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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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부대 본부 전경
1. 개요
2. 설립
4. 계급 체계
5. 행적
5.1. 부대 내규
5.2. 생체실험 내역
5.2.1. 생체 반응 실험
5.2.2. 무기 실험
5.2.3. 세균 실험
5.2.4. 기타 생체 실험
5.3. 실험 외적인 살인 행각
6. 일본제국 멸망 후
6.1. 미국의 묵인
6.2. 이시이 시로의 회고
6.3. 부대 건물
6.4. 이후
7. 현지 사건
8. 부대원
9. 생체실험 피해자
9.1. 한국인
9.2. 특별이송
10. 세계문화유산 등록 시도
11. 731부대 죄증진열관
12. 나치의 유태인 강제수용소와의 차이
13. 731부대가 등장하는 작품들
14. 참고 자료
15. 관련 문서


1. 개요


731部隊(ななさんいちぶたい[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을 포함한 생화학무기 개발 등의 업무를 하던 일본제국 소속 육군 부대. 하얼빈에 있었다. 정식 명칭은 '''"관동군 검역급수부 본부(関東軍検疫給水部本部)"'''이다.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부대로도 알려져 있다.

2. 설립


1936년에 설립되어 일본 제국이 패망하는 1945년까지 활동했다. 이 부대는 쇼와 덴노칙령으로 설립된 유일한 부대이다.
'방역급수부'란 전염병을 예방하고 물을 공급한다는 뜻이다. 즉, 부대 이름대로라면 예방의학의 연구 및 식수의 병참을 연구하는 부대여야 했다. 그러나 이시이 시로가 부대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명칭은 위장 명칭으로 전락했고 비인간적인 인체실험을 통해 생물학무기를 개발하는 업무를 맡았다.

3. 마루타


이러한 생체 실험의 대상을 '마루타[2]'라고 불렀다. 희생자 중에서는 전쟁 포로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조선인, 몽골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소련군, 미군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끌려가 희생되었다.
미국 또한 전후 전범들과의 사법 거래를 통해 생체실험을 통해 나온 자료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731 부대에서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른 자들보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3] 이는 미군과의 사법 거래에 의한 것이다. 미국이 자료에 눈이 멀어 전범에게 면죄부를 준 탓에 죽어나간 사람들만 피눈물을 흘리게 됐고, 이는 미국이 난징 대학살, 만주사변, 위안부 문제와 달리 731 부대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가장 큰 이유다.

4. 계급 체계


일제 공무원, 군속, 군인의 계급은 서로 비교할 수 있었다. 731부대에는 군인들 외에도 의사, 간호사 등 군속들이 복무하고 있었다. 고등관, 판임관, 고원 등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공무원들 계급이고, 기사라든가 기사의 보조인 기수 등은 국가가 공인하는 기술자들의 자격 명칭이었다. 보통 전문학교나 고등실업학교 출신 수준의 기술자를 기수, 거기서 경력을 더 쌓으면 기사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기수가 기사자격증, 기사가 기술사 자격증 정도로 보면 된다. 고등문관시험 합격자가 고등관, 보통문관시험 합격자가 판임관이었으며 고원의 경우는 필요에 따라 뽑는 계약직 기능직 공무원들인데 우리식으로 말하면 5, 7, 9급 출신에 각각 대응된다. 이렇게 딱히 731부대만의 특별한 호칭은 아니고, 부대에서 근무하는 군무원 취급을 해 줬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당시 일본의 직제에 하사관은 판임관 4~1등(4등이 낮고 1등이 높다)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소위는 고등관인 주임관 8등이었다. 용인은 우리 식으로 따지면 옛날 기능직 공무원 같은 건데 필요에 따라 뽑는 노무자들 정도였고, 고원은 구태여 말하자면 무기계약직 사무보조 공무원 같은 건데 이 시대에는 보통문관시험 합격자들이 수습기간에 고원 신분으로 일을 하거나 아니면 빽으로 관청에 들어가서 고원으로 일하다가 5년 전후로 판임관 정식 발령이 나거나 말거나 했다. 그리고 판임관 대우라는 것도 있었는데 판임관보다는 아래로 취급받았는데 이를테면 형무소 말단 간수나 경찰 중 순사나 순사부장이 판임관 대우였다. 한편 '기수'라는 직책을 살펴보면 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온 이상이 총독부 영선과 기수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던 데서 알 수 있듯 기초적 전문기술이 있는 기술자를 일컫는 말로 관청 기수라면 경부나 경부보와 비슷한 판임관에 해당했으며 '기사'가 되면 주임관의 직급을 받았다.
731 부대를 다룬 미디어들 중 소설 마루타나 영화 흑태양 시리즈 같이 악마의 포식[4] 을 참조했다는 작품들을 보면 일본의 계급이나 관제가 아주 개판으로 설명되어 있다. 정현웅의 소설 마루타에서 이시이 나가데가 요시다에게 부대 계급을 설명해주면서 '마루타 특설감옥 간수들을 죄다 이시이 시로의 고향에서 대려왔는데 판임관 대우를 해 준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게 정현웅이 어디서 저 '판임관 대우'라는 말을 보고 저 이야기를 한 거라면 아마도 진짜 일제시절에 있던 공무원 계급인 '판임관 대우'였을 확률이 크다.[5] 또 진청민의 '일본군 세균전' 같은 학술서도 뭘 참고했는지 일본의 계급이나 관제에는 상당히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

계급
군인
민간인
칙임관(勅任官)
장관급 장교
부대장 이시이 시로 육군 중장
그 형제인 이시이 지로 등의 인물들
그 외에 육군 소장급으로 1명~2명
해당 계급 없음
고등관(高等官)
좌관급 장교,
군속 기사(의사)
판임관(判任官)
위관급 장교
군속 기사보조(의사) 등
고원(雇員)
하사관
간호사 등
용인(用人)
이등병, 일등병 상등병 병장
최말단 고용인

5. 행적


731부대의 진상은 1981년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에 연재된 논픽션 '악마의 포식'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악마의 포식"은 당시 "적기"의 기자였던 "시모사토 마사키"가 "하바롭스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난 731부대와 일본군의 생체실험 등을 추적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가 모리무라 세이치가 연재한 논픽션이다. 총 2부작으로 이루어졌는데, 1부는 "적기"의 일간지판에 1981년에 연재되었고, 제2부는 적기의 일요일판에 1982년에 연재되고 코우분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글에 실린 731부대에 대한 내용은 다시 공산당 소속 의원이 국회에서 문제 제기를 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악마의 포식' 연재 이전부터 731부대의 존재나, 그 부대에서 있었던 만행의 대략적인 개요는 알려져 있었던 듯 한데, 1969년에 발행되어 다큐멘터리 라디오 극본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한림출판사의 5권짜리 태평양전쟁 책에서도 731부대의 존재와 이시이 시로의 이름, 그리고 그 부대에서 했던 제반 실험 등등이 자세하지는 않으나마 어느정도 구체적으로 묘사된 것이 존재했었던 것이 그 증거다.[6] 그리고 당장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731부대 이야기를 알게 되는 계기가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방영때 저 부대가 나오면서부터인데, 여명의 눈동자 원작 소설은 70년대 후반에 연재되었다. 악마의 포식이 연재되기 전부터도 저 부대의 정체는 어느정도 알려져 있었다.
애시당초 '일본군 부대 중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곳이 있다더라'라는 이야기가 '일본 군부 중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초초초초 특급 비밀'이라는 것 자체가 약간은 과장된 사실로 볼 수 있다. 관동군이나 대본영에서 731 부대의 실험을 참관하며 생화학전을 논의하던 장교들 숫자도 적지 않으며, 애시당초 일본군 내에서는 731부대 말고도 관동군 제 100 부대니 등등 본토나 조선 만주 중국 등 점령지 전체에 생사람을 잡아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가 여럿 있었다. 하는 일의 성격상 알면서도 쉬쉬하는 구석이 없지야 않았겠지만, 731부대가 국화문장이 없는 유일한 부대일 정도로 천황도 모르는 부대라느니[7], 이시이 시로나 아주 극소수의 고위층 빼고는 아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보안이 유지된 유일한 부대라느니 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을 하는 부대도 많았고, 그 부대들끼리 나름 인력교환도 있었으며[8] 그 부대들끼리의 업무를 자기들끼리 알아서 한 게 아니라 관동군이나 더 상위 부대 등의 명령과 조정을 받아서 했을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에서는 1982년 4월 13일과 같은 해 8월 4일 동아일보에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다. 사족으로 당시 책에 실렸던 사진 35장 중 20장은 실제 사진이 아니었다고 한다. 1982년 9월 16일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서 관련 기사가 나왔었다. 개정판에서는 수정됐다고 한다. 한국에서 '마루따' 내지는 '악마의 포식'이라고 나온 판은 전부 '''초판본'''이다. 그런 이유로 731을 방문한 독일 장교 내지는 731이 생기기도 전에 나온 병원 사진이나 중국 병원에서 찍은 검시 사진 같은 것이 포함되기도 하니 주의할 것.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731부대는 살아있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시청자들의 큰 충격을 줬다.1편 2편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731부대 부대장 이시이 시로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본에서 싼값에 거둬들인 혈액을 한국전쟁에서 미군에게 비싸게 팔아서 많은 이득을 얻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한 한국(조선) 독립운동가 40여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실험이 이뤄졌다'''[9]는 내용 등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10]
미국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해준 731부대 다큐멘터리 장면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이시이 시로는 독일의 나치 의사 요제프 멩겔레조차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악랄한 인물로 평가되었다. 아우슈비츠와 비견될만한 시설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노약자 및 임산부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를 요망한다.
이들이 가행한 잔혹한 행위는 아무 검색 사이트나 들어가서 731부대라고만 처도 관련 사진이 쏟아져 나온다. 흑백이라 잔혹함이 덜해보이긴 하나 어쨌든 매우 혐오스러운 광경이므로 보기 전에 각오를 해야 한다. 한국에 출판된 저서 중에는 재중동포인 진청민이 쓴 《제731부대의 진상을 파헤친 일본군 세균전》이라는 책을 참고해봐도 좋다. 《악마의 731부대와 마루따》도 추천. 일본인이 직접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어가면서 작성한 책이다.

