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야 코우요우

 

[image]
가장 오른쪽의 인물.[1]
1. 개요
2. 작중 행보
3. 기타


1. 개요


'''塔矢行洋'''(とうやこうよう) / '''Toya Koyo'''
히카루의 바둑의 등장인물. KBS 한국어 더빙판 애니메이션에서는 '''조남운'''으로 로컬라이징 되었다.
성우는 [image] 츠다 에이조 / [image] 이강식(KBS)[2], 김기현(투니버스). [3]
프로기사로 단수는 九단. 이 작품의 서브 주인공토우야 아키라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일본 7대 바둑기전[4] 중 최상위 3개중[5] 하나인 '''명인'''(名人) 타이틀 보유하고 있기에 '''토우야 명인'''이라는 경칭으로 불린다.
작중 초기엔 명인 외에 '''기성(碁聖)'''과[6] '''천원'''(天元) 타이틀까지 보유해 3관왕을 먹고 있었으며,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십단'''(十段)과 '''왕좌'''(王座) 타이틀도 따내어 5관왕에 올랐다. 한마디로 '''작중 일본 바둑계 정점에 서있는 최강자'''. 이외에 훌륭한 제자들을 여럿 길러낸 명스승이기도 한데, 현역 타이틀 홀더인 오가타 세이지 九단과[7] 10대 초중반의 나이에 벌써 四단에 오르고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혼인보전 리그 본선에 진출한 토우야 아키라, 그외 제자들도 여러 기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다.
'''신의 한 수'''를 추구하고 있으며, 아들 아키라처럼 후지와라노 사이의 라이벌 포지션. 세계관 최강자인 사이와 유일하게 맞먹는 실력을 가졌으며, 사이도 이점을 이미 꿰뚫어 보고 토우야 코우요우와 진검승부를 벌이고 싶어했다.

