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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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에르미타주 박물관, 넵스키 대로 쪽에서 바라보이는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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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본 요새
1. 개요
2. 역사
3.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4. 황족 묘역
5.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Петропавловская крепость[1]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 강변에 있는 러시아 제국 시대의 요새. 수호성인베드로(페트로)와 바울로(파블로프)였기 때문에 두 성인의 이름이 붙여졌다.

2. 역사


표트르 대제스웨덴 해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네바 강변의 하중도에 처음 건설했다. 강국 러시아가 왜 스웨덴 해군을 경계했는지 의문일 수도 있는데 당시 스웨덴은 유럽이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으로 내흥을 겪는 동안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해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해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원래 중심지였던 키에프 지방이 몽골에 의해 쑥대밭이 된 이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국가를 개편한지 오래되지 않은 시절이었고 인접국 스웨덴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표트르 대제가 오기 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늪지대였는데, 이 도시가 거의 처음 기반을 닦은 곳이 이 요새 근처다.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광지 중 하나. 가운데의 뾰족한 건물은 성당으로, 러시아 제국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한 이후의 차르황후들의 관이 있다. 표트르 대제부터 알렉산드르 3세까지는 사후 안장되었고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러시아 혁명 이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처형후 암매장되었다가 소련 붕괴 이후 시신을 수습해 1998년 여기에 가족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 외에도 제정 시대 여러 위인들이 한때 수감되었던 옛 감옥 등 여러 구역이 다른 테마로 관리되고 있다. 성벽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내려다볼 수도 있다.

3.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외관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Петропавловский собор)은 표트르 대제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할 때 가장 먼저 착공된 곳으로, 1712년부터 1733년까지 약 21년에 걸쳐 세워졌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에 있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주교좌는 1859년 성 이사악 대성당으로 이전되었으며 현재는 카잔 대성당에 있다. 상술한 내용처럼, 이곳에 부속된 황실 묘역에는 표트르 2세이반 6세를 제외하고 표트르 대제부터 니콜라이 2세까지의 차르와 황후 및 황족들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황실 묘역'''
피장자
출생
사망
매장
비고
'''표트르 대제''' 사진




'''예카테리나 1세''' 사진




'''안나 이바노브나''' 사진




'''엘리자베타 여제'''




'''표트르 3세'''




'''예카테리나 2세''' 사진




'''파벨 1세'''




'''알렉산드르 1세'''




마리야 표도로브나
1759.10.14.
1828.10.24.
1828.11.13.
파벨 1세의 아내
엘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1779.01.13.
1826.05.04.
1826.06.21.
알렉산드르 1세의 아내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
1798.07.01.
1860.10.20.
1860.11.05.
니콜라이 1세의 아내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우측 석관



알렉산드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르 2세''' 좌측 석관




'''알렉산드르 3세''' 좌측 석관




'''니콜라이 2세'''
1868.05.18.
1918.07.17.
1998.07.17.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1872.06.06.
1918.07.17.
1998.07.17.
니콜라이 2세의 아내
마리야 표도로브나 우측 석관
1847.11.26.
1928.10.13.
2006.09.28.
알렉산드르 3세의 아내[2]

4. 황족 묘역


외관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이 완성되고 200년 가까이 흐르자 내부에 안장된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매장할 공간이 모자라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성당 내부에 안장된 황족들 중 직계가 아닌 사람들을 이장할 새로운 묘역을 마련할 필요성이 생겼고, 건축가 다비드 이바노비치 그림이 황족 묘역(Великокняжеская усыпальница)을 1896년에 설계해 1908년에 완공했다. 지붕 위에는 네오바로크 양식의 이 얹혀져 있으며 내부는 대리석모자이크, 오르몰루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새로 지어진 황족 묘역에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에서 이장한 8명을 포함해 러시아 혁명 전까지 13명의 황족이 안장되었다.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선 뒤에는 1992년 4월 29일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이 안장되었고, 1995년 3월 7일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의 부모인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3]과 빅토리아 표도르브나 대공비가 이곳으로 이장되었으며, 2010년 6월 2일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대공의 아내인 레오니다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까지 안장됨에 따라 이들 4명을 더해 총 17명이 안장되었다.
'''황족 묘역'''
피장자
출생
사망
매장
비고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1850.01.02.
1908.11.01.
1908.
알렉산드르 2세와 첫 번째 아내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4남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1875.08.19.
1877.03.04.

블라미디르 알렉산드로비치와 마리야 파블로브나의 1남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1827.09.21.
1892.01.25.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의 2남
뱌체슬라프 콘스탄티노비치
1862.07.13.
1879.02.27.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와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의 4남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1825.06.24.
1844.08.10.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의 3녀
나탈리아 콘스탄티노바
1905.
1905.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와 엘리자베타 의 2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1819.08.18.
1876.02.21.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의 1녀
세르게이 막시밀리아노비치
1849.12.08.
1877.10.12.

막시밀리앙 드 보아르네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의 3남
알렉산드라 막시밀리아노바
1840.03.28.
1843.07.31.

막시밀리앙 드 보아르네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의 1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1847.04.22.
1909.02.17.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3남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1830.07.08.
1911.07.06.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의 아내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1852.02.29.
1912.05.16.

막시밀리앙 드 보아르네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의 4남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1858.08.22.
1915.06.15.
1915.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와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의 2남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
1917.08.30.
1992.04.21.
1992.04.29.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와 빅토리아 표도르브나의 1남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1876.10.12.
1938.10.12.
1995.03.07.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와 마리야 파블로브나의 2남
빅토리아 표도르브나
1876.11.25.
1936.03.02.
키릴 블라디미로비치의 아내
레오니다 게오르기예브나
1914.10.06.
2010.05.23.
2010.06.02.
블라디미르 키릴로비치의 아내

5. 매체에서의 등장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 에서 연합군, 소련군 미션에서 등장한다. 소련군 미션에서는 성당을 욱일제국군으로부터 방어 해야 한다. 연합군의 최후의 임무에서 '''최종보스'''로 등장하여 성당이 우주왕복선 발사대로 마개조 되어(...) 등장한다. 파괴된 이후 생포된 체르덴코와 크루코프는 영구 냉동형에 처해진다.
브레이브 위치스에서 502부대의 기지 모티브가 되었다.

[1] 영어로는 St. Peter Paul Fortress라고 많이들 얘기한다.[2] 러시아 혁명 후 모국인 덴마크로 망명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 곁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으나 사후 78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3] 알렉산드르 2세의 아들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아들이자 니콜라이 2세의 사촌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