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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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수
尹斗壽
'''
<colbgcolor=#94153e> '''시호'''
'''문정공(文靖公)'''
'''본관'''
해평 윤씨(海平 尹氏)
'''성명'''
윤두수(尹斗壽)
''''''
자앙(子仰)
''''''
오음(梧陰)
'''출생'''
1533년
'''사망'''
1601년
1. 개요
2. 생애
2.1. 출생부터 임진왜란 전야까지
2.2. 임진왜란 때부터 말년까지
3. 평가
4. 현대 창작물에서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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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인이자 성리학자, 작가, 시인이며, 서인의 일원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또는 子昻), 호는 오음(梧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해평 윤씨 오음공파에겐 중시조가 된다. 동생인 윤근수(尹根壽, 1537년 ~ 1616년) 역시 선조 대에 조정 중신으로 활동했다.
손자 윤신지(尹新之)는 선조인빈 김씨의 딸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했다. 윤신지와 정혜 옹주의 손녀인 해평 윤씨는 김만기김만중을 낳았는데, 김만기는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이며, 김만중은 유명한 고전 구운몽의 저자이다.
순정효황후 윤씨, 윤치호, 윤치영,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이 이 사람의 직계 후손이다.

2. 생애



2.1. 출생부터 임진왜란 전야까지


윤두수는 1533년 군자감정 윤변(尹忭)과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인 어머니 성주 현씨(星州 玄氏)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윤남수(尹柟壽)·윤춘수(尹春壽) 등 형 2명이 있었으며, 아래로 동생 윤근수(尹根壽)가 있었다. 사육신의 인척으로 고조부 이후로 높은 벼슬을 역임하지 못했으나, 윤두수와 그의 동생 윤근수가 정1품 벼슬까지 올라가면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정진하여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묵암 성혼을 만나 평생지기 친구가 되었으며, 이때의 영향으로 후에 붕당이 나뉠 때 서인을 택하게 된다.
그 뒤 이중호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수학하다가 안동 도산의 이황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된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한 다른 동문인 박승임, 류성룡 등은 동인이 되나 그는 서인을 택한 셈이다.[1] 사실 조선 정치사에서 스승이 누구냐가 반드시 붕당 선택에 역할을 미치진 않았다 당장 남명 조식만 해도 대북의 핵심인 내암 정인홍이 그의 문하지만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같은 남인계 인사들도 배출했다. 그 밖에도 조카사위 곽재우는 정계에 몸담지는 않았으나 정치적 견해는 남인에 가까웠고 대북에서 적대했다. 외조카 이준민(계갑일록의 기록을 보면 이준민이 동인들이 모두 서인을 사악하다고 지탄하여 논의가 분분하고, 신도 서인이기 때문에 지금 비로소 좋은 벼슬을 얻었다고 합니다라고 한 기록이 존재한다)과 제자인 양홍주 하락(河洛)등은 남인도 아닌 서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555년(명종 10) 3월 식년시 생원시에 1등 1위로 장원급제하고#, 이어 1558년(명종 13) 식년시 문과에 을과 7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1559년 5월 정자, 1560년 저작, 1561년 9월 부수찬, 10월 병조 좌랑을 지냈다. 11월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12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1562년 4월 다시 사간원 정언, 5월 홍문관부수찬, 7월 다시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562년 10월 이조 좌랑을 거쳐 이후 이조 정랑이 되었다. 1563년 이조 정랑에 재임 중 권신 이량이 그의 아들 정빈을 이조 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 기대승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에 그해 8월 대사헌 이감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해 9월 영의정 윤원형, 우의정 심통원 등의 상계로 무죄임이 밝혀진 뒤[2] 수찬에 다시 서용되었다.
