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모리 아키나

 


'''나카모리 아키나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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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모리 아키나
(なか(もり(あき( |𝐀𝐊𝐈𝐍𝐀 𝐍𝐀𝐊𝐀𝐌𝐎𝐑𝐈
'''

<colbgcolor=#874055><colcolor=#fff> ''' 본명 '''
'''나카모리 아키나 (中森 明菜(なかもり あきな, Akina Nakamori) '''
'''출생'''
1965년 7월 13일 (58세)
일본 도쿄도 [image] 오타구 [image][1]
'''국적'''
일본 [image]
'''신체'''
160cm | A형
'''직업'''
가수, 작곡가, 작사가, 프로듀서, 배우
'''학력'''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 (중퇴)
'''데뷔'''
1982년 5월 1일 싱글 スローモーション(슬로 모션)
'''15307일'''째
''' 레이블'''
| UTAHIME Records
'''소속사'''
FAITH[2]
'''가족'''
부모님, 2남 4녀 중 다섯째[3]
'''링크'''

1. 소개
2. 생애
2.1. 데뷔 전 (1965년 ~ 1981년)
2.2. 데뷔 초 (1982년 ~ 1984년)
2.3. 아티스트 노선으로 전환과 전성기 (1985년~1989년)
2.3.1. 자살미수 사건
2.4. 안정기 (1990년 ~ 1991년)
2.5. 다양한 시도,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
2.6. 2000년대 이후
3. 디스코그래피
4. 여담
5. 출연 작품 및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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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80년대를 대표하는 가희#s-3'''

뮤직 스테이션 2011년 10월 14일 방송의 소개 문구[4]

마츠다 세이코와 함께 1980년대 일본 가요계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데뷔 이래 현재까지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아티스트들 중 하나로[5] 일본 레코드 대상, FNS가요제 '''여성 최초 2연패''', 오리콘 연간 아티스트별 토탈 세일즈 선두 횟수 역대 2위(4회)[6], 솔로 1위, '''더 베스트 텐 최다 1위 (69회)''' 등 수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다(2020년 기준). 2010년 이후, 건강 악화로 활동을 무기한 정지하였으나, 2014년 홍백가합전에서 복귀 무대를 가지고 이듬해 1월 신규 싱글과 커버 앨범으로 완전 복귀하였다. 2020년 현재 총 판매량은 약 2568만장.
한국에서의 별명은 아키나의 한자를 그대로 발음한 '''명채'''(언니 또는 누나).

2. 생애



2.1. 데뷔 전 (1965년 ~ 1981년)


1965년 도쿄도 오타구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4녀 중 3녀이자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정육점이 장사가 잘 되지 않아 키요세시로 이사를 가 아버지와는 따로 살았는데, 사실상 키요세에서 자랐고, 홍백가합전을 비롯해 여러 방송에서 출신지를 키요세로 말하는 등 본인은 키요세를 고향으로 여기는 것 같다. 어려운 형편에도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지로 언니를 따라 4살 때부터 발레를 10년 간 배웠다. 어릴 때부터 언니오빠들과 함께 TV나 라디오 등에서 노래를 듣기도 했고[7], 어머니가 연예계를 동경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가수로서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언니와 오빠들이 소위 일진으로 불리는 불량아들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입학했을 때 선생님들이 "네가 나카모리 동생이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데뷔하기 전, '스타 탄생'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탈락의 고배를 두 번 마셨다. 1979년 중학교 2학년일 때 참가한 첫 번째 오디션에는 이와사키 히로미의 '여름에 안겨(夏に抱れて)'를 불렀으나 '나이에 비해 목소리가 너무 어른스럽다'며 탈락했고, 1980년 중3때 참가한 두 번째 오디션에는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青い珊瑚礁)'를 불렀으나 '노래는 잘하는데 얼굴이 너무 아기같아서 동요를 불러야 할 것 같다'는 이유로 탈락했으나, 이듬해인 1981년 세 번째 오디션에서 야마구치 모모에의 '몽선안내인(夢先案內人)'을 불러 역대 최고의 점수로 합격했다. 스타 탄생 영상[8]

2.2. 데뷔 초 (1982년 ~ 1984년)



<color=#fff> '''데뷔 전 영상(슬로 모션), 1982년 2월23일'''
프로그램 우승 이후[9] 연예사무소로 켄온, 레이블로 워너 파이오니아[10] 계약을 맺고[11] 1982년 5월 1일에 첫 싱글 슬로 모션을 발매하며 아이돌로 데뷔하였다. 원래 소속사 측에서 아키나를 '모리 아스나', '나카모리 아스나'라는 예명으로 활동시키고자 했으나 본인의 거부로 인해 본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12][13] 아키나를 비롯해 코이즈미 쿄코, 하야미 유, 마츠모토 이요, 호리 치에미 등 1982년에 데뷔했던 아이돌들이 연예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자, 이들을 통틀어 '''꽃의 82년조'''라고 일컫게 되었다.
수줍음 많은 실제 성격과는 달리 의외로 데뷔 전부터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주관을 보였다.[14] 초창기부터 무대의상이나 소품, 메이크업 등을 본인이 하나하나 체크했으며 2번째 싱글이었던 소녀A는 가사가 자신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가[15] 스태프들의 회유와 설득으로 녹음하게 되었다. 이러한 셀프 프로듀싱 또한 아키나의 인기 요인이었으며, 후일 DESIRE의 디렉터였던 후지카와는 아키나에 대해 "깜짝 놀랐다. 그 당시의 레이디 가가였다."고 회고.

<color=#fff> '''데뷔 초 불량소녀 노선을 대표하는 곡, '少女A (소녀A)''''
데뷔 싱글 '슬로 모션'은 가련하고 청순한 이미지의 발라드로, 아키나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곡임에도 오리콘 주간 차트 30위가 최고 성적일 정도로 반응이 대단하지는 못했다. 이후 츳파리(つっぱり), 즉 불량소녀 이미지가 가득한 두번째 싱글 '소녀A'를 통해 오리콘 주간 차트 5위에 오르고 더 베스트 텐 이나 밤의 히트 스튜디오와 같은 지상파 음악방송에도 출연하게 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 뒤이은 세번째 싱글 '세컨드 러브'는 첫 싱글처럼 다시 가련하고 청순한 발라드로 회귀한 곡이었는데, 이 곡이 오리콘 주간 차트 6주 1위(3주 연속 1위 2회), 1983년 연간 차트 8위에 오르는 대단한 성적을 기록하고, 약 77만장을 판매해 나카모리 아키나 역대 최고의 판매실적을 올린 싱글로써 대히트하였다. 네번째 싱글 '1/2의 신화'에서는 또다시 츳파리 노선으로 돌아와 오리콘 주간 차트 6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발라드인 '트와일라잇 ~석양의 편지~' 2위를 기록하고, 츳파리로 돌아온 금구가 또 한 번 대박을 치면서 다시 1위를 탈환하며 1983년 홍백가합전에 처음으로 출전하게 되었다. 이 기세를 몰아 1984년에도 '북쪽 날개'(2위)[16], 후속 싱글 '서던 윈드'(1위), 츳파리 노선의 집대성이라고 불린 '십계 (1984)'(1위)까지 연속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 때부터 대중들은 아키나를 당시 최고의 인기 아이돌이었던 마츠다 세이코의 라이벌로서 주목하기 시작한다.

