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1세

 


[image]
'''이름'''
'''파벨 페트로비치 로마노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Романов)'''
'''생애'''
1754년 10월 1일 ~ 1801년 3월 23일 (향년 48세)
'''재위'''
1796년 11월 17일 ~ 1801년 3월 23일[재위기간]
'''출생지'''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지'''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성 미하엘 성
'''왕비'''
첫 왕비 헤센-다름슈타트의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
(1773년 결혼, 1776년 사망)
계비 뷔르템베르크의 마리아 표도로브나
(1776년 결혼, 1828년 사망)
'''자녀'''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알렉산드라
엘레나
마리아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니콜라이 1세
미하일
1. 즉위 전
2. 즉위와 치세
3. 암살
4. 평가
5. 후손
5.1. 가족에 대한 일화


1. 즉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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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때인 1761년의 모습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9대 황제다. 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카테리나가 바람 피워 낳은 아들이라는 카더라가 있었으나 별 근거는 없다.[1]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 옐리자베타 여제 밑에서 자라났다.
아버지가 어머니에 의해 폐위당한 후 줄곧 황태자로 있었으나, 어머니의 정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예카테리나 2세 즉위 초에 정통성을 들어 여러 반란이 일어났기도 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파벨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당시 9세였던 파벨이 어린 점을 들어 파벨을 새 차르로 즉위시키지 않고 섭정으로 머물지 않은 채 자신이 직접 차르가 되어 통치했다.
애초에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떨어져서 성장한 데다가 여러 정치적 입장이 미묘했기 때문에 불편한 관계이긴 하였으나, 예카테리나 2세도 낳은 정이 있기 때문에, 아예 아들과 관계회복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유일한 적자 파벨을 위해 며느리 간택 때 미모를 고려하여 아들과 함께 직접 간택했고, 많은 자금을 하사하여 저택과 취미 생활이던 밀덕질에 돈을 펑펑 쓰게도 해주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관계에 타격을 준 건 '''푸가초프의 난'''이었다. 3년여를 끌며 남러시아를 초토화시킨 농민 반란에서 우두머리 푸가초프가 자신을 표트르 3세라 자처하며 파벨을 옹립하겠다고 반란의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
이 때문에 모자의 사이는 서먹해졌고,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여러 야심가들이 카더라 통신을 배포하면서 험악해졌다. 더군다나 이런 카더라 때문에 아들의 정사 개입을 원천 차단했고 파벨은 수도에서 떨어져 나와 정사에서 배제되어 예카테리나 2세 치하에 찬밥 신세였던 신하들을 측근으로 삼았다.

2. 즉위와 치세


어머니 예카테리나는 당시 유일한 적자 아들이자 정적이었던 파벨을 꺼렸기에 장손자 알렉산드르가 태어나자, 아들 부부에게서 장손자 알렉산드르, 둘째손자 콘스탄틴을 빼앗아서 자신이 길렀다. 알렉산드르는 역시나 부모와 별 정 없이 컸고 예카테리나는 10여년 전부터 파벨의 장남이자 자신의 손자인 알렉산드르를 계승자로 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으나 명분도 약한 데다가 장손자 알렉산드르도 반대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진 못하고 황태자가 뒤를 이어 파벨 1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하자마자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려 했고, 제정 러시아 궁정에 만연한 프랑스풍은 물론 외국의 풍습과 물건까지 금지하려 했다. 파벨 1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 제국에서 귀중한 것은 자신과 자신의 군대와 자신과 이야기하는 사람 뿐"이었다. 다만 그 사람도 가치 있는 것은 이야기하는 '''그 순간 뿐'''.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하긴 집안 사정이 저 모양이니 문제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1797년 대관식을 치르자마자 제위계승법을 발표해 '''장자계승원칙'''을 확립시켰다. 그전까지 러시아의 왕위계승법은 차르가 생전에 직접 후계자를 지명하는 방식이었는데 파벨 1세는 제위계승법을 서유럽처럼 법령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장자계승원칙은 이전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왕위계승자를 사전에 확정하고 정치적 혼란을 막는 조치였기에 업적이라면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2] 이것은 앞서 어머니 치세에 대한 반발로 자신을 건너뛰어 황위계승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을 극도로 증오하여 사상은 물론이고 프랑스풍의 옷까지 규제했다. 이 당시 러시아 제국 최고의 군인 중 하나로 꼽히는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기도 하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몰타를 잃어서 방황 중인 '''가톨릭''' 몰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 쳐발려서 굴복한 유럽 나라에서 대인배 취급을 받았으나 곧 러시아 빼곤 죄다 프랑스에 굴복하였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강화에 응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유럽 대륙 내에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였으며 실제로 덴마크를 러시아편으로 끌어들이는 등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해상 교역에 차질이 생긴 영국이 하이드 파커와 호레이쇼 넬슨 지휘 하에 함대를 파견했고, 덴마크를 코펜하겐 해전에서 탈탈 털어버렸다. 황제는 분개했으나 해상에서는 영국 해군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국내에선 폭압적인 정책으로 인기를 잃고 있었다. 무엇보다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것[3]으로 많은 반발을 샀다. 전대 차르이던 예카테리나 2세가 재임 시절 자신의 취약한 정통성을 군대와 귀족의 인기를 얻어 만회하려고 국가 소유의 농노까지 마구 퍼주면서 귀족의 농노제 특권을 강화시켰는데, 파벨은 일단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총신들에게 뿌려진 국가 소유 농노들을 환수하고 여제의 애첩들을(...) 궁정에서 쫓아내는 한편, 당시 1주일에 4일간 지주에게 봉사해야 하는 농노의 의무를 3일로 단축시키고 남는 시간에는 국가농장에 투입하려 했다. 단순 산술적으로 지주들의 수입이 4분의 1은 줄어드는 격. 물론 그렇다고 해서 농노에게 자비로웠던 것은 아니라 새로 개척된 러시아 남부까지 농노제를 퍼뜨리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총신들에겐 예카테리나 2세보다 더 빠르게 농노들을 분배했다.
게다가 군대에는 엘리자베타 여제 이후 독일풍이라면 알레르기 돋는 러시아군에 자신의 취미였던 프로이센 복장을 입히고 군제마저 개혁하려 했다. 이러니 공공연히 귀족들 사이에서 쿠데타 카더라가 돌았고 반대파에선 의심 많은 파벨의 의심을 더 자극하려고 아내와 아들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까지 차르를 죽이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파벨은 가족들을 궁정에서 내쫓는다. 이것이 치명타가 되는데...

