BOØ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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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1년 결성되어 1988년에 해체한 일본의 록밴드. 1980년대 호황기 일본의 록밴드 붐의 중심에 서 있었던 밴드로, 일본의 초창기 대형 록밴드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핫피 엔도가 일본어 록 음악을 처음 제시한 이후, 캐롤, 사잔 올 스타즈와 같은 밴드가 일본에서 록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고 RC 석세션과 같은 밴드가 록의 정신과 로커의 문화를 일본에 주입했다면, 보위는 그 다음 세대로서 멜로디나 음악 형식적 측면에 있어 일본적 팝 록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전까지 일본적 록이라 하면 청자들은 포크송이나 블루스, 혹은 헤비메탈에 기반한 음악들만을 떠올렸지만, 보위의 등장으로 비로소 록의 범주에 있으면서도 팝적인 감성을 갖춘, 이후 일본 록의 표준이 되는 '대중적인 하드록'이 생겨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80년대 세계 전체를 휩쓸던 뉴웨이브적 접근이나 일렉트로닉 도입, 멜로디를 중시하는 경향성 등을 표현하면서도 록의 하드함은 잃지 않은 채, '현대적 감수성'을 일본 록에 이식한 밴드로 평가된다. 그들이 없었다면 L'Arc~en~Ciel이나 GLAY 같은 밴드도 지금과 같은 시원시원한 음악이 아니라 훨씬 고전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그런 의미에서 보위를 일본 '모던 록'(보통 쓰이는 얼터너티브의 대체 용어로써의 쓰임과는 다르게, 일본 록의 세대 변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에서)의 선구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의 라이브 퍼포먼스나 분장, 의상 또한 차세대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 초창기 비주얼계의 상당수 밴드(대표적으로 BUCK-TICK)가 그들의 음습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모방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의 상업적 성공으로 인하여 일본에 록 음악을 듣는 청자가 크게 늘어났고, 그것을 넘어서 대중음악 전반에 록적인 음악이 확산되는 계기도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들 외에도 이들의 후발주자들의 꾸준한 성공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그들의 새로운 성공은 70년대의 일본 록과 80년대의 일본 록을 구분짓는 '2세대 J-Rock'의 시대를 열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록은 저항적 음악이고 일본 내에서는 듣는 사람만 들었으며, 그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록밴드들은 다양한 시도를 했다. 계속해서 지적이고 저항적 기조를 유지하며 마이너함에 머물러 있었던 RC 석세션[1] , 정신적 측면을 아예 포기하고 듣기 쉬운 록을 추구했던 캐롤이나, 해외의 하드 록/메탈을 참고하여 음악적 완성도에만 집중했던 LAZY(훗날 LOUDNESS 등으로 이어지는), 반대로 록적인 하드함을 포기하고 조금 더 일본적인 형식으로 다가가는 사잔 올 스타즈 등이 그러했다.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보위 이전의 유명한 일본 록 밴드들은 60-70년대의 고전적인 록 음악 형식(로큰롤, 포크, 블루스 등에 기반을 둔)을 구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
반면 보위는 록적이고 현대적인 사운드(80년대 최신의, U2, 폴리스(밴드) 등을 위시한 뉴웨이브 계열)를 유지하면서도[3] 일본적인 접근(특히 멜로디의 측면에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4] , 그것으로 큰 대중적 성공을 이루어냈기에, 일본 록의 새로운 세대를 연 밴드로 평가받는 것이다.
요약하면, 여전히 록이 일반 대중 및 시대와 괴리가 있던 이전의 일본 록의 흐름에서 거의 최초로 현대적 록 사운드를 유지한 음악으로 큰 성공을 거둠으로서 이후 일본에 등장할 수많은 록 밴드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이 바로 보위라고 말할 수 있다.
보위의 성공에는 전 플라스틱스의 멤버였던 프로듀서 '사쿠마 마사히데'의 공도 빠질 수 없다. 1985년 Boowy의 히트에는 그의 프로듀싱도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는 이후 GLAY, JUDY AND MARY 등 후배 모던 락밴드를 프로듀싱하면서 'J-Rock의 대부'로 불리기까지 했다.
