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S. 패튼

 


'''조지 스미스 패튼 주니어'''
'''George Smith Patton Jr.'''

'''출생'''
1885년 11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게이브리얼
'''사망'''
1945년 12월 21일 (향년 60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하이델베르크
'''국적'''
[image] 미국
'''신체'''
187cm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09 ~ 1945
'''최종 계급'''
대장
'''주요 참전'''
멕시코 혁명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서훈 내역'''
수훈 십자장
은성 훈장
훈공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훈장 내역 정리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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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제15기병연대
제8기병연대
제13기병연대
'''지휘'''
제304전차여단
제5기병연대
제2기갑사단
제2기갑여단
제1기갑군단
제2군단
제7군
제3군
제15군
'''자녀'''
조지 패튼 4세
1923년 12월 24일 ~ 2004년 6월 27일 외 2명
'''친척'''
존 K. 워터스
1906년 12월 20일 ~ 1989년 1월 9일

1. 개요
2. 일생
2.1. 출생과 성장
2.2. 멕시코 내전과 1차 대전 활약
2.3. 전간기의 행적
2.4. 2차 대전 활약
2.4.1. 아프리카 전선
2.4.2. 이탈리아 전선
2.4.3. 서부전선
2.5. 전쟁 이후의 행적과 최후
3. 연설
4. 평가
5. 기타
6. 관련 인물들
7. 어록
8.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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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미합중국 육군장군. 미군 최초의 전차 부대 지휘관이자, 30년간 미군 주력 전차의 자리를 차지했던 M46/47/48/60 패튼 시리즈의 네이밍 모델로서도 유명하다.
아래에 언급되는 그의 언행을 보면 해군의 윌리엄 홀시나 공군의 커티스 르메이의 육군 버전이라고 하면 딱 맞다.

2. 일생



2.1. 출생과 성장


'''"생도들 차렷! 당황하지 마라. 지진은 곧 끝난다."'''

사관생도 시절, 지진이 일어났을 때 당황해서 이리뛰고 저리뛰는 생도들 앞에 제복을 제대로 차려입고 나타나서 한 말

패튼은 남부의 부유한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로버트 E. 리스톤월 잭슨 장군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랐고 남군 기병대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친 '회색 유령' 존 싱글톤 모스비와 친하게 지냈다. 미국육군사관학교 1909년 졸업생이며 동기생으로 제이컵 데버스, 로버트 에이첼버거, 윌리엄 후드 심슨, 존 클리퍼드 하지스 리, 델로스 에몬스와 비록 중퇴하기는 했지만 코트니 하지스 등이 있는데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상급부대 지휘관으로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패튼 하면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활화산 같은 성격의 사고뭉치 지휘관' 하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는데, 오죽하면 별명이 '''싸움닭'''. 여우라 불리는 에르빈 롬멜과 비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외에도 '''사고뭉치''' 같은게 별명 중에서 그나마 가장 좋게 불리는 별명이다.
어쨌든 성깔 한번 지랄맞았기 때문에 1915년 졸업생인 오마 브래들리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보다 늦게 진급했으며, 후배인 이 2명은 자신들의 선배가 사고치고 다니는 걸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졸업성적은 103명 중 46등이었으며 기병 병과로 임관했다.

2.2. 멕시코 내전과 1차 대전 활약


'''"진짜 산적은 우리 부대에 있었군."'''

존 조지프 '블랙 잭' 퍼싱 장군. 패튼이 멕시코 내전에서 산적(Bandito)두목(반란군 장군)을 본네트에 매단 채 복귀한 걸 보고.

육군 소위 임관 직후 터진 멕시코 내전에서 토벌군 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1] 육군 준장의 부관으로 참전, 반란군 지휘소를 기습하여 장군 하나를 권총으로 사살한 뒤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복귀하는 기행을 벌여 일약 유명해졌다.
그가 말하길 처음으로 실전에 참가했을 때 긴장과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어 죽기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그를 데리러 온 기라성 같은 조상님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자 죽어서 그들을 대하는 게 더 무서워져 용기를 내어 "또 한 명의 패튼이 전사할 시간이다!"라고 외치며 돌격했고, 패튼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몸소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사기가 올라 함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역시 원정군 사령관이 된 퍼싱 장군의 발탁으로 미군 최초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된다. 이후 그는 철저한 기동전의 신봉자가 된다.[2]

2.3. 전간기의 행적


그러나 1차 대전 종전 후 그를 늘 높이 평가해주던 퍼싱 장군이 퇴역한 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군내에서는 버린 자식 취급받았다. 불같은 성격에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안하무인적 태도는 주변사람들과의 마찰을 항상 불러일으켰으며,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도 포기한 상태라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전쟁광이란 타고난 성격이 전간기의 군축 분위기와는 상극인지라 별 수 없었다. 거기에 여러차례 음주사고에 불륜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아돌프 히틀러처럼 단 것에 광분하여 섭식장애 증세까지 보여 건강까지 망치며 상층부의 골치를 썩였다.
게다가 사생활에 있어서도 취미승마요트 등 돈이 많이 드는 귀족 취향의 것들을 즐겼는데, 세계 대공황 시기에도 그 짓을 하고 다녔다. 그쯤 되자 상관이든 동료들이든 부하들이든 누구나 그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얼마나 승마를 좋아했느냐 하면, 복장 규정을 무시하고 '''전투복 하의 대신에 기병 병과을 타는 인원 이외엔 착용이 금지되어 있는 육군 기병용 승마 바지를 입고, 손에도 승마용 채찍을 들고 다녔을 정도'''였다.
1931년 일명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 당시 상당한 오점을 남겼다. 세계 대공황시기 연금 지급을 요구하는 제대군인 시위대에 전차와 보병을 '''착검돌격'''을 시켜서 무려 사상자 100여명이 나온 것(...).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대선에서 참패했고, 더글러스 맥아더는 예편 후에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떠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년까지도 패튼은 이 사건에 관해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 당시 제대군인 시위대 중에는 1차대전 때 전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패튼을 구해준 조 안젤로(Joe Angelo)라는 장병도 있었다. 패튼은 이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2.4. 2차 대전 활약