2.3. 아티스트 노선으로 전환과 전성기 (1985년~1989년)


1984년 11월에 출시한 열번째 싱글 '장식이 아니야 눈물은'부터 기존 아이돌 이미지의 가요나 발라드가 아닌 아티스트로서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싱글은 주간 차트 1위는 물론 연간 차트에서도 6위를 기록하며 대박을 쳤다. 이 즈음부터 남성팬보다 여성팬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는데, 패션리더로서의 매력이 부각되었고 노래가사와 이미지를 통해 당당한 일본 여성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이 후 1985년 1월에는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사랑 여행'이 개봉하였으며, 이 영화에 공동 주연으로 출연한 콘도 마사히코와 교제가 시작되었다.[17]
이어 발표한 열한번째 싱글 '미 아모레'[18]는 아키나 최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곡이다. 차트인과 동시에 1위를 기록하며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1985년 연간 차트 2위 랭크 및 66만장[19]의 판매고를 올리며 아키나 역대 두 번째로 높은 판매실적을 기록했으며, 무엇보다도 이 곡을 통해 최연소로 1985년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리오의 이국적인 삼바 리듬과 정열적인 카니발의 이미지를 담은 이 곡은, 원래 '붉은 새가 도망쳤다' 라는 곡으로 작사되었으나 아키나가 "가사가 적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재작사를 요청하여 편곡까지 더해 재탄생한 곡. "미 아모레"의 이국적 이미지는 다음 싱글인 아랍풍의 'SAND BEIGE -砂漠へ-'로 이어졌으며, 쓸쓸한 도시 여성의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풍기는 발라드 'SOLITUDE' 까지 지속적으로 차트 1위를 점령하게 된다.

<color=#fff> '''대표곡 중 하나인 <DESIRE -정열->'''
1986년 2월에 발표된 "DESIRE"은 그녀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대표곡. 싱글 재킷의 기모노도 화제였으며,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된 기모노와 보브 가발이 실제 무대 의상으로 사용되면서, 기존과는 완전히 달라진 아키나의 매력이 발산되었다.[20] 실제로 아키나는 디렉터였던 후지카와에게 "TV 출연했을 때의 모습을 기대해 달라"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가 했던 후지카와는 실제로 아키나가 TV에 나온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세련된 패션감각과 메이크업/가발, 투수의 투구 동작에서 본 딴, '난데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안무는 이 노래를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이 노래를 통해 나카모리 아키나는 1985년에 이어 일본 레코드 대상을 2연패하는 업적을 쌓았다. 이 기록은 여성 솔로 가수로서는 최초이며, 이후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21]가 공동으로 가진 기록.
이어, "집시 퀸"과 "Fin"등의 싱글을 내며 도시여성적 이미지를 확고하게 다지는 등 전성기를 이어나갔으며, 그러한 와중에도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위해 앨범 不思議(불가사의)를 발매. 본인이 직접 앨범 제작에 참여하여 아이돌 팝의 범주를 벗어나 뉴웨이브나 신스팝의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한편 가수 본인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트랙에 묻어버리는 프로듀싱을 선보여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며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위태로운 듯 치명적인 멜로디와 안무, 후렴구의 비브라토가 매우 인상적인 "TANGO NOIR", 무려 에르메스 손수건으로 무대의상을 제작하여 큰 화제가 된 번안곡 "BLONDE"[22] 등 내놓는 싱글마다 주간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인기열풍이 지속되었다. 또한 해외 작곡가만을 기용하여 모든 제목과 가사가 영어로 이루어진 Cross My Palm과 같은 팝 앨범을 발매하는 등 음악적 시도도 놓치지 않았으며, 앨범 발매 한 달 후 열 아홉번째 싱글 "난파선"을 발표하며 연간 차트 6위에 오르는 대박을 치게 된다. [23] 원래 눈물이 많고, 노래를 '연기'하는데 탁월하다는 평을 받아왔던 아키나였지만, 이 노래를 음악 방송에서 라이브로 부를 때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개인적 상황[24]이 이 노래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고 한다. 이 노래로 1987년 일본 레코드 대상 3연패도 점쳐졌으나, 아키나 본인이 이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실제 대상 수상은 콘도 마사히코[25]가 수상했다.수상자 발표 당시 수상자 본인보다 더 활짝 웃으며 박수치는 아키나를 보면 당시 아키나가 마사히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이후 "SAND BEIGE"를 잇는 아랍풍의 이국적인 싱글 "AL-MAUJ"와 발랄하고 경쾌하며 신기로운 편곡으로 브로드웨이 음악을 연상케하는 "TATTOO"로 15개 연속 싱글 1위를 기록하면서 전성기를 이어가게 된다. 이후 "I MISSED “THE SHOCK”"이 아쉽게 3위를 하며 연속 1위 기록은 깨졌지만 이 작품으로 싱글 총 판매량이 1000만 장을 돌파하였으며 다음 싱글 "LIAR"를 통해 1위를 되찾아오기도 했다.

2.3.1. 자살미수 사건


1989년 7월 11일, 일본 미나토구 롯폰기에 있는 콘도 마사히코의 저택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쓰러져있는 아키나를 발견한 콘도의 신고로 병원으로 이송된 아키나는 절단된 혈관과 신경을 봉합하는 6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26]
당시 가족간의 금전적인[27] 문제로 인한 분쟁과 콘도 마사히코와의 성격차이,[28] 연예생활을 하는 동안 깊이 곪아온 감정적인 문제까지 겹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29]
사건 이후 연말인 12월 31일에 사죄 기자회견을 열어 콘도 마사히코와 함께 참여했는데, 이 자리에서 아키나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연예 활동을 지속하면서도 불미스러운 일로 걱정을 끼친것에 깊이 사죄드린다.”라고 말하면서 대국민 사과를 했다.[30] 기자들은 콘도에게 다음해인 1990년 쯤에 결혼이나 약혼을 할 계획이 있냐고 묻자 콘도는 “결혼 계획은 절대 없다.”고 딱 잘라 말했고, 아키나와 콘도의 관계는 이 기자회견을 끝으로 완전히 종결점을 찍었다.[31] 이후 아키나는 몇 달 간 방황하며 활동을 쉬게 된다.[32]
훗날 아키나는 이 사건을 이렇게 회고했다.

'''가족을 위해 17살 때부터 일하기 시작했어요. 5년 전 그 소동[33]

때도 가족은 내 마음 같은 건 결국 아무것도 알아주지 않았고, 사무실이 하는 말은 믿어도 저를 믿어 주지는 않았어요. 가족은 남이 아니니까 더욱 곤란해지네요. 예를 들어 연애라면 고작이라고 스스로에게 타이르잖아요. 상대는 어차피 남인데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딱 잘라버리겠죠. 하지만 피가 연결되어 있으면 아무리 알아주지 않아도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거죠. 옛날에 다른 가족들도 아버지에게 가게를 내 주었어요. 근데 자기가 고생해서 낸 가게가 아니라서 금방 망하게 되거나, 열심히 하지 않아요. 그 후로도 4년이나 5년이나 일을 하지 않고, 무엇인가 조금만 해도, 금방 그만둬 버려. 그런 걸 보면 내가 가수가 된 게 잘못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가족들은 나 몰래 사무실에서 매달 돈을 받곤 했어요. 이상한 얘기지만 사무실과 가족은 점점 유대감이 강해지는데 저와 가족관계는 멀어져만 갔습니다. 5년 전 그때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온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런 절망감으로 가득 차서... 회사에 대해서도, 가족에 대해서도, 어쨌든 인간을 모두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 내가 열심히 해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솔직히 연애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어요. 결혼이라든가 내용이 진한 무엇인가가 있는 상대가 있었다면, 저렇게 되지 않고,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벌써 외톨이였어요. 그래서 죽으려고 했던 것도 할 수 있었을 거고. 콘도씨에 대한 것은 저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어요. 콘도씨에게는 소동에 휘말려 큰 폐를 끼쳐서 미안한 일을 했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그래서 몇 달 후에 그와는 헤어졌어요. 지금 제 마음속에는 꼬리를 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마르코폴로 1월호. ‘나카모리 아키나 격백’