그 뒤 사헌부장령을 거쳐 1563년 9월 수찬, 10월 이조 정랑, 1564년 7월 의정부 검상, 10월 사헌부 장령, 1565년 1월 이조 좌랑, 3월 홍문관 부응교 등을 지냈다. 이후 명종 말엽 윤원형, 심통원 등의 외척들을 탄핵하여 몰락시켰고, 그뒤 사복시정, 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565년 문정 왕후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1566년 1월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우승지를 지냈다. 이때 사람을 살해한 종실 경양군 이수환 사건의 위관으로 참여하였다. 1566년 8월 좌부승지, 윤 10월 우승지를 거쳐 1567년(명종 22년) 자전이 살아있는데도 경솔하게 상례를 논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무마시켰다. 그해 3월 형조 참의를 거쳐 4월 다시 우승지가 되었다가 명종의 임종을 지켰다. 1567년(선조 즉위년) 11월 대사간, 1568년(선조 1년) 8월 우승지 등을 지냈다.
1574년 8월 문과의 고시관의 한명으로 과거 시험 주관에 참여하였고, 9월 대독관에 임명되었다. 9월 병조로부터 함부로 정계 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1575년의 을해당론으로 동인과 서인이 나뉘게 되자 그는 동문인 김효원 등을 따르지 않고 이이, 심의겸, 성혼을 따라 서인에 가담하였다.
1576년(선조 9년) 7월 사간원 대사간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선발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귀국 후 승정원도승지가 되었으나 이후 이종 사촌 동생인 진도 군수 이수에게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1579년 3월 파직당했으나 같은 해 복직되었고 대사간 김계휘의 주청으로 재기용되어 연안 부사가 되었다.
1581년 3월 황해 감사의 서장에 의하여 재령 군수 최립 등과 함께 구황을 잘하였다 천거받고 선조로부터 옷 한벌을 상으로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부 좌윤·오위 도총부 부총관·형조 참판을 역임하고, 1587년 6월 통정대부 수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해 7월 전라도 관찰사 재직 중 우후를 무단으로 잡아들여 벌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당하고 추고받았다. 1588년 말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589년 호조 판서를 거쳐 평안 감사가 되고, 1589년 정여립의 대동계 사건이 확대되어 기축 옥사가 터지고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고 집권하자 다시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내직에 돌아왔다. 그뒤 호조 판서가 되었다가 홍순언, 황정욱 등과 더불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를 변무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에 성공한 공으로 광국 공신 2등관에 서훈되고 해원군에 봉하여졌다. 이후 형조 판서, 대사헌, 호조 판서 등을 지냈다.
1591년 1월 사헌부 대사헌, 2월 호조 판서가 되었다. 대사헌 재직 중 왕세자 책봉 문제로 벌어진 동인과 서인 간의 당파 싸움인 건저 문제로 이산해 등과 함께 광해군을 지지하기로 했으나 그 때문에 선조의 진노를 사서 호조 판서로 임명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윤근수와 함께 삭탈 관직되어 회령으로 유배를 갔다.
그 뒤 동인의 계속된 탄핵으로 배소가 옮겨져 홍원으로 이배되었다. 그해 10월 공이 적지 않다는 왕명으로 근도로 이배되었다가 11월에 방면되었다.