2.4.1. 아프리카 전선


"이기지 못하면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첫 번째 전투를 벌이기 직전에 부하들에게 한 말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2기갑사단장으로 아프리카 전선으로 향한다. 카세린 계곡 전투에서 미군이 독일-이탈리아 추축군에게 민병대 같은 모습을 보이며 치욕적인 대패를 당해 영국군에게 조롱을 받게되자 열불이 뻗칠대로 뻗친 미군 지휘부는 평시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작자지만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광전사인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2군단의 지휘를 맡긴다. 패튼은 오합지졸들을 무지하게 갈궈서 카세린의 치욕에서 깨어나게 해준다. 그는 부하들을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변화시켜 전사로서 바꿔내는데 성공하여 아프리카 군단에 대한 반격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들을 다수 이뤄낸다. 그러나 그는 원하던 롬멜과의 대결이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3]

2.4.2. 이탈리아 전선


이후 이탈리아 전선의 시칠리아 상륙전에 미 육군 제7군 사령관으로 참가한다. 몽고메리 장군의 농간으로 조공으로 돌려지나, 오히려 그의 지휘부대가 영국군을 따돌리고 거점도시 메시나와 팔레르모를 점령하는 활약을 펼쳐 주객이 전도되게 만든다. 이후 몽고메리에게 라이벌로 찍힌다. 이 시기 독일군 내에도 그의 명성이 퍼졌으며, 특히 오합지졸인줄 알았던 미군을 영국군 이상의 강적으로 변화시킨데다 자기들만큼이나 기갑전, 속도전에 능한 그에 대해 필요 이상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 덕분에 연합군 첩보부는 패튼이 지휘하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가짜 부대를 조직하고 빈 상자를 대량으로 배치해서 보급품으로 위장하는 등 공작을 펼쳐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까지 독일 정보부를 속여 먹는다. 실제로 노르망디 상륙 당일에도 ''영국 내 패튼 부대가 움직이지 않았으니 노르망디는 페이크다!"라고 독일군이 결론내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술하는 야전병원에서 부하를 구타하는 등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보직해임되어, 한직으로 쫓겨난다.

2.4.3. 서부전선


"그럼 우리가 저 다리(레마겐의 철교)를 폭파해버리기라도 해야겠군."

― 레마겐의 철교를 주워먹은 후, 라인 강 도하작전을 망친다고 영국군이 징징대자 한 말

이후 유럽 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후속 부대인 육군 제3군을 이끌고 참가해, '코브라 작전'을 발동시켜 눈앞의 몽고메리 부대에 정신이 팔려 있던 독일군의 뒤통수를 박살내 패주하게 만들고 중부 프랑스를 쾌진격하며 유럽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친다. 영화에도 잘 나와있듯이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폭주기관차마냥 가는 곳마다 독일군을 개발살내면서 질주했는데[4], 보급부대가 못따라가서 아이젠하워 사령관 명의로 특별수송대까지 조직했는데도 부족했을 정도다. 패튼은''' '우리가 빠른 게 아니라 너네가 느린 것'이라고 취급했다.'''
이것은 패튼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고속 기동전의 신봉자여서인데,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갑부대와 정찰대는 적의 어려운 저항에 마주치면 그대로 우회로를 찾아 원래 목표로 계속 달려나가고 뒤따라오는 보병포병이 아까의 그 적군과 싸운다. 이런 식으로 틈새를 찾아 계속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적군은 더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패튼의 기갑부대가 자기네 영역으로 들어와 전선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다만 후속부대들은 패튼이 남겨놓고 우회해버린 적군들을 하나하나 쳐부숴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보급선이 연합군의 역량 밖으로 늘어나는 문제도 있었다. 결국에는 보급 문제로 1944년 여름에 진격을 멈추게 된다.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했던 게 다름아닌 마켓 가든 작전.
한편 패튼은 야전군사령관이면서도 끊임없이 전선시찰을 나가고[5], 전선 근처의 동태를 살피는 한편 올라오는 정보보고는 꼼꼼하게 살폈다. 닥돌도 포지션과 타이밍 싸움이기 때문에 정보 분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그저 적이 보인다고 무조건 닥돌하는 닥돌 바보는 아니었는데 오히려 전선의 틈새, 즉 적이 없는 헛점을 찾기 위해서 부지런히 전선시찰을 한 것에 가깝다. 일례로 밑에 설명될 아르덴 공세 때도 오히려 브래들리 장군보다 독일군의 이상징후를 먼저 파악하고 어느 정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두었다.
그러나 그 독불장군 같은 성품 덕분에 여전히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바닥을 달렸는데, 특히 영국군 지휘관이자 롬멜 장군을 몰아낸 버나드 로 몽고메리 영국 육군 원수와는 고양이 사이였다고 한다. 안 그래도 몽고메리도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미군 장성들에게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기에, 어찌 보면 동족 혐오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작전에서 몽고메리가 "패튼이 어느 독일군 장교의 군대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듣고 "내가 그 독일놈 모가지를 뽑아서 몽고메리 X구멍에 쑤셔버릴 테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이런 시나리오가 자주 펼쳐졌다고 한다.

1.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2. 전략을 토의한다.

3. 패튼과 몽고메리가 서로 내가 옳네 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4. 곧 두 사람끼리 언성을 높이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버로우.

5. 회의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 원수가 뒷머리를 부여잡는다.

6. 브래들리 장군이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원수를 달래러 간다.

1. 다시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이하 반복.'''