5.1. 부대 내규


  • 물의를 일으키거나 탈주를 시도한 수용자는 24시간 이내에 실험을 종료시킨다. 이 때문에 수용자가 폭동을 일으킬 경우 아예 학살을 하기도 했다.
  • 731부대의 모든 구성원(부대지휘관 포함)은 731부대에 몸담고 있는 도중에 사망하면 그 시체는 생체실험 비교자료를 얻기 위해 부검된다.
  • 어떠한 경우라 해도 수용자는 석방시킬 수 없다. 실험이 종료된 이후의 수용자는 살아있든 죽었든 간에 무조건 소각 처리한다.
  • 만약 적과의 교전에서 패배 또는 기타 다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731부대를 해체해야 할 경우에는 모든 수용자를 정리해야 한다. 여기서 정리란 수용자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국 "정리"가 실현되었다. 7동의 마루타들은 청산가스로 살해하고 8동의 마루타들에게는 자살을 강요했다. 남성 마루타들은 2명씩 짝을 이뤄서 서로 로프 고리 속에 목을 넣고 로프 중간에 곤봉을 끼워서 두 명이 합해 돌리는 식으로 자살을 시켰다. 여성 마루타들은 목을 매게 했는데 문의 손잡이에 로프를 매단 바람에 신체를 오그리고 발을 오그리는 식으로 죽어야 했다.
  • 수용자의 탈주를 도와준 731부대원은 직위 해제는 물론이고 중죄인으로 분류되어 사형 또는 이에 준한 형벌을 받는다.
  • 처음 전입한 신병은 수용자 중 가장 품질이 떨어지는 수용자를 때려 죽여야 한다. 이는 수용자를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5.2. 생체실험 내역


'''읽기 전에, 거부감이 드는 잔혹한 내용이 많으므로 주의할 것.''' 또한 혹시 호기심이 생겼어도 해당 사진은 절대 찾아보지 않는 것을 권한다.
단편적으로 알려진 731부대 실험 내용은 소련군의 만주 공습 때 남겨져서 부대시설 소각을 맡은 부대원들이 소련군에 잡히고, 하바롭스크 재판을 받으면서 알려진 정보다. 물론 이들은 실제 실험의 핵심 내용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11]
실험의 내용을 살펴보면 '''살아있는 실험체에 탄저균, 천연두균 등의 바이러스균을 주사'''하여 결과를 지켜보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그대로 해부하여 내장을 빼내거나 심지어 동물의 내장과 교체하는 실험도 하였다. 그리고 포로의 대량 처분에 독극물을 쓰면 돈이 들기에 어떻게 빠르게 대량학살을 하기 위한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사람을 저진공에 집어넣어 죽이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12]
이들은 어떨 때는 피험자에게 '''마취를 하지도 않고'''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실험들이라는 것이 거의 대부분 동물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고, 그걸 거의 다 시도했다.
  • 총기 관통력 테스트를 한다고 산 사람한테 총을 쏘았다. 30명을 3개의 조로 나눠서 일렬로 세워놓고 실험을 했다. 팬티만 입힌 조, 평상복 조, 겹겹이 방한복을 입힌 조로서 팬티만 입힌 조는 전원 사망, 평상복은 6명 사망, 방한복은 2명 사망했다.[13]
  • 저온에서 몸의 세포가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한다고 멀쩡한 임산부를 강제동원해 몸의 일부만 얼리는 실험을 했다.
  • 사람을 통째로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는 행위도 했다는데 여기서 얻은 결론은 '인간의 70%가 물이다'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실험에 대해서는 다른 말도 있다.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건조시키는 것인 건조실험을 한 결과라는 말도 있다.
  • 영하 50도에서 몇분이 지나면 죽는가 관찰하는 실험을 했는데 그 가운데 독가스 실험은 직접 카메라로 찍었는데 독가스를 터트리고 몇 분 후에 죽는가를 실험했고, 마루타들의 몸에 전기코드를 연결한 다음 독가스를 터트려 몸의 변화 관찰, 페스트균을 터트려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를 관찰했다.[14]
  •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한 한국(조선) 독립운동가 40여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실험이 이뤄졌다.[15]
그런데 이것들은 731부대 자체가 흑역사가 돼버리는 바람에 정보 취득 출처를 숨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시이 시로 항목에서 보듯이 역정보와 정보 오염일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서 페스트균이 벼룩의 체내에 기생함으로써 벼룩의 보호막 안에서 균도 보호되고 계속 번식을 하는 이상적인 사이클을 발견했으나 이건 오늘날 방역상의 발견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뒤에 서술되어있듯이 '''이때 취득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떵떵거리고 산 경우가 많다'''. 마냥 의미없는 실험만 했다면 이런 인종들과 사법거래를 하고 승진까지 시켜줄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위 실험 중에서는 이후 상황이 재현된 것들이 여럿 있는데[16] 그 예가 원심분리기 실험과 진공 실험이다.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결과가 관찰되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도 상당수 발견되었는데 이는 사실 스너프에 준하는 몇몇 포르노 매체의 것이 검증 없이 곧바로 대입된 탓이 있다. 다른 곳에서 한 실험이 731부대에 의한 것으로 오해를 사는 것도 수없이 있다. 어떤 의미로는 731부대를 이용해서 일본 전역에 걸친 전쟁범죄 행위에 물타기를 한 것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생체실험을 하고 세균이나 기타 살상 가능한 무언가를 연구하고 뿌리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한 부대는 이 부대 말고도 여럿이 있다. 참고로 일단 관련 증언은 있다.

5.2.1. 생체 반응 실험


수용자는 '''마취 없이''' 생체 반응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당했다. 다양한 질병에 걸린 수용자를 생체 해부하였다. 아주 드물게 외부에서 초청된 사람이 참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였다. 부패 과정은 결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모두 살아있는 상태에서 시행했다.
  • 성인 남자, 성인 여자, 어린이 , 영아 모두 대상이었다. [17]
  • 생체 반응 실험은 임산부에게도 시행되었다.
  • 어떤 때는 성고문, 의사에 의해 수태되고 그 태아는 꺼내졌다.
  • 출혈의 연구를 위해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였다.
  • 절단된 팔이나 다리는 가끔 수용자의 반대편에 다시 붙여졌다.
  • 몇몇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는 얼려져 절단되었다.
  • 어떤 때는 얼렸다가 녹여서 치료받지 않은 괴저 및 부패의 영향을 연구했다.
  • 일부 수용자의 위는 외과적으로 절제되고 식도와 장을 연결하였다.
  • 일부 수용자에게서 , , 의 일부가 제거되었다.
  • 피부 표본을 얻기 위해 실험 대상의 피부를 산 채로 벗겨내었다.
  • 의식은 살아있는 반 시체 상태의 마루타는 소각 처리되었다.
  • 남자여자의 생식기를 절단하여 각각 상대방의 국부에 이식하는 성전환 수술 실험을 했다.
1945년 5~6월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제1외과 이시야마 후쿠지로와 제자들은 격추된 미군 B-29 탑성원 포로 8명을 대상으로 수술 실험을 하였다. 수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18]

5월 17일 포로 2명의 한쪽 폐를 전부 적출

5월 22일 포로 2명 중 1명에게 위 전 적출 수술. 대동맥을 압박해 지혈하고 심장 정지시킨 후 개흉 심장 마사지, 심장 수술, 나머지 1명은 상복부 절개하고 담낭을 적출, 간장의 편엽을 절제

5월 25일 포로 1명에게 뇌수술(3차 신경 차단)

6월 2일 포로 3명 가운데 1명에게 오른쪽 대퇴동맥에서 약 500cc를 채혈한 후 대용 혈액약 300cc 주사. 1명에게 폐동격 수술, 나머지 1명에게 담낭 적출, 대용 혈액 200cc 주사, 간장 절제, 개흉 심장 마사지, 심근 절개 및 봉합, 대동맥 압박 지혈

동상 실험을 했던 다니무라라는 인물은 실험 대상자들에게 야외 실습 실험을 하기도 하였다. 다니무라는 동계 위생 연구반을 조직해 텐트에서의 수술, 지혈, 수혈 등에 대해 가르치는 야외 실습을 했는데, 중국인 8명은 생체 실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 8명은 실험이나 수술이 끝난 뒤 살해돼 생체 해부용으로 쓰이거나 총살됐다고 한다.

