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야나기 테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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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배우, MC, 수필가, 평화운동가. '''일본의 전설적인 연예인'''이다.'''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고 존경받는 여성.'''
― 도널드 리치 (미국의 일본 연구가)출처
일본 탤런트의 선구자적인 존재로 오랜 세월동안 현역으로서 방송계 최정상에서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전설적인 원로급 MC 및 여배우로 대접받고 있으며, 반전 운동과 유니세프 친선대사와 팬더 보호활동을 오랫동안 해 오고 있기도 하다. 테츠코 본인이 유니세프에서 활동하면서 느낀 것들을 적은 수필을 모은《토토의 눈물》이란 책도 있다. 일본의 연기자 및 예능계 인사들 중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다.
1933년생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건재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 프로그램은 1954년 처음 주연을 맡았던 얀보, 닌보, 톰보와 1961년부터 1967년까지 방송했던 <꿈에서 만납시다(夢であいましょう)>, 1971년 방송된 드라마 <마유코 혼자서(繭子ひとり)>, 1976년부터 지금까지 '''48년째 방송되고 있는''' TV 아사히의 토크 프로그램 《테츠코의 방》[2][3] 과 1978년부터 1989년까지 쿠메 히로시 등과 진행한 TBS 테레비의 《더 베스트 텐》이다. 《테츠코의 방》은 매 회 여러 분야의 유명인사들을 초청하여 대화하는 구성의 프로그램으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진짜 유명인이라고 여기는 사람까지 존재할 정도로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프로그램이다.
2. 생애
2.1. 초등학생 시절
※ 이 문단은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어린 시절을 그린 책 《창가의 토토》를 참고해 작성되었다.
1933년 도쿄도 미나토구 출생으로, 아버지는 NHK 교향악단의 악장을 역임한 바이올리니스트, 어머니는 성악가이자 수필가로 활동했던 분이다. 여동생도 발레리나와 수필가로 유명하다.
어린 시절에는 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와 학습장애 등 온갖 안좋은 수식어가 따라붙은 문제아였다.[4] 이러한 점 때문에 학교의 단체 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던 테츠코는 7살의 나이에 다니던 학교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퇴학을 당했고, 이후 당시 지유가오카역 근처에 있던 토모에 학원[5] 이라는 일종의 대안학교에 입학한다.
폐전기 기관차를 개조해 만든 조그마한 학교인 토모에 학원에서는 태평양 전쟁 열기로 미쳐 있었던 일본에서 군국주의, 전체주의적인 교육과 거리가 먼 자유분방한 수업을 추구하고 있었다. 테츠코 또한 토모의 학원의 자유로운 수업 방식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며, 《창가의 토토》에서 나오는 몇 가지 일화를 통해 토모에 학원의 교육 분위기를 알 수 있다.
- 토모에 학원에 다니던 학생 중에는 소아마비에 걸린 학생이 있었고, 도시락을 제대로 못 싸올 정도로 가난한 학생도 있었다. 당시 기준으로도 소외받기 쉬운 계층이었지만 고바야시 교장은 차별없이 학생들을 대했고, 학생들도 그 영향을 받아 서로 차별하는 일없이 지냈다.[6]
- 태평양 전쟁 당시 정부에서 적국의 언어라면서 영어 교육을 금지하고, 더 나아가 '미국 사람은 귀신'이라는 발표를 하던 순간에도 토모에 학원에서는 미국에서 자라서 일본어가 서툰 학생이 다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소통하고 있었고, 미국에서 온 학생도 일본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적응해 갔다고 한다.