2.4. 안정기 (1990년 ~ 1991년)


건강을 되찾은 아키나는 소속사 켄온과의 재계약을 하지 않고 개인 사무소 'Collection' 을 세워 90년 7월에 그녀의 싱글 곡 중 유일하다시피 밝은 분위기의 싱글 Dear Friend 로 컴백, 약 55만장을 판매하고 오리콘 차트 2주 연속 1위를 하였으며 연간 차트 6위에 랭크되는 등 다시 한 번 건재함을 입증하였다. 다음 작품인 물에 꽂은 꽃으로도 1위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이어나갔다. 물에 꽂은 꽃 활동이 끝나고 해당 곡이 수록된 복귀 앨범 <GAZE>를 발매할 예정이었지만 돌연 발매를 연기하고[34] 다음 싱글인 후타리시즈카를 발매, 주간 차트 3위에 들며 롱런하여 최종적으로는 약 50만장 가량의 판매량을 달성하는 등 다시 전성기를 되찾은 듯 보였으나...

2.5. 다양한 시도,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


1992년 서포트 부족 등의 이유로 개인 사무소 임원들과 갈등이 지속되어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개인 사무소 'Continue'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간 음반 제작이나 이미지 컨셉트 등의 문제로 의견 충돌이 생겨 데뷔 때부터 함께한 레이블 워너 파이오니아와의 계약을 해지하였고 92년 한 해 동안 음반사가 없어 일체의 음악 활동 없이 배우로써 외도 기간을 가지며 드라마 <솔직한 그대로>의 속 여린 양아치인 츠키시마 칸나역으로 주연을 맡아 배우로써도 상당한 성과를 냈다.[35] 그 후 음반사 MCA빅터와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음반사를 이적하는 과정에서 아키나가 몰랐던 이중 계약 관련 이슈가 있었고 레이블 이적료의 분배 문제로 인하여 소속사와 법적 공방을 벌이며 또(...) 소속사를 이적하였다.

<color=#fff> '''90년대 대표곡 <愛撫 (애무)> 무대 영상'''
1993년 법적 공방을 마무리하고 싱글과 앨범을 발매하지만 긴 공백기 이후로 새롭게 재편된 헤이세이 시대의 음악계에서 아키나의 신곡은 이전과 같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레이블 이적 후 바로 발매된 싱글 Everlasting Love/NOT CRAZY TO ME 부터 음악적 성향이 판이하게 달라져 판매량과 순위가 현저히 줄었다. 하지만 싱글 발매 후 4개월만에 정규 앨범 UNBALANCE+BALANCE 를 발매하는데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던 코무로 테츠야의 프로듀스를 받아 제작된 곡 애무가 앨범 수록곡임에도 불구하고 유선 차트 3위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하며 히트하여 1994년, 뒤늦게 이 곡을 싱글컷하여 활동을 이어나간다. 이후 니혼 TV 마감 뉴스와 타이업하여 싱글 이 밤 어딘가에서를 발매해 활동했고, 2개월만에 싱글 월화를 발매해서 오리콘 8위에 진입하는 성과를 냈다.
이어 1995년 정규 앨범 la alteración 의 선행 싱글로써 태초에, 여자는 태양이었다를 발매하는데, 이 싱글 발매 직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 한 것은 물론 활동중 가족들과의 감정적 문제, 분쟁이 극에 치달아 아예 가족들과 절연. 이후 본명이 아닌 'AKINA' 라는 명의로 싱글 Tokyo Rose를 발매하였으나 3만장 판매로 노선 변경에 실패하여 이듬해 다시 나카모리 아키나로 돌아와 또 한 번 코무로 테츠야 와 손을 잡고 MOONLIGHT SHADOW-月に吠えろ를 발매하였다. 코무로 붐의 인기 속에서 TK 프로듀스라는 것을 강조해 홍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14위(약 10만장) 으로 당시 아키나의 판매량에서 크게 상승하지 못한 수치를 보여주었다. [36]
98년 MCA빅터를 나와 소규모 음반사 가우스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하였다. 아키나 본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 <차가운 달>의 OST로 쓰인 帰省 〜Never Forget〜이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37] 이듬해에도 드라마 <보더 -범죄심리수사관 파일>의 주연으로 출연해 주제가 오필리아를 부르며 배우와 가수 양쪽으로 활발히 활동하려 했으나 독감과 동시에 골절 사고까지 겪어 드라마가 조기 종영되었다. 또한, 당해에 레이블과 팬클럽 측이 협업하여 생일 기념 콘서트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이는 아키나에게는 전혀 고지되지 않은 일이었고 레이블과의 갈등이 심화되어 생일 축하 콘서트는 중지되었으며 팬클럽 회장이 티켓 비용을 먹튀하는 바람에 아키나의 사비로 팬들에게 2400만엔 가량을 배상하는 등 여러가지 크고 작은 일들이 겹쳐 암흑기의 절정을 찍게 된다. 심지어 이런 불화 과정 속에서도 소속사에서는 제대로 뽕을 뽑으려 작정했는지 아키나가 녹음하다 손 뗀 여러 곡을 합쳐 만든 앨범이자 어떠한 동의도 없이 발매되어 아키나 본인도 자신의 앨범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앨범 will을 발매했고, 이 앨범을 홍보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가우스 엔터테인먼트의 사장은 '나카모리는 이 업계에 있어서는 안 되는 가수'라며 아키나를 격하게 비난하는 등 파국을 맞았다. 결국 가우스와는 완전히 절연하여 2002년까지 레이블이 없는 상황이 된다.