1944년 8월 31일 보급을 위해 프랑스 메츠에서 기동을 멈추었고 그 사이 요새를 강화한 메츠의 독일군과 10~11월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인 끝에 11월 23일 메츠를 점령했다.[6][7]
1944년 12월 독일군의 아르덴 공세를 맞이해서 반격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단 48시간 만에 서쪽으로 진격 중이던 미 제3군예하 3개 사단으로 구성단 1개 군단을 뽑아내어 북쪽으로 이동시키는 초월적인 기동을 보였다. 즉 독일의 공세를 예측하고 반격계획을 미리 짜두었다는 의미. 패튼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순한 닥돌 바보가 아님을 보여주는 일화. 반면 브래들리와 그 참모들은 독일의 반격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세워두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독일 국내로 진격, 연합군 최초로 라인강을 자력으로 건너버린다. 당시 몽고메리와 아이젠하워간에 라인강 도하는 영국군이 먼저 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지만, 미군이 먼저 그 유명한 '레마겐의 철교'인 루덴도르프 교를 장악해버렸고, 미군이 몰려오자 독일 육군 공병들이 뒤늦게 폭파했는데 폭약량을 잘못 계산해서 부서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지만 먼저 건넌 후에 벌어진 일이라 상대적으로 묻혔어도 독자적으로 도강작전을 진행해서 기습적으로 라인강 건너편을 제압한 후, 부교까지 설치한 것이라 전술적 의미에서는 더 가치가 높다. 이건 라인강에 오줌 싸면서 인증샷도 찍었다.[8] 대대적으로 작전 계획을 짠 뒤 한참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폭격, 포격을 날리며 부산떨던 몽고메리는 멍때려야 했다.[9] 전쟁 후 대선주자 자리를 노리던 아이젠하워는 미군 희생이 늘까봐 노심초사했고... 1945년 4월 14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image]
대장 진급 후의 사진. 철모에 달린 계급장을 보면 대장용 계급장을 새로 붙이지 않고 기존의 중장 계급장 위에 별 하나를 덧붙여 형태로 만들었다

2.5. 전쟁 이후의 행적과 최후


유럽 전선에서 이긴 패튼은 이제 중국으로 보내져서 이번엔 일본군과 싸울 차례였지만 일본이 항복하면서 중국행은 취소되었고 독일에 남게 되었다. 이후 그는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처신이 워낙 무뎌 결국 힘든 시기를 보낸 듯하다.
나치당을 미국 민주-공화당 정도로 비유하고 나치 인사들을 관대히 처리해 물의를 일으켰고, 오히려 연합국인 공산주의 러시아인을 매우 싫어했다. 전직 나치 당원을 정부 요직에 임명한 것에 대해서 비난이 빗발치자 "독일 공무원의 태반이 나치 당원이다. 그러면 정부 일을 까막눈들한테 맡기란 말이냐?"고 항변했다. 베를린에 입성해서는 "우린 괜찮은 민족 하나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러시아의 야만인들로 채워놓았다."고 투덜거렸다는 일화가 있으며 독일이 항복한 후 베를린에서 벌어진 연합군 퍼레이드에 참석했을때,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가 패튼에게 IS-3같은 소련 중(重)전차의 강력함과 전차포의 긴 사정거리를 자랑하자, "제 부하가 그렇게 먼 거리에서 적을 쏘는 비겁한 짓을 한다면, 제가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해 주코프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서 "원수, 원수의 그 배때지를 당신들이 자랑하는 사거리 밖에서 내가 쏘아서 뚫어버릴테니 주둥이 닥치시고 우리의 감시망에 들어오지마시오(....)"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이 진주한 곳에 소련군을 피해 항복해온 국방군 2개의 사단과 친위대 1개의 사단을 해체하지 않고, 훈장을 받은 독일 장교들이란 장교들은 불러다가 같이 밥까지 먹자 빡친 소련군이 연락장교를 보내 항의를 했다고 한다.[10] 그 연락장교의 항의에 빡돌아서 "니놈의 궁둥이를 내가 직접차서 이 군영에서 쫓아내겠다"고 난리쳤고 소련군 연락장교는 서둘러 패튼 군영을 빠져나왔다고 한다. 더 막장도 있었는데 앞서 소개한 독일 패잔병들 문제로 욕먹은 소련군이 아이젠하워에게 불평하자 아이젠하워는 브래들리에게 좀 타일러서 독일 패잔병들을 해체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온 브래들리에게 패튼이 한 말이...'''"난 이 독일 나치놈들이 좋네! 그들은 진정한 전사란 말이야. 이놈들과 함께 아이젠하워한테 찡찡거리는 소련놈들을 부서버리겠어! 이제 우리의 적은 소련이란 말씀이야! "'''라고 말했고 브래들리는 도청을 당하고 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비슷한 시간에 지구 반대편에 있었던 맥아더 원수는 '''그때까지의 모든 일본 최고 지도자가 그랬듯이 천황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자신이 다 해먹었다'''. 한마디로 정치적 수완은 영 시원찮다는 증거.[11]
그러다 결국 라인강 서안 슈파이어로 사냥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그가 탄 1939년형 캐딜락이 트럭에 치이면서 중상을 입고 만다. 사고가 난 날은 미국으로 복귀하기 하루 전인 12월 9일. 아우토반을 달리다가 패튼이 동승자(호바트 게이 대령)에게 불에 탄 차량을 가리켰고 운전수도 같이 보면서 전방 부주의로 2.5톤 트럭에 부딪혔다.[12] 운전수와 동승자는 찰과상만 입었지만 패튼은 뒤로 튕겨나가[13] 머리가 뒷유리창과 부딪힌 탓에 목뼈가 부러졌고 두개골이 갈라져 뼈가 보였다 한다.[14] 12일 뒤 하이델베르크 군병원에서 수면중에 향년 6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만다. 사인은 색전증. 전쟁이 끝난지 고작 7달 만이었다. 사망후 그의 유언대로 룩셈부르크에있는 벌지전투에서 전사한 제3군 미군묘지에 묻혔다. 어떻게 생각하면 평안한 것을 싫어하고 평안하지 않은 것, 즉 전쟁을 미친듯이 좋아했고 그 전쟁에서 미친듯이 싸워 승리했던 자의 최후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워낙에 유별난 삶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죽음에 관해 일종의 음모론 같은 게 주장되기도 했고 암살설을 바탕으로 한 허접스런 B급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78년작 Brass Target(한국판 제목: 암호명 S 비밀지령).[15] 이후 패튼이 살아서 6.25에도 참전했다면 남북통일이 일찍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우스개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16]
패튼이 죽고 그의 유품을 치울 때 패튼이 애지중지하던 불테리어 수컷 윌리가 슬퍼하며 그의 유품 곁에 드러누워 먹지도 않고 오랫동안 있었는데 "사람에게는 욕먹어도 기르던 개에게는 자상했다."라는 비웃음도 나왔다.