2.2. 임진왜란 때부터 말년까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어 피난가는 선조를 호송하여 어영 대장과 5월 우의정, 약방 도제조, 좌의정으로 연달아 승진했다. 평양까지 밀려난 상황에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며 조선만의 힘으로 일본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하는 것도 강력하게 반대해 몽진을 지지한 정철과 대립했다. 징비록에 의하면 정철 앞에서 남송의 충신 문천상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강경하게 몽진을 주장한 선조는 6월 11일 평양을 떠났고 윤두수는 이원익, 김명원 등과 평양에 남아 평양 방어를 책임졌다. 대동강 너머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개전 이래 별다른 인명 손실 없이 쾌속 진격을 거듭한 반면 평양에 남은 군병은 4천에 불과했고 평양 사수를 거듭 약속했던 선조의 몽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장기간 비가 오지 않아 강물이 점점 말라가 방어는 처음부터 힘들었다. 윤두수는 김명원, 이원익과 의논해 6월 14일 새벽, 고언백에게 정예병 수백(실록 100명, 기재사초 400명)을 이끌고 능라도(대동강 사이에 있는 충적섬)를 지나 야습을 시도했다. 야습은 성공해 적 수백을 죽이고 다수의 군마를 노획(실록 133필, 징비록 300필)했다. 그러나 퇴각 중에 문제가 발생했다. 물러나는 조선군을 추격하는 왜군의 기세에 겁을 먹은 조선 사공 일부가 강변에 배를 대길 거부하고 달아나 버렸다. 퇴각할 수단이 없어진 사졸 30여명이 강변에서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는 어쩔 수 없이 위쪽으로 올라가 수심이 얕은 왕성탄을 건너 빠져나왔다. 이 모습을 지켜본 왜군은 대동강변에서 수심이 얕은 지역을 파악했고 도하를 시도했다. 왕성탄을 수비하던 오응정과 박석명은 왜군을 보고 겁에 질려 달아났고 왜군은 손쉽게 대동강을 도하했다. 방어가 불가능함을 짐작한 윤두수는 전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화기를 강에 빠뜨려 파기한 다음 평양을 빠져나왔다.
평양성 전투에서의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명나라에 망명 의사를 전달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윤두수는 급히 쫓아와 선조의 말고삐를 잡고 ‘필부의 경솔한 행동’이란 극언을 서슴지 않으며 '''부디 망명 요청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후 북쪽으로 몽진하다가 포위될 수 있으니 수로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가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으나 본인도 풍랑이 심해 길을 바꿔야 겠다며 무리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고 조정에서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제2차 평양성 전투에서 왜군을 얕보고 무리하게 전투를 시도했던 조승훈의 명군은 평양성 내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사유, 마세륭, 장국충 등을 잃고 참패했다. 이 전투에서 척후장을 맡았던 순안 군수 황원이 왜군이 모두 한양으로 이동했다고 보고하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조승훈은 이를 침소봉대하여 자신의 패배는 조선이 왜군의 화력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제공해 주지 않았고 명군만 전투에 앞장세운데 말미암은 일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윤두수는 자청해서 총병 양호를 만나 이 사안을 해명하고 조선군 일부가 왜군에 투항했다는 소문 역시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이후 임진년 내내 명군과의 외교 업무 및 명군의 보급 임무를 담당했으며 1593년엔 전라, 충청 지방에 내려가 백성들을 위무하고 삼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었다.
명군의 개입을 처음부터 탐탁찮아 했던 그는 명군이 전쟁에서 발을 뺄 기미가 보이던 1593년 말부터 조선군의 단독 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1594년 9월 수군과 육군이 합동으로 거제도를 공격한다는 장문포 해전을 기획했다. 비변사에서는 견고한 성에 자리잡고 지키는 왜군을 타격할 수단이 없고 조선군의 질이 떨어지며 명군이 다시 내려올 때 제공할 물자가 부족하단 이유를 들어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당시 전라도에 내려가 있었던 윤두수는 왕의 재가를 기다리지 않고 독단으로 작전을 실행시켰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전투가 장문포 해전이었으나 적이 교전을 회피하고 조선군도 견고한 요새에 틀어박힌 왜군을 타격할 수단이 없어 흐지부지 끝났다.
실효성이 낮은 군사 작전을 왕의 재가도 받지 않고 독단으로 강행한 처사에 조정은 한바탕 소란스러워 졌고 삼사가 연일 윤두수를 탄핵했다. 선조는 이럴 때 국사를 맡은 대신을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거부했으나 거듭되는 요청에 결국 파직했다. 그러다 1595년 해원 부원군에 봉해지고 판중추부사로 복직되었다.