2.6. 2000년대 이후


2002년, MCA빅터와 여러 레이블이 합쳐져 만들어진 유니버설 뮤직 재팬과 계약을 하며 복귀하였다. 복귀 후 콘서트 중에 눈물과 함께 '절대로 음악활동을 멈추지 않겠다', '건강 문제로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 등의 약속을 하기도. 2002년 3월, 커버 앨범 'ZERO album-歌姫2'를 발매하였고 2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히트하여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시 한 번 입증하며 활동을 재개한다. 5월 이상민이 프로듀싱한 싱글 The Heat 〜musica fiesta〜를 발매하였으며, 12월 셀프 커버 앨범 <가희 더블 디케이드> 를 발표, 앨범 차트 8위에 오르는 성과를 내며 수록곡 飾りじゃないのよ涙は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장하였다.
이후 赤い花이나 花よ踊れ등의 여러 싱글을 발매하며 활동하다 2010년 말 건강 악화로 인해 장기간 활동휴지기에 들어갔다. 활동 휴지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가뜩이나 마른 체격이 점점 더 핼쓱해지고, 라이브에서도 특기인 아키나 비브라토를 구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이는 등 컨디션이 여러모로 좋지 못하다는게 알려졌던 상황이라 일부 팬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활동 휴지기동안 기레기들은 신나서 각종 병명을 줄줄이 가져다 붙였고, 결혼설을 비롯한 별의별 찌라시도 같이 나돌았다.
이후 건강 회복에 전념하면서 점점 활동 재개 의지를 불태우던 아키나는 2014년 말, 약 4년간의 공백기를 깨고 가요계에 복귀를 선언했다. 레전드로 불리는 가희답게 복귀 무대는 바로 2014년 홍백가합전. 홍백가합전을 통한 복귀는 가수별 시청률 42%를 넘으며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기념으로 발매한 올타임 베스트 앨범은 12만 장이 팔리며 인기를 끌었다. NHK 무대가 아닌 아닌 뉴욕 스튜디오에서 이원방송으로 등장했다. 홍백 복귀 방송인데 드레스가 아닌 검은색 가죽 라이더 자켓이라는 터프한 복장이 인상적. 신곡인 'Rojo - tierra -'[38]를 부르며 여전한 카리스마와 녹슬지 않은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이때 마츠다 세이코도 같이 홍백에 출연해 화제가 되었다. 단, 같은 무대는 아니고 아키나는 특별출연방식으로 뉴욕에 있는 스투디오에서 이원중계 방식으로 출연하였다.
홍백가합전 방송 이후 곧이어 1월 9일 NHK 특별방송에 출연해 근황에 대한 이야기와 가희4 앨범에 수록되었던 커버곡들의 무대를 선보였다. 또한 21일 'Rojo -tierra-' 를 발매하였으며 초동 약 14,000장 정도로 주간 차트 8위에 랭크, 20년만에 오리콘 차트 TOP10에 진입하는 대단한 성과를 냈다. 최종 판매량은 무려 약 25,000장.
2015년 9월 30일에는 활동 복귀 이후 싱글 2탄이자 50번째 싱글(디지털 싱글 포함) 'unfixable'과 NHK에서의 출연 영상을 담은 DVD 박스가 발매되었다.
2017년에는 본인의 이름과 동명의 앨범 明菜를 발매하며 동시에 새로운 커버 앨범 Cage도 발매하였다. 明菜는 오리콘 앨범 차트 9위에 오르며 1만장 이상을 파는 성과를 냈다. 커버 앨범 Cage의 경우, 80년대의 사회 현상을 표현한다는 컨셉 하에 제작되어 80년대의 디스코, 유로비트 등 서양 댄스 히트곡들을 커버하였다.
2020년 5월부터 아키나의 옛 소속 레이블인 워너 뮤직 재팬에서 아키나의 85년, 89년, 91년 콘서트 DVD 영상을 차례대로 공개했으며 멜론이나 유튜브 뮤직에 아키나의 데뷔 초 음원[39]들이 풀렸다.[40] 더불어 멜론에서는 프로필 사진이 바뀌어 국내 팬들은 '아키나가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아닌가'라며 기대 중. 또한 12월 9일, 워너에서 82년부터 91년간 몸 담았던 시절에 냈던 '''모든 정규 앨범과 베스트 앨범의 음원'''[41]을 '''AKINA BOX (1982-1991)'''라는 박스 세트에 수록된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풀었다'''. 총 170곡으로, 2020년 12월 20일 기준으로 애플 뮤직과 유튜브에서 청취가 가능하다.(2020년 12월 말 기준으로 멜론, 지니 등에도 릴리즈되었다.)

