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클립 작전
1. 개요
Operation Paperclip,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시된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나치 독일 주요 인사 포섭 작전이다. 페이퍼클립이라는 작전명은 나치 독일 과학자, 정보기관 출신의 인물들의 명단을 페이퍼클립으로 표시해 놓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페이퍼클립 작전은 1945년부터 1946년까지 OSS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이후 OSS가 폐쇄되고 CIA가 미국 정식 정보기관이 된 이후로 페이퍼클립 작전과 유사한 나치 독일 과학자 포섭작전을 1955년까지 수행하였으며 전리품으로 나치 독일의 과학기술과 유능한 과학자들을 포섭하였다. 특히 항공역학, 로켓기술, 화학무기, 화학반응기술, 의약품에 대한 과학기술을 중점적으로 획득하였고 이에 관련된 과학자들은 가족들과 함께 모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2. 상황
1945년 4월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고 5월 7일 나치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을 한다. 이후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베를린 분할통치가 시작되었고 4개국은 독일의 행정권, 통치권을 수행하였고 군대가 해산되었으며 숨어있던 나치 독일의 고위급들은 전부 체포되었다.
나치 독일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쟁의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이른바 신무기들에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하지만 당시 과학력의 한계 상 나치 독일 측에서 연구하던 무기들의 대부분은 실용화하지 못했고, 종전 시점까지도 기술실증 단계를 겨우 거친 수준이 대부분이었으며 심지어 핵무기같은 경우는 대전 중 완성하고 실전에 투입했던 미국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미국의 일부 기술에는 추축국 출신들의 망명자들 덕분인 부분도 있다는 사실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독일의 과학기술 중에서는 제트 항공기, 대공 미사일, V2 같이 실전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실용화된 기술들도 상당히 존재했으며, 이러한 기술들 중에서는 독일이 미국보다 다소 앞서 있는 부분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미국 기준으로만 판단하기엔 전쟁 끝과 동시에 갈 곳 잃은 이들이 차후 미국의 적이 될 국가(소련)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도 곤란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냉전에 돌입한 미국은 나치 독일이 남긴 여러 '쓸 만한' 기술적 자산들을 수습하고 아울러서 독일의 기술인력을 소련보다 먼저 포섭할 준비를 시작한다.
이 나치 독일의 비밀무기 저장소와 각종 도면은 곧바로 미국 백악관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사망 이후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인계 받은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상황정리와 냉전의 시작으로 소련을 견제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재빠른 판단을 내렸고 당시 정보기관 임무를 수행했었던 전략사무국(OSS, CIA의 전신)에 임무 명령서를 하달하였다. 그 명령서는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최대한 많이 포섭할 것을 지시하는 작전 명령서였고, OSS는 즉시 임무를 수행할 요원들을 소집해 브리핑한 뒤 독일에 급파했다. 이 요원들은 독일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기존 OSS 요원들과 접촉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작전의 결과로 많은 주요 인사들이 소련의 손길을 피하여 미국에 무사히 입국하였으나, 입국과 동시에 이들이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미국 여론이 들꿇었다. 하지만 미국 당국은 빠르게 선전선동 작전을 펼쳤고 이들은 주요 언론에 옆집 아저씨의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각종 대 여론공작을 펼쳤다. 동시에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 외 132명의 과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나치 독일의 강압 때문에 협력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탈출하기 위한 과정을 영웅적으로 묘사해 미국의 여론이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이 작전은 후일 오버캐스트 작전 또는 페이퍼클립 작전(Project Paperclip)로 불리게 되었다. 이 작전으로 미국으로 들어온 인사들 중 2/3이 나치당이나 나치 친위대,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요원이었으나, 미국 OSS 요원들이 이들의 전범기록을 삭제함으로써 무사히 미국 입국이 허가되었고 1955년 이후 총 760명 이상이 미국 시민권자로 입국하여 미국 과학계에서 일하게 되었다.
2.1. 전쟁의 끝
1945년, 연합군이 독일로 진주하면서 독일 과학자들의 지식과 성취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독일이 항복한 후 2년 동안 미국은 독일에서 전리품으로 기술과 과학 지식에 대한 정보수집에 주력한다. 이러한 기술의 값어치는 현재 시가로 1000억달러 수준이며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115조 6000억 원에 이르는 가치의 정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 나치 독일 과학자
페이퍼클립 작전이 모집한 독일 과학자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다. 폰 브라운은 미국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그는 미국으로 오기 전에는 독일의 V-2로켓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폰 브라운은 1937~1945년까지 독일의 악명 높은 피네문데의 로켓 연구센터의 기술 감독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폰 브라운은 대공 미사일과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으며 A-4로켓(V-2 로켓의 원형)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실제 인원은 이 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NASA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페이퍼클립 작전이 진행되면서 ‘외국 기술자와 전문가’ 642명이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이 가운데 폰 브라운이 데리고 온 로켓 기술자 132명은 단일 그룹으로 최대 규모였다.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에 이송된 과학자의 상당수는 친(親)나치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르튀어 루돌프(Arthur Louis Hugo Rudolph)로 그는 새턴 로켓 팀의 또 다른 주축 멤버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노예 노동으로 악명 높았던 수용소 내 공장 감독을 맡았던 인물로 당시 공장 일꾼으로 동원된 노예들은 굶주림과 고문에 시달렸고 지나친 노동으로 과로사하는 일이 허다했다.
