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전투

 

'''튀니지 전투'''
[image]
'''날짜'''
1942년 11월 17일 ~ 1943년 5월 13일
'''장소'''
북아프리카 전역
'''원인'''
연합국의 북아프리카 주둔 추축국 축출 시도
'''교전국'''
[image] 영국
[image] 미국

[image] 나치 독일
[image] 이탈리아 왕국
'''지휘관'''
[image] 아이젠하워
[image] 로이드 프레덴덜
[image] 조지 S. 패튼
[image] 버나드 로 몽고메리
[image] 케네스 앤더슨
[image] 에르빈 롬멜
[image]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image] 조반니 메세
'''결과'''
연합국의 결정적인 승리
북아프리카 전역 종결
'''피해규모'''
76,020명 사상
29만명 사상
1. 개요
2. 이탈리아의 진격
3. 독일의 지원
4. 미국의 개입
5. 롬멜의 철수 후의 북아프리카 전선
5.2. 추축국의 상황
5.3. 전개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연합국추축국 사이의 전투. 장소는 튀니지.
전체적으로 보급 문제로 양쪽 모두 고전했으며 사막이라는 배경 때문에 일반적인 전투와는 상황이 달랐다.[1]
23만여 명의 추축국 병사가 포로로 잡히며 추축국이 패배. 연합군은 이 전역의 승리로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게 되고 추축국의 패배가 다가오게 된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초반부 부분이 튀니지 전투이다.

2. 이탈리아의 진격


이탈리아 왕국의 지도자였던 무솔리니는 당시 동맹국이였던 독일과 군사 수준이 같다고 믿고 있었다. 근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애초에 빈약한 경제 때문에 성장은 커녕 오히려 약해지는 부분도 있었고 보병과 해병을 제외하면 연합국의 나라들과 비교도 안될정도로 빈약했다.[2] 이런 상황에서 무솔리니는 자신의 확신과 독일은 지원을 믿고 연합국의 식민지가 있는 북아프리카로 군대를 보내게 된다.

3. 독일의 지원


이탈리아의 믿음에 따라 독일은 지원을 하기로 결심하고 90경사단과 제15기갑사단 등의 병력을 파견한다. 롬멜이 처음 히틀러에게 요구했던 병력은 4개의 기갑사단이였다. 하지만 제대로 편성되지 못한 2개 사단만이 주어졌다.[3]
추가예정

4. 미국의 개입


초반부 물자만 지원하던 모습과 달리 중반부에 들어서자 미국은 전차부대와 보병들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신형 전차인 M4 셔먼은 연합국의 전차병력을 크게 증강시켰다. 그러나 시디 보우 지드 전투(Battle of Sidi Bou Zid)와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 독일군의 봄바람 작전이 개시되자 미군은 180여대에 달하는 전차 손실과 함께 1만명 가까이 되는 사상자를 낳았다. 한번은 독일군 제10기갑사단 제501중전차대대 소속 6대의 티거 전차가 미군 제1기갑사단 소속의 셔먼, 스튜어트 전차 20대를 상대로 완승을 거둔다. 미군은 티거의 어마어마한 위력을 경험하고 종전까지 티거 공포에 사로잡힌다. 여기엔 당시 미군 2군단장인 로이드 프레덴달(Lloyd Fredendall)의 졸렬한 지휘도 한몫했다. 결국 프레덴달은 군단장 직에서 해임되고 패튼이 부임한다.
일단은 연합국을 상대로 한 전술적 승리로 추축국은 한숨 돌리는듯 했다. 하지만 미군은 막강한 공군력과 포병지원으로 탈라(Thala)에서 반격을 개시하였고 결과적으로 다시 시디부지드 지역을 탈환 하는데 성공한다. 여담으로 롬멜은 후일 노획했던 미군의 장비를 보고 극찬하였고, 더욱이 미군이 상당히 빠른시간만에 현대적 기동전에 대한 이해 및 적용 한 것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물론 패튼 장군의 업적.

5. 롬멜의 철수 후의 북아프리카 전선



5.1. 사막의 여우의 부재


독일의 아프리카 집단군과 이탈리아의 군대를 모아 마지막 공격인 카프리 공세가 실패로 끝나게 되면서 아프리카 집단군을 이끌던 롬멜은 더 이상 아프리카 전선에 가망이 없는 걸 깨닫고 우크라이나에 있던 히틀러에게 가 철수를 설득하려고 한다. 하지만 '승리 아니면 자살' 이라는 구호를 강요하던 히틀러에게는 이런 일은 허락 될 수 없었고 롬멜을 강제로 병가처리하고[4] 아르님에게 아프리카 집단군의 지휘권이 넘어가게된다.

5.2. 추축국의 상황


10척의 유조선 가운데 1척만 남은 상황에서 전차[5]를 기동할 연료[6]마저 부족했고 전차마저 부족했다. 수적으로도 연합국이 배로 많은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동맹국인 이탈리아마저 불안한 상황이었고 연이은 패배로 사기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거기에다 롬멜이 없었다.'''[7]
아직도 독일군 5개 사단과 이탈리아 9개 사단이 남아있긴 했지만 물자가 부족했고 결정적으로 영국군과 미군을 막아낼 충분한 병력이 되지 못했다. 영국 군함들은 계속해서 보급함들을 침몰시켰고 수송기 또한 계속해서 격추되고 있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레트 방어선이 전술적으로 뛰어났고 연합국[9]에 비해 추축국은 서로 연락이 잘 통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게다가 횃불 작전으로 비시 프랑스가 영미 연합국에게 서아프리카를 탈탈 털려버리고 비시 프랑스가 정신 없는 틈을 틈타 독일-이탈리아는 비시 프랑스령 튀니지 통감인 장 마리 에스테바에게 협력을 강요해 튀니지는 이탈리아가 사실상 점령하게 된다.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추축국 내부에서도 갈등이 많았다.