3. 디스코그래피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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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아키나가 재일이라는 설이 떠도는 편이다.[42] 한국에서 재일로 의심하는 근거로는 위에 사진에 나와있듯 한옥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아키나의 형제들 이름이 모두 아버지를 따라 명(明)자 돌림[43]인데 이것이 재일교포에게 많이 보이는 작명법이라 의심을 하는 것. 이외에도 아버지가 정육점을 운영한 것으로 재일 의심을 받기도 하고[44] 아키나가 방송 활동 초창기에 매운 것을 즐겨먹었다고 말한 것도 의심의 근거로 쓰인다. 그렇지만 부친의 고향인 사이타마현 시키시에는 20채에 가까운 나카모리 집안이 있어 나카모리 마을이라고 불린 곳도 있었고 본관은 11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로 보아 재일설은 확실히 루머이다.[45]
  • 프로그램에서 우승 당시, 코이즈미 쿄코, 혹은 나카야마 미호하고 같은 레이블에서 데뷔를 할 뻔 했다. (!)[46]
  • 데뷔 전부터 상당한 자신감과 배짱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에서 유독 아키나에게 점수를 짜게 주던 심사위원 마츠다 토시[47]가 '노래는 잘하는데 얼굴이 앳돼 못쓰겠다. 동요나 부르는게 어떻냐'며 빈정대자 '동요를 부르라고 하시는데 스타 탄생에서는 동요는 받아주지 않는 거 아니에요?' 하고 맞받아쳤다는 일화가 있다. 엄마가 객석에서 말리자 그제서야 겨우 진정했다고(...).
  • 데뷔 초, 싱글 홍보에 소속사가 만든 '조금 H한 밀키소녀'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했다.[48] 그런데 여아이돌이 대놓고 캐치프레이즈에 'H#s-3.11.7'란 단어를 집어넣어 버렸으니[49] 주위에서 계속 '아키나씨는 야한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겉으로나마 '아니에요.'라고 수줍게 대답하던 아키나지만 결국 쌓이다 보니 짜증이 나서 '그래 야하다 어쩔래?'하고 반응하게 되었다고…[50]
  • 아키나가 켄온에 재적하던 당시 사장직에 있던 하나미에 따르면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지만 전혀 공부 같은 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때문에 데뷔 직후에는 악보나 대본상의 한자에 후리가나로 친절하게 발음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 1983년 1/2の神話로 활동할 때 더 베스트 텐 출연을 앞두고 안무를 연습하다 다리를 다쳤었다. 방송에 나갈 때 순위 발표식에서 부상소식을 알리고 다음 순위발표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PD가 아키나에게 부르지 않을래? 몇천명의 팬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라고 부탁하여 연주가 성사되었고 [51] 급하게 60초 동안 광고를 내보내 시간을 벌며 관현악단과 방송국 주조종실에도 이 사실을 전달, 결국 실수 없이 무사히 노래를 불렀다. [52] 당시 MC였던 쿠로야나기 테츠코도 노래가 끝난 직후 아키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
  • 아키나의 84년 싱글 十戒 (1984) 이후로 얼굴에서 젖살이 점점 빠져 어른같은 모습이 되었다. 게다가 80년 후반에는 스트레스와 충격을 받아 10kg 가량이 빠졌다. 최근 사진을 보면 데뷔 초의 아키나와 닮았다.
  • 80년대 최고 인기 가요순위 프로그램인 ' 더 베스트 텐' 에서 역대 최다인 69주간 1위 기록을 가지고 있어서 '베스트텐의 여왕' 이라는 호칭을 가지게 되었다. 최다 2위 기록 역시 아키나가 보유하고 있다.
  • 동세대 여성 가수중에 가장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최고 권위인 레코드 대상 2회 수상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제1회 골드디스크 그랑프리등 주요 가요제에서 무려 15회나 대상(그랑프리)을 수상하였다. 특히 최전성기인 86년에는 거의 모든 메이져 시상식의 대상을 독식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참고로 라이벌인 마츠다 세이코는 2회의 대상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 활동 초기에는 데뷔곡인 スローモーション을 비롯한 청순가련한 발라드와 少女A, 1/2の神話, 十戒 (1984) 등으로 대표되는 츳파리(つっぱり), 즉 불량소녀 계열의 컨셉을 번갈아가며 활동했다.[53] 이후 飾りじゃないのよ涙は부터 다른 아이돌들보다 빠르게 음악성에 비중을 둔 아티스트 노선으로 전환하였고, ミ・アモーレ 등의 이국적인 분위기의 노래들을 발표해 히트시켰다.
  • 활동기간이 겹치고, 서로 상반된 이미지가 두드러졌던 마츠다 세이코라이벌로 꼽힌다. 당시 두 사람의 노선에 빗대 나카모리 아키나는 달의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는 해의 아이돌로 불렸다[54]. 모든 라이벌들이 그러하듯 세이코와 아키나 또한 서로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야기를 나누는 등 전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키나 본인이 마츠다 세이코의 팬#이며 모든 앨범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둘이서 여러 예능에 출연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이코의 노래인 푸른 산호초하얀 파라솔을 부르기도 했다.[55]
  • 콘도와의 열애 중 두 사람이 취재에 좀처럼 응하지 않자 기자들은 아키나의 친정을 노렸지만, 한 성깔 하던 아키나의 어머니가 소화기까지 휘두르며 기자들을 쫓아냈다고. 하여 부친의 가게에 라면을 먹으러 간 손님인 척 해서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었다는 듯(...).
  • 한국에는 일명 아키나 폭로집의 내용이 정설인 양 떠돌아다니는데, 이 폭로집은 본토에서도 아키나 측에 고소당해 패소한 찌라시다.[56] 국내에 정설처럼 퍼져 있는 콘도 마사히코마츠다 세이코 삼각관계 스캔들은 당시 스탭들과 함께 간 뉴욕에서 식당에 앉아 있다가 사진을 찍힌 것이었고 당시 세이코는 배우 칸다 마사키와의 결혼 생활 중이었다(...).[57] 아키나의 자살 기도는 스캔들이 터지고 6개월 후에 일어났는데 콘도와의 관계 및 가족 관계 때문이었으며 세이코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 왕조현을 단숨에 톱스타로 등극시킨 80년대 홍콩 영화의 레전드 천녀유혼의 여주인공 '섭소천' 역이 원래는 나카모리 아키나를 No.1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서극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최근 전해져 화제가 된 바 있다.
  • 가사의 음절 뒷부분을 중저음 비브라토와 함께 길게 끌어내는, 일명 '아키나 비브라토'라는 고유의 창법으로도 유명하다. 아키나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DESIRE -情熱-가 이러한 아키나 비브라토를 십분 활용한 곡으로, 도입부를 아키나 비브라토로 시작해서 노래의 끝도 아키나 비브라토로 마무리한다.
  • 무대에서는 관객들과 카메라를 씹어먹을 듯한 강렬한 눈빛, 빼어난 성량을 자랑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면 수줍음 타는 소녀가 되는 갭 모에를 지니고 있다. 2014년 복귀 무대였던 홍백가합전에서도 작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열창을 하고, 노래가 끝나자 다시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웃으며 인사하는 귀여운 모습을 보였다.
  • 애연가이다. 87년도 잡지에서 흡연 사진이 실려 있는데, 사실 잡지의 사진은 컨셉으로 찍은 것. 또한 앨범 CRIMSON의 수록곡인 '믹 재거에게 미소를'의 노래 시작 전 인트로에서 담배를 피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 밖에도 파파라치 컷이나 자신이 직접 공개한 사진에서도 흡연하는 모습을 공개하는 등 80년대부터 자신이 흡연자임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사진에 유난히 많이 잡히는 담배갑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입생로랑 담배를 피운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잡지를 살펴보았을 때 20살이 된 직후부터 피우기 시작한 듯. 출연한 드라마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 82년조 데뷔 동기들 중에는 동년배인 코이즈미 쿄코독신 동맹[58][59] 을 맺을 정도로 가장 사이가 좋다. 쿄코가 아키나를 일컬어 '다정한 언니 같은 존재'라고 칭하기도. [60]
  • 전 매니저 나유키 후사노리에 따르면 아키나와 맛치가 교제할 당시, 아키나에게 들이대는 남자도 적지 않았지만 맛치 외의 남자에겐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으며 고지식할 정도로 맛치만을 생각했다고. 1987년 7월 2일 더 베스트텐에서는 칠석 기념으로 엽서에 「빨리 시집갈 수 있기를...」 이라고 써 당시 MC가 '그것이 현실이 될 것 같습니까?' 라고 묻자 「당분간은 아니겠죠...」라고 대답하기도 했다.[61]
  • 아키나의 사무소 콘서트 담당자 카도츠는 '아키나의 콘서트는 따로 연출자를 두지 않고 아키나 자신이 콘서트 연출을 하니 대단한 일'이라고 평했다. 콘서트 전체의 책임자는 아키나이기 때문에 트랙순서나 구성, MC, 세트 등은 무대 감독과 상의하며 의상 등은 항상 아키나와 회의한다고.
  • 2013년에 어머니 사망 이후 아키나가 나머지 가족과 절연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아키나가 가수활동을 하며 벌어온 수입에 의존하여 탕진하는건 기본이고[62] 찌라시에 사생활을 팔아 넘기거나 거짓 인터뷰를 하는가 하면, 동생인 아키호는 어떠한 상의 한마디 없이 1988년에 본인의 누드 사진집을 발매하고 아버지라는 인간은 자신의 여자 문제 때문에 아내를 핍박하는 등 문제란 문제는 다 일으켰기 때문이다. 현재까지도 아키나의 친부라는 사람은 주간지에 아키나 이름을 팔며 '새 음반이 나온다는데 가족들은 소식도 모른다'며 피해자 행세를 하며 인터뷰를 하고있다.
  • AKB48 출신이자 지금은 솔로 가수로 활동하는 인기 멤버 타카하시 미나미가 아키나의 광팬이다. "여린 분이었기에 상처가 많으셨던 것 아닐까"라며 아키나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가수로서의 롤모델로도 아키나를 자주 언급하는 편. 탑 배우로 알려진 시노하라 료코 역시 아키나의 광팬으로 아키나를 동경해 연예계에 들어왔다고. 국내에서는 레드벨벳슬기가 동경하고, 방시혁이 오래 전부터 좋아했던 연예인이기도 하다. 성우 박로미도 아키나가 자신의 영원한 아이돌이며 십계를 가장 좋아한다고 본인의 트위터에서 밝혔다.출처
  • 핸드폰이 없다. 본인이 HEY! HEY! HEY!에 나와서 "보통 사무실에서도 부재중 전화로 두고 정말 용건이 있을때만 『받아주세요』라고 말하면 받아요." 라고 언급했다.
  • 면허가 없었다. 정확히는 예전에는 있었지만 중간에 없어졌다. 이유는 갱신을 까먹어서(…). 그러나 그 이후 면허를 다시 따서 09년식 아우디 S5를 탄다고 한다. 아키나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코이즈미 쿄코가 잠시 차를 맡아 줬다고.#
  • 2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가져 '젊고 아름다운 엄마'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혼.
  •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편인데 좀 남들과 다른 잣대를 들이미는 편이다. 5~10분 늦은 경우는 교통체증이 있기에 이해하지만 1~2분 늦은 경우에는 늦장 부린거라고 생각한다고(...).
  • 2010년부터 건강상의 문제로 장기간 활동 휴지에 들어간 지 4년만에 미국에서 영상 인터뷰에 출연했는데, 팬 여러분들이 기다려 주신 만큼 저도 그것에 보답하고 싶다고 말하며 레코딩 전에 스트레칭을 여유있게 하고 도로 옆 인도에서 해맑게 장난치는 등 어느정도 컨디션이 회복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 2002년 한국 가수 BoA홍백가합전에 첫 출연했을 때 아키나가 그녀를 직접 응원[63]해 주었다.
  • 아키나 공식 캐릭터가 존재한다. 이름은 치비나(ちび菜). 싱글 Crazy Love의 자켓 사진과 본인의 노래가 나오는 파칭코 게임에 있는 바로 그 것. 각 활동기마다 했던 컨셉이 이미지화되었다[64]. 메신저 LINE에서도 스티커로 출시되어 이용할 수 있다.#
  • 2005년 뮤직페어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데뷔초 더 베스트 텐에서도 랭크 인을 했을 때 특별 이벤트로 31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줬는데, 그 때 "어렸을 때 아이스크림을 죽을 정도로 먹었다"고도 밝혔다. 반대로 '생크림'은 싫어하는 편으로, 1996년 뮤직 스테이션 출연 때에 토크 중에 이야기했었다.
  • 아키나 특유의 조곤조곤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언급이 자주 된다. 자신은 상황에 따라서 목소리가 달라진다고 하나[출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 똑같다. "나를 흉내내는 사람들은 거의 다 내 목소리 방식도 따라해요, 목소리가 안 들리죠?!"라고 밝힌 것을 보아 자신도 알고 있는 듯.
  • 데뷔 전 스타 탄생 출연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앞니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는데, 소속사에서 그녀에게 치열 교정을 제안했다고 한다. 정작 아키나는 이 덧니를 좋아했어서 "고치지 않으면 안되는 건가요?" 라고 묻자, 소속사는 "아이돌이니까!" 라고 답했다고.[65] #
  •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의 ミ・アモーレ〔Meu amor é・・・〕 앵콜 무대를 꼽았다. 1985년 대상을 수상받은 아키나가 노래를 하는 도중에 어머니가 무대 위로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꽃다발을 건네주었는데(!), 이에 아키나는 노래를 이어부르지 못할 정도로 오열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정도라고. 보통 이런 것은 사전에 공지를 해주는데, 이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무대를 진행해서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다.[66] #
  • 가수 유현상에 따르면, 제작자로서 가수 이지연을 데뷔시킬때 "저런 가수를 만들고 싶다."며 나카모리 아키나를 벤치마킹하였다고 한다. 그후 이지연의 '바람아 멈추어다오'가 가요톱10 5주연속 1위를 한후, 일본에서 나카모리아키나와 이지연의 조인트 공연을 가지면서 유현상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팟캐스트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 19회-1 "나는 이렇게 인어공주를 꼬셨다!"편 27분 27초~27분 48초]