미국은 초기 평가에서 루돌프를 ‘100퍼센트 나치주의자’라 평가되었고, 그를 억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루돌프는 1984년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자 서독으로 망명해 1996년 1월 1일 함부르크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페이퍼클립 작전에는 나치의 악명 높은 생체 실험에 참여했던 과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례로 쿠르트 블룸은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유행병 백신을 실험했으며, 몸이 아픈 죄수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블룸은 전후 미국으로 건너와 미 육군 화학전단에서 일했다.
이와 함께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실행된 인체 실험을 감독하고 지휘했던 발터 슈라이버 소장은 미 공군 의과대학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는 1952년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자 미국을 빠져나가 나치에 비교적 우호적인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다.
2.3. 그 외
Horten Ho229 전투기는 발견되자 노스롭 그루먼 사로 보내져서 시험대상이 되었다. 또한 소련군에게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생산시설은 파괴되었다. 물론 이를 살펴본 노스롭의 반응은 제트엔진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1940년에 전익기 N-1M을 비행시킨 기록이 있다.
미국은 독일 점령지에서 특히 항공역학(Aerodynamics), 로켓기술(Rocketry), 특히 V1과 V2 로켓 프로젝트[1] , 화학무기(Chemical Weapons), 화학 반응기술(Chemical Reaction Technology)과 의약품(Medicine)에 관심이 많아 생포한 과학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비밀리에 미국으로 이주시켰다.
여기에는 NSDAP와 나치 친위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전쟁 범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들이 소련군에 넘어가서 소련에게 협력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했기에 미국 정부의 정식 허가나 비자 등이 없이 비밀리에 확보된 장비와 함께 이주시켰다.
이들이 미국 과학계로 진출하고 난 뒤인 1958년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고 초기 직원 8,000명중 나치 독일 과학자에서 이주한 과학자들은 대략 500명 가량이 되었는데 이들은 텍사스의 Bliss 요새, 뉴 멕시코의 White Sands 등에 분산시켜 유도 미사일과 탄도 미사일 기술을 전수받았고 이것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설립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원천 기술이 되었다.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는 페네뮌데(Peenemuende) 비밀기지에서 V2 로켓을 개발하던 자신의 로켓팀(The Von Braun Rocket Team)연구원들 중 132명을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데려온다.
본 작전과의 직접적 관련성은 없지만 페이퍼클립과 비슷하게 이시이 시로가 이끄는 일본 731 부대의 연구 자료를 거액으로 거래하여 넘겨 준 사례도 있다.
3. 앨런 덜레스
앨런 덜레스(Allen Dulles)는 1945년 페이퍼 클립 작전 당시 베를린 주재 미국 대사관의 정보원이었고 OSS 베를린 지부장이었으며 페이퍼 클립을 비롯한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국 정보원으로 크게 활약한다. 훗날 CIA의 국장이 되고 CIA를 강한 정보기관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동시에 쿠바침공실패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해고 되었으며 케네디 암살사건에 CIA가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4. 매체
- 아웃라스트에서 작중 만악의 근원인 모포제닉 엔진의 기술과 핵심 인사인 베르니케 박사를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얻었다고 언급된다.
-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에서 아르님 졸라 박사가 페이퍼클립 작전을 이용해 미국으로 침투했으며, 이후 쉴드(S.H.I.E.L.D.)에서 일하며 그 내부에서 조금씩 히드라를 재건했다고 나온다.
- 미국 드라마 엑스파일에서도 등장하는데 시즌 3 에피소드 2에서 잘 차려 입은 남자가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외계인 혼합종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 스나이퍼 엘리트 시리즈에서는 해당 작전이 직접 언급된것은 아니나 임무 내용들 중 일부는 영락없는 페이퍼클립 작전과 일치한다. 사실 상기한대로 해당 작전의 이름은 나중에나 붙여졌고 시행 당시엔 그냥 긴급작전 A였으니 의외로 고증에 맞는 셈이다.
-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이 페이퍼클립 작전의 결과로 미국 과학기술 고문이 된 나치 전범이다. 원래 이름은 머윅데리브('이상한 사랑'이란 뜻으로 영어인 스트레인지러브와 같은 의미). 아직도 나치시절 버릇이 남아 있다. 오른손이 시도 때도 없이 나치식 경례를 해댄다거나, 도살이란 단어에 강세를 준다거나, 대통령을 총통으로 지칭하다 정정한다거나, 나중에 갑자기 휠체어에서 번쩍 일어나면서 "Mein Fuhrer! 내가 걸을 수 있다니!"라고 외친다거나...
- 레드 아이즈에 등장하는 최종보스 율리안 크레이즈의 세력인 루미스 왕국이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독자적인 무기 체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걸 본 레온 리다스는 도시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라며 레드 아이즈 세계관의 나치 제국인 GNR이 몰락하고 이들을 위해 일하던 과학자들이 처형되려 할때 어느 귀족이 이들을 몰래 빼돌렸고 이 귀족이 루미스 왕국의 일원이 될때 이들도 같이 가문을 이루며 루미스 왕국을 섬기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