- 전쟁이 계속되면서 테츠코는 강제로 다른 학교 아이들과 군사 병원에 위문을 가게 되는데, 다른 학교 아이들은 군가나 찬양가를 불렀지만 테츠코는 그런 노래들을 잘 몰라 대신 점심시간에 부르는 '꼭꼭 씹어요'라는 노래를 불렀다. 토모에 학원이 군국주의 교육을 행하지 않았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시간이 흘러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는 과정에서 토모에 학원은 도쿄 대공습 때 폭격으로 불타버렸고,[7] 자기 학교가 불타는 것을 아들과 함께 목격한 코바야시 교장은 '''"얘야, 다음엔 어떤 학교를 만들까?"'''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바야시 교장은 전쟁 이후 그의 교육 방식을 실현할 학교를 다시 세우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토모에 학원은 테츠코를 포함한 다른 졸업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창가의 토토》작가 후기에 따르면 토모에 학원의 졸업생들[8] 은 졸업 이후에도 매년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하지만《창가의 토토》는 1981년에 초판이 발행된 책이므로 현재까지도 원년 멤버들이 모두 모일지는 불명이다. 작중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배우 이케우치 준코가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동급생이었지만 2010년에 사망했다.
토모에 학원이 폭격으로 사라진 이후 테츠코는 가족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오모리현으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 때 생긴 버릇이 밥을 빨리 먹는 것이라고 한다.
2.2. 데뷔 이전까지의 행보
토모에 학원 이후에는 고란 여학교를 거쳐서 1952년 도요 음악학교 성악을 전공했으며,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의 청강생으로 수강한 이력도 있다. 당초에는 오페라 배우를 꿈꿨지만 이루지 못했고 NHK 방송극단과 분가쿠지를 거쳐 1953년 배우로 데뷔하였다. 아이들에게 책을 잘 읽어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 때문에 배우로 데뷔했다고 한다. 배우가 되기 위해 NHK 방송극단의 면접을 볼 때 일화가 있는데, 면접을 보면서 심사위원들에게 실언[9] 을 했지만, 당당하게 합격했다.
배우로써는 일본 최초로 TV 방송에서 얼굴을 비춘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본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NHK의 시험방송을 촬영할 때는 얼굴의 양쪽을 청백색으로 나눠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10] 그러나, 신인들이 거의 그렇듯이 당시의 쿠로야나기 테츠코는 그저 갓 데뷔한 무명 신인 연기자였다.
2.3. 일 중독 배우
상술된 바와 같이 라디오, TV 프로그램의 눈에 띄지도 않는 조연으로 무명 생활을 지내다가 정식으로 그녀가 방송에 이름을 드러낸 건 다름아닌 성우로서였다. 바로 1954년 4월부터 방송된 NHK 라디오 드라마 얀보, 닌보, 톰보의 주인공 역을 맡게 된 것이다. 거기서 처음으로 주연인 '''톰보'''라는 어린 원숭이 캐릭터를 맡게 되었는데, 이것이 다름아닌 성우 역사에 길이 남게 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성인 여성이 최초로 아역을 연기한 케이스'''라는 것이다! [11] 이는 당시 이 방송의 작가였던 이이자와 타다스[12] 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성인인 성우가 어린 아이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제작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다.[13][14]
이후 주로 어린이 프로그램과 젊은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 쇼 프로그램에 간판 연기자로써 매일 방송[15] 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1958년에는 제 9회 홍백가합전의 '아카구미'(홍조) 사회자가 된다.[16] 또한, 1961년 일본 방송작가협회의 주연상을 받기도 하는 등 TV프로그램에 빠져서는 안될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더욱이, 1950년대부터 일본의 민영방송들이 속속 개국하면서 드라마를 비롯해 예능프로그램의 진행자 또는 출연자로써 바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2.4. 연기 유학
이렇게 배우와 사회자로써 15년이 넘게 큰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는 1971년 4월부터 방송되었던 NHK 아침연속극 '마유코 혼자서'(繭子ひとり)에 시골출신 가정부 '다구치 케이'역을 맡아 초반 6개월동안 출연해 연기를 한다.[17] 이 드라마에서 그녀는 하얗게 머리가 샌, 두꺼운 안경을 낀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 출신 가정부로 분해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이 휴식을 강하게 원해 이 드라마를 끝으로 돌연 미국 뉴욕으로 1년간 연기유학을 떠난다.
