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흥

 



'''유재흥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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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9대 국방부 장관
유재흥
劉載興 | Yu Jae-hung
'''
[image]
제1야전군사령관 시절
<colbgcolor=#dd0000><colcolor=#fff> '''출생'''
1921년 8월 3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 시
'''사망'''
2011년 11월 26일 (향년 90세)
서울특별시
'''본관'''
강릉 유씨
'''호'''
국헌(菊軒)·자헌(自軒)
'''재임기간'''
제3대 연합본부참모총장[1]
1957년 5월 18일 ~ 1959년 2월 26일
제19대 국방부 장관
1971년 8월 26일 ~ 1973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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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유승렬, 어머니 정열
'''배우자'''
윤의상
'''자녀'''
아들 유태종, 유형종
딸 유미혜 및 2명
'''학력'''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경력'''
초대 주(駐)타이 대한민국 대사
주 스웨덴 대한민국 대사
주 이탈리아 대사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
제19대 국방부 장관
대한석유공사 사장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
성우회 부회장
성우회 회장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55기)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41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60년
'''최종 계급'''
중장
'''최종 보직'''
연합본부참모총장
'''주요 보직'''
육군제1야전군사령관
제3대 연합본부참모총장

1. 개요
2. 그의 아버지
3. 생애
3.1.1. 4.3 사건 사령관 시절
3.3. 현리전투 이후
3.4. 전쟁 이후
4. 그에 대한 평가
5. 회고록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1950년 6월 17일 38선 부근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왼쪽부터 유재흥, 존 덜레스,[2] 신성모)[3]
'''
[clearfix]

1. 개요


일본대한민국군인.
일본 나고야 출생. 고향은 나고야이지만 5살 때 귀국해서 줄곧 한국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창군기의 많은 동료들은 그가 한국어를 잘 하지 못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해방 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구 일본군에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이 때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군 장성시절과 국방부 장관시절 한국말이 서투르고 일본말이 유창해서 한국어 통역을 데리고 다녔다는 다수의 증언이 있으며, 퇴역후 외국대사로 있을 때에도 한국말보다 일본말이 더 유창했다고 미대사관 기밀문서는 기록하고 있다.
제주 4.3사건 당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이 되어 제주도에 부임하여 '''유화책을 펴서 중산간 주민들의 귀순을 유도, 제주를 수습하고 도민의 목숨을 구한 공적'''으로 긍정적 평가도 있으나, 1949년 3월 그의 부임이후에도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의한 학살과 암매장은 있었다고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는 밝히고 있다. 그의 유화책에 대한 평가가 미군사고문단에게도 나왔고,당시 제주도 도지사가 유재흥 대령이 사람이 좋은데, 사람 좋은 유재흥 대령이 떠날 경우 포악한 함병선 대령이 다시 제주도 사령관이 되면 큰일난다고 한 증언이 엄연히 남아 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덕천 전투로 제2군단을, 현리 전투에서 '''패주'''한[4] 제3군단을 책임진 지휘관인 인물이다. 현리전투는 6.25전쟁 최대의 패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군작전지휘권이 유엔사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 그의 아버지


대한제국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일본군 대좌까지 올라갔던 유승렬의 아들이다. 이걸 보면 유승렬이 당대의 인재로 인정받기는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관비유학생이 된 것 부터가 대단하다. 대한제국은 국비 유학생을 의외로 많이 보냈는데 대부분이 일본이었다. 다만 국비로 보낸 유학생들의 상당수가 반고종으로 돌아선 것은 고종의 문제라고 해도, 이들의 대부분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돌아선 것은 이 시기 대한제국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준 단적인 사례가 되었다. 친일파로 가지 않은 케이스의 대부분은 또 중도 귀국해버렸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의 국비유학생 제도는 그야말로 대실패작이었다.
하지만 관비유학생은 실패였지만 유승렬 자신이 능력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 능력을 친일에 써먹어서 그렇지...유승렬 역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였으며, 부자가 함께 한국군에서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장군 진급은 임관 시기 및 한국군 복무기간의 문제로 유재흥이 더 빨랐다.
유재흥은 1941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55기로 졸업, 1945년 종전 당시 대위까지 진급했다. 여담이지만 유승렬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아들에게 꼬박꼬박 거수경례를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 없이 단 두 사람만 있을 때도 절대 경례를 빼먹지 않았으나 말만은 놓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공석에서는 경어를 썼다는 이야기인 듯. 이런 부자 간의 전력 때문에 당시 북한에서는 "부자가 쌍으로 친일모리배다, 조선말도 변변찮은 놈" 운운하는 선전물을 뿌리기도 했다.