5.2.2. 무기 실험


  • 수류탄을 시험하기 위해 인간 목표물을 다양한 거리의 다른 위치에 세웠다.
  • 인간을 대상으로 화염방사기를 시험하였다.
  • 인간을 말뚝에 묶어 세균방출폭탄, 화학무기, 폭발성 폭탄을 시험하였다.

5.2.3. 세균 실험


  • 수용자에게는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이 접종되어 그 효과를 연구했다. 물론 예방접종이라고 위장하였다.
  • 치료받지 않은 성병의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를 강간하여 일부러 매독, 임질을 감염시키고 연구하였다.
  • 질병 전파 벼룩을 대량으로 얻기 위하여 수용자에게 벼룩을 감염시키고 세균전의 유용성을 연구하였다.
  • 일부 수용자에게는 전염병이 퍼지는 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질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만두에 집어넣고 급식시켰다. 당시 수용자에게 지급되는 음식이 만두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 전염성 벼룩, 감염된 의류와 물자가 폭탄 안에 포장되어 다양한 목표물에 투하되었다. 이때 이시이 시로 중장이 직접 개발한 도자기 폭탄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도자기 폭탄은 폭발력을 고의로 약하게 만들어 안에 내장된 세균이 죽는 것을 최소화했다. 페스트, 콜레라, 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세균을 증식하는 과정에서 731부대에서도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5.2.4. 기타 생체 실험


  • 일부 수용자는 숨막혀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하여 목 매달렸다.
  • 일부 수용자는 색전이 생기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동맥 또는 심장공기가 주입되었다.
  • 일부 수용자는 신장에 말의 소변이 주입되었다.
  • 일부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결정하기 위하여 물과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다.
  • 일부 수용자는 죽을 때까지 고압의 방에 놓였다.
  • 일부 수용자는 극저의 온도에 놓이어 동상이 걸리게 하였다. 그런 조건에서 얼마나 생존하는지, 인체 살의 부패와 괴저가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로 여성 수용자에게 행해졌다.
  • 일부 실험은 온도와 화상, 인간 생존의 관계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 동물의 혈액이 일부 수용자에게 주입되어 그 효과가 연구되었다.
  • 일부 수용자를 가스실에 넣어 다양한 종류의 화학무기를 시험했다. 이것 관련해서는 731부대의 모든 생존자가 입을 닫았다. 그러나 마침 파견 근무를 하고 있었던 516부대[19]의 생존자들이 입을 열자 증언하기 시작했다.
  • 바닷물이 생리식염수를 대치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 바닷물을 몇몇 수용자에게 주사했다.[20] 또는 생리식염수가 얼마나 혈액을 대체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식염수를 주사했다고 한다. 윤동주, 송몽규 시인이 이 실험에 의해 죽었다는 설도 있다.
  • 진공 상태에서 사람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 실험했다.
  • 모성애 테스트를 하기 위해 방안에 아이와 엄마를 가두고 바닥을 후라이팬 같이 불로 온도를 올려서 엄마가 언제쯤 모성애를 잃고 아이를 깔고앉게 되느냐는 실험을 했다. 프라이팬룸 모성애 실험.[21]

5.3. 실험 외적인 살인 행각


  • 731부대의 판임관[22]과 고등관[23]들은 실험이 이미 끝났지만 살아있는, 그러나 실험으로 인해 쇠약해지거나 병들어 죽음을 앞둔 수용자들을 원판에 묶은 뒤 원판을 돌리며 그 원판에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했다. 이때 판임관들 사이에서 도박이 행해졌는데 명중되는 부위를 걸고 자신이 선택한 수용자의 신체 부위에 단검이 명중되었을 경우 그 간부가 도박에 걸어놓은 돈을 전부 획득했다.
  • 731부대의 군인들은 때때로 아직 실험하지 않은 여성 수용자들을 강간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 731부대에서는 병사들의 군기를 확립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수용자 중에 가장 병약하거나 가장 반항이 심한 수용자를 실험재료로 사용하기 전에 육모방망이로 때려서 숨지게 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수용자를 인간으로 인식한 일본군 병사가 수용자를 탈출시켜주는 것과 석방을 요구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한편 공범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조직을 배반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다.

6. 일본제국 멸망 후


731 부대에 의해 실험당한 사람들 가운데 '''생존자는 단 1명도 없다.''' 당연하겠지만 실험 자체가 생존할 확률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진짜로 죽을 때까지 실험하는 일도 흔했다. 상기한 내규에 따라 생존자도 모두 처리되었다. 독립운동가들도 실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이 실험을 주도한 자들도 이게 만행이라는 것은 알았는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진격한 소련군에게 발각나기 전에 만주 작전을 개시해서 남아있는 실험 대상자와 관련 시설을 주도면밀하게 모두 제거한 후, 실험 결과를 적은 문서 따위만 휴대한 채 성공적으로 일본으로 도주했다. 게다가 실험을 저지른 작자들의 전우회도 있다. 전우회의 이름은 각각 '정혼회', '파공회', '방우회'라고..
일본 의학계는 731부대 관계자들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731부대가 작성한 여러 논문이 있는데, 이 가운데 731부대 시절에 작성한 육군 군의학교 방역 연구 보고 게재 논문을 학위 논문으로 그대로 제출해 통과한 사람도 있었다. 731 부대가 작성한 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24]

* 조직 내에 있는 페스트균 염색법에 관한 연구(게이오, 1946)

* 파상풍과 키소이드의 예방적 효력에 대해(구마모토, 1946)

* 이질균 분류에 대해(구마모토, 1946)

* 장기 손상의 후유 기능 장해에 대해(도쿄, 1947)

* 뇌척수액 당량의 변화에 대한 연구(니가타, 1949)

731부대의 잔인한 행위는 현재 전쟁범죄로 공표되어 있는 상태다. 하지만 절반가량인 25명이나 사면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소련에 12명, 중국공산당에 13명(헌병대 이송책들까지 포함)이 잡혀서 하바롭스크, 푸순, 선양, 타이위안 등지에서 심리와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 유형 6년 강제노동형, 만주의 푸순 유형 10년 노동교화제에 처해졌다. 이때 공산권의 추운지역 강제노동형과 노동교화제도는 사형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6.1. 미국의 묵인


이들이 판치고 다니게 된 것에는 '''최대 피해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공산국가이며 냉전이라는 특성상 당시 자유진영이었던 일본이 자유진영 맹주 미국의 우방이라 미국이 덮어주기 쉬운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고,[25][26] 따라서 731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것에는 최대의 피해국인 러시아, 중국이 나서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큰 중국과 러시아가 이를 공론화해줘서 다행이라는 평이다. 중국이 일본을 GDP순위에서 추월하면서 나름 국제사회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 등으로 날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사 문제를 꺼내들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기본 시설과 극비문서 일부, 그리고 731 부대의 시설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하거나 1950년대 발굴된 731부대의 기록물에 관해 발표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과거사 청산에 소극적인 일본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번 발표 자료는 1936년부터 1945년 5월 사이에 작성된 것들로, 81권의 책자와 400여 건의 문서, 70여 건의 시청각 자료로 상당한 수준이다. 관련 기사보도
1945년 10월, 731부대장의 오른팔이었던 대령과 곤충학자인 소령, 전 육군참모 등 3명을 미 육군의 생물전연구 기관 캠프 데트릭의 샌더스 중령이 신문한 기록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전쟁범죄자의 적발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안심하고 얘기해주기 바란다 . (중략) 대통령에 제출하는 비밀 보고 자료를 작성하기 때문에..."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의 신문 보고서를 1947년 12월 12일 미 국방부에 제출한다. 그가 제시한 최종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인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의 비용과 오랜 세월을 거쳐 얻은 자료다. 이런 정보를 우리 쪽 연구소에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체실험은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총액 25만엔 정도로 얻었다. 연구에 투입된 비용을 따져보면 이는 미미한 금액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이런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은 731부대가 아닌 일본 내에서 소수의 미국인이 생체실험을 당하여 살해되었을 때 그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처벌하였지만 731부대를 비롯한 자국민이외의 사람이 생체실험을 당한 경우에는 전혀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금전까지 지급하며 보호하였다.[27] 뿐만 아니라 미국은 생체 실험 주범들에게 월급을 주고 실험 인원으로 고용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화학전 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까지 요청하였다.