2. 작중 행보



아들 토우야 아키라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시절, 신도우 히카루라는 아이에게 두번이나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실력을 알고 싶다며 히카루와 대국했다. 기원[8] 앞까지 왔다가 바둑 둘 기분이 아니라며 돌아가려는 히카루를 오가타 세이지가 우연히 발견하고 기원에서 손님들에게 지도 대국을 해주고 있었던 토우야 명인에게 데려갔다.[9] 영재교육을 받은 아들을 이길만한 동년배는 절대로 없을줄 알았는데, 실제로 나타나니 관심이 생겼던 모양.[10][12] 이 대국은 중간에 히카루가 토우야 명인처럼 간지나게 바둑돌을 놓다가 사이에게 자신의 몸을 빼앗겼다고 착각하고 놀라서 뛰쳐나가는 바람에 결판이 나진 않았지만, 토우야 명인은 히카루가 둔 수들에 대해서 모범적인 프로 같았다는 평가를 내렸다.[13]
이후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아키라가 중3이던 때에 히카루가 프로시험을 돌파해 입단하자, 고단자와 갓 입단한 기사가 이벤트성으로 대국하는 신초단 시리즈에 대전상대로 히카루를 지명하는 조건으로 특별히 출전했다. 사이는 이승에 돌아온 후 꼭 상대해보고 싶었던 토우야 명인이 상대라는 사실을 듣자 히카루에게 억지를 부려 대리 바둑에 임했는데, 이벤트전이라는 성격상 루키인 히카루에게 역 핸디로 5집 반이 주어지자, '핸디 없이 두고 싶다.'는 생각에 자신이 오히려 15집의 핸디를 안고 있다는 전제로 대국을 감행하였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무리한 수를 두는 엉망인 대국으로 보였지만, 상대인 토우야 명인은 이를 눈치채고 히카루의 실력에 대한 평가를 전혀 낮추지 않았다.[14] 오히려 불계패를 선언한 히카루에게 "다음번엔 호선으로 두고 싶구나."라며 칭찬했을 정도. 참고로 이 대국 때 토우야 명인은 히카루 안의 사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느꼈으며, 그의 시각에서 흐릿한 사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15] 미래에 이들의 승부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듯 하다.
얼마 뒤 제자인 오가타 세이지 九단과의 십단전 제4국을 앞두고 피로누적+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16] 병문안을 온 히카루가 자신이 알고있는 인터넷 고수인 sai와 대국해 달라고 부탁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처음에는 "십단전 방어전을 치루는 동안의 기분전환은 되겠지"라며 수락했으나 히카루가 "선생님이 지셨을 때 진지하게 둔 게 아니었다.고 말씀하시면 안된다."고 하자 정색을 하고 내가 질 일은 없다며 '''제한시간 3시간'''에 지면 '''프로 기사에서 은퇴'''하겠다는 배수진까지 치며 sai와의 승부에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 뒤 인터넷 바둑에 익숙해지기 위해 몇 일간 감을 잡기 위해서 인터넷 바둑에 올인했고,[17] 약속된 날 sai와의 대국에 임하게 되었다. 과거 인터넷 바둑 최고수로 소문이 자자했던 sai와 바둑계 최강자인 토우야 코우요우가 인터넷에서 붙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엄청난 관전 속에 대국이 진행되었고, 그에 걸맞게 토우야 명인과 사이도 최선을 다해 임했다.[18] 결과는 용호상박의 아슬아슬한 접전이 진행되다 종반에 들어갈 즈음에 반집 정도로 미세하게 뒤쳐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토우야 명인이 역전은 불가능이라 판단하고 불계패를 선언했다.
본인의 자존심 측면에선 꽤나 뼈아픈 패배였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도 이렇게까지 내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대오각성, 오가타와의 십단전 제5국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국면임에도 본래의 기풍과는 다른 실험적인 수를 뒀다. 보통의 사람들은 눈치를 못챘지만, 대국 상대인 오가타와 쿠라타 아츠시는 한눈에 알아보고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나?"라고 생각할 정도. 아무튼 이 대국은 막판에 오카타가 역전승을 거두었고 토우야 명인은 십단 타이틀을 잃었다. 그 후 히카루가 다시 병원에 왔을때 정말로 바둑계에서 은퇴할거냐고 묻자 한번 말한건 번복하지 않는다고 하며 sai와 다시한번 대국하게 해달라고만 했다.
그리고 얼마뒤 진짜로 타이틀 4개를 내려놓고 '''일본 바둑계에서 은퇴'''했다! 전부터 프로 기사로서 빡빡한 일정 소화에 지쳤었다는 걸 이유로 들었는데, 그렇게 한동안 쉬다가 뜬금없이 중국 프로팀과 계약을 맺고 중국 바둑리그로 날아가 버렸다(...) 전 세계의 기사들과 자유롭게 겨루고 싶다는 목적인데, 일본기원 일정 상 토우야 명인 같은 다관왕은 일본 국내 기전에 집중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생각하면 족쇄가 사라졌으니 마음대로 해보겠다는 행보나 마찬가지인 셈.[19][20]
북두배 에피소드에서는 꽤 많이 등장했다. 집에서 바둑판을 앞에 둔 채 돌 하나 올려놓고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다는데,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모습은 딱봐도 sai(후지와라노 사이)와의 재대결을 원하는 의지의 표명인듯.
그리고 작중 한국 바둑계 최정상급 기사이자 동년배 라이벌이자 친구인 서창원 九단이 한국기원의 객원기사 자리를 제의하자 대뜸 수락한 걸 보면 해외기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모양인듯. 그 증거로 삼성화재배 주최측의 배려로 와일드카드를 통해 본선 진출 및 시드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21][22]

3. 기타


  • 백발과 얼굴 주름이 있어 제법 늙어보이지만, 배우자인 토우야 아키코[23]가 무척 젊은 걸 보면 50대 후반~60대 즈음의 많은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전성기 실력의 바둑기사인 점, 중학생 정도의 아들이 있다는 점 등으로 유추하면 대략 40대 후반~많아야 50대 초반 정도로 보는게 맞을듯. 아마도 중후함을 살리기 위해 설정상 나이에 비해 노안으로 캐릭터 디자인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상당한 대인배+인격자다. 자존심 강하고 고지식할 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타인을 함부로 깔보지 않는 매너를 겸비하고 있으며, 특히 아들뻘인 히카루가 여러번 무례하게 굴었음에도 전혀 혼내지 않고 좋게 넘어가거나 응해줬다.
  • 한국 기사들과도 친분이 있으며, 특히 위에 언급된 서창원 九단과 동년배 라이벌로서 매우 친하다. 한국에 갔을때 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묵어가기도 했다는 언급이 작중에 나온다.