윤두수가 가장 많이 비판받는 또 다른 대목은 임진왜란 기간 중 자기 당파의 이득을 위해 이순신을 비방하고 인척인 원균을 옹호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다른 조정 대신들의 발언은 무시하고 윤두수의 발언만 키워 만든 왜곡에 가깝다. 우선, 정유년 이전까지 원균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인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되는 주장이지만 임진년 이후 정유년 이전까지 조정 대신들이 원균에 대해 가진 인상은 '''용맹하고 쓸만한 장수'''였다.[3] 원균은 조정 고위 대신들과 연줄이 닿아 있고, 이들에게 이순신을 모함하는 행위를 일삼았다. 당파를 초월하여 남인이던 이덕형에게도 이순신을 모함한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의 정황과 원균의 절묘한 처세''' 때문이었다. 경상 우수영을 전투 없이 와해시킨 건 분명 큰죄였지만 문제는 전쟁 초기 전면 패주 상황에서 도망간 장수가 너무 많았다. 진주판관 김시민, 함안군수 유숭인, 곤양군수 이광악, 안동부사 정희적, 청도군수 배응경, 선산부사 정경달 등은 모두 왜란때 크고 작은 공을 세운 장수들인데 이들 모두 전쟁 발발 직후엔 달아났던 사람들이다. 이각, 이유검 등 일부를 본보기로 참했지만 다 죽이거나 내칠 수는 없었다. 도망가지 않은 장수들은 전부 싸우다가 죽었으니까. 원균의 행각도 그런 정황이 참작되어 넘어갔다.
왜란 이전 인사 고과에서 하점을 받는 등 행정 능력이 형편 없었고 행실이 거칠다는 점도 알고 있었으나 그게 그 당시 일반적인 무장상이었다. 당장 왜란 이전 조선 최고의 무장으로 이름난 신립만 해도 성정이 거칠고 오만하여 남의 말 안 듣고 사졸들을 함부로 죽여서 말이 많았지만 용맹이 뛰어났기에 그냥 넘어갔다. 이순신의 전임 수사인 유극량도 질낮은 사람들하고 어울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문관들에 비해 교양이나 학문이 떨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일로 전란 중에도 꾸준히 독서하고 지방관 시절 선정으로 칭송받은 이순신이 오히려 특이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후술할 이미지 메이킹으로 원균이 용맹하다는 인상이 생겨 전시에는 필요한 인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균의 묻어가기 능력이 탁월했다. 규정을 무시하고 이순신에게 연명 장계를 올리자고 했다가 거절당한 사례나 수급 얻으려고 아군에게 활을 쏜 일화, 조선인 어부를 왜인으로 변장시킨 다음 죽여 왜군의 수급이라 속이려다 이순신에게 적발된 일화에서 보듯 원균은 이순신의 전공에 아주 적극적으로 숟가락을 올렸고 못올리면 만들려고 했다.
정유년에 신구차를 올려 이순신을 구명하는데 누구보다 힘쓴 정탁은 일찍이 원균은 사졸들이 따르는 쓸 만한 장수라 평하며 수사직에서 체직하면 안된다고 말했다.(1594년 11월 12일 기사) 조정에서 이순신에 대해 가장 긍정적으로 평하고 원균에게 부정적이었던 대신은 체찰사 임무로 직접 겪어본 이원익인데, 그조차도 원균은 평시에는 못 쓸 인물이지만 전시에는 쓸 만한 장수란 평가를 내렸다.(1596년 10월 21일 기사) 정탁, 이원익과 마찬가지로 남인계인 김응남은 거제도를 점령하고 원균을 파견하자면서 원균 아니면 누가 거제를 지키겠냐고 말한바 있고 서인 윤근수가 이에 동의했다.(1596년 6월) 칠천량 해전에서 본래 기량이 드러나기 이전까지 서인, 남인 할 것 없이 원균에 대해 '전시에는 쓸 만한 장수'란 평가를 내렸다. 실무에서 원균을 지겹게 겪은 이순신이 들으면 치를 떨었겠지만, 멀리 떨어진 조정에서 보기에 이순신과 함께 움직이며 공도 세우고 수급도 열심히 바치는 원균은 용맹한 장수로 보였던 것이다. 행실이 문제라는 지적은 꾸준히 나왔지만 무장들에게 싸움 잘 하는거 말곤 기대도 안하는게 조정 분위기였다.