3. 연설


'''Then there's one thing you men will be able to say when this war is over and you get back home. Thirty years from now when you're sitting by your fireside with your grandson on your knee and he asks,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orld War Two?" You won't have to cough and say, "Well, your granddaddy shoveled shit in Louisiana." No sir, you can look him straight in the eye and say "Son, your granddaddy rode with the great Third Army and 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

'''이제 제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이것 한가지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년 뒤, 난롯가에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가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뭐 했어요?"라고 물어보면 헛기침이나 하면서 "응, 할애비는 루이지애나에서 삽으로 똥이나 펐단다."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지, 제군은 손자를 당당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해주어라! "아가, 네 할애비는 위대한 3군, 그리고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자식과 함께 용맹하게 진군했단다!"'''

1944년 유럽침공이 시작되기 직전에 미제3군 장병들에게 한 연설이다.
초반에는 차분한 논조로 함께 싸우게 되어 영광이다 같은 멘트를 하더니 갑자기 이렇게 급발진해버렸다고 한다. 워낙 인상적이었는지 패튼과 함께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은 연설의 다른 부분은 다 잊었어도 패튼이 스스로를 빌어먹을 개자식이라고 지칭한 대목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저 불쌍한 거지새끼들한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냥 쏴 죽이지 않을 것이다. 산채로 내장을 빼서 우리 탱크가 지나가는 길에 기름칠을 할 것이다.'''


4. 평가


호평과 악평이 교차하지만, 어쨌든 그가 명장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미국스러운 장군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호사가는 시대를 잘못 택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차라리 19세기 프로이센 기병 장군이었다면 더욱 좋았을 거라고.
미 육군은 M4의 후속 주력 전차 M46과, 개량형인 M47, M48, 에 그의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공로를 기렸다.[17]
워낙 유별난 지라 히틀러조차 그가 참전하기 전에 성격 등을 알고 있었으며 "카우보이 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5. 기타


그 더러운 성질머리의 소유자답게 부하들로부터는 매우 두터운 인망(?)을 얻었는데, 2차 세계 대전 회고록을 보면 타 부대에서는 존경을, 직속 부하들에게는 혐오감을 받은 상관. "꼴도 보기 싫은 개자식이지만 어쨌든 전쟁에서는 늘 승리를 거두게 한다"는 게 부하들의 총평.
그는 전투를 피하는[18] 부하들에게는 인정사정없이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면서 '''내 부대에 너 같은 겁쟁이는 필요 없다! 꺼져 버려!''' 라고 하면서 폭언을 퍼부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용감하게 싸워서 큰 전공을 올린 부하들에게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해줬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다혈질이면서 용기와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 취향의 인물이었던 셈. 겁쟁이를 경멸하고 용감한 병사들을 아낌없이 칭찬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부하들을 쉬지않고 독려한 것도 그가 기갑부대를 현대판 기병대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튼의 성향은 훗날 미디어에도 반영되어, 조지 C. 스콧 주연의 전기 영화인 <패튼> (국내명: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는 독일군 정보장교인 슈타이거 소령이 자신의 상관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에게 패튼을 평가하면서 "그는 전쟁 역사가이며, 현대에 환생한 기사입니다"라 말했다.
특히 그는 전투 중에 부상당한 부하들이 입원한 야전병원에 직접 병문안을 가서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 다른 부대의 병사들까지 일일이 살펴보면서 격려했다고 한다. '''군 사령관이 직접 말이다.''' 군의관헌병이야 의전으로 죽어나겠지만, 자연스럽게 그와 비슷한 성향의 부하들은 이 괴짜 사령관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고, 미 3군은 똘똘 뭉쳐 독일군을 상대로 용명을 떨쳤다. 또한 아이젠하워와 더불어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차별하지 않았던[19], 당시 미군에서 몇 안되는 인종 평등 면모를 보였던 장군이었다. '''그것도 남부 상류 집안 출신인데.''' 의외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사실 당대에 인종평등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으로 유명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그냥 철저한 결과지상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20]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은 끝끝내 문제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바로 패튼의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부상병 구타 사건'''이었다.[21] 시칠리아 공격이 한창이던 1943년 8월 3일, 제15임시병원을 방문하여 병문안을 위해 사병들의 침대를 일일이 돌던 패튼의 눈에 붕대도 감지 않았고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몰골의 병사가 침상에 버젓이 누워있던 장면이 들어온 것이다. 계속 부상당한 병사들에 대한 측은감을 표시하던 패튼은 그 병사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문제의 부상병은 제1사단 소속으로, 전쟁 전에는 카펫 전문가로 일하던 인디애나 청년이었는데 패튼에게 전쟁공포증을 호소하며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패튼은 이걸 겁쟁이의 비겁한 변명으로 간주했고 격노하여 즉각 장갑 낀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친 다음에 그를 천막에서 끌어내서 등을 걷어차고''' 외쳤다.

'''"이 겁쟁이 새끼야, 넌 다시 전선으로 보내버릴 줄 알아!"'''