이 때 '마유코 혼자서'의 반응이 너무 뜨거워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자 '다구치 케이는 어디로 갔냐'는 문의가 빗발쳐 '도쿄에 사는 의사가 그녀를 데리고 뉴욕으로 갔다'는 설정이 추가되었으며, 1971년 12월 '다구치 케이'가 뉴욕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시청자들의 요청에 의해 그녀의 뉴욕 생활을 담은 영상을 방송한 적이 있다. 이 때 쿠로야나기 테츠코는 똑같은 가정부 분장을 하고 영상을 찍어 보냈다고.[18]
2.5. 테츠코의 방, 그리고 지금까지
유학 이후, 드라마에 다시 복귀한 그녀는 1976년 그 유명한 테츠코의 방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후 배우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본인 스스로 테츠코의 방을 오랜동안 진행하면서 얻은 진행자의 이미지를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그녀 특유의 양파모양 헤어스타일을 고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6년 지금까지 늘 같은 시간에 같은 헤어스타일로[19] 방송하고 있으며, 2015년 5월 27일 1만회 방송[20] 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기네스에 오른 뒤에도 자신이 세운 기록을 계속 경신중이다.
테츠코의 방 제 1회 출연자는 '시레토코 여정'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가수 겸 연기자인 모리시게 히사야였는데, 방송 중간에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가슴 을 만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외국인 출연자로는 장근석,레이디 가가등이 있으며,1997년 성우로서는 유일하게 하야시바라 메구미가 출연했다.#
이후로도 더 베스트 텐과 세계 불가사의 발견 등 굵직굵직한 방송에 출연하며 2016년 현재 만 83세의 나이에도 현역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국민적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국내에는 그다지 인지도가 높은 사람은 아니다.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담아 대안교육에 대해서 다룬 책인 '''《창가의 토토》'''[21] 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베스트셀러인데 정작 책의 높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방송인으로써 그녀의 독보적인 입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편.
3. 여담
- <창가의 토토>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친지들이 다들 남자로 태어나리라 예상해서 태명이 '토오루(徹)'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나자 이에 당황한 친지들이 -子를 붙여 테츠코라고 지은 것이며, 토토라는 별명 또한 발음하기가 어려운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 NHK의 여성 탤런트 1호의 기록을 갖고 있다. 민방까지 전부 통틀어서도 일본 여성 TV 탤런트 1호.
- 상술했듯이, NHK 홍백가합전에도 여러번 출연했다. 1958년 9회를 시작으로, 1980~83년에 홍팀(여가수팀) MC를 맡았고, 2014년에는 타모리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2015년에는 82세의 나이로 종합 MC를 맡았다. 이로써 홍백 최고령 MC 기록 달성.
-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던 아츠미 키요시와는 1961년 방송되었던 예능프로그램인 '꿈에서 만납시다'에 같이 출연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본디 아사쿠사의 스트립 극장의 배우로 일하던 아츠미 키요시가 탤런트로 데뷔하면서 만나게 된 것인데, 서로 '오빠', '아가씨'라고 호칭하며 다녀서 열애설이 잠시 돌기도 했었다.[22] 그러나, 아츠미 키요시는 사생활을 일절 이야기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해[23] 1996년 아츠미 키요시가 폐암으로 숨을 거둘 때 까지 집이 정확히 어디인지, 부인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24]
- 사카모토 큐의 대표곡 '위를 보고 걷자'를 작사한 작사가 에이 로쿠스케와도 절친이어서 로쿠스케가 진행하던 라디오방송에 수차례 게스트로 출연했으며[25] , 에이 로쿠스케가 사망하기 5개월 전인 2016년 2월에 테츠코의 방에도 게스트로 출연할 정도였다.[26]
- 일본 오와라이 BIG 3 중 한명인 타모리를 일약 유명하게 만든 데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 인연으로 1977년부터 2013년까지 '테츠코의 방'의 그 해 최후 방송은 반드시 타모리가 출연하기도 하였다. 1984년 3월 14일 타모리가 진행했던 '웃어도 좋잖아(笑っていいとも)'에서는 반대로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출연하여 43분 동안 줄창 토크를 계속했던 기록을 갖고 있었다. (이 기록은 이후 2014년 1월 14일에 이르러서야 톤네루즈에 의해 깨진다. 이쪽은 48분)
- 사회자 중에서도 특유의 비탁음과 빨리 말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생방송을 많이 해서 시간을 맞추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 예전에는 자가용으로 벤츠를 몰았으나 후에 전기차인 프리우스로 차를 바꿨다고 한다.