2.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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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호테이 토모야스 (기타), 타카하시 마코토 (드럼), 마츠이 츠네마츠 (베이스), 히무로 쿄스케 (보컬).
3. 역사
1981년 보컬의 히무로 쿄스케, 베이스의 마츠이 츠네마츠, 기타의 호테이 토모야스와 모로보시 아츠시(諸星アツシ), 색소폰의 후카자와 카즈아키(深沢和明), 드럼의 키무라 마모루(木村マモル)[5] 와 함께 '폭위(暴威)'를 결성하여 데뷔했다. 첫 투어 이후 키무라가 탈퇴하고 타카하시 마코토가 가입하고, 1982년에 발음만 똑같은 BOØWY로 개명했다.[6] 이렇게 해서 초창기 멤버는 총 6명이었는데, 1982년 모로보시와 후카자와가 탈퇴하여 우리가 아는 4인조 구성이 되었다.
메이저 데뷔하면 계약금으로 차와 여자친구에게 줄 반지를 사고, 해외여행 가보는 것과 하루 종일 술을 마셔보는 게 꿈이었던 소박한 소년들이었으나, 대도시 도쿄는 냉혹했다. 집에 전화도 없어서 급한 일이 생기면 목욕탕의 공중전화로 연락을 했고, 커튼도 냉장고도 없는 이케부쿠로의 하숙집, 굶기는 밥먹듯이…[7] 거기다 돈을 벌어오는 건 마츠이와 타카하시 둘 뿐이라 돈에 쪼들리는 생활은 덤.[8] 여러 에피소드[9] 를 겪으며 꿈을 키워나갔던 BOØWY는 1982년 마침내 첫번째 앨범 MORAL을 들고 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가는 데마다 가사 이미지가 더럽다면서 퇴짜.[10]
우여곡절 끝에 발매는 했어도 음악 팬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1983년에 나온 두번째 음반 INSTANT LOVE는 소속사인 저팬 레코드가 도쿠마 저팬으로 병합되는 과정에서, 선전은 커녕 포스터 한 장조차 안 만들어 줬다고.
전국의 라이브 하우스를 돌면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스스로를 알려갔던 BOØWY. 뒤늦게 음악 관계자들에게 알려져 TOSHIBA EMI와 새로운 계약을 맺고, 1985년 독일(당시 서독)에서 녹음한 3집 BOØWY가 대성공을 거둔다. 호테이는 그 해 페르난데스에서 자신의 Telecaster 모델이 제작되자[11] 감격의 눈물을 닭똥처럼 떨어뜨렸다고 한다. 같은 해, 스튜디오 세션을 해주러 다니다 만난 야마시타 쿠미코와의 결혼을 발표한다.
1986년 'JUST A HERO' 앨범[12] 과 'BEAT EMOTION' 앨범[13] , 그리고 1987년 PSYCHOPATH[14] 앨범으로 정점을 찍으며 쾌진격을 거듭하던 BOØWY는 1987년 12월 24일 시부야 공회당에서 해산을 선언하였고[15] , 1988년 4월 4일, 5일 이틀 간의 도쿄돔에서의 라이브로 BOØWY로서의 활동을 끝냈다. 해산을 결정한 밤, 호텔에서 아침까지 울었다던 호테이. 팬에게의 최후의 인사로서 발표한 2일간의 라스트 도쿄돔 기그는 10분만에 95000장 전 티켓이 매진 되었다. 심지어는 예약 개시일 일부 지역의 전화 회선이 고장나기도.