5.3. 전개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마레트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작전은 제15 기갑사단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10군단이 롬멜이 우려했던대로 측면으로 우회해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결국 추축국은 북서쪽으로 60km를 후퇴하고 가베스 부근의 와디 아카리트에 새 방어선을 만들게 된다.
미 2군단도 협곡을 통해 추축국 방어선 후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미군이 이기는 상황이었지만 지형[10] 때문에 미군은 독일군을 추적하는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영군 8군과 미국 2군단의 계속된 공격으로 방어선은 다시 붕괴되고 추축국은 다시 복쪽으로 후퇴하게 된다.[11]
독일의 후퇴 이후 영국군과 미군의 전선이 연결되면서 다시 소모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
연합국 공군은 추축국의 공수작전을 차단하는데 집중했고 영국 군함들 역시 보급선과 탈출로 차단에 집중하고 있었다.[12] 이 때부터 아프리카 집단군의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미 2군단과 영국 1군과 8군이 포위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13]
남쪽부터 시작된 연합국의 공세에 독일군은 다른 방어선의 대전차포와 예비 전차 전력을 돌려 막아낸다. 하지만 이로 인해 중앙의 전차병력에 구멍이 생겼고 이 때문에 미 2군단과 5군단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방어거점 대부분을 점렴당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 공세인 엔피다빌 방면의 연합국의 공격은 추축국의 강력한 방어선과 험난한 지형 때문에 당시의 병력으로는 성공이 불가능했다. 알렉산더는 몽고메리에게 수비임무를 밑기고는 병력을 증강해 주변으로 집결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은 연합국의 병력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5월 5일 연합국의 모든 준비는 끝난 상황이었다. 결국 대대적인 포격 지원을 받은 연합국의 보병은 추축국 방어선을 돌파했고 6, 7기갑사단이 밀고 들어가게 된다.
5월 7일, 영국 전차가 튀니스로 입성하게 되고 북쪽의 비제르테는 2군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결국 6일 후 230,000명의 추축국[14]이 연합국에 투항하면서 북아프리카의 추축국 세력은 개발살나버리면서 아프리카 전역은 막을 내린다. 폰 아르님 장군은 롬멜 장군이 인계해 준, 노획한 영국 육군의 트럭을 개조한 지휘차량 맘모스를 소각해 버리고 항복했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영화 작전명 발키리 초반부에 이 전투가 등장한다.
스팀 게임 Tank Warfare:Tunisia 1943 이 드물게 이 전역을 상세하게 다룬다. 미군이 처음에 개고생했던 카세린 협곡 캠페인을 기본으로, 처칠 전차가 제대로 활약한 롱스탑 언덕 전투(Longstop hill), 전술적으로 뛰어나서 참호전 양상의 소모전이 일어났던 마레트 방어선(Operation Pugilist), 그리고 엘 게타르(El Guettar)에서의 미군과 추축국의 전투를 다루고 있다. 제작사는 Graviteam Tactics 시리즈로 유명한 Graviteam. 전차의 관통, 물리엔진 면에선 상당히 뛰어나나 보병전이 약간 빈약한 것이 흠. 여담으로, 미군 캠페인을 하다보면 사막에서의 88미리를 장비한 티거 전차의 무서움과, 셔먼 전차대신 찐따스러운 망리와 눈물나는 사양의 M3 GMC로 독일 기갑부대를 맞상대 해야하는 답답함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1] 예를 들면 트여있는 환경때문에 보병이나 전차들은 노출이 쉬웠고 독일의 88mm가 대전차포로 자주 사용되거나 보병의 엄페물이 거의 없어 전차가 더욱더 중요해졌다.[2] 일례로 이탈리아의 주력 전차였던 중형전차들인 M11/39M13/40들은 항목을 확인하면 알겠지만 당시 같은 추축군이었던 독일군과 적군인 연합국인 영연방군 측이 "정어리 통조림" 이라 돌려깔 정도로 안습한 전차였다.[3] 이 전투는 티거의 제대로된 활약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전투이기도 하며, 여기 실려 온 티거들 중에 501 중전차대대의 1중대 3소대 1호차가 있었다. 영국군에게 온전하게 노획되어 지금 유일하게 굴러가는 그 티거다.[4] 하지만 아프리카에 롬멜이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롬멜은 민간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5]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지형이 사막인지라 전차는 전투의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6] 롬멜은 부족한 연료를 최대로 활용했지만 아르님이 그런다고 장담하지는 못한다.[7] 이는 군사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8] 당시 이탈리아 해군의 수송전단 70%정도가 이 북아프리카 전선을 보급하기 위해서 손실되었다. 이탈리아 해군은 몸을 던져가며 보급을 하려고 했지만 피해는 증폭되었다.[9] 공군과 육군이 협조가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10] 이 때문에 가베스 주변의 고지의 이탈리아군을 소탕해는데도 몇 주가 소모되었다.[11] 이 와중에도 이탈리아 해병은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2] 이 때문에 독일군의 상황은 더 악화되어간다. [13] 10 전차사단의 지원을 받은 괴링 사단이 8km가량 침투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다시 방어선으로 돌아왔어야 했다.[14] 이 병력들은 시칠리아 방어전을 담당할 군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