- 헤어스타일을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기로 유명하다.[27] 일본에선 이 헤어스타일을 양파(玉ねぎ)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저 머리 안에는 항상 사탕이 들어있고 그걸 물어보는 사람에게 꺼내 하나씩 준다.
-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어린 사람한테도 정중하게 극존칭을 사용하는 진행스타일이 특징으로 반말을 사용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 보니 이미 친분이 있는 중견급들 뿐만 아니라 신인들도 대단히 잘 적응한다. 그래서 테츠코의 방에는 방송될 즈음 주목받는 젊은 연예인들도 왕왕 출연한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테츠코의 방을 진정한 신인들과 무명 연예인들의 등용문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테츠코의 방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어 성장한 스타들이 상당히 많았다.
- 2016년 9월, '테츠코의 방'에 출연한 후쿠야마 마사하루의 추천으로 인스타그램을 시작[28] 했으며, 시작 일주일만에 10만명의 팔로워가 생겼다. 2020 12월 현재 팔로워 수는 약 113만명(!)이다.
- 정치 분야에도 관심[29] 이 있으며, 정치 성향은 진보적[30] 이다. 일본의 헌법 개정 등에 자신의 목소리를 냈으며, 2015년 평화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저명인사들과 함께 '세계평화에 대한 겸손한 제안'이라는 책을 공동으로 출판했다. 또한, 인종차별 반대 및 동성연애 지지 등 현재 세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더 베스트 텐에 샤넬즈[31] 가 출연했을 당시 인터뷰를 통해 한 남자가 "왜 샤넬즈는 흑인인 주제에 향수 브랜드를 그룹 이름으로 씁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자,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피부색이나 국적이 다른 것을 이유로 ‘주제에’ 하는 식으로 하대를 해서는 안된다며, 눈물이 나올 것 같다는 내용의 즉흥 멘트를 하며 시청자에게 호소한 일화가 있다. 이 즉흥 멘트를 흘려 보내지 않고, 공동 진행자인 쿠메 히로시가 적극 동의했음은 물론, 당시 출연자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 일본 연예인 중에서는 드물게 종종 한복을 입고 방송에 출연하기도 한다.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씨[32] 와 친분이 있어 이 분의 책에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으며, 실제로 유투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면 무려 더 베스트 텐에 한복을 입고 출연해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익들이 간혹 쿠로야나기를 까는데, 본인은 신경도 안 쓰는 듯.[33]
- 2016년 4월 30일부터 자신의 자서전 '창가의 토토'의 속편과 속속편인 '토토 채널(トットチャンネル)'과 '토토 한 사람(トットひとり)'을 원작으로한 드라마 토토 텔레비전(トットてれび)[34] 에 '100세의 테츠코씨'역으로 출연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테츠코를 연기한 것은 미츠시마 히카리.
- 영어 실력도 매우 좋은 편이라 영어로 유창하게 스피칭을 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인 적 있다.