  • 본 문서의 제목은 완전판의 번역을 따라서 '토우야 코우요우'이지만 사실 외래어 표기법을 정확히 따르면 '도야 고요'가 맞다.

  • 흔히 이 작품의 현실성을 논할 때 토우야 九단처럼 전성기를 한참 지났을 나이많은 기사가 최강자로 설정된 부분이 말이 안 된다는 점을 꼬집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발상이니 걸러 들어야 한다. 특히 이 만화는 9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부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90년대~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내 주요 기전들은 개인당 제한시간이 5~8시간이나 주어지는 초장고 대국이라 시간을 물쓰듯 쓸 수 있어서[24] 두뇌회전이 상대적으로 느린 중~노년급 기사들도 경쟁력이 있었으며, 덤도 5집 반이라[25] 흑을 잡으면 상당히 유리했고, 인공지능이나 인터넷바둑을 이용한 연구 같은 것도 없었고[26] 기보는 인맥을 통해 얻거나 잡지에 실리는 걸 복사해 봐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축적된 연구량과 경험치를 바탕으로 머리 팽팽 돌아가는 젊은 기사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었고 오히려 큰 기전 같은 데에선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로 긴장타고 있는 젊은 기사를 누를 수도 있던 시절이었다. 이후 케이블 TV가 보급되며 많은 기전들이 TV중계를 하게 되자 대부분의 기전들이 제한시간을 줄였고(당연하지만 16시간짜리 바둑을 생중계할 순 없다.),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며 기보를 컴퓨터를 이용해 간단히 보거나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만화 연재가 끝난 이후 이러한 대격변이 일어나 현재처럼 10~20대 젊은 기사들이 기전에서 맹활약하고, 30대를 넘어가면 퇴물 소리를 듣도록 바둑계의 판도가 바뀐 것. 히카루의 바둑이 연재될 당시에는 토우야 명인 같은 짬도 충분히 먹고 두뇌회전이 그렇게 많이 퇴화하지 않은 40~50대의 기사가 최강인 것이 리얼한 묘사였다.