이순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정유년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의 감독, 각본, 주연은 선조이지 대신들이 아니다. 양위 파동을 비롯한 온갖 정치적 쇼로 권위를 유지하는데 성공한 선조가 일관되게 원균을 추켜세우고 이순신을 폄하하는 태도를 보이자 다른 신하들과 함께 선조의 뜻에 따른 것으로 거의 대부분의 신하들이 이순신을 모함하고 원균을 옹호했다. 고위직은 말할 것도 없고 바른 말 하라고 세워둔 언관들조차 건수 하나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앞장서서 이순신을 탄핵했다.
이순신을 옹호하거나 중립을 지킨 인물은 정탁이원익, 권율, 김명원 정도였고 류성룡조차 이순신 모함에 소극적으로 편승했다.[4]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자신이 이순신을 추천했기 때문에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적은 걸 보고 서인이 동인의 보호를 받는 이순신을 공격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 당시에는 조정의 당쟁은 서인과 동인이 아닌 서인과 북인의 당쟁으로 임진왜란 이전 서인이 기울면서 북인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북인이 남인인 류성룡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류성룡이 말한 자신을 싫어한 사람들은 서인보다도 북인이다. 그리고 윤두수의 정적인 북인의 영수 이산해도 이순신에 대한 태도는 윤두수와 다를게 없었다. 선조 실록 1597년 1월 27일 기사를 보면 이산해, 류성룡, 김응남 등 북인, 남인 인사들이 당색을 막론하고 돌아가면서 이순신을 모함했다.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기 싫어 칠천량 해전 직후에 각 수사들이 고을 단위로 방어하게 하자 주장했다는 모함도 있는데 이 발언은 칠천량 해전 소식이 전해진 직후 대책 논의 과정에서 나온 발언[5]으로 윤두수는 전선이 남아 있어도 수졸이 없어 전선을 운용하기 힘들 테니 당분간은 통제사를 임명하지 말고 수사들이 관할 해역을 방어하게 하자고 주장했을 뿐이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전해진 수군 폐지령에서 보여지듯 이때 조정은 수군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고 그러한 상황에서 그나마 유효한 방어 대책을 찾다가 나온 발언에 불과하다. 이 발언 바로 앞에 나오는 류성룡의 발언도 윤두수와 다를 게 없었다. 류성룡은 남은 전선을 강화도로 모아 방어하자고 제안했는데 이 역시 하삼도 수운 방어를 포기한 행위였다.
정유재란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에 물러났다. 그해 판중추부사를 거쳐 다시 1599년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동인들이 반대하므로 곧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전직되었다가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출입하였다가 1601년에 병사하였다.
비록 이순신 탄핵건으로 류성룡과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이 글에서 나온 것처럼 윤두수는 이항복과 같은 서인 내부에서도 중도파였는데다가 서인 강경파였던 정철과도 친했던 류성룡은 비록 윤두수와는 당색이 다르나 같은 동문인 류성룡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기도 하는 등 류성룡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말이 통하는 사이였다 실제로 서애 탄핵 사건 때도 류성룡은 자신 말고 윤두수도 있다면서 윤두수를 명나라로 보내기를 추천하기도 하였고 서애집에 의하면 윤두수의 부음을 듣자 남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사람은 오늘날 쉽게 얻을 수 없다. 지나간 임진년 무렵에 만약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면 우리들은 이미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요사이도 자못 공평한 의론을 주장했는데 갑자기 이 지경이 된 것도 운수이니 어찌하겠는가"라고 안타까워 하였다고 한다. http://cafe.naver.com/booheong/116141
사후 1605년(선조 38년) 선조의 어가를 의주까지 호종한 자들을 포상할 때 호성 공신 2등관에 추서되었다. 저서로 기자에 대한 사적을 모은 기자지(箕子志)와 생전의 글을 모아 아들 윤방이 편찬한 오음유고(梧陰遺稿)가 있다.