BOØWY가 일본 록계에 있어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으로, 그동안 매니아층에게만 호응을 얻었던 '록 음악'이란 장르가, BOØWY로 인해 대중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를 받는다. 종종 "BOØWY 이전" "BOØWY 이후"라고 표기되고, 현재도 BOØWY를 추종하는 후배 뮤지션들이나 카피 밴드가 수없이 등장하고 있다. 사실 일본 록의 꺾고 떠는 뽕삘 나는 창법은 히무로 쿄스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일설도 있을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밴드였다. BOØWY 해산 이후, 히무로는 일본의 거물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로서 지금도 투어를 개최하면 관객석이 만석을 채우는 등의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쌓았으며 호테이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타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베이시스트 마츠이나 드러머 타카하시도 히무로나 호테이만큼 화려하진 않아도 나름대로의 음악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여담으로 호테이가 처음에 히무로의 밴드에 가입하게 된 이유가 '주먹이 무서워서'였다는 말도 있다(…).[16][17][18] 호테이가 외모나 키, Yoshiki와의 일화 때문에 한 주먹을 했을 거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호테이는 순둥이에 가까웠고, 히무로 쿄스케가 고교 시절 군마현 일대를 주먹으로 평정한 소문난 싸움꾼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일본 락계 선배인 LOUDNESS의 소문난 불같은 싸움꾼 타카사키 아키라도 인정했다고 할 정도...
이들이 해체한 해에 태어난 야구선수 호소야 케이가 이들의 광팬이라고 한다. 등장곡과 응원가 모두 이들의 노래로 해 놨을 정도. 또 모닝구무스메 OG 아베 나츠미도 보위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닝구무스메로 데뷔하게 된 계기인 오디션 프로그램 '아사얀'에 참여한 것도, 원래는 프로그램 우승시 록 밴드의 보컬로 데뷔할 수 있었기 때문.
4. 디스코그래피
4.1. 정규앨범
4.2. 베스트앨범
4.3. 싱글
4.4. 라이브앨범
정규 디스코그래피 이외에 유명 라이브로는 84년에 신주쿠 LOFT에서 이루어진 LOFT 2 DAYS, 86년에 이루어진 JUST A HERO 투어, 87년 자신들의 전곡을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연주했던 것으로 유명한 CASE OF BOØWY, 해산 선언을 했던 1224, 고별 기념 콘서트인 LAST GIGS가 있다.
LOFT 2 DAYS 에서의 GIVE IT TO ME 라이브
JUST A HERO 투어에서 동명의 곡을 연주
CASE OF BOØWY에서의 B.BLUE
1224에서 해산 선언 이후 연주된 MEMORY
LAST GIGS에서 연주된 그들의 대표곡 MARIONETTE
[1] 후에 세계에 펑크 록이 유행하고 그런 저항적 기조가 받아들여졌을 때야, 그들 또한 완전한 악동 락 밴드로 이미지 변화를 꾀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2] 이와 별개로 LOUDNESS 등의 경우가 80년대 '영미권' 헤비메탈 트렌드를 잘 따라잡은 경우에 속한다.[3] 아주 최초는 아니다. 일본은 70년대 후반에 이미 YMO로 대표되는 일렉트로닉의 명가였으며 록 밴드 중에서도 P-MODEL과 같이 일렉트로닉을 펑크 록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밴드가 있었다. 또한 펑크와 뉴웨이브의 결합도 더 루스터즈 등의 밴드가 80년대 초중반부터 이미 시도한 것이었고, 일본 내에서 상당히 흥행했었다. 더 나아가서, 이미 동시대 일본에 TM NETWORK 같이 뉴웨이브의 끝판인 신스팝 밴드도 있었다. 즉, 보위의 경우는 유행을 선도했다기보다는 따라간 것에 가까우며 이런 부분에서 평론적으로는 상당히 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유행을 '하드 록'이라는 형식을 지키면서도 발빠르게 접목하여 대중화한 것이야말로 그들의 공훈이라 할 수 있다.[4] 물론 보위의 음악적 기원은 펑크와 하드 록에 있었다. 초기에 그들은 펑크 밴드로 분류되었으며 85년 이후에는 뉴웨이브가 결합된 하드 록 밴드로 분류되었다. 