- 2020년 기준 미혼. 본인 말에 의하면 살면서 연애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때가 맞지 않아 결혼하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도 지적인 남성을 만나면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독설로 유명한 유명 MC이자 '여제'로 불리는 방송인 카미누마 에미코가 같이 프로그램을 하는 쿠사노 히토시를 인터뷰하면서 "쿠로야나기 씨가 정답을 잘 맞추는데 정답을 알고 녹화하느냐"고 궁금해하자, 쿠사노가 프로그램 자체가 상황에 따른 행동방식을 묻는 것이라 언급하며 1주일간 스태프가 알려준 테마에 맞춘 책을 읽은 후 상황에 알맞는 정답을 고민한다는 대답을 듣고 "실례했습니다"'라고 급히 수습한 일화가 있다.[35] 이렇게 방송경력이 길고 독설로 유명한 카미누마뿐만 아니라 비슷한 컨셉인 와다 아키코, 빅3 MC를 비롯한 웬만한 방송계 유명인사들이 존경을 표하는 것에서 쿠로야나기가 일본 방송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알 수 있다.
[1] 2017년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도민에 임명됐다.[2] 특유의 오프닝 사운드가 엄청난 중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프로. 애니메이션 쓰리몬에서는 일종의 막간 코너인 <야벳치의 방>으로 패러디 되었는데, 심지어 오프닝 사운드마저 깨알같이 패러디했다.[3] 간혹 외국 연예인들도 초청되기도 한다. 한류 열풍이 일본에서 뜨거울 때는 장근석과 배용준, '''레이디 가가'''(!)가 출연하기도 했다. 특히 배용준이 출연할 때는 간단한 한국어로 인사까지 했다.[4] 책상 뚜껑을 신기해 해서 수시로 쾅쾅 여닫거나(당시 책상은 서랍식이 아니라 책상 윗부분을 들어올려서 물건을 꺼내는 방식이었다.) 수업을 듣다 말고 창가에 서서 바깥에 있는 사람 또는 나무 위의 새에게 말을 걸거나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서 깃발의 술을 표현한다고 도화지애 색을 다 칠하고 책상 면 위로 술 부분을 직직 긋는 등의 행동을 했다고 한다.[5] 학원의 이름에 붙은 '토모에' 는 세 가지 무늬가 한데 어우러진 형태의 문양이며, 다양한 가치관을 받아들임을 상징한다. 《창가의 토토》의 작가 후기에 따르면 역 근처에 있는 피콕 스토어 지유가오카점이 토모에 학원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1988년에는 피콕 스토어 지유가오카점 앞에 과거 이 곳이 토모에 학원이 있던 곳이라는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관련 기사[6] 소아마비 학생은 졸업도 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었다. 더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지병이 있었던 모양.[7] B-29 폭격기가 학원 건물 상공에 잠시 머물러서 폭격을 했다는 묘사가 있다. 토모에 학원은 버려진 전기 기관차를 건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학원을 차량기지로 오인하여 폭격한 것으로 보인다.[8] 후기에 나온 테츠코의 동창생들은 평범한 가정주부부터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근무하는 물리학 교수까지 다양한 일을 하고 있었다. 물리학 교수가 된 '''야마우치 타이치'''는 토토의 첫 사랑이라서 창가의 토토에서도 자주 출연했다.[9] "부모님께 이 일(면접)을 말씀드리면 꼴불견이라고 말할 것."이라던지, "어머니가 이 세상엔 사기꾼들이 많기 때문에 조심하라고 말했다."는 둥, 면접관 앞에서 면접관을 까는 ... 지금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10] 이 모습은 사이토 유키가 주연한 영화 《토토 채널》(トットチャンネル, 1987년)에서도 재현되었다.[11] 즉, 이 분을 시작으로 여성 성우가 아역 연기도 가능하다는 걸 입증이 되어서 그 이후에 한국, 일본에서는 아역 담당 성우는 여성을 세우고 있다. [12] 쿠로야나기 테츠코가 스승으로 모신 작가다.[13] 이 방송은 1957년 3월 31일까지 방송되었고, 마지막회의 방송 녹음본이 현존하며, 1995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송된 적이 있다.