서자를 포함해 아들만 다섯을 두었는데 이들도 아버지를 닮아 인생이 꽤나 파란만장했다. 일단 장남 윤방은 부친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재직했는데, 노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난 간 소현세자민회빈 강씨를 호종하고 역대 임금들의 신주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강화도가 병력부족으로 청군에게 함몰될때 신주를 급히 은닉하던 중 일부를 훼손하는 바람에 책임을 물어 전후 탄핵을 당했고 유배를 갔다. 훗날 순종황제의 국구이자 매국노인 윤택영, 윤덕영 형제의 조상이다. 차남 윤흔은 광해군때 옥사에 휘말려 정계에서 소외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가까스로 복귀했고, 동생 윤휘와 달리 후금에 대한 주전론을 주장했다. 윤웅렬, 윤치호 부자와 윤보선의 조상이다. 삼남 윤휘는 외교통으로 형들과 달리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지지했고, 그로 인해 서인과 산림 세력의 미움을 받았다. 폐모론에 반대했고, 외교 전문가+서인의 원로 윤두수의 아들이라는 점 덕에 인조반정 때도 살아남아 중용되었지만 지속적으로 탄핵을 받았다. 정묘, 병자호란때 외교 실무를 맡았고 그 이후에도 대청 외교통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한다. 사남 윤훤은 가장 안습한데 정묘호란때 후금을 막지못했다하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참수된다.
묘소는 오늘날 북한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후 장단부 오음리[6]에 묻혔다고 하는데, 이 지역은 명목상으로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는 지역이라서 찾아가 볼 수 없다. 군사 분계선이 이 일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방치되었거나 심지어는 실전되어 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오늘날 윤두수의 후손들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에 있는 윤두수의 손자 윤경지(1604~1659)를 모신 사당인 모덕재에서 윤두수를 기리는 제례를 지내고 있다. 항목 맨 위의 초상화는 모덕재에 있는 윤두수의 초상화이다.

3. 평가


행정 관료, 외교관으로는 유능했으나 군사적 안목은 다소 떨어졌고 이순신원균 문제에 얽혀 이순신을 모함한 주동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명종 때 권신 이량의 청탁을 거절해서 파직당하는 등 젊어서부터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고 지방관 시절에도 유능한 모습을 보여줬다. 전시의 행보를 봐도 조승훈의 보고로 생긴 명나라의 오해를 푸는데 기여하고, 명군에 대한 보급과 남도 백성 위무도 충실히 수행하는 등 외교와 행정 실무에서는 별 흠이 없었다. 전란 전에 한 차례 뇌물 스캔들로 파직당한 전례가 있기는 하나 사실 조선에서 녹봉만으로 생활을 유지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하고[7] 물자의 유통이 적었던 조선시대에는 양반들 간의 '선물 교류'는 일상적인 일이었고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다. 다만 뇌물과 선물을 가르는 대가성의 기준이 모호한 만큼 정치 상황에 따라 같은 선물도 뇌물이 될 수 있었다. 특히 당시 조선 경제 체제의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 때문에, 상대 당이 작정하고 털면 뇌물죄에서 자유로운 관료는 거의 없었다. 이때문에 조선 시대의 뇌물 스캔들은 진짜 뇌물과 이런 선물이 정치상황에 따라 뇌물로 몰리게 된 케이스를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선조 수정 실록 1578년 10월 1 기사를 보면 윤두수의 뇌물 스캔들은 동서인의 정쟁 과정에서 불거진 일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그러나 윤두수는 국방 문제에선 다소 모자랐다. 물론 그가 종2품 어영 대장[8]도 역임했던 사람이니 군사 문제에 아예 문외한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전략 부분. 동시대에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같은 국방 문제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실무 관료들이 뛰어난 지휘력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끈 건 아니지만 명과의 연계를 통한 군무 행정, 군사 제도, 전략 입안 단계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인 반면 윤두수는 조선 단독으로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에만 너무 매달려서 조선군 역량으론 무리한 구상을 했다.