3. 생애



3.1. 6.25 전쟁 이전


비매품으로 나온 자서전에 의하면 우수한 성적으로 제국 육군대학을 지원했으나 종전으로 인해서 입학이 무산되었다는데 자기자랑인지. 실제 그 정도 실력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지로 대한제국 왕가가 아닌 일반인으로 육군대학을 나온 사람은 홍사익이 유일하다.
1945년 12월 미군정이 설립한 군사교육기관인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입교, 다음해 1월에 졸업하면서 구 일본군의 계급을 인정받아 남조선 국방경비대 정위(대위)로 임관했다. 이 시기에 임관한 이들답게 유재흥의 진급은 매우 빨라, 28살인 1948년대령으로서 여단장사단장을 역임할만큼 능력과 장래성을 인정받있다고 한다.[5]
또한 1949년에 부친인 유승렬의 현역 대령 임관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어 동년 제주도전투지구 사령관으로 부임, 4.3 사건 후반기의 한국군 지휘를 총괄했다.
이 시점에서의 의혹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으나, 일단 4.3사건 후반기의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지휘책임은 있다. 물론 유재흥이 맡았을때는 4.3도 어느 정도 끝물이라서 유명한 학살 사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응준이 4.3 당시 비난을 받아야 할 일.

3.1.1. 4.3 사건 사령관 시절


유재흥은 4.3 사건 관련자들과 연구자들 사이에선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미군 비밀문서 『4·3 종합보고서』[6]에서도 다음처럼 나온다.

반도들에 대한 작전은 통합부대장인 '''유재흥 대령이 제주도에 파견된 3월 2일 이후에야 실제로 성공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면계획을 채택해 '''중산간 주민에 대한 무분별한 사살을 중지토록 요구'''했다.

4.3 보고서만 해도, 유재흥은 토벌대의 학살속에서 제주도민들을 구해낸 인물로 평가된다.[7]

이날 2연대가 작전을 벌인 후 이웃마을 봉개리에 주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살아 남은 주민들은 더 이상 마을 부근에 은신할 수 없었다. 이후 주민들은 더욱 깊은 산속으로 은신해 들어갔다. 주민들이 산에서 내려온 것은 1949년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사이였다. 더 이상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내려왔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하산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이젠 막 죽이진 않는다더라’는 정보 때문이었다. 유재흥 대령의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이른바 ‘선무공작’을 펼 때이다. 앞서 하산한 사람이 산으로 올라와 이런 사실을 알려주자 비로소 내려온 것'''이다. 이는 앞서 벌어졌던 집단총살이 얼마나 무모했던 것인가를 말해준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의 작전을 함병선 2연대장이 주도한 제1기(3월 2일~3월 마지막 주)와 유재흥 사령관이 비로소 제주에 도착해 진압작전을 진두지휘한 제2기(3월 마지막 주~5월 15일)로 나눌 수 있다. '''실제 상황에 들어가면 1기와 2기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유재흥이 오기 전만해도 4.3 사건 상황은 이랬다고 묘사된다.