1차 대전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쟁공포증이나 PTSD란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었다. 지휘관들은 그런 증세를 보이는 이들을 그저 겁쟁이로 취급할 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한 뒤로 군의관들은 거듭된 전투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지고 기계처럼 변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경악했으며, 사방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로 미쳐버린 군인들이 속출하면서 비로소 진지하게 다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전장공포는 1차 세계 대전 때부터 연합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개전전에 대규모 육군을 보유하지 않아 비숙련 징집병의 비율이 높았던 영국군이 이 문제에 대해 민감했다. 그에 비해 미군은 당시의 영국군과 같은 처지임에도 상대적으로 참전 기간이 짧아 직접적으로 PTSD 문제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다만 동맹국인 영국의 전훈을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엔 '''영국군이 겁쟁이라서 저런 놈들이 많이 나온다'''고 떠벌였을 정도. 그러나 2차 세계 대전 시점이 되면 패튼 같은 행동을 드러내놓고 하는 것은 금기시될 정도까지 인식이 바뀌긴 했다. 그리고 전쟁공포증을 패튼 본인이 인정하냐 마느냐 이전에, 장군병사를 '''폭행'''하는 것은 당시 미국 법에서도 '''군법회의에 즉각 회부되어야 할 중죄'''였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8월 10일에 제93 임시병원을 방문한 패튼은 또 다시 (겉보기에는) 멀쩡한 병사가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병사에게 '''권총을 겨누고(!)''' 위협하면서 '''겁쟁이는 쏴 죽여야 한다'''고 난동을 부렸으며, 거기다 군의관까지 호출해서 "저 놈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내가 직접 영창에 처넣어 주겠어!"라고 소리친 후 곧장 부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전쟁공포증 같은 것은 다 유대인 놈들이 지어낸 헛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기까지 했다.
이후 그 사실이 곧 연합군 총사령부로 전해지면서 아이젠하워 원수는 패튼의 행동에 분노하였으나, 신뢰하는 부하이자 아끼던 육사 선배인 패튼의 구명을 위해 모든 종군기자들에게 정보 관제를 신신당부했고 한편으로는 패튼에게도 그 병사에게 직접 사과할 것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패튼은 메시나 점령의 기쁨[22]을 제쳐 두고 문제의 병사들은 물론, 임시병원의 의료진 전원과 제1보병사단 전체에게 사과해야 했다. 당연히 제1보병사단 병사들에게 패튼은 철천지 원수같은 존재였지만, 그래도 병의 신분으로서 상관에게 강력히 항의하거나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과를 조용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기자들도 그저 실수려니... 하고서 순순히 보도 자제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비슷한 사건이 또 벌어진다.
이번의 피해자는 시칠리아 전투의 질척질척한 참호 속에서 참호족염을 얻어 입원 중인 병사였다. 그 역시 당장 겉보기에는 크게 아파 보이지 않는 상태로 입원을 하고 있었기에 어김없이(...) 패튼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런데 이 병사도 장난이 아닌 게, 어지간히도 분노했던지 자신의 앞을 다시 지나가던 패튼을 향해 "저는 1주일 넘게 전투화를 신은 채로 흙탕물로 가득찬 참호 속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장군님."이라며 '''그를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말대꾸'''를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이번에는 분명히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은 패튼이 사과했지만 이미 그 소식은 미국 전역에 퍼져 공론화된 상황이었고, 거기에 기자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이전에는 함구하고 있었던 폭행 사건들까지 몽땅 폭로해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여론의 반응은 '''"이 미친 놈아!"'''였고, 전국에서 패튼을 맹렬히 비난하는 기사가 쓰여지고 그를 퇴역시키라는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상술된 PTSD 관련 건은 당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라 변명의 여지라도 있었지만 참호족염은 패튼 자신을 포함해서 수많은 1차 대전 참전 용사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참호족염으로 고생했거나 발가락을 잘라야 했던 전상자들도 많았던지라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결국 '''또 다시''' 아이젠하워가 나서서 간신히 뒷수습을 했지만 "이제 조지가 또 이런 만행을 저지른다면 '''난 그를 자를 수밖에 없네.''' 나도 언제까지나 뒤치다꺼리를 해 줄 수는 없단 말이야."라며 부관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 추가로 이 사건때 군경력상으론 패튼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고 아직 살아 있었던 퍼싱 원수도 공개적으로 패튼을 비난하여 둘이 이후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었다.
그 후에도 이탈리아 시칠리아 상륙작전에서 또(...) 한 번 아이젠하워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는데, 작전 당시에 예정되었던 두 번째 야간 강하 작전이 해안의 대공포 사수와 해상의 지원 함대에게 제대로 통보가 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팀킬이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원래 해당 공수작전에 따르면 2,300명이 강하할 예정이었는데, 이 팀킬로 전사한 사람만 400명, 중경상자까지 포함하면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강하 작전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대공 사격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패튼이 강하 작전에 참여할 82공수사단과 수송기 조종사들에 통보하기를 "만약 지상이나 함정이 포격을 하거든 자신들의 위치와 방향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며, 절대 귀관들을 격추시키려는 것이 아님."이라고 하는 바람에 어느 정도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하여 "책임 소재를 파악하고 귀관이 직접 명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귀관의 목이 날아갈 것"이라는 투의 전보를 보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미군의 삽질에는 아이젠하워의 책임도 큰지라 유야무야 넘어갔다.
사실 보직 해임 시기 아이젠하워는 그를 미국 본토로 전출시키려 했으나 조지 마셜 참모총장이 이를 반대, 결국 1년 가까이를 휘하 부대 하나 없는 장군으로 허송세월 보내야 했다. 그 사이 자기 부관이었던 브래들리는 중장 진급하여 나중에는 상관으로 모시는 사태마저 벌어진다(...).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근대 5종 경기 선수로 참가해 300m 자유형 수영에서는 37명 중 6위를, 에페 펜싱에서는 29명 중 3위를, 크로스컨트리 장애물 경마에서는 퍼포먼스는 완벽했으나 시간이 약간 뒤쳐져서 3위를, 4킬로 크로스컨트리 경주에서는 골을 45m 남겨두고 걸어들어올 정도로 체력이 소진돼 15명 중 3위를 차지했다. 권총 사격에서는 뛰어난 사격실력으로 소문났음에도 불구하고 32명중 20위를 차지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선수들이 사격용 권총으로 .22 구경을 사용할 때 혼자서 군의 제식 구경인 .38 구경을 사용해서 발생한 문제였다. 사격을 할수록 먼젓번에 맞은 구멍에 겹쳐 맞으면서 사격지에 탄착 구멍이 확대되다보니, 나중에 쏜 탄이 벌어진 구멍을 흔적없이 통과해버린 것이다. 심판은 표적지에서 탄착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해서 완전히 빗나갔다고 판정했다.
그 외에는 개인 취향답게 검술에도 꽤나 능통해서 세이버 검술서를 저술하였다. 검술 스타일이 본인의 성격을 반영해서인지 베기나 흘리기 같은 기술 버리고 오직 직선적인 찌르기만 존재한다. 그가 디자인한 세이버도 거의 찌르기 위주로 만들어진 직도 세이버이다. 이미 올림픽 이후 유럽 여행을 하다가 프랑스 기병학교의 검술 교관과 교류를 가졌고, 1913년에는 아예 군의 허락을 받아 프랑스에 가서 검술을 배웠다. 그가 디자인한 세이버가 미군 기병대의 제식 세이버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 세이버는 그래서 일명 '패튼 세이버'로도 불리며, 세계 최후의 대량생산된 기병도이다. 중세에 태어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인물.
상술된 각종 기행 때문에 꽤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상술한 승마 바지 및 승마 부츠, 별이 이상하게 배열된 철모와 더불어 그가 차고 다녔던 권총도 유명한 요소다. 권총은 콜트 싱글 액션 아미 리볼버를 차고 다녔는데,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은장 도금에 상아 손잡이가 달린 물건이었다. 거기다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상아 손잡이가 달린 스미스 & 웨슨 M27 리볼버도 같이 차고 다녔다. 그러니까 장군이 서부극에 나오는 무법자같이 전장에서 쌍권총을, 그것도 고급품으로 차고 다녔다는 이야기다(...). 괜히 카우보이 장군이라는 별명이 나온 것이 아니다.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패튼의 동상에도 반영되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닮은 외모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지 패튼은 생전에 환생과 윤회에 대해 말하곤 했는데, 공교롭게도 트럼프는 패튼이 1945년 12월 21일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 약 6개월 후인 1946년 6월 14일에 태어났다
6.25 전쟁 이전에 사망했기에 한국과는 별 인연이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본인은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한국 전쟁에 대한 예측도 한 적이 있다. 패튼이 그리스에 있는 밴 플리트를 찾아간 후에 그에게 "언젠가 극동(한국)에 가서 그 곳 주민들을 위해 이북의 빨갱이들을 때려잡아야 할 거요."라고 말했다고 밴 플리트가 밝혔다. 밴 플리트는 "물론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도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23]