5. 출연 작품 및 방송


===# 영화 #===
  • 사랑 여행 (1985)[67] - 고이즈미 유키 역(주연)
  • 달려라 메로스 (1992)[68] - 라이사(성우)
===# 드라마 #===
<rowcolor=#fff> '''년도'''
'''제목'''
'''배역'''
'''최고 시청률'''
'''방영 횟수'''
'''비고'''
1987
'''ベスト・フレンド 「人間交差点」より(베스트・프렌드 「인간교차점」에서'''
카시마 아야

1회
'''주연'''
1988
'''中森明菜のスパゲティー恋物語(나카모리 아키나의 스파게티 사랑이야기'''
노무라 아유미

1회
'''주연'''
1991
'''悪女A・B''' (악녀A・B)
마미야 카스미, 쿠니모토 신코

1회
'''주연'''
1992
'''素顔のままで''' (솔직한 그대로)
츠키시마 칸나
'''31.9%'''[69]
12회
'''주연'''
1994
'''古畑任三郎''' (후루하타 닌자부로)
코이시카와 치나미
14.2%[70]
12회
조연
1998
'''冷たい月''' (차가운 달)
시이나 키요카
18.0%
10회
'''주연'''
2006
'''プリマダム''' (프리마담)
쿠라하시 난코
13.4%
11회
'''주연'''
===#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