평양성 방어전이야 처음부터 크게 불리한 조건이었고 사공들이나 강변 방어 부대가 겁먹고 도망간 것까지 윤두수 탓으로 돌릴 순 없다 쳐도 장문포 해전은 누가 봐도 무리한 계획인데 윤두수가 특유의 강직한 성격으로 말미암은 추진력과 조선군 단독 작전에 대한 집착이 빚어낸 참사였다. 특히 휴전 협상 기간이라 일본군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현장에서 작전을 진행했던 이순신이 적당히 강약을 조절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큰 패배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순신 파직 건은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로 선조가 철저히 주도했지만 윤두수 역시 조정 중신의 한 사람으로서 동조한 책임이 분명히 있다. 물론 모함의 주동자로 악명을 뒤집어쓸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4. 현대 창작물에서


이순신이나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가끔 등장하지만, 류성룡이나 이항복 등의 유명 인물과는 달리 다소 인지도가 낮은 편이라 조연으로 등장한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이순신을 악역으로 그릴 수는 없으므로 그와 대립하는 윤두수가 나쁜 놈이 되는 편.
늘 그렇듯 동생인 윤근수와 셋트로 같이 나온다.
1985년 방영한 MBC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박웅이 담당하였다. 극중에 자주 출석을 하긴 하는데, 그다지 특이점은 없는 흔한 조정 관료 A 수준으로 나왔다. 이순신 파직 건 또한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들이 한 걸로 나온다.
비중있게 등장한 작품은 2004년 KBS에서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부터다. 배역은 중견 탤런트 정동환. 전형적인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는 조정 대신으로, 주인공의 강력한 조력자인 류성룡과 정치적으로 반대쪽에 있어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9] 그러나 왜란이 터지자 전란 극복을 위해 다른 당파인 류성룡과도 협력하거나 자신의 목숨까지 담보로 내세우며 이순신을 보호하는 등 한동안 훈훈한 모습을 연출했다.[10]
그러나 갈수록 선조의 의심이 깊어지자 태도를 싹 바꿔 원균을 옹호하고 이순신을 끌어내리려 하는 악역으로 변모한다. 선조가 이순신을 극딜할 때마다 앞장서서 이순신을 까더니 급기야 압송된 이순신을 직접 고문해서 반죽음에 이르게 해 시청자들에게 개쓰레기로 낙인찍힌다. 그래놓고 원균이 함대를 홀라당 말아먹자 은근슬쩍 이순신 복귀를 주장하다 빡친 류성룡에게 멱살을 잡혀놓고도 마지막화까지 이순신을 공격하면서 김경진의 소설 임진왜란과 함께 윤두수 이미지가 망가지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오죽하면 이 드라마에 나온 이미지를 곧이 곧대로 믿고 당시 집에서 기르는 개 두 마리의 이름을 각기 선조와 윤두수라 지으며 매번 개처럼 자랑스레 부르던 사람의 사연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우혁의 판타지소설 왜란종결자에도 가끔씩 조정장면에서 스쳐지나가는데, 작가의 미움을 받았는지 용렬하다, 어리석다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있다. 그러나 그 윤두수마저 한 수 접을 정도로 선조가 찌질이로 나와서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반면 원로 소설가 김성한의 '7년전쟁'에서는 외교전이 중심이 된 작품 특성상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그의 공로와 과오를 균형있게 잘 다룬 편이다.