6. 관련 인물들


한국전쟁에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였던 낙동강 전선의 위기를 극복하고, 1.4 후퇴 직후까지 유엔군 주력을 지휘한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제20군단장으로서 그의 부하였다. 패튼만큼이나 저돌적 지휘 스타일로 유명했던 그가 옛 상관과 마찬가지로 교통사고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역사의 우연. 이 후 패튼과 같이 그의 이름도 전차에 붙여졌다.
역시 한국전쟁에서 월튼 워커매튜 B.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을 역임한 제임스 밴 플리트도 1945년에 패튼 휘하에서 제3군단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레마겐 교두보 장악 이후 루르 포위전의 주력으로 활약하여 패튼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크레이튼 에이브럼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패튼의 제3군 예하의 주력 기갑부대 중의 하나인 제4기갑사단 소속 제37전차대대장으로 맹활약했다. 에이브럼스는 그 이름이 후계 주력 전차로 붙어 반세기 가까운 미군 주력 전차 대명사로 불리운다.
그와 붕어빵처럼 외모가 닮은 아들 조지 패튼 4세도 군문에 들어 갔는데 한국전쟁에서는 전차중대장으로, 베트남에서는 11기갑수색연대장으로 싸웠고 나중에는 소장으로 전역한다. 베트남에서 3년동안 싸울 정도로 용맹한 군인이었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온후한 성격이었다. 막내 손자인 벤자민 패튼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기를 써서 발표하기도 했다.

7. 어록


'''죽은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은 멍청하고 잘못된 일이다. 그러기보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살아갔다는 사실을 주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병사의 눈은 예지로 빛나야 하며 완전히 전투에 열광케 하여 왕성한 기백과 공격정신으로 승리의 길로 전진토록 하라.

공격해오는 적 전차에 성난 늑대같이 달려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공포와는 타협하지 말라, 아니 상의조차도 하지 말라.

공격하라, 공격하라, 피로가 극심할 때까지 공격하라. 피로가 극에 도달해서 쓰러졌을 때 바로 그때 다시 공격하라.

휘발유가 있는 한은 어디든 간다.[24]

내 부하들은 벨트를 씹어먹을 수 있지만, 탱크기름이 필요하단 말이다.

두려움은 1분간 참으면, 용기가 된다.

'''나라를 위해 죽지 마라, 적들이 나라를 위해 죽게 만들어라.'''[25]

대담, 대담, 항상 대담.

전쟁에 비하자면 인간이 이룩한 다른 것은 하찮은 것이다. 나는 전쟁이 좋아 견딜수가 없다.

내게는 전쟁보다도 평화가 지옥이다.

나는 하루를 살아도 사자로 살고 싶다.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X끼'''[26]

불쌍한 거지 새끼들

나를 이끌든지 따르든지, 이도저도 아니면 내 길에서 비켜라.

상관에 대한 충의는 흔히들 말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부하에 대한 충의다. 위대한 사람들에게 빈번히 발견되는 특성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며,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남을수 있게 해준 것이다.[27]

신은 내 적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왜냐면 난 그렇지 않을 것이니까.

용기는 1분을 더 버티게 하는 두려움이다.

용기는 잠시 동안 공포를 억누르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저 버러지 놈들의 목을 따기 위해 가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저놈들의 창자를 뜯어서 전차들이 잘 굴러갈 수 있게 윤활유로 쓸 거다.

전쟁은 무질서가 난무하는 곳이다.