<color=#fff> '''1983년''' (初)
'''禁区'''[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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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 '''1984년''' (2)
'''十戒(1984)'''
[1] 성장은 키요세시에서 하였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도 출신지는 키요세로 기술되어 있다.[2] 1인 사무소이다.[3] 여동생나카모리 아키호이다.[4] 정확히는 3시간 스페셜 "당신의 고향 No.1은? 47도도부현별 아티스트 매상 랭킹"의 VCR 자료화면.[5] 쇼와 시대(1989년 1월 7일까지)의 가수별 판매량(오리콘 기준)이 '''2천만장'''을 넘은 사람은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 단 둘 뿐이었다.[6] 1위는 아라시로 8회.[7] 마츠토야 유미야자와 에이키치의 음악을 즐겨들었다고 한다.[8] 나카모리 아키나 데뷔 당시와 그 이후에 걸쳐 부른 몽선안내인(夢先案內人)과 야마구치 모모에의 원곡을 비교해놓은 영상을 보고 싶다면이곳으로.[9] 음악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당시 다니고 있던 메이지 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곧 중퇴하였다.[10] 정확하게는 워너 뮤직 재팬 산하 레이블인 "리프리즈 레코드"였지만 보편적으로는 워너 파이오니어라 본다.[11] 일본 연예계에서는 레이블과 사무소가 협업하여 연예인을 케어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레이블은 음반 발매나 음반 홍보, 콘서트 등의 음악 관련 활동을 서포트해주는 역할이고, 사무소의 역할은 방송 스케줄이나 언론을 관리하는 등 가수 자체의 케어에 집중되어있다.[12] 이후 출간한 에세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고, 남이 시키는대로 해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 '그 때의 나는 사실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며 궁시렁대는 뒷말을 하거나 생각하게 되는 쪽이 더 싫었다."[13] 현재에 와서는 '아키나'라는 이름이 여자에게 꽤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아키나'는 인기가 없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결국, 나카모리 아키나의 인기가 '아키나'라는 이름의 인식 개선에 도움을 주게된 것이라 봐도 무방할 듯.[14]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호불호도 확실했다.#[15] 인기는 끌었으나 그럴만 했다. 가사를 보면 어른을 꼬시는 내용(...).[16] 자세한 내용은 북쪽 날개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원래 1위여야 했으나 오리콘 측의 잘못으로 인하여 첫 주 판매량이 분할 집계되어 아쉽게도 2위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는 60만장을 파는 등 다른 싱글 못지않게 큰 히트를 기록[17] 일부 인터넷 설에는 1982년 아키나가 데뷔했을 때부터, 콘도가 아키나를 점찍어서 아무도 대쉬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기도 한다.[18] 최초 발표했을 때 작사가는 '내 사랑'이라는 의도로 "Mi Amore"로 제목을 정하였으나, Mi는 스페인어, Amore는 이탈리아어였기 때문에 다소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어인 "Meu amor é"로 중간에 표기를 변경했으나 이번엔 뜻이 '내 사랑'이 아니어서 문제. 영어 외의 언어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 일본 가요계 풍조를 볼 수 있는 사례로 꼽힌다.[19] 추후 발매한 원곡 붉은 새가 도망쳤다 의 판매량까지 합하면 98만장[20] 그래서 팬들 중 일부는 이 시기 아키나의 음악과 비주얼을 역대 아키나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우가 꽤 있는 편이다.[21] 물론 하마사키 아유미 이 분은 최고 기록인 3연패까지 이뤘다. EXILE과 동률.[22] 본인의 스튜디오 앨범 Cross My Palm 의 6번 트랙 <The Look That Kills> 를 재해석하여 싱글컷[23] 이 곡은 원래 싱어송라이터인 카토 토키코가 1984년 발표한 곡이었으나, 카토 토키코 본인이 아키나의 목소리로 불리는 것이 어울리겠다고 판단, 이후 토키코 본인은 더이상 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 아키나에게 커버를 제안하여 발매된 싱글이다.[24] 콘도 마사히코와의 불안정한 관계, 여동생 아키호의 누드집 발간 등을 포함한 가족 문제 등. [25] 당시 레코드 대상을 수상한 싱글이 "愚か者" 라는 곡인데, 판매 실적도 21만장으로 난파선에 비해 1/2 정도였고, 오리콘 연간 차트 6위를 기록한 난파선에 비해서 연간 차트 35위권에 랭크된 곡으로 아무리 봐도 대상감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때 콘도에게 '레코대(レコ大, 레코드대상) 사퇴를 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유골을 돌려주지 않겠다'는 괴전화가 왔음에도 기어이 시상식에 참여하여 어머니의 유골은 끝끝내 되돌려받지 못했다.[26] 팔꿈치 안쪽을 너무 깊게 긋는 바람에 왼손 약지의 신경 손상으로 움직임이 지금도 부자연스럽다고 한다.[27] 가족들은 아키나가 연예계에 데뷔하여 성공하게 되자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아키나가 벌어온 돈을 쓰며 호화생활을 했고, 아키나 혼자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28] 아키나는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싶어했고, 콘도는 서른살이 넘어 결혼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또한 콘도 역시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아키나처럼 당시 가족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었다고 한다.[29] 이 때 큰 건을 물었다 싶었는지 대부분의 황색언론 잡지들은 아키나의 자살 미수에 수해서도 자극적으로 다루었다. 큰 제목으로 <인기가수 아키나, 콘도의 집에서 자살>이라 쓰고 밑에 "시도했다"를 아주 조그만한 글씨로 써놔서 여러 사람들이 충격과 오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로 제2의 오카다 유키코 투신자살 사건이 되었을 상황이였다.[30] 일본은 당시만 해도 매우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자살미수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봤을 때 아키나는 피해자에 가까움에도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거기다 당시 아키나의 소속 사무소인 켄온이 규모있는 사무소가 아니었어서 바람막이가 없는 것도 한 몫 했다.[31] 자살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몇 달 뒤 두 사람은 이미 결별했었고, 기자회견에 두 사람이 참석한 것은 아키나가 콘도에게 부탁해서라고 한다.[32] 같은 시간에 NHK에선 제40회 홍백가합전이 방송 중이었는데, 기자회견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바람에 이 해의 홍백가합전은 처음으로 30%대로 추락하며 역대 최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기자회견은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금색 병풍 기자회견(金屏風前会見) 사건으로 불린다.[33] 89년 자살미수.[34] 얼마 후 워너 파이오니아와 계약을 해지하며 끝끝내 발매되지 못했다. 당시 상황에 따르면 이미 워너를 떠날 생각이 있었다는 듯.[35] 최종회 시청률 31.9%를 기록[36] 당시 한 주간지에서는 코무로를 붙여줘도 회생불가라는 식으로 비아냥대기도 했다. [37] 판매량은 9만 4천장 정도[38] 보도 자료에서는 '아프리카풍 EDM'이라고 소개되었다. 웅장한 드럼 비트로 시작해 일렉 반주가 오버랩되는 강렬한 노래로 속도감 있는 드럼 비트와 상반되는 애절한 보컬이 특징.[39] プロローグ〈序幕〉~ANNIVERSARY#s-2. 싱글로는 スローモーション~北ウイング.[40] 일본 내에서는 음원이 제공되었었지만, 드디어 국외 스트리밍을 풀어준 것으로 보인다.[41] 미니 앨범과 대다수 싱글 B면곡들은 해당 박스에 미수록되어 워너 시절의 전곡은 아니다.[42] 한국에서는 본명이 천명채라는 설이 퍼져있다. 하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설.[43] 장녀 아키에(明恵) → 장남 아키히로(明浩) → 차남 아키노리(明法) → 차녀 아키코(明子) → 3녀 아키나(明菜) → 4녀(막내) 아키호(明穂) 순이며, 아키코부터 밑의 세 자매는 모두 연년생이라고 한다.[44] 당시 일본에서 정육점은 부라쿠민이나 하는 직업으로 천대받았고 재일교포들도 정육점을 많이 했었다고.[45] 게다가 애초에 관보에 귀화 기록도 없다.[46] 그렇지만 93~97년도에 쿙쿙이 소속한 빅터가 출자해서 만든 MCA빅터 소속이였기 때문에 잠깐이나마 계열사였다.[47] 이와사키 히로미를 데뷔시킨 사람이라 여간 거물이 아니었다고 한다.[48] 원문은 ちょっとエッチなミルキーっこ[49] 소속사는 H(エッチ)란 뜻이 음란하다는 의미가 아닌, 곧 어른으로 발돋움할 성숙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캐치프레이즈를 붙였다고 설명했다. [50] 비슷한 맥락으로 데뷔 초부터 수영복 촬영을 하기 싫다고 공공연하게 밝혀왔다.# 때문에 히트곡이 늘고 아키나의 입김이 강해지면서부터는 불필요하고 자극적인 수영복 화보를 일체 찍지 않았으며, 이후 하와이 체류기간을 담은 사진집에 수영복 사진이 실렸으나 이는 매우 호쾌한 사진 셀렉팅이 인상적(...)이다. 수영복을 입었으나 성적인 암시를 담지 않은 편안한 사진.[51] 당시 모든 카메라가 스튜디오를 녹화하고 있어 종이에 글을 써서 전달했다. 아키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로 대답.[52] 평소 부를 때와는 달리 다리를 들거나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고 곡의 템포도 원래보다 조금 느려졌다.[53] 하지만 아키나 본인은 불량소녀 컨셉을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자신의 형제자매들은 날라리였지만, 본인은 정말 착하고 말 잘듣는 아이여서 그런 느낌을 내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소녀A 녹음 당시의 일화로 프로듀서에게 "눈을 감고 들으면 어디선가 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불러달라"고 부탁 받아서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54] 혹은 '빛의 마츠다 세이코'와 '어둠의 나카모리 아키나'.[55] 그리고 현재 두 사람은 같은 레이블에 소속되어 있다. 사실상 이 두 사람 뿐만 아니라 쇼와의 거물들은 다 여기 소속되어 있다. 타하라 토시히코라던지, 마츠토야 유미라던지..[56] 패소했다고 해서 해당 폭로집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속단할 수는 없는 것이, 명예훼손 등의 죄의 성립에 있어 피고소인의 발언이 반드시 사실이 아닐 것임이 요구되지는 않는다.[57] 1997년도에 이혼.[58] 이 동맹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았다.[59] 정확히는 코이즈미 쿄코가 한번 갔다왔으니.. 한번 깨졌다가 다시 붙었다. 게다가 현재 유부남 상대로 불륜 진행중...[60] 데뷔 초 날계란을 맞은 쿄코에게 아키나가 가장 먼저 달려가 소매 끝으로 닦아준 적도 있다고.[61] 이듬해 칠석때는 엽서에 「모두가 건강했으면...」이라고 적었다.[62] 가족 중 한명이 유명해지면 나머지 가족들이 별다른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이 벌어오는 수입에 의존하는 것, 형제의 인기에 숟가락을 얹어 본인도 유명해 지는 것 등은 과거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 세계에서도 빈번한 일이며, 이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사례들이다.[63] 「がんばれ!!」[64] 十戒 (1984), DESIRE -情熱-, TATTOO 등등...[출처] 「笑っていいとも!」 '09[65] 실제로는 치아 교정기를 부착하여 교정을 하진 않았고, 라미네이트 방식으로 앞니만 고쳤다. 아마도 데뷔를 앞두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듯 하다.[66] 하지만 엄격했던 어머니의 성격 탓에 아키나는 울면서도 '제대로 부르지 않으면 엄마한테 혼날 것 같아!' 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제대로 불러나갔다. 그동안은 가수로서 대중들 앞에서 멋있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어머니의 딸로서 노래했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67] 콘도 마사히코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 로맨스 영화[68] 장편 애니메이션[69] 본인 주연 드라마 중 최고 시청률이며 90년대 이후 평균 시청률 순위에서 13위를 차지하고 있다.[70] 출연부작[71] 상술했듯, 당시 다리가 다쳐서 목발을 딛고 걸어다녀야 되는 수준이었다.