[1] 나머지는 쿠라타 아츠시 七단(맨 왼쪽)과 아들인 토우야 아키라 四단.[2] 야인시대 창작물에 공신(?) 중 하나인 나레이션을 하신 그 성우 분이시다![3] 아이러니하게도 일본판 성우분이 제일 어리시다. KBS판 성우인 이강식 성우가 제일 연장자이며, 그 다음이 김기현 순이다.[4] 기성(대), 명인, 혼인보, 천원, 왕좌, 기성(소), 십단.[5] 역사가 오래된데다 상금도 수천만엔 급인 기성(棋聖), 명인, 혼인보를 의미한다. 참고로 일본에선 이 3개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으면 대삼관(大三冠)이라 부른다.[6] 같은 이름의 타이틀전이 2개 있다. 기성(棋聖)과 기성(碁聖)인데, 일본어로는 각각 기세이/고세이로 표기 및 이름이 달라서 구분하기 쉽지만, 한국어로는 둘 다 기성이라 혼동하기 딱 좋다. 그래서 한국에선 구분을 위해 '큰 기성전' '작은 기성전'으로 부르곤 한다. 토우야 명인이 가지고 있는 건 작은 기성(고세이).[7] 결말부 기준 스승이 은퇴하여 공석이 된 십단(十段)과 기성(碁聖) 타이틀을 리그전을 통해 획득해 2관왕에 올랐다.[8] 신도우 히카루가 토우야 아키라와 처음 만나 대국했던 곳으로, 토우야 명인이 경영하는 기원이다.[9] 히카루에게 3점을 깔라고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토우야 명인은 "아키라도 명인인 자신에게 언제나 3점을 깔고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10] 토우야 명인 曰: "아키라는 이미 프로 수준인데 그런 아키라를 이긴 아이가 있다는걸 나로서는 믿을 수 없다."[11] 히카루 曰: 바둑돌을 놓는 손가락 끝이 빛나는 것 같다.[12] 이 때 후지와라노 사이는 토우야 코우요우에게서 '혼인보 슈사쿠 시절의 자신에게 도전했던 호적수의 기백'을 느꼈고, 히카루는 토우야 코우요우가 간지나게 바둑돌을 놓는 모습[11]을 보며 자기도 저렇게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13] 히카루가 뛰쳐나가기 직전에 토우야 명인처럼 간지나게 바둑돌을 놓은 마지막 수에 대해서는 '굳이 따지면 악수(惡手)지만 흥미로운 한 수'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14] 오가타 세이지와 쿠와바라 혼인보도 같은 평가를 했다.[15] 바둑 귀신처럼 묘사되었다.[16] 이 때문에 십단전 4국은 부전패했다. 참고로 일본의 주요 기전들은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대국자 개인사정으로 참가를 못하면 봐주는 것 없이 무조건 이렇게 처리한다.[17] 오가타 세이지가 스승이 심심해 하실까봐 노트북을 마련해줬으며, 하는 방법을 간단히 배웠다.[18] 일부 팬들은 진짜 대면해서 두는 대국과 인터넷 대국의 차이점 때문에 토우야 명인이 100%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시니어급 프로기사들 중에선 리얼 대면대국과 이래저래 다른 측면이 많다며 인터넷 바둑을 꺼려하는 경우가 많으며, 작중에서 토우야 명인도 "진짜 바둑돌을 드는 느낌이 안나서 좀 그렇더구만."이라고 하며 이를 간접적으로 인증하긴 했다. 다만, 유령인 사이가 정체를 숨기고 토우야 명인이 대국할 수 있는 방법이 인터넷 바둑 뿐이라 스토리 진행을 생각하면 위의 사정은 어느 정도 무시하는 선에서 작가가 설정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따지면 아예 헤이안 시대 사람인 사이가 더 익숙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감각을 느낄 육체조차 없는 만큼 훨씬 불리하다고 볼 수도 있다.[19] 현실에서도 토우야 명인처럼 국내 타이틀을 여러개 보유하고 있는 이야마 유타시바노 도라마루 같은 정상급 기사들은 빡빡한 국내 스케줄 때문에 세계 대회에 자주 나가지 못한다.[20] 여담으로 작중 주간바둑의 기자 한명이 은퇴한 토우야 코우요우가 명인전에 나오지 못하는걸 안타까워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편집장이 "명인전이든 뭐든 일본 기전들을 일본기원과 관서기원의 기사가 아니라도 참가할 수 있도록 규칙을 바꾸면 토우야 코우요우도 자유인 토우야 코우요우로서 참가할 수 있다. 토우야 명인이 탐나면 문호를 개방하면 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기도 했다.[21] 참고로 이건 작가가 취재차 한국기원을 방문했을때 기원 관계자가 "삼성화재배에 사이를 위한 시드를 하나 줄까요?"라고 농담을 건낸 걸 작중에 반영한 거라고 한다.[22] 이렇게 삼성화재배 와일드카드 받아서 우승한 일본기원 소속 프로기사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바로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가서 프로 데뷔를 한 조치훈 九단이다. 작품이 완결된 후에 열린 2003년 삼성화재배애서 이 위업을 기록했다. 아마 이 작품의 연재가 더 길어졌다면 조치훈의 에피소드가 인용되어 토우야 명인이 삼성화재배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그려졌을 수도 있다.[23] 성우는 사쿠마 레이 / 정유미.[24] 2020년 현재 이러한 경향이 옅어지긴 했지만 기성(대)/명인/혼인보 같은 전통있고 권위가 높은 거물급 기전은 여전히 1인당 제한시간 8시간+1박 2일 일정으로 바둑을 둔다. 덕분에 일본에서는 아직까지도 70년대생 중년 기사들이 타이틀을 종종 따내곤 한다.[25] 2020년 기준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덤 6집 반 룰로 모든 대국을 진행하고 있다.[26] 당시 인터넷은 등장한 지 10년도 안 된 신기술이었던 터라 대중적으로 보급이 안됐다. 이 당시는 네이버가 생긴지 1년 된 신생기업이었던 시절이다. 당연히 인터넷 바둑 좀 만지는 건 젊은 기사들 위주였고 기성세대 기사들은 마우스 쥐는 법도 모르는 컴맹들이 대다수였다. 인터넷 바둑이라는 게 존재는 했지만 지금처럼 인터넷 바둑을 통해 연구회를 갖는다던지 하는 개념은 없었다. 실제로 작중에서 인터넷 바둑은 아직 대중화되지 못한 최신 기술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