항구적인 평화는 쓸데없는 꿈이다.[28]

'''"내 부하들이 저 따위로 쫄보 새끼처럼 싸운다면 내가 직접 내 부하들을 족쳤을 거요."'''[29]


8. 대중매체에서


  • 여러 번 영화화될 뻔 했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부인의 타계 후 1970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명작 패튼 대전차군단이다.
  • 밴드 오브 브라더스 원작에서 얼 헤일 병장(Sgt. Earl Hale)에 관한 일화가 언급이 되는데 중대원 한명이 부상으로 목에 구멍을 내 숨을 쉬기 때문에 넥타이를 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열식에서도 넥타이를 매지 못하고 참가했는데, 패튼이 이걸 보고 욕을 퍼부은 모양(…). 그 병사는 당당히 앞섶을 풀었고, 패튼은 머쓱한 표정으로 지나갔다는 이야기. TV판에는 패튼이 바스토뉴에 고립되어 있던 101공수사단을 구출했다는 자막 해설과 조 토이와 윈터스가 우리 101공수에겐 그딴 도움 전혀 필요없었다고 까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 마피아 2의 주인공 비토 스칼레타가 이탈리아에서 작전을 펼친 후 1달 간의 휴가를 받고, 엠파이어 베이로 돌아와 친구인 조 바바로에게 패튼 장군에게 직접 훈장을 받았다고 말한다.
  • 엠파이어즈 근대사회의 여명의 캠페인 모드에서 사자왕 리처드, 이순신과 함께 3대 미션 주인공으로 나온다. 북아프리카 전선부터 독일 패망까지 주요 전투들을 패튼의 시점으로 재현했는데, 패튼 특유의 불같은 성격과 주요 전투들을 잘 살렸다.
  • 알파캣이 그린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 등장한다. 괄괄한 성격으로 부하들을 몰아붙여 독일군을 분쇄하는 용장 으로 묘사된다.
  • 일본의 웹 소설 별이 펄럭일 때에도 등장한다. 작품 내에선 해전이 위주로 다뤄지기에 자주 얼굴을 비치지는 않지만 첫 등장에서부터 승리 직후 포로가 된 겁쟁이 적장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등 상당한 또라이 기질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부정적으로만 묘사되는 건 아니고 순식간에 적 부대의 허리를 끊거나 몇겹으로 된 방어선을 뚫어내고 수십 킬로미터를 순식간에 돌파하는 등 능력도 상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작중 판타지 국가들의 시민수준이 중세~19세기 즈음이라 경외의 시선과 찬양을 받고 있다.
  • 삼국지연의장비와 싱크로율이 높다. 급한 성미, 불같은 성격, 후임 갈구기(...) 등. 용맹하고 잘싸운 부하에게는 잘해줬다는 면도 비슷하다. 차이라면, 장비는 관우의 죽음이 그의 급한 성미를 더 심하게 해버린 나머지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정도. 그리고 연의 장비와 정사 장비랑 성격이 정반대이지만, 패튼은 인권의 중요성이 당연시 되는 현대의 인물임에도 성격과 사상이 저랬다는 점.
  • 게임 War Robots에 '제너럴 패튼' 이라는 로봇이 나온다. 무장도 좋고 해서 고렙 고수들도 많이 사용하는 로봇.