6.2. 이시이 시로의 회고



이시이 시로는 1955년 12월 교토 대학 때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 기관의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하였다.[28]

“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결정하여 기온의 변화, 환경이 다르므로··· 하나는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어서 결국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계속 발전하여 우선 전쟁터가 4천 킬로미터나 넓어져···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의 신체를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는 하얼빈에··· 또 남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그 외 수차 연구실을 만들어 실시하였고 결국 324개의 연구소를 만든 겁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큰, 그러니까 마루 빌딩의 14배 정도의 연구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합대학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인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셔서 여기 계신 이시가와 교수, 그리고 도호쿠대학의 오카모토 교수 그 외 십여 명의 교수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왔기 때문에, 패전 때문에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정리해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나 있다.
하나 더하자면 생체실험과 세균전이라는게 조금 쉬쉬했을지는 몰라도, 일본 육군과 전 일본 의학계에서 광범위한 협조를 얻어 이뤄진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시이 시로의 지휘와 군부 밎 의학계의 높으신 분들의 뒷바라지 아래 인력과 돈이 광범위하게 들어간 사업이라는 건데, 이렇게 따지고 보면 731부대가 천황도 몰랐던 부대니 국화무늬가 없는 부대니 하는 말 자체가 그저 광범위한 전쟁범죄를 저거 하나로 물타기하려는 꼬리자르기용 어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 저 위에서 이시이 시로가 언급한 이시가와나 오카모토, 그리고 동상 연구반장 요시무라 등은 대체로 교토대 의학부 출신으로 1907,8년생 인물들로 부대 설립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비군인 의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을 이 부대로 보내고 이 연구결과를 기대하고 이용하려는 누군가가 의학계의 거물 중에 있었다고밖에는... 그 점에서 일본 군부의 흑역사일 뿐 아니라 일본 의학계 전체의 흑역사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6.3. 부대 건물


당시 부대 건물은 전쟁이 끝난 후 중학교로 사용되었으며, 2001년부터는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중국 하얼빈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하얼빈(哈爾賓) 핑팡취(平房區) 신장다제(新疆大街) 25호에는 당시의 현장을 일부 복원시킨 ‘침화일군 제731부대 유적지’(侵華日軍 第七三一部隊 遺跡地)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731부대는 원래 건물 80여 곳에 총면적이 6.1km2였으나 현재는 당시의 본부 건물을 유적지로 복원하였다.

6.4. 이후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여기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2011년 10월 16일 731부대 관련 극비 문서가 발견되어 추후 반응이 기대된다. 이 문서에는 중국 도시에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살포한 기록이 있는데, 살포한 날짜와 벼룩의 양, 1, 2차 감염자 수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731부대 존재 부정론자들에겐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되리라 본다. 결정적으로 2002년 8월 도쿄의 지방 법원은 처음으로 제731부대의 존재와 범죄 사실 일부를 인정하였다. 관련기사[29]
또한 일본을 경악시킨 희대의 집단 살인사건인 제국은행 사건은 731부대, 또는 731부대와 같은 성격의 부대인 100부대[30]의 관계자들에 의해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적어도 당시 사용된 독극물 만큼은 거의 확실히 731부대로부터 흘러나온 물건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일본인 안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

《일본의 야망 & 죽음의 공장》이라는 책에는 생체실험에 참여했던 자들이 미국의 지시 아래 원자폭탄 희생자들을 마루타로 삼아 실험했다는 내용도 있다. 충격과 공포. 다만 이 책은 상당히 신빙성에 의문을 가질만한 내용이 있는데 다분히 소련과 중국이 선전의 목적으로 부풀렸으면 부풀렸지 줄일리 없는 실험 희생자 발표수인 3천 명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할힌골 전투에서도 731이 활약했다는 이야기 등 다분이 증거가 박약한 이야기도 싣고 있다.[31]
현재 전시 형태로 개방되어 있다. 하얼빈시 핑팡 구에 위치해 있으며 택시를 타고 731(치싼이, 치싼야오)을 말하면 찾아갈 수 있다. 입장료는 받지 않으나 대신 신분증이 필요하다. 외국인은 여권을 가져가야 한다. 하루에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개방하며 내부의 설명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되어 있으나, 한국어로 된 오디오 해설기를 빌릴 수 있다. 마지막에는 신분이 확인된 희생자들의 이름이 쓰인 방이 있으며, 한국어로 된 이름도 찾을 수 있다.
[image]
2013년 5월 12일에 아베 신조[32] 일본 총리가 항공자위대 히가시마쓰시마 기지를 방문해서 곡예비행단 '블루 임펄스'의 많은 T-4 훈련기 중 하필이면 '''731'''이라 적힌 기체에 '''탑승해 기념사진까지 찍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연히 그랬든 의도적으로 그랬든 명백하게 도발적인 행위다. 게다가 해당 기체의 파일럿 네임에 아베 신조라고 적혀있는 걸 보면, 우연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곳에서 확인 가능 애초에 이런 사진은 촬영 전 총리 관저에서 이미 여러번 체크를 하며 가능한 모든 오해를 배제하는 형태로 찍는다. 결정적으로 이는 일본의 최대 우방인 미국에게도 엄청난 부담인데, 자료를 대가로 731 부대의 부대원을 사면해준 미국 입장에서 이 이상 731 부대가 이슈화되는 것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731 부대에 관해 극도로 말을 아끼는 미국에서조차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2014년 1월 21일, 교토대학 의학부에서 731 부대에 가담한 관계자들에게 1960년까지 꾸준히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경성제국대학에서도 1945년에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뉴스 뉴스2
2015년 중국의 한 청년이 731 부대와 비슷한 성격의 부대인 526 부대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공개했다.(#)
2016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부산에서도 생체 실험했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전파했다. #[33]
소련 국경까지도 위안부가 있었는데, 반항할 경우 비밀리에 731부대로 끌려가 세균 실험과 신체 실험 대상자가 되기도 했다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2020년에 731부대 대원 정보, 조직 기구 모습이 상세하게 담긴 문서가 발견되었다.#
한국에서는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 만행 중 하나로 제일 많이 인용되는 사례 중 하나지만 정작 국내의 연구는 서이종이 2014년에 발표한 논문 2편 정도를 제외하면 매우 지지부진하며, 언론에서 자극적인 방송을 위해 편의대로 써먹는 일만 허다하다. 731부대의 실험장면이랍시고 인용되는 사진들을 보면 일본군 다른 부대의 실험 사진이면 진짜 양호한 경우고 1928년 지난 사건의 일본인 피해자들을 뜬금포로 731 부대 마루타로 둔갑시키질 않나, 731부대의 '''구호활동''' 선전 사진을 실험 사진으로 둔갑시키고, 731부대가 창설되기 수십년 전의 1910년대의 부검 사진을 마구잡이로 인용하는 일이 허다하다. 2005년 MBC는 자신들이 러시아 기밀 자료를 입수했다면서 중국 고어영화 '''흑태양 시리즈''' 흑백판을 상영하는 초병크를 터트려 산케이신문들로부터 광병적 반일에 매몰된 한국 매스컴의 실체라고 가루가 되도록 씹혔으며 국내에서도 비판이 쏟아져 결국 사과하고 정정보도를 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거꾸로 자정 능력 없이 저질 민족주의 팔이에 여념이 없는 한국 언론의 민낯을 폭로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한 셈이 됐다.
하지만 이후로도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이규연 스포트라이트, 한겨레 등 여러 주요 매체에서 731부대 관련 왜곡 보도를 수 차례 발생시켰음이 학계 내부에서 지적되고 있다. 731부대와 관련된 1,2차 자료들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에 있기 때문에 과거 국내에 잘못된 정보들이 상당히 퍼져 있었던 탓이다. 물론 현재는 원전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과거 오용 사례들이 수정되지 않고 복사+붙여넣기 되고 있기 있다.