2010년에 역시 KBS에서 방영한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는 장현성이 연기하였다.
2015년에 방영한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임동진이 분했다. '''왕이 곧 나라다'''는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운 강직한 성격의 근왕주의자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대표 정적이라 취급이 좋진 않지만 배우빨을 받아서 가만보면 무슨 애국지사 느낌이 난다.
그래픽 노블 <이순신: 전사와 수호자>에서 등장하는데, 그 묘사가 거의 이 분을 맞먹는다. 결국 작가의 오리지널캐에 의해 고자가 된다.

5. 관련 문서



[1] 참고로 이황은 동인만의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고, 스스로 서인을 자처하거나, 혹은 당시 정치적으로 서인이라고 지목되었던 인물들 가운데에도 이황을 사사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당장 서경덕의 문인으로 알려진 사암 박순이 그랬고, 한때 이황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꼽혔던 백담 구봉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2] 이량은 윤원형의 정적이었다.[3] 현대적인 군사학이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엔 장수를 평가할 때 용맹이라는 애매한 요소가 중요한 평가기준 중의 하나였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에서 가장 무명이 높은 무장은 북도 제승방략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지장이자 부하들 사이에서 여론도 나쁘지 않았던 이일(신립은 임진왜란 발발후 한양에서 얼마간 사람을 모아 내려가려 했을 때 아무도 응하지 않아 류성룡이 대신 모아줘야 했다. 반면 이일은 여진족 첩자를 조정의 허락안받고 참수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북도 방위를 위해 이일이 꼭 필요하다는 지역 수령들과 장졸들의 요청으로 복직되었다.)이 아니라 난폭하고 지휘관으로선 검증된바 없으나 무예와 용맹으로는 조선 천지에 당할 자가 없는 신립이었다. 물론 신립의 무용과 전과는 대단했으나 그것이 철저한 개인전술에 기반한 것으로 소규모 별동대 이상의 병력을 지휘해서 세운 게 아니었다.[4] 그리고 나중에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이순신을 구명할 방법이 없을까 하여 찾아왔을 때도 모르쇠로 일관했다.[5] (전략) 윤두수는 아뢰기를, “비록 잔여 선박이 있다 하더라도 군졸을 충당하기가 어려우니 아직은 통제사를 차출하지 말고 각도의 수사로 하여금 우선 그 지방의 군졸을 수습하여 각기 지방을 지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후략) '''선조 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6] 그의 호인 '오음(梧陰)'에서 딴 마을 이름이다.[7] 물론 당상관 정도 되면 녹봉도 상당한 편이라 굶어죽을 정도로 녹이 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 녹봉은 쌀과 포 등으로 주는데,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특히 조선 중기는 상업과 유통의 미발달로 인해 재산이 있다고 바로 현물을 구할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현지 수령들을 통해 각종 물품들을 받지 않으면 가장 기초적인 반찬거리조차도 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재상급 대신이라 해도 생활이 심히 곤란해진다.[8] 어영청 도제조와 제조는 영의정과 병조 판서가 겸임하지만 대장은 독립 무관직이다.[9] 극중에서 일본군이 등장하면 나오는 일본군 전용 브금이 있는데, 윤두수가 이순신을 사찰하러 전라좌수영으로 내려올때 제작진이 이 브금을 틀었다. 취급이 어떤지 알 만하다.[10] 선조명나라 사신에게 무릎을 꿇고 지원군을 애걸하는 굴욕을 겪은 후 류성룡과 단 둘이 있을 때, '''"국익보다 당의 이익을 우선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며, 이 전란은 마땅히 우리의 자존심을 걸고 우리의 힘으로 지키는 것이 마땅한 것이거늘, 명의 지원군과 사대의 예 따위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라며 류성룡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