  • 강철의 왈츠M48A2패튼[30]아틀리 패튼의 모티브로 보인다.
  • 문명 5위대한 장군 산업 시대 이후 일러스트가 패튼을 모티브로 했다. 2차 대전 미군 군복에 은장 리볼버를 차고 승마용 채찍을 들고 지프차에 타고 있는 모습이 여러모로 패튼과 판박이. 당연히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도 등장한다.
  • 퍼스트 어벤져에서 직접 등장은 없지만 그의 명언 중 하나가 체스터 필립스 대령에 의해 언급된다. "패튼 장군은 전장은 무기로 하는거지만, 승리는 병사[31]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자신있게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는 최고의 병사.....들이 있기 때문이지."라고 하며 스티브를 한심하게 쳐다본다. 다른 병사들은 나름 정예병사들을 뽑은 것이지만 스티브는 약골 중에도 최약골이었기 때문에.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고 더 강해질 것이니까. 아주 많이 말이야" 하면서 체념한듯하는게 개그 포인트.
  • 영화 지.아이.조 2의 마지막 장면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연기한 조 콜턴 장군이 드웨인 존슨이 연기한 로드블럭에게 조지 패튼의 유품인 M1911권총을 건네며 코브라 사령관을 찾아 끝장내라고 한다. 로드블럭은 이를 받아 허공에 한 발 쏘며 영화는 끝이 난다.
[1] 중형전차 M26 퍼싱의 네이밍 모델이 된 장군이다.[2] 주로 사용한 전차는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르노 FT-17이었다.[3] 이 때 롬멜은 아프리카 군단원들이 다들 앓고 있던 지병인 이질과 위장병이 악화되어 독일에 가있었다. 군의관이 병가를 내라고 거듭거듭 말하다 못해서 강제로 병가를 보내버렸다. 여담으로 이 원인은 부실한 위생관리에 있었다고 한다.[4] 이 문서에도 후에 언급되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소련 장군 주코프가 우리 "IS-3 전차는 저 멀리서 적을 안전하게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패튼이 "내 부하들이 그렇게 싸운다면, 전 그 부하들의 뚝배기를 깨버릴 것입니다. "라고 말한걸 보면 재밌는 일화이다 [5] 애용하던 전용 지휘 차량은 전선 근처를 돌아다니기에 일단은 방탄판 등을 덧붙였다. 한편 만약 무장이 없다면 꼭 자기가 직접 쏠 수 있는 자리에 기관총을 개조해서 달았다. 근데 조용히 적을 피해 다니긴 글렀던 것이 항상 큼지막하게 빨간/흰색 조합 장성판을 상시 붙이고 다녔기 때문이다.[6] 패튼이 기동전에만 능하고 공성전이나 시가전 등에는 젬병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공군과 미사일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지금도 민간인을 고려할 경우 무척 고단하고 긴 시간이 소모되는 게 시가전이다. 겨우 3개월 남짓 두터운 요새지구인 메츠에 고착되었다고 해서 요새공략전에 무능했다고 볼 순 없다. 당장 훌륭한 전술가로 평가받는 롬멜도 토브룩 공략에 여러 차례 실패를 겪었고, 몽고메리는 작전 준비에 몇 달을 잡아먹은 적이 여러 차례 있다.[7] 또한 군사학을 따로 배우지 않았더라도 직관적으로도 지형지물과 엄폐물이 많은 시가지에서 전투하려면 정말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되고 그만큼 골머리를 앓아야한다는 느낌이 올 것이다. 특히 이미 점령되어 적군이 주둔한 도시에다가 덩치도 큰 전차를 집어 넣어 운용해야하니 정말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8] 이 상황은 1969년 영화 ''레마겐의 철교''의 후반부에 잘 나와있다.[9] 몽고메리는 보병 출신이라 신속한 기동이라든지 기갑전술에 거의 무지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패튼의 경우에는 정석적인 기갑지휘관으로서 신속한 기동과 돌파에 매우 뛰어났다. 성향상 패튼이 유리한 조건이었던 셈.[10] 연합군과 소련군은 소련군에게서 도망쳐서 연합군에게 항복한 독일군들을 전부 소련에 넘기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11] 다만, 이건 당시 맥아더는 한 전역의 집단군사령관 직을 맡을 수 있는 원수였는데 반해서, 패튼은 기껏해야 야전군사령관대장이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맥아더처럼 본국이 뭐라하건 간에 다 씹으면서 자기 하고 싶은대로 밀어붙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는 말. [12] 호바트 게이 대령이 조심하라 소리쳤지만 패튼은 아직 불탄 차량을 보고 있었다. 사족으로 저 호바트 게이는 훗날 중장까지 올랐으며 한국전쟁 당시 1 기병사단장으로서 파병왔다.[13] 1945년에는 아직 차량에 안전벨트를 장착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14] 사고당시 패튼은 의식이 있어서 대령에게 손을 만져보라 했고 감각이 없자 "이거 죽는방법 치고 참 더럽군" 이라 했다.[15] 하지만 상기했다시피 그는 정치적 수완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맥아더나 아이젠하워처럼 정치판에 뛰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그냥저냥 전쟁영웅으로 대우만 받으며 살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굳이 그를 암살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B급 영화설정...이긴 한데 이 영화는 배우진들이 꽤나 호화진이다. 소피아 로렌, 존 카사베츠, 막스 폰 시도우, 조지 케네디가 패튼 역...[16] 실제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면 북진통일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항복 후 한반도가 분단되자 "우리에겐 전쟁이 아직 더 남아 있다. 언젠가 미군이 한국에 가서 빨갱이들을 다 때려 눕혀야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17] M60에는 공식적으로 패튼이라는 이름이 붙은 적이 없다.[18] 후술되겠지만 이 당시에는 정신병리학의 발전이 아직 충분하지 못했던데다, 패튼 본인도 특유의 마초 기질 때문에 현대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PTSD 환자조차도 단순한 겁쟁이로 취급했다.[19] 다만 처음 흑인 부대를 배속받으면서는 이들이 잘 싸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래도 해당부대를 방문 해서, '''나는 네놈들의 피부색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난 나치를 잘 박살 낼수 있는 놈들을 원한다''' 라고 연설했다. 성능충은 스킨따위 신경쓰지 않는 법...[20] 이 시기의 인물들 중 인종차별적 면모가 없었던 것으로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와 레오 듀로셔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이 무슨 성인군자라서 인종차별을 안했던 것이 아니다. 르메이가 흑인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던 이유는 그냥 '안그래도 사람이 모자라는데 일하겠다는 사람을 차버릴 이유는 없어서'였고, 듀로셔 또한 단지 '우리의 승리에 도움이 되고 구단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해주니까' 저 친구가 검둥이든 외계인이든 그딴 건 알 바 아니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좀 더 후대를 다루는 히든 피겨스 같은 영화에서도 NASA에서 인종차별을 없앤 이유는 결국 업무 효율을 늘리기 위해서였다는 식으로 나온다.[21] 이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장인 이마무라 히토시와 졸장이자 임팔 작전을 승인한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유명한 카와베 마사카즈. 이 사람들은 부하들을 굉장히 사랑했고 이마무라가 전쟁공포증을 앓고 있던 병사를 보더니(일단 겉보기에는 별 상처나 수술 자국도 없는 멀쩡한 병사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나도 자네처럼 그런 고통을 겪었던 일도 있었지"라며 그 병사를 위로해 주었다.[22] 미국 본국은 대단히 기뻐했고 루스벨트가 직접 패튼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루스벨트의 고문인 해리 홉킨스는 패튼에게 에트나 후작 작위를 수여해야 한다고 농담하기까지 했다.[23] 대신 중국 빽을 믿고 설치던 북한을 탈탈 털어 주기는 했다. 실제로 6.25 전쟁의 80%는 중공군과의 전투였고, 미국이 휴전한 이유는 북한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24] 무기에 채울 기름만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간에 당장 군장 싸매고 달려간다 이 말이다.[25] 패튼이 연설을 한 번만 한 게 아니라서 바리에이션이 다양한데, 이 대목은 미육군 제6사단을 상대로 할 때 한 말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을 단순하게 요약한 문장이기도 하며, 동시에 동시대 일본군카미카제가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도 같이 깔 수 있는 연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한국에는 웹툰 개장수를 통해서도 알려졌다.[26] 패튼의 연설을 들은 그당시 병사들이 이대목만큼은 기억한다는거 보면 화끈한 명언 맞는것 같다(...).[27] 이 또한 동시대에 부하들의 목숨을 개차반으로 취급한 일본군과 대조된다.[28] 얼핏 봐서는 전쟁광이나 할 법한 말 같지만, 실제로 미래학이나 국제정치학 쪽에서 조금씩 연구되고 있는 이론이다. 기술 개발 등의 요인으로 인해 인간의 기대수명이 높아지면서, 세계 인구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는데, 자원의 양은 한정되어있다. 거기다가, 자원의 양이 충분하더라도 그 분배가 불균형하기에 이 균형을 맞추고 인구수를 조절하고자 일정 주기로 대규모의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즉,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항구적인 평화란 불가능하며, 일정 주기로 지속적으로 대규모 전쟁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29] 2차대전 직후 베를린에서 주코프가 패튼에게 소련군 신형 중전차를 보고 IS-3은 먼 거리에서 안전한 공격이 가능하다는 말을 하자[30] 구 어흥튼 M46 패튼[31] 영어로는 사람 혹은 남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