7. 현지 사건


1989년 신주쿠의 유명한 공원인 도야마공원(戸山公園)에 위치했던 후생성 연구청사의 건설현장 지하에서 100구가 넘는 훼손된 아시아인 유골이 발견된적이 있다. 수술및 총상자국으로 인해 훼손된것으로 확인. 이후 수년동안 일본정부와 후생성은 이 유골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아서 미스테리로 남아있었는데 이 연구청사가 있기 전에는 육군 군의학교가 있었다는점, 지하에는 731부대와 관련 깊은 연구실이 있었다는 증언등과 신주쿠 구의원 까지 나서게 되면서 결국 731부대의 생체실험 지하 연구소였다는 도시전설 비슷한 의혹이 나오기 까지 시작했지만 정부와 후생성은 끝까지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데..이 미스테리는 당시 군의관 간호사 출신이였던 이시이 라는 할머니의 증언으로 풀리게 되었는데 종전 후 미국으로 부터 생체실험 은폐를 위해 마루타들을 모두 처형시키고 지하에 매장시켜 그위에 건물을 세워 들키지않도록 했다는 것이라고 까발려 버렸다. 이후 후생성은 결국 일부를 시인했다.후생성은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기관이라 입지에 타격을 입을것을 걱정하고 계속 부정해왔다는 결론. 하지만 일본정부는 아직까지도 부정하고있다.
[image]
위 사진은 도야마 공원 근처 당시 군의학교 731부대 지하연구실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현재는 저렇게 형상만 남았는데 저게 뭔지 아는사람은 정색한다고 한다. 이지역은 원래 군의학 시설이 많았던 곳이라 현재도 근처에 도야마 병원등 의료센터가 많다. 구글맵 위치
현재 시간이 꽤지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일본 시민은 그렇게 많지않지만 알고있는 사람은 이 도야마 공원이 있는곳은 너무 무서워서 절때 살고싶지 않은 마을중 하나라고 한다.그런 이유에서 인지는 알수없지만 십 수년 전만해도 이 부근은 굉장히 어두운 동네였다. 다만 현재는 근처에 신오쿠보라는 한인타운이 있고 좀더가면 카부키쵸, 신주쿠라는 일본에서 1,2위를 다투는 대도시가 있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고 부동산가격도 높은편이다. 반면 이 도야마공원 지역 주민은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을 내기도 하는데 장난반 진담 반이라고(...)

8. 부대원


  • 이시이 시로 - 731부대장
  • 다케다노미야 츠네요시 - 1909~1992, 최종 계급은 육군 중좌. 메이지 덴노의 외손자. 즉 황족이다.[34]
  • 기타노 마사지 - 일본녹십자(미도리주지)[35][36][37] http://www.mt-pharma-korea.com 공동 설립자
  • 요시무라 히사토 -731부대 동상연구반장. 교토부립의과대학 학장
  • 가사하라 시로
  • 다나카 히데오
  • 미나토 마사오
  • 다나베 이와
  • 나이토 료이치 - 일본녹십자 공동 설립자·이시장·회장
  • 마스다 미호 - 방위대학교 교수
  • 시노즈카 요시오 - 얼마 전까지 이 사람이 731부대에 관한 증언을 하고 과거를 참회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밑의 유아사 겐도 마찬가지로 참회 및 증언하였으므로 수정함. 위 동영상에서도 부대 상황을 증언하는 사람이 이분이다.
  • 와카마쓰 유지로
  • 유아사 겐 - 시노즈카 요시오와 마찬가지로 731부대에 관한 증언 및 반성하였다. 그리고 이 사람은 유일하게 소련군에 끌려가지도, 일본에 돌아가지도 않고 현지에서 중국군에 붙잡혔다. 그리고 10년 후 일본에 돌아와서도 우익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증언 및 참회를 하다가 2010년 세상을 떠났다. ※관련사이트: https://hanew1026.blog.me/220424133967
  • 후타키 히데오
  • 기와사마 기요시- 731부대 제4부장으로 군의소장. 731부대 장군들중에서는 유일하게 시베리아행을 하고 하바로프스크 전범재판에서 25년형을 받은 인물. 여기까지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데 요코 이야기 저자의 친아버지나 친할아버지가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9. 생체실험 피해자


중국에 위치해 있던 만큼 당연히 피해자 대다수가 '''중국인'''이었고, 그 외 한국인러시아인, 전쟁 포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독립운동가나 항일운동가들도 잡혀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들 외에도 731 부대의 주둔지 부근의 지역민들도 세균폭탄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현재까지도 피해자들의 규모는 제대로 확인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조금씩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가 발굴되고 있다. 1998년 지린성 문서고에서 1,467명의 특별이송문서가 발견되었고, 이후 731 부대의 세균전으로 인한 사망자 1,500여 명의 피해자가 밝혀지면서 2010년 기준으로 3천여 명의 피해자 명단이 공개된 상태이다. #
또한 1945년 9월에 잠수항공모함을 이용해 미국 서부를 세균 폭탄으로 공격한다는 "밤의 벚꽃" 작전을 계획했으나, 8월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서 무산되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현되었더라면, 미국 서부 지역 주민 수만명이 희생되는 대참극이 벌어졌을 것이다.[38]

9.1. 한국인


한편 한국인 피해자들도 그 규모는 미상이지만 일부는 그 신원이 밝혀졌다. 731부대 죄증진열관에 공개된 피해자 명단에 따르면 현재까지 밝혀진 한국인 피해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이름
생몰년도
체포일자
출생지
활동
이기수(李基洙)
1913~?
1941.07.20
함경남도 신흥군 동흥면
동북항일연군
한성진(韓成鎭)
1913~?
1943.06.25
함경북도 경성군
독립운동가
고창률(高昌律)
1899~?
1941.07.25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독립운동가
김성서(金聖瑞·)

1943.07.31
함경북도 길주군
독립운동가
이청천(李淸泉)

1944.07

독립운동가
김안동(金安東)



독립운동가
심득룡(沈得龍)
1911~1944
1943.10.01
중국
소련공산당 첩보원
김성배(金成培)
1892~?

경상북도
동북항일연군

9.2. 특별이송


‘특별이송’은 만주 지방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대가 체포한 항일 독립운동가나 국민당 국군이나 공산군 포로, 외국의 첩보원 등을 대상으로 취조를 한 뒤 완강하게 버티는 인사들은 ‘개전의 정이 엿보이지 않는다’거나 ‘항일정신이 뼈에 사무치니 없애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이유로 생체실험 자료인 ‘마루타’(통나무라는 뜻의 일본어)로 지정해 재판도 없이 압송하는 것이다. ‘실험 재료’가 모자란 탓에 애꿎은 민간인이 헌병대에 의해 731부대로 특별이송된 경우도 있었다.[39]
다음은 한국인을 ‘특별이송’한 자료중 일부다.

시기:1939년 6월

명령자:하얼빈시 신시가헌병분대장 소좌 아카기 모리미

내용:하얼빈 교외에서 중국 공산당 아청현 위원회 소속 중국과 한국인 공작자 25명 이상이 회합하고 있음을 정찰해 전원 체포했음. 

결과:비행장에서 이시이부대가 독약을 주사해 사망.


10. 세계문화유산 등록 시도


2009년,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유네스코에 등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시도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이 제작한 기록이라 현 중국 정부와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어 중국 정부의 등록제안이 받아들여지기 어렵고 당시의 기록은 미국이 이시이 시로로 대표되는 전범들의 무죄방면 거래에 사용된 것이며, 국제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이라 중국 정부가 처음 의도한 '''인류 최초의 공식적인 생체실험을 기록한 일'''로 등록할 수 없었다.
그러자 중국 측은 계획을 바꾸어 2010년부터, 일본군하얼빈 일대에 건축한 731 부대의 주둔지를 문화 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다. 731 부대 시설은 일본이 전쟁범죄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중국에게 731 부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지 말 것을 요청한다고 해도[40], '''지금은 엄연히 현재 중국의 영토이므로 중국이 과감히 등록 제안을 할 수 있는 상태.''' 또한 2011년 상술한 실험 자료가 공개되어, "731 부대는 인류가 저지른 끔찍한 과오"라는 당위성만 인정받는다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11. 731부대 죄증진열관


현재 731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하얼빈에서는 옛 731 부대 주둔지에 ''''중국 침략 일본군 731부대 죄증진열관'''이라는 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12. 나치의 유태인 강제수용소와의 차이


731부대가 행한 인체실험은 나치의 유태인 강제수용소에서 행해진 인체실험과 자주 비교되는데, 인체실험을 했다는 사실은 같으나 엄밀히 따지면 차이가 있다. 731 부대는 기본적으로 생화학 무기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군 부대였고,[41] 인체실험은 생화학전술의 효과적 운용을 목적으로 군 내에서 조직적으로 실시되었다. 반면 나치의 강제수용소 자체는 군 부대가 아니라 유태인을 포함한 인종청소 및 절멸을 목적으로 한 시설이었고, 행해진 실험도 무기 개발 목적 보다는 의학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실험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이곳 역시 실험을 행한 이들이 친위대 소속 군의관이었고, 교도관들 또한 친위대나 국방군에서 차출된 자들이었음을 생각하면 사실상 군부에 소속된 것이나 다름 없는 수준이긴 했다.