<color=#fff> '''1985년''' (3)
'''ミ・アモーレ'''[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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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 '''1986년''' (4)
'''DESIRE -情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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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v(398777752, height=170)]
<color=#fff> '''1987년''' (5)
'''難破船'''
[72] 일본 레코드 대상 시상식이 끝나자 마자 바로 달려와서 처음엔 등장하지 않았다.


<color=#fff> '''1988년''' (6)
'''I MISSED “THE SH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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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 '''1989년''' (-)
'''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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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 '''2002년''' (7)
'''飾りじゃないのよ, 涙は'''
[73] 원래 출연예정이었지만 자살기도로 출연 불발

[kakaotv(398777755, height=170)]
<color=#fff> '''2014년''' (특별 출연)
'''Rojo -Tierra-'''[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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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
  • 수상 횟수: 138회
  • 대상 횟수: 19회
    • 레코드 대상: 2연패
<rowcolor=#fff> '''수상년도'''
'''시상식'''
'''부문'''
'''수상 작품'''
'''1982년'''
메가로폴리스 가요제
신인부문 입상
スローモーション
FM도쿄 라이온 리스너즈 그랑프리
최우수신인상
오리콘 월간 신인상
7월
전일본유선방송대상
신인상(상반기)
신인상(연간)
少女A
FNS 가요제
우수신인상
일본가요대상
방송음악신인상부문 연맹상
일본유선대상
신인상
긴자 음악제
전문심사위원 장려상
신주쿠 음악제
심사위원 특별장려상
요코하마 음악제
최우수신인상
당신이 선택하는 전일본가요음악제
신인장려상
ABC 가요 신인 그랑프리
은상
KBC 신인 가요 음악제
우수신인상
'''1983년'''
일본 레코드 대상
골든 아이돌 특별상(TBS상)

골든 아이돌상
禁区
'83 아이돌 베스트10
NEW AKINA エトランゼ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現 오리콘 연간 랭킹)
'''연간 토탈 세일즈 대상'''

LP부문 대상

골든애로우상
음악신인상

메가로폴리스 가요제
팝스 입상
1/2の神話
니혼TV 음악제
금비둘기상
トワイライト -夕暮れ便り-
일본유선대상
최다 리퀘스트 가수상(상반기)

유선음악상(상반기)
トワイライト -夕暮れ便り-
최다 리퀘스트 가수상(하반기)

유선음악상(하반기)
禁区
전일본유선방송대상
우수스타상(상반기)
セカンド・ラブ
요미우리TV 최우수상(연간)
禁区
우수스타상(연간)
요코하마 음악제
요코하마음악제상
일본가요대상
방송음악상
당신이 선택하는 전일본가요음악제
금상
심사위원장려상

'''1984년'''
일본 레코드 대상
금상
北ウイング
최우수스타상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싱글부문 골든상

LP부문 골든상

메가로폴리스 가요제
'''팝스 그랑프리'''
セカンド・ラブ
팝스 입상
일본유선대상
'''그랑프리(상반기)'''
최다 리퀘스트 가수상(연간)
十戒 (1984)
FNS 가요제
최우수히트상
北ウイング
우수가요음악상
十戒 (1984)
일본가요대상
최우수방송음악상
요코하마 음악제
요코하마음악제상
니혼TV 음악제
'''그랑프리'''
당신이 선택하는 전일본가요음악제
'''골든 그랑프리'''
전일본유선방송대상
요미우리TV 최우수상(상반기)
セカンド・ラブ
심사위원회 최우수상(연간)
十戒 (1984)
골든애로우상
음악상

미스 DJ 리퀘스트 퍼레이드
'83 베스트 아티스트상

'''1985년'''
일본 레코드 대상
'''대상'''
ミ・アモーレ
금상
우수앨범상
D404ME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연간 토탈 세일즈 대상'''

싱글부문 대상

LP부문 골든상

FNS 가요제
'''그랑프리'''
ミ・アモーレ
우수가요음악상
최우수히트상
飾りじゃないのよ涙は
전일본유선방송대상
요미우리TV 최우수상(상반기)
ミ・アモーレ
우수스타상(상반기)
요미우리TV 최우수상(연간)
SAND BEIGE -砂漠へ-
우수스타상(연간)
니혼TV 음악제
우수상
일본유선대상
최다 리퀘스트 가수상
유선음악상
일본가요대상
방송음악 프로듀서 연맹상
SOLITUDE
방송음악상
전일본가요음악제
최우수가창상
금상
요코하마 음악제
요코하마음악제상
'''1986년'''
일본 레코드 대상
'''대상'''
DESIRE -情熱-
금상
베스트 아티스트상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연간 토탈 세일즈 대상'''

싱글부문 대상

LP부문 대상

메가로폴리스 가요제
'''팝스 그랑프리'''
ジプシー・クイーン
팝스 입상
FNS 가요제
'''그랑프리'''
DESIRE -情熱-
우수가요음악상
최우수히트상
니혼TV 음악제
'''그랑프리'''
우수상
일본유선대상
최다 리퀘스트 가수상
유선음악상
전일본유선방송대상
'''그랑프리(상반기)'''
우수스타상(상반기)
최다 리퀘스트상(연간)
Fin
우수스타상(연간)
일본가요대상
'''대상'''
방송음악특별상
전일본가요음악제
'''골든 그랑프리'''
골든애로우상
음악상

요코하마 음악제
요코하마음악제상

'''1987년'''
일본 레코드 대상
특별대중상

금상
難破船
우수앨범상
CRIMSON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연간 토탈 세일즈 대상'''

싱글부문 골든상

LP부문 골든상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
'''그랑프리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

베스트 5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

베스트 5 싱글 오브 더 이어
DESIRE -情熱-
그랑프리 앨범 오브 더 이어
BEST
베스트 5 앨범 오브 더 이어
요코하마 음악제
요코하마음악제상
TANGO NOIR
전일본유선방송대상
우수스타상(상반기)
최다 리퀘스트상(연간)
難破船
우수스타상(연간)
FNS 가요제
최우수가창상
우수가요음악상
전일본가요음악제
특별화제상
긴자 음악제
가요 팝스 부문 금상
일본가요대상
최우수방송음악상
방송음악 특별연맹상
일본유선대상
최다 리퀘스트 가수상
유선음악상
BLONDE
'''1988년'''
일본 레코드 대상
금상
TATTOO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
베스트 5 싱글 오브 더 이어
TANGO NOIR
難破船
메가로폴리스 가요제
'''팝스 대상'''
TATTOO
팝스 메가로폴리스상
전일본유선방송대상
요미우리TV 최우수상(상반기)
우수스타상(연간)
I MISSED “THE SHOCK”
일본유선대상
유선음악상
FNS가요제
최우수가창상
우수가요음악상
AVA그랑프리 (現 디지털 콘텐츠 그랑프리)
은상 도쿄도지사상
Cross My Palm (VHS)
'''1989년'''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
베스트 5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

일본 레코드 세일즈 대상
LP부문 실버상

비디오 오브 더 이어
최우수 뮤직비디오상
AKINA EAST LIVE
'''1992년'''
멀티미디어 그랑프리 (現 디지털 콘텐츠 그랑프리)
비디오부문 음악비디오상
~꿈~ '91 Special Live
'''2001년'''
ACC CM FESTIVAL
TV스팟CM부문 ACC동상
판클 녹즙 '남편의 녹즙' 편
'''2007년'''
일본 레코드 대상
기획상
염화-Enka-
'''2008년'''
일본 골드디스크 대상
더 베스트 엔카/가요곡 아티스트

'''2015년'''


[74] 뉴욕 스튜디오에서 생중계로 출연. 홍팀, 백팀을 벗어난 특별기획 구성으로 출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