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철수
1. 개요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과 잇따른 패전으로 전세가 불리해 짐에 따라 평양을 다시 내주면서 38선까지 대대적으로 후퇴한 사건.
2. 10월 19일, 국군과 유엔군의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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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0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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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불과 4달 전 서울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김일성이 버리고 간 평양에 입성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5만 명의 평양 주민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 "형제들이여, 우리는 단군의 후예요,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
2.2. 평양 점령 중 통치
평양 전투#s-4 이후 평양시는 역사적 정통성과 대한민국 헌법상 당연히 대한민국 영토이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유엔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 평양을 실효지배를 한적이 없고 국군 역시 유엔군 소속이므로 대한민국이 단독으로 통치하는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 사이에 평양의 통치권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 결국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중에 대한민국의 통치권은 38선 이북인 평양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유엔이 10월 21일 평양 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유엔군이 평양을 통치하였다.
유엔군 점령하의 평양의 광경을 묘사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
3. 중공군 개입
3.1. 중공군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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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지원 요청에 중국은 6.25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9일 펑더화이 예하 30개 사단과 38만 명의 대병력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왔다. 11월 초에는 쑹스룬 예하의 대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의 산악지대에 포진했다. 이후 중공군은 전면적 공세를 펴며 온정리 전투를 치렀고, 11월 25일부터는 60만 병력의 인해전술로 총반격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로 청천강 전투가 발발하였고, 유엔군이 이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중공군은 유엔군이 평양에서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동부전선에서는 11월 27일 미 해병대가 중공군에 의해포위되어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이어 대동강 이북의 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다.
3.2. 12월 4일[5] ,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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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의 철수 명령에 따라 대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유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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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을 철수하는 국군'''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공세에 유엔군의 지도부는 충격과 공포에 흽싸였다.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은 중공군이 평양 북방 50km를 향해 진격해 오자 공포에 휩싸였다. 워커 장군의 생각에는 평양 사수도 중요하지만 유엔군 병력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3.3. 12월 6일, 중공군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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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들어온 중공군'''
4. 평가
이 기사 참조
[1] 평양 철수를 상징하는 사진...이건만 어째서인지 한강에서 찍혔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평양 철수일인 1950년 12월 4일에 대동강에서 찍힌 사진이다. 종군기자 막스 데스퍼(Max Desfor)는 이 사진으로 1951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2] 유엔군이 평양을 철수하기 시작한 날짜[3] 국군이 맨 마지막으로 평양을 철수한 날짜[4] 국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한 날[5] 국군이 마지막으로 철수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