13. 731부대가 등장하는 작품들


흑태양 731(黑太陽731, Men Behind the Sun)은 모돈불 감독의 홍콩 영화로, 1988년 1월 개봉되었다. 대한민국에는 1990년 2월 24일 개봉되었으며, 한국판 제목은 마루타이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일본제국 육군 내 비밀 생물학 병기 실험을 담당한 731 부대의 만행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731 부대가 러시아인들 및 중국인에게 행했던 잔인한 인체 실험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실제 시신을 촬영용으로 사용했다는 점과, 여과 없이 등장하는 여러 잔인한 장면들 때문에 개봉된 여러 나라에서 많은 논란을 낳았다. 흑태양 731은 공포영화, 고어 영화, 스플래터 영화(사람의 신체가 절단되거나 파괴되는 혐오스런 장면이 나오는 영화)로 분류되어 B급 영화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서울 시내 극장에서 잠깐 영화가 상영(1990년 2월 24일)되기도 했는데, 한 여성이 이 영화를 보다가 너무 놀라서 구토를 일으키는 사건도 발생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보기에는 부적절한 장면이 많이 나옴에도 역사교육을 한다는 목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단체관람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복절/3.1절특집으로 심야시간대에 공중파에서 편집본을 간간히 방영하였다. 90년대 이후의 하드고어 영화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여과없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숙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만약 자신이 천한 식인귀라고 치더라도 그들은 자신보다 휠씬 더한 오니라고.'''[42]

'''악마의 부대'''

작중 배경이 되는 마을 히나미자와의 3대 가문 중에서 실질적 지배자인 소노자키가의 부흥 배경에 731 부대가 등장한다. 메이지 유신 까지도 식인 풍습이 조금 남아있던 히나미자와는 외부에서 막대한 차별을 받았고 당시 소노자키가에서 일본군에 차출된 소노자키 소헤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노자키 소헤이는 천한 출신으로 인해 하얼빈의 전염병 시체 운반과 군 의료기관의 잡무를 담당하게 되는데, 이 부대에서는 히나미자와의 식인 풍습을 아득히 넘는 비인도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케이이치는 731 부대를 언급하며 구일본군이 히나미자와를 차별하는건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비웃고 미온은 소헤이가 담당했던건 731 부대의 주업무들 보다는 더 온정적인 연구였다고 말한다.[43] 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선에 조달할 식량을 연구할 것. 그 결과 중 인육 통조림이 성공을 거뒀다. 소노자키 소헤이는 설령 자신이 정말로 천한 식인귀라 할지라도, 인육 통조림을 만들 걸 지시한 일본군의 상부는 그보다 더한 악귀라고, 그래서 아무리 경멸당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면서 스스로를 다잡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소노자키 가문은 소노자키 소헤이가 대량으로 빼돌린 통조림을 팔아(당시는 전후시대였으므로 이것 하나도 상당히 비쌌다) 가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통조림이 사실 인육 통조림이었다는 예전 상관의 폭로[45]와 함께 부활한 차별이 히나미자와를 다시 폐쇄적인 환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케이이치의 말로는 731 부대에 대한 이야기는 TV 다큐멘터리에서 봤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크게 이슈가 된 것은 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1981년에 소련 하바롭스크 극동 군사재판의 내용을 근거로 쓴 논픽션인 《악마의 포식》의 영향 때문이었는데, 일본의 극우파들이 지금까지 줄기차게 731부대를 부인하고 있어 정말로 일본의 TV에서 방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83년 6월.
미마사카의 연구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731 부대가 나온다.
  • 모험왕
이연걸 주연의 영화로 마루타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모습과 독가스 실험, 인체 해부와 같은 장면들이 나왔다.
등장한다기 보다는 곡의 모티브가 된 것. 부제인 731이 바로 이 부대를 의미한다.
  • 슬레이어의 정규 앨범 《World Painted Blood》 2번째 트랙 〈Unit 731〉
  •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 중 731부대를 소재로 한 논픽션이 있는데[46], 원제는 위에서 언급된 '악마의 포식'.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작은 데서 시작되었는데, 작가는 처음에는 생존 부대원을 만나 이를 단순한 소재 거리로 보고 접근한게 시초였다고 한다. 그런데 파들어 가다보니 나오는 게 워낙 막장인지라, 충격을 먹고 왜 이런 일이 생겼나를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나니, 나온 게 이 작품이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작품 내용만 보면, 워낙 자극적인 소재라 과장된 부분도 있다는 평이 있다. 모리무라는 작품을 발표한 후에도 사람을 미쳐 돌아가게 만드는 전쟁의 광기나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사회적인 활동을 펴기도 했다. 그래서 본인이 직접 시민 합창단을 조직하고, 책의 제목을 딴 합창곡을 만드는데도 일조했으며, 한국에서도 한 차례 공연을 가졌다. 그때 공연했던 장소가 바로 노근리다. 그리고 《악마의 포식》과는 별개로 《신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으로 731부대의 피험자 중 생존한 사람이 복수극을 펼친다는 소설을 같이 펴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 항목에도 혼동이 있었는데, 《악마의 포식》하고는 다른 작품인 듯. 단 한국에서는 여자 마루타(...), (속) 인간의 조건 등의 괴상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해당 소설은 절판되었지만, '악마의 포식'의 경우에는 종종 거래되는 경우가 있는 듯하며 작품에 관련 사진들이 같이 있어서 당시 보던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인터넷에서는 이 두 작품이 발표된지 벌써 30년은 넘은 상태라 아직도 혼동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도 등장한다. 미래에서 와서 731부대의 존재를 알던 히틀러에 빙의한 주인공이 한국 광복군 제 4지대를 광복군 군사고문단장 오토 슈코르체니를 통해 출동시킨다. 홍사익이 일본군 내부에서 이우의 사주를 받고[47] 기동훈련을 시키면서 그 틈을 타서 하얼빈으로 숨어든 광복군은 특무로 변장해 731부대를 급습, 수많은 자료와 인체표본 등을 노획하고 실무진 다수를 납치한다.(하지만 이시이 시로는 당시 부재중이여서 끌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전 세계에 증거자료와 함께 폭로하고, 스위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미국, 영국, 독일 등에서 공개비난이 이어진다. 후일 미군이 만주로 진공했을 때 대한민국 국방군이 시설을 장악하는데, 설마 자리는 옮겼겠지, 설마 국제비난을 맞았는데 그걸 재개하진 않았겠지라는 이우의 생각을 비웃듯 멀쩡히 운영되고 있었다! 격분한 한미영독 연합군은 이시이 시로를 체포하려 했으나(이우의 말에 따르면 잡히기만 했으면 포를 떠서 하얼빈 중심가에 내걸었을 거라고, 슈코르체니도 맞장구를 치며 인간의 탈을 쓴 악마라고 깐다.) 이시이 시로는 소련으로 튄 지 오래였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등장은 없으나, 하얼빈을 장악한 연합군에게 자료들이 노획되었음이 언급된다. 자료가 공개되면서, 연합군 수뇌부가 천황제 폐지에 뜻을 모르게 되고, 히로히토가 폭살되는 계기가 된다.
  • 정현웅의 많은 작품.
    • 정현웅 장편실화소설《마루타》
주인공이 요시다 다카부미 대위 (28)인데 방첩반장(정보장교)이다. 악역은 이 부대의 지휘관인 이시이 시로 중장의 조카인 이시이 나가데 대위 (28)이며 보직은 악역답게 마루타 수송반장이다. 말이 수송반장이지 실제로는 납치가 주 업무이다.[49] 이시이 나가데는 인간성도 썩었고 머리도 일자무식인데 딱 하나 잘하는 게 있다. 바로 지상 최강의 검도의 달인으로 이시이 나가데는 맨 손일 때는 별거 없는 인물인데 손에 일본도를 쥐면 세계관 최강자로 돌변한다. 부대 검도대회가 개최되면 항상 우승한다. 둘이 직접적으로는 후미코라는 여성 직원을 사이에 두고 연적이며 이시이 나가데는 항상 요시다 다카부미와 정을 통한 여성들은 고의로 마루타로 잡아오며 요시다 다카부미를 고의로 분노하게 만든다. 결국 강숙희라는 한국인 게이샤를 이시이 나가데가 마루타로 잡아오고 그 강숙희를 요시다 다카부미가 탈출(!)시키면서 둘의 악감정은 극대화된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에서 이시이 시로는 키가 180cm의 거인으로 나온다.