3. 암살


의심이 점차 심해지면서 자기 가족들과 분리된 차르[4] 파벨 1세는 자신의 호위연대를 궁에 상주시켜 놓고 있었는데 마침 호위연대장을 출타시킨 그날밤 사건이 터졌다. 궁에는 이미 내통자가 있었고 새 차르치세에 쫓겨난 귀족들이 허락도 없이 궁에 들어온 것. 사건은 치밀하다기보다 우발적으로 일어났다. 차르가 오기전 술에 대판 취해서 서로 눈치만 보다가 차르가 옆방에 들어가자 몸으로 막고 차르에게 퇴위 서류에 사인하라고 강요했으나 차르가 화가 나서 거부하며 나가자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 시절 '애첩으로 총애받다가 쫓겨난 신하'가 술이 거하게 취해서 용감하게 파벨을 태클(?)로 넘어뜨린 다음, 금속상자로 관자놀이를 내리쳤고 놀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버닝겐 백작이 주도했다곤 하는데 영국의 지원설도 있고 단독적인 범행은 아니었다. 이미 인심을 잃은 건 오래 되어서... 후일담으로 버닝겐 백작은 소식이 알려지고 3일 연속 잠도 못자고 울고 있는 알렉산드르에게 '''"그만 울고, 통치를 하십쇼!"''' 라 일갈했다고 한다. 후에 알렉산드르는 쿠데타 가담자들을 포상하지도 않고 추방하지도 않고 그냥 면직 처리만 했다. 이것이 알렉산드르의 솔직한 심경이었을듯.
아들 알렉산드르 1세와 동생 콘스탄틴은 파벨 1세에 대한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암살까지 동의했는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하다고 하는데 최소한 아버지의 퇴위까지는 동의했고 "해치지는 않는다" 정도로의 동의가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덕분에 알렉산드르는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원래 이름은 조피 도로테아)에게 부친을 살해했다는 강한 의심과 질책을 들었고, 치세 내내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파벨 1세는 자신을 암살한다는 음모론에 빠져, 황후와 이혼하고 자신의 정부와 재혼하여 황후에게서 낳은 알렉산드르와 그의 형제들의 계승권을 박탈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므로, 알렉산드르에게는 아버지의 암살까진 몰라도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것에 대해선 반대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4. 평가


최근까지는 예카테리나 여제와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가려진 데다가 짧은 치세에 암살당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선 부정적인 평가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그가 진지하게 개혁을 원했는지는 차지하고서라도 농노제를 건드린 것만으로 영국 같은 자유주의 국가에선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고, 톨스토이도 소설에서 농부들의 대사를 통해 "파벨 황제가 살아계셨더라면 우리가 더 평안했을 텐데" 드립[5]이 나오기도 한다. 예카테리나와 알렉산드르 모두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즉위 후엔 어른의 사정으로 반동적으로 변모하는데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반면 파벨은 아버지와 닮았다(?)는 까임 덕에 제대로 된 평가나 연구가 좀 부족한 게 사실.