실제로 보위 멤버들은 70년대 말 일본의 펑크 밴드 루스터즈 등에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한 적 있으며 AUTO-MODE(이 때 같이 밴드를 했던 멤버 중 일부가 PERSONZ라는 또 다른 일본의 전설적인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라는 실험적인 펑크 밴드를 겸업한 시절도 있었다. 또한 그들의 음악적 지향이 하드 록이었음은 밴드의 작곡을 담당했던 기타리스트 호테이 토모야스의 보위 이후 밴드인 COMPLEX의 음악에서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호테이 토모야스의 경우 70년대 훵크 스타일이나 로커빌리 스타일 연주에도 매우 능숙했으며 Bad Feeling 등의 곡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5] 탈퇴 이후 'INSTANT LOVE'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6] 둘 다 ぼうい라고 발음한다.[7] 호테이의 경우 술집에서 옆사람이 남긴 술안주를 몰래 집어먹고 그랬다고 한다.[8] 히무로와 호테이는 그냥 니트족(…)처럼 지냈다고.[9] 많이 알려진 일화로, 무명 시절 지방에 2~3만 명 정도 모인 무대가 있다는 말만 듣고 기껏 지방까지 갔더니, 정작 관객은 무대 근처의 2~30여 명이 전부였고, 개런티는 '''야채와 술'''로 받았는데 , 개런티를 받아 차비로 쓸 생각에 돈을 다 써버리고 온 BOØWY 멤버들은 당황했다고…[10] 그도 그럴 것이 타이틀 곡 MORAL의 가사 내용을 보면 '타인의 불행이 너무 좋아'라던가 '그 녀석이 자살했을 때 나는 웃어버렸어'라는 내용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참고로 MORAL의 '자살한 그 녀석'의 모티브가 된 인물은 '야마다 카마치(山田かまち, 1960~1977)라는 히무로와 마츠이의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으로(셋이서 밴드를 만들기도 했다고), 실제로는 자살이 아니라 집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치다 감전사했다고 한다.[11] 그의 텔레캐스터는 그의 당시 메인 기타였던 ESP 네비게이터 텔레캐스터를 베이스로 제작되었다.[12] 오리콘 5위[13] 타이틀 곡은 B·BLUE. 오리콘 1위[14] 타이틀 곡은 Marionette. 오리콘 1위. 여담으로 Marionette의 PV는 가이낙스에서 제작했다.[15] 해산선언 당시의 영상 해당 영상[16] 이게 사실이라면 호테이가 보위 해체 이후 히무로랑 반목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17] 다만 호테이가 히무로를 정말로 싫어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보위로 활동하며 히무로는 호테이를 상당히 아끼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는데 멤버들과 함께 다닐 때도 유독 호테이를 옆에 두고 다녔으며 그에 대해 '일본에 많은 기타리스트가 있지만, 호테이만큼 멋있는 녀석은 없다.' 고 추켜세우거나 해산선언 당시 눈물을 보이면서 호테이를 나지막하게 돌아보았을 때 호테이가 외면하듯 등을 돌리자 충격받은 듯이 수초간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도 보일 정도였다. 호테이 또한 보위의 해산이 결정된 날 호텔에서 혼자 밤새 울었다고 했으며, 히무로가 솔로활동 중 호테이가 대부분의 법적 권리를 갖고 있던 보위의 악곡을 무단으로 사용했을 때 히무로를 비판하긴 했지만 이는 빼도박도 못하게 법적·도의적 측면에서 히무로의 잘못인 것이 사실이기도 하며 또한 자신에 대해 먼저 물어봐주는 등 최소한의 존중을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일종의 '서운함' 의 감정이라고 봐야 한다. 그 이후로도 내내 히무로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으나 히무로가 은퇴 투어를 발표했을 때는 끝내 '히무로의 곁에서 기타를 치고싶다.' 는 마음을 드러낸 만큼 히무로에 대한 감정은 일방적 증오가 아닌 애증의 감정이라 봐야 한다. 애초에 호테이가 정말로 히무로를 싫어했다면 그가 보위의 악곡을 무단으로 사용했을 때 법적으로 충분히 히무로를 데꿀멍시킬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18] 비록 보위의 대성공에는 대부분의 곡을 작곡했던 호테이의 공이 크지만, 그런 그에게 먼저 밴드를 만들자며 제안했던 것은 히무로이며 히무로 또한 카리스마있는 퍼포먼스와 가창력으로 보위의 인기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또한 인기를 얻기 전까지 다양한 에피소드를 겪으며 동고동락해 온 만큼 그 둘의 관계에 대해 함부로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