  • 여명의 눈동자》에서 장하림(박상원)이 팔로군 게릴라의 습격으로 부대가 전멸하자 홀로 탈출하여 떠돌다 731부대 소속의 군의관 미다 대위(김흥기)를 만나 그의 조수로서 세균무기 개발에 종사하게 되었다. 원작의 장하림은 동경대 의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바로 관동군 방역급수부, 즉 731 부대에서 복무한다. 원작 소설의 미다 대위는 삐뚤어진 애국심을 가진 평면적인 악인이지만, TV 드라마의 미다 대위는 애국과 양심 사이에 갈등하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미다는 군의관도 아니었고, 사무라이 집안의 전투요원임에 자부심 갖고 사는 동경제대 경제학부 출신의 전술연구장교로 나온다. 이시이 시로가 이걸로 살짝 갈구기도. 장하림에게 있어서 미다 대위는 생명의 은인이면서도, 악마의 계획에 동참하게 만든 원수이기도 하다. 여기서 731부대의 생체실험 장면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을 주었다. 다만 세부적인 고증은 실제와 좀 차이가 있다. 가령 작중 731부대 요원들이 생체실험을 위해 소독하는 장면은 작중에선 현대식 첨단 설비를 이용하는 것처럼 묘사하는데, 실제로는 그런거 없었다.
  • 맥스 브룩스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에서는 여기서 좀비 관련 실험을 했고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과 중국에서 이를 바탕으로 좀비 실험을 한다는 언급이 있다.
  • 이와 비슷하게 2015년 한국에서 나온 좀비 아포칼립스×일제강점기물인 경성 좀비 탐정록에서도 좀비 사태의 원인을 731로 꼽는다.
  • 다나카 요시키창룡전에서는 부대명 언급은 없지만 산 사람을 해부하길 좋아하는 미친 늙은 일본인 의사가 나오는데 극중 설명으로 만주나 중국 여기저기서 무고한 사람을 해부하던 부대에서 악명을 떨쳤다고 나온다. 나중에 이놈은 애용하던 수술용 메스에 자신이 찔리는데 미치도록 아퍼하며 절규하자 주인공이 "남을 해부하던 놈이 정작 자신도 해부당하듯이 메스에 맞으면 아픈 걸 그리도 몰랐냐?" 라고 비웃는다. 그리고 그렇게 죽던지 말던지 해라는 듯이 놔둬서 고통 속에 천천히 죽어간다.
  • 인도네시아의 공포 영화 《데드마인》(Dead Mine, 2012)[50]에서는 수마트라 섬의 토미니 만에 있는 우나우나 섬에는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에 개발된 것으로 추정되는 폐광이 있다. 이곳은 1942년에 침공한 일본군벙커로 사용했는데 일본군 장군 야마시타 도모유키필리핀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에서 약탈보물을 숨겨놨다는 전설 야마시타 골드가 전해졌고, 미국인 갑부인 프라이슨 워런은 보물을 찾기 위해 일본인 역사학자 리에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참전한 용병 스탠리를 포함한 현지인 용병대장 티노가 이끄는 용병들을 고용한다. 고용주인 워렌과 그의 중국인 여자친구인 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고, 곧 괴생명체에 의해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아 광산 안에 갇히게 된다. 그들은 다른 입구를 찾기 위해 들어가고 광산에는 일본군 벙커치고는 무언가 특별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워런을 따라 보물을 찾으러 간 일행들에 떨어진 스탠리와 리에는 곧 부상당한 용병을 습격한 괴물을 추격하다 괴상한 모습의 일본군 생존자를 발견한다. 1945년 당시 미주리호에서 항복서명 장면을 리에를 통해 본 생존자는 그들에게 이곳의 비밀을 알려준다. 이곳은 731 부대가 주둔한 실험기지로 가스와 약물을 통해 인간병기를 만드는 계획 하에 포로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였다.[51]약의 제조법이 완성되자 일본육군 25사단장 야마시타를 포함한 일본군들이 주사를 받는다.[52]이들은 그저 파괴만[53]을 위해 만들어졌고 가스를 주입하면 바로 실전에 투입되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버려진 것. 그러나 위런 일행이 실험실에서 이 병기들을 발견하면서 실수로 그들을 깨우고 말았다. 결국 일본군 병사의 도움으로 유일하게 리에만 탈출하지만, 곧 병기들이 광산내의 지하수를 통해 호수로 나오면서 곧 야마시타에게 붙잡힌 리에는 야마시타의 일본도에 죽는 것으로 끝난다.
  • <731 바이러스> - 이 만화는 네이버에서 연재되는 베스트도전만화이며, 좀비 바이러스와 비슷한 효과의 바이러스를 731 부대가 만들었다는 가정 하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 아일랜드(일본 만화)
  • 배틀그라운드 모바일
제대로 소재로 쓴다기 보단 제작사에서 대단히 나쁜 의도로 등장시켰다. 그것도 욱일기까지 끼워넣은 것 보면 확실히 악의적이다.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매칭 시 부족할 수 있는 플레이어들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넣은 것으로 추측되는[54] 인공지능 봇의 닉네임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출시된 치장 아이템에 욱일기가 그려진 공군 모자가 있다. 본작 개발/서비스의 펍지 주식회사는 아닌 타 업체에 하청으로 맡겨서 제작하고 내놓았지만 펍지 주식회사는 이에 평소 방만 운영을 보이며 잘 관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판 의견이 나오면 매번 곧바로 삭제하거나 무시하면서 언플로 해결하려 한다며 비판을 받아왔는데 이번 만큼은 그간의 사건과 궤를 달리하는 심각한 논란임에도 관련 항의들을 무조건 삭제하고 묵살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비난이 커지고 이슈가 확대되자 결국 사과문과 약간의 보상으로 마무리 지었지만 그 동안의 무책임한 운영에 질려있던 플레이어들이 이번 사건으로 폭발하여 상당한 숫자의 이용자가 감소하고 있다. 거기다 한국회사라면 이런 일에 이렇게 처신하면 안됐는데, 엄청난 배신감까지 실망에 겹쳐서 국내에선 적지 않은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이 부대를 소재로 한 AV(영상물)도 있다...... 관동군 109부대라는 가상의 명칭으로 나오지만 사실상 731부대. 그런데 내용이 쓸데없이 무겁고 진지하다. AV 영상물이지만 731부대 생체실험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데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당시 일본군의 실상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이게 야동인지 아니면 역사 재연 다큐멘터리인지 헷갈릴 지경. 미즈타니 아오이가 출연했다. 리뷰 글
  • 높은 성의 사나이
시즌 4에서 마쓰다 장군이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731 부대 출신자이다. 아마 이시이 시로의 부하 아니면 후임 사령관인 것으로 추정. 미국인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731 부대 북미 파견대를 이끌고 부임하지만, 경매장에서 저항군에게 사살된다.
무려 본명에서 문제가 되었다. 그것도 어느 빌런의 이름으로 써서 작가가 사과하기까지 일렸다. 자세한 것은 비판 항목 참조.
  • 러시아와 미국에서 제작된 731부대와 관련된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인 ナイフの哲学(Philosophy Of A Knife)도 존재한다. 감독은 러시아인 안드레이 이소카노프. ※관련사이트: #
이 영화는 분명 러시아 영화인데, 제목 및 설명글이 전부 일본어이다. 일본인들을 엿먹이려고 만든 작품인 듯.
이 영화를 본 일본인들의 설명글을 보면......"'악마의 소행'이라면서 어떤 할아버지가 옛날의 일을 밝히는 형식(옴니버스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얼굴을 불태우거나, 진공으로 머리를 폭파하거나, 바이러스를 주사하거나,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거나 이빨을 다 뽑아 내거나, 체내에서 거대하게 성장한 기생충을 우쟈우쟈와 사타구니에서 끌어내거나, 억지로 섹스하거나, 피부을 벗겨내거나, 무슨 실험인지 잘 모르는 세계의 묘사가 가득한 249분 완결입니다."
현재 이 영화는 '고어/호러'로 분류되어 있으며, 위에서 언급한 흑태양731보다 더 잔혹하고 메스껍다. 한국에서는 어둠의 루트를 통해서 다운로드가 가능하지만, 웬만하면 보지 않는 것을 추천. 단지 이런 영화도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충분하다.