5. 후손


독일 출신의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1755~1776,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 루이사)와 결혼했고 파벨은 아내를 열렬하게 사랑했다. 하지만 나탈리아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웠고, 불륜 대상은 파벨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내연남은 외지로 보내졌는데 파벨은 그녀의 불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1776년(22세) 출산 중에 사망했다. 후처 마리아 표도로브나(1759~1828,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와의 사이에서 장남 알렉산드르(1777년생), 차남 콘스탄틴(1779년생) 이후 알렉산드라(1783년생), 엘레나(1784년생), 마리아(1786년생), 예카테리나(1788년생), 올가(1792년생), 안나(1795년생) 등 딸만 6명을 두다가 3남 니콜라이(1796년생)와 4남 미하일(1798년생)이 태어났다.
그러나 올가는 1795년에 요절했고 알렉산드라와 엘레나는 출산 중에 죽었다. 파벨 1세 이후로 살리카법이 개정되었는데 네 아들 중에 알렉산드르 1세는 두 딸만 남겼고, 콘스탄틴은 사생아만 있고 귀천상혼 한데다가 넷째 미하일도 딸만 넷을 두었기 때문에 로마노프 왕조의 계보는 니콜라이 1세의 계보로만 이어졌다.
초상화를 보면 파벨 1세가 추남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게 후처 마리아 표도로브나(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는 '''로마노프 가문에 뷔르템베르크의 잘생긴 외모를 가져왔다'''고 평가될 정도로 미인이었고, 심지어 단신이었던 파벨 1세보다 키가 훨씬 컸다. 덕분에 파벨 1세와 대조적으로 아들 니콜라이 1세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라 일컬어질 정도로 당대에 손꼽히는 미남이었다. 마리아 표도로브나가 로마노프 가문의 외모를 업그레이드해준 덕에(?) 니콜라이 1세 이후에 로마노프 왕조의 대공들은 장신인 것도 모자라 외모도 아주 준수했다. 심지어 이 외모에 혹해 기존의 약혼자를 차버리고(…) 로마노프 왕조의 대공과 결혼한 왕족 여성들도 있을 정도.

5.1. 가족에 대한 일화


파벨 1세가 사망한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넷째 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를 후처로 삼고 싶어했는데, 유럽의 폭도떼 두목(?) 나폴레옹 소리에 기겁한 황태후가 강력하게 반대했고, 알렉산드르 1세가 얼른 자신의 이종사촌 올덴부르크 대공의 아들에게 시집보내 버렸다.
당연히 나폴레옹에게 거절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당시 높으신 분들 예법은 직접적인 거절이나 비난을 하지 않기 때문에 40살 먹고 후계자가 급한 나폴레옹에게 전한 말이 "넷째 여동생 대신 14살 난 막내 여동생이 있는데 성인으로 장성할 때까지 기다려달라" 였다. 그나마도 이 편지가 도착한 것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쳐바르고 빈에서 프란츠 2세의 딸 마리아 루도비카 공주에게 청혼하고 나서였다. 당연히 나폴레옹 이를 꽤 불편하게 받아들였고 호사가들에겐 if 떡밥으로 "나폴레옹에게 순순히 여동생을 조공으로 바쳤으면 러시아 원정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몰락도 없고, 유럽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다" 하는 카더라가 퍼지기도 했다.
5번째 딸 안나 파블로브나네덜란드 빌럼 2세의 왕비가 되었는데, 서로 종교나 취향이 달랐지만 남편이 정교회 신앙을 존중해 준 덕분에 생활에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자식들은 결혼계약에 의해 개신교 신자로 자랐다. 유럽에서 종교색이 옅어지는 19세기부터는 종교가 다른 국가나 가문끼리 결혼을 할 경우 한 쪽이 개종하거나 자식들을 특정 종교로 키운다는 합의[6]를 하기 때문에 종교의 차이가 그 이전 시기만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벨 1세의 아버지 표트르 3세부터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까지는 모두 정교회를 믿지 않는 독일 제후국 군주 가문과 통혼했지만...

[재위기간] 5년[1] 무엇보다 아버지와 생김새와 성격이 비슷하고, 표트르 3세가 지능이 떨어져도 자기 자식도 못 알아볼 정도로 백치는 아니었다. 옐리자베타도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었고. 후대에 예카테리나 2세가 여러 남을 두고 문란한 것을 두고 공격하여 생긴 카더라로 보는 게 유력하다.[2] 당시 서유럽에서는 왕위 승계시마다 쿠데타가 일어나는 러시아의 야만성을 비웃었다. 특히 예카테리나 2세와도 서신을 교환했던 볼테르까지도 지명상속제를 두고 지명제가 아니라 점령제가 아니냐고 예카테리나를 비웃을 정도.[3] 이는 서유럽 절대왕정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 1차로 서유럽화를 추진한 군주가 표트르 대제라면 2차로 서유럽화를 추진한 군주는 파벨 1세인 셈이다. 실제로 상술한 장자계승원칙 확립과 후술할 내용처럼 러시아군에 프로이센 복장을 입힌 것 또한 파벨 1세가 러시아의 서유럽화를 추진한 것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표트르 대제와 달리 파벨 1세는 상술한 것처럼 프랑스풍을 배척했다는 것.[4] 러시아의 황제를 뜻하는 단어.[5] 톨스토이는 저서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대사로 "위대한 예카테리나 대제" 드립을 치기도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농노제를 강화한 것 때문에 소설 밖에서 개인적으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6] 대부분 아내가 남편 쪽을 따르지만 드물게 상속녀와 결혼하는 데릴사위의 경우에는 아내의 종교를 따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