[14] 이 때 쿠로야나기 테츠코 이외에도 주인공 역을 맡았던 사토미 쿄코, 요코야마 미치요와 함께 'NHK 세 자매'라고 불리우며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15] 정말 매일 출연했다. 당시 NHK에서 방송하던 월요드라마부터 일요일 밤 음악프로그램까지 매일 방송에 나왔으며, 본인의 회상으로는 메이크업과 분장도 자신이 스스로 해야 했고 심한 경우 6일동안 잠을 자지 않고 방송에 출연해 과로로 쓰러진 적까지 있다고 한다. 당시 방송 환경이 열악하여 대본도 늦게 나오고 리허설에 방송 한 편 내 보내면 거의 하루 일과 시간을 다 쓰기에 바빴기 때문이다.[16] 이후 1980년부터 1983년까지 4회 연속 홍백가합전의 사회를 보게 되며, 2015년에는 종합사회자로 활약한다. 총 6회 출장[17] 이 때 아오모리에서 겪었던 피난생활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며, 실제로 역할을 맡았던 다구치 케이의 고향이 아오모리로 설정되었다.[18] 검색해 보면 잡지에 실린 사진이 남아있다.[19] 물론 의상은 늘 바뀐다. 몇 년 전까지는 자신이 직접 의상을 골라 입었으나, 최근에는 코디네이터가 의상을 골라준다고.[20] 이는 지난 2011년 8961회 때 자신이 세운 기록을 갈아엎은 것이어서 더 의미가 있다.[21] 1981년 발행된 책으로 세계 35개국에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누적 판매부수 800만부를 자랑하는 베스트셀러이다. 후속작으로 토토의 눈물, 토토의 창, 토토의 친구들, 어른이 된 토토쨩, 이상한 나라의 토토 등이 있고 모두 명작으로 인정받는 에세이들.[22] 쿠로야나기 테츠코 본인이 이야기 한 것[23] 1979년 아츠미 키요시가 테츠코의 방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는데, 이후 여러차례 출연을 요청해도 딱 잘라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24] 마침 아츠미 키요시의 사망 발표일이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생일인 8월 9일이어서 엄청 슬퍼했다고 한다.[25] 이렇게 에이 로쿠스케의 방송을 출연하며 알게된 아나운서가 이후 더 베스트 텐의 파트너가 되는 쿠메 히로시이다.[26] 이 방송에는 역시 명 MC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오오하시 쿄센도 출연했다. 안타까운 것은 에이 로쿠스케도, 오오하시 쿄센도 지난 2016년 7월 세상을 떠났다는 것.[27] 테츠코의 방 이외의 방송에서는 간혹 바뀐 헤어스타일이 나오지만 ... 기본형은 역시 양파.[28] @tetsukokuroyanagi[29] 자신이 100세가 되면 정치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했다.[30] 위에서 설명한 토모에 학원에서의 자유분방한 교육과 진보적인 성향이였던 부모(<창가의 토토>에서 토토의 어머니가 재일 조선인을 동정하는 장면이나, 오케스트라의 악장인 토토의 아버지가 군국주의 관련 공연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의 영향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31] 1980년 데뷔한 밴드로, 1983년 '랫츠&스타'로 밴드명을 개명했다. 데뷔 당시 밴드의 멤버들 모두 얼굴을 검게 칠하고 활동을 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32]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첫 해외 한복 패션쇼를 열었고, 1993년부터 12년동안 파리 컬렉션에 진출해 한복을 알린 세계적인 디자이너이다.[33]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탄생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일제강점기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으로 집 근처에 조선인 마을도 있었다. <창가의 토토>를 보면 그녀의 어머니가 차별당하는 조선인 아이를 안타까워하는 묘사가 있으며 그녀 본인도 어머니에게 '조선인 아이든 일본인 아이든 다 같은 어린이니까 차별해선 안된다'고 가르침받은 듯하다.[34] NHK 종합에서 7주간 토요일 8시 15분부터 방영[35] 제 아무리 방송에서 쓴소리를 쏟아내고 사과를 잘 안 하고 간사이 라디오에서 싫어하는 사람을 씹는 카미누마라도 쿠로야나기 앞에서는 아예 그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