14. 참고 자료



15. 관련 문서



[1] 일본어로 '나나상이찌부타이'라 읽는다.[2] 뜻은 통나무. 사람이 아니라 재료라는 의미.[3] 이시이 시로 문서 참고. 교토대 의학부를 비롯한 일본 의학계 중진에 731부대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인권 때문에 진행할 수 없었던 생체자료를 잔뜩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4] 작가가 생존한 731부대원에 대한 인터뷰와 취재를 통해 만든 사실 기반의 소설이라고 밝혔다. 일부 세력의 위협을 우려한 안전장치로서 그렇게 설정했다는 설도 있다.[5] 적절하게도, 일제시대 형무소의 간수를 판임관 대우를 해 줬었다. 순사나 순사부장과 함께 대표적인 '판임관 대우' 공무원...[6] 참고로 이 책은 일본어 중역의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다, 고가 미네이치 생존설, 사이판 전투 전에 일본군 장성 탈영 후 행불설등 몇몇 부분에서 묘하게 픽션스러운 흔적이 있기는 하다. 731부대에 대한 서술에도 1944년에 이시이 시로가 부대장으로 실험을 주재했던 이야기나 부대의 비밀을 알게 된 일본인 기자를 마루타로 사용한 이야기, 혹은 731부대의 비밀을 6년에 걸쳐서 파해친 소련인 스파이 이와노프 소좌에 대한 이야기 등등 확인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있기는 하나, 최소한 이시이 시로의 존재나 각종 실험 상황, 부대의 규모 등은 요즘 나온 여러 연구들과도 일치하는 바가 있는지라 80년대 훨씬 이전에도 731부대 자체나 그 만행의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는 증거는 된다.[7] 천황이 모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본영이나 관동군의 알 만한 사람들이 모를 부대는 아니었다.[8] 이시이 시로는 예산 횡령 등의 문제로 좌천후에도 절강성 영파 등의 전선이나 포로수용소 등으로 발령받아서 여전히 생체실험을 했었다. 이시이 시로 이후의 부대장인 기타노 마사지 역시도 그런 부류...[9] 1998년 KBS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취재진 미국 의회도서관 미군 정보문서 참고.731부대 다큐멘터리 이 동영상 19:45초 부분을 참고하라.[10] 심지어 여기에 파생되어 731에서 얻은 세균무기를 토대로 6.25 전쟁에 사용했다는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다.# 그러나 니덤 보고서는 영국인이 작성했지만, 이를 주도적으로 배포한 국가가 중공이었으며, 미국 CIA의 입장은 미군 전쟁포로가 중국에 억류되는 동안 중공군에서 이들에게 허위진술을 한 내용이 그대로 흘러들어간 것이라 일축했기에 6.25 전쟁에서의 사용여부는 아직도 논란에 있다.[11] 실제 실험 정보는 밀실 거래를 한 미국이 공개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실무자들은 미리 기차를 타고 조선을 경유해서 일본으로 도망갔다.[12] 단, 이런다고 보통 생각대로 터져죽진 않는다. 게다가 당시 일본에게는 고진공을 유지할만한 시설을 만주 한복판에 건설할 여력도 기술력도 없었다. 현대에도 진공시설은 상당히 고가의 시설에 속한다. 우주공간에 맨몸으로 나가면 터져 죽는다 항목 참조.[13] 1991년 방영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이 실험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14]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일본군 731부대 운전병 코시 사다오가 직접 증언한 부분이다. 실제 증언[15] 1998년 KBS일요스페셜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취재진이 찾은 미국 의회도서관 미군 정보문서에 그 내용이 나와 있다. 당시 방영된 장면[16] 당연히 실험이 아니라 사고로 재현된 것들이다.[17] 마루타 실험은 주로 건장한 청년들에게 시행되었는데, 정확한 실험 결과를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으나 중국과 소련의 젊은 군인들을 상대로 사용할 무기나 세균무기를 실험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게 맞다.[18] http://www.astronomer.rocks/news/articleView.html?idxno=87957[19] 독가스 부대. 라바울의 일본군 요새에서 거듭된 포격으로 일산화탄소 중독 문제가 일어나자 대본영의 명령으로 731부대와 공동으로 일산화탄소 중독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7동의 마루타를 섬멸한 것도 이 사람들.[20] 사실 바닷물은 생리식염수를 대치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생리식염수의 염분 농도가 0.9%인데 반해,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이것의 4배에 가까운 3.5%이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표류 중인 사람이 아무리 갈증이 나도 바닷물을 마실 수 없는 것도 바로 바닷물의 염분 농도가 체내의 염분 농도보다 높기 때문이다.[21] 나치가 유태인 상대로도 하였다.[22] 위관급 장교 및 기사보조(의사)[23] 영관급 장교 및 기사(의사)[24] http://www.astronomer.rocks/news/articleView.html?idxno=87957[25] 아이러니한건 중일전쟁 당시 중국은 중화민국 즉 현재로 치면 대만이고 대만은 한국 못지않은 미국의 우방국중 한곳이다. 다만 일본은 각종만행을 저질럿던 한반도와 중국본토와는 달리 대만섬에는 꽤나 유화적으로 식민지배했다.[26] 미국에서 위안부 소녀상에 한국인 피해자는 부각되면서 중국인 피해자는 부각되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경제력도 경제력이지만 동맹관계도 무시 못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비하여 나치가 유대인에 저지른 만행이 크게 공론화되는것도 지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피해국인 이스라엘이 미국의 최대 맹방이고 유대인들이 미국 정,제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때문이다.[27] http://news.bbc.co.uk/2/hi/programmes/correspondent/1796044.stm[28] (『고 기요노 겐지 선생 기념존문집』 제3집).[29] 그러나 이것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가 아니고 일본 정부가 아닌 '지방법원'의 판결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 측에서도 이걸로 일이 해결됐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30] 이놈들은 만주국 수도인 신경, 지금의 장춘에 있었던 부대인데, 겉으로는 수의 방역 연구소라는 푯말을 달고 주로 군마 등의 전염병을 연구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가축을 이용한 인간 살상을 연구했던 놈들이라는 거다. 당연히 여기도 극비부대였다고...[31] 다만 할힌골 전투에서 모종의 세균작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32]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는 731부대가 있던 만주국의 산업부 차장과 총무국 차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장관은 만주인을 세운 바지사장이었기에 실질적인 정책은 그가 담당하였다.[33] 물론 오랜 연구를 통해 부산에서 생체 실험했다는 것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졌지만 이번 지상파 뉴스를 통해 보낸 것은 처음이다.[34] 다카히토는 전임 다이쇼 덴노의 아들이자 당시 재위 중이던 쇼와 덴노(히로히토)의 동생, 즉 '직황족'인 반면(혈통 상은 간인노미야), 츠네요시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갈라져 나온 '방계 황족(세습친왕가)'(혈통 상으로는 후시미노미야)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참고로 츠네요시와 다카히토는 황가 혈통으로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츠네요시의 어머니가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6녀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공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사촌지간이 된다. 참고로 2019년 기준 구 황족 타케다노미야 당주는 이 사람의 장남이며 막내아들(엄밀히 말하면 신적강하 직후에 출생)은 부정부패 등으로 IOC/JOC 위원 자격을 사임한 다케다 츠네카즈(竹田恒和)이며 그의 장남인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의 경우에는 이러한 집안을 팔아가면서 일본 극우 활동가로 활동 중이다. (일본 황실 문서도 참고)[35] 미쓰비시 다나베 파마 후신[36] 전범기업 미쓰비시그룹 산하의 미쓰비시 케미컬 홀딩스의 계열사 이다.[37] 미쓰비시 다나베 파마 코리아[38] 무엇보다 이로 인해 진주만 공습으로 분노해 있던 미국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어 수많은 일본인들이 보복 학살당할 가능성도 있었다.[39]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10415&code=117#csidx51d45070adae1de93024adc744a194b[40] 심지어 미국조차도 중국에게 731 부대 만큼은 절대로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 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다. [41] 상술했듯이 처음에는 급수부대였다. 1941년부터 변질된 것.[42] 이 숙부라는 양반도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며 인육 통조림을 만드는데 일조를 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걸 본인이 먹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731 부대를 자신보다 휠씬 더한 오니라고 평가한 모습에서 731 부대가 얼마나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곳인지를 알수 있다.[43] 문제는 이게 인육 통조림을 어떻게 먹을수 있는지 조사하는 곳이었다는것이다. 그 때문에 수없이 많은 시체들을 해부했다고...[44] 인간의 뼈를 간장으로 졸인거다...[45] 이 부대는 인육 통조림에 마루대 라는 표시를 해놓아 구분할 수 있도록 해놓았고 실수로라도 자신들이 먹지 않도록 했다. 이때 당시 군인들에게 보내진 인육 통조림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으며 그중에서는 간장으로 졸인 전골도 있었다고 한다.[44] 소노자키 소헤이가 전후에 팔았던 통조림 역시 절대 인육 통조림이 아니었다고 끝까지 부인했다고 한다.[46] 작가는 직접 취재한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소설처럼 쓴 것'이라 에둘러 말했다.[47] 이우와 처음 접촉했을 때 홍사익은 이우의 작전 내용을 듣고 "방역급수부는 식수를 공급하고 전염병을 예방하는 부서일 뿐입니다. 굳이 그런 곳을 공격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말하며 의아해한다. 고위 장교인 홍사익도 731 부대의 실체를 몰랐다는 설정.[48] 그래서 마루타 특별감옥 경비원들도 죄다 자기 고향에서 데려온 청년들이고, 특별감옥 총 책임자는 시골에서 농사짓던 자기 친형, 저 이시이 나가데 대위의 아버지를 임명했다. 진청민의 '일본군 세균전' 이라는 저서에 따르면 실제로도 마루타 특별감옥 책임자가 이시이 시로의 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물연구반장은 친동생이었다고...[49] 작품의 설정에서는 이 보직이 업무 특성상의 문제로 인해 이시이 시로 부대장이 일반인에게는 줄 수 없는 보직이고 자기 친척에게만 줄 수 있는 보직으로 나온다.[48] 그래서 자기 조카를 그 자리에 보직시켰다.[50] 이 영화는 아웃포스트와 상당히 유사한 구조다.[51] 영화에 나온 괴물들이 그 포로들이고 생존한 일본 군인의 흉칙한 모습도 이러한 실험 때문이다.[52] 이 병기들은 사무라이를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일본 갑옷일본도로 무장하고 있다. 갑옷은 현대식 총알로도 뚫지 못한다... [53] 이들은 적군 아군 가리지를 않는다. 같은 일본인 리에와 생존한 일본군 병사도...[54] 1부대 2부대... 이렇게 계속 수를 더하다 보니 이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