'''사살‧포로자 숫자에 비해 노획한 무기가 너무 적다는 점'''은 함병선 연대장이 주도한 3월 한 달 동안의 이른바 ‘섬멸전’의 성격을 말해 준다. '''사살‧포로자 중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피난해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숨어 지내던 비무장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작전은 큰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한 미군 보고서(7)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는 1949년 3월 말까지의 제주 상황에 대해 '''“지난 한 해 동안 1만 4,000명~1만 5,000명의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 중 최소한 80%가 토벌대에 의해 살해됐다.''' '''섬에 있는 주택 중 약 1/3이 파괴됐고, 주민 30만 명 중 약 1/4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소개당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유재흥 장군이 온 뒤부터는 이렇게 된다.

3월 마지막 주에야 비로소 제주에 도착한 유재흥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은 선무공작을 실시하는 한편 지금까지 해안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산악지역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유재흥 사령관은 남아있는 무장대 체포와 특히 '''‘2만 명 가량의 피난민’을 하산시키기 위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지휘권을 잡은 즉시 유(재흥) 대령은 전임자 함병선의 가혹한 작전(이 작전은 신분이나 무기의 소지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것을 포함한다)을 바꾸어 즉각적으로 사면계획을 시작하였다. 가능한 한 포로들을 붙잡아서 유 대령 자신이 직접 심문하였다. 포로들은 양심의 가책을 나타냈으며 만일 그들이 게릴라 전투요원으로 가담한 자가 아니면 음식과 담배 등을 주어서 석방'''하였다. 현재까지 이러한 방법의 결과는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석방된 포로들은 유 대령의 부대를 무기 은닉처로 안내할 것이며 그들의 동료들에게 항복하면 모두 사살 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말을 퍼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유 대령은 자신의 사면계획 하에서 석방된 포로들마다 최소한 6명씩을 데리고 왔다고 추산하고 있다. (“Visit to the Island of Cheju,” May 18, 1949, RG 319: Records of the Army Staff, Entry 85: Army-Intelligence Document File, Box 3736.)

'''제주도 사람들이 싫어하는 서북청년들의 횡포를 막으면서 ‘과거 일은 불문에 부칠테니 안심하고 내려오라’고 선무'''했고 또 실제로 '''몇 군데 그렇게 한 결과 소문이 나서 매일 몇 천명씩 내려오니까 2만 명이 금방 내려오게 되었다'''

이같은 ‘귀순자’ 증가에 관해 4월 7일부터 13일까지 제주를 시찰하고 온 이윤영 사회부장관은 “'''요즘 귀순자가 늘어가고 있는데 내가 갔다온 1주일간만 하더라도 898명이나 귀순자가 있었고 4월 13일 현재 합계 3,500명이 돌아왔었다'''. 제주도 5개 수용소에 있는 자가 3,174명이 있다”고 말했다.(��東亞日報��, 1949년 4월 15일.) 귀순자는 점점 늘어 5월 11일 현재 6,000여 명에 달했다.(��朝鮮日報��, 1949년 5월 20일.)

유재흥이 재평가받는 경우 대부분은 4.3 사건에서 보여준 처신에 근거를 둔다.
별개로 유재흥은 다른 성우회 회원과 함께 4ㆍ3사건법이 반란세력과 진압군경을 동일한 위치에 둠으로서 헌법 제39조 제2항[8]에 반한다며 헌법소원심판청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반란세력은 민간인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다.

3.2. 6.25 전쟁에서



3.2.1. 의정부 방어전


1950년 6.25 전쟁 발발 직전의 돌연한 인사이동 과정에서 의정부 북부를 경계하던 (구)수도사단(현 제7보병사단)의 사단장이 되어 의정부 방어전에 참가했다. 문제는 해당 인사이동이 한국군 10대 의혹이라고 불리는 6.25 전쟁 당시의 열 가지 의문사항 중 하나로, 6.25 전쟁 개전 직전 한국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갑자기 서로 자리를 바꿈으로서 현지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개전을 맞이했다는 의혹일 정도라서 유재흥도 그 피해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의정부 방어전의 패배 원인에서 당시 7사단장이었던 유재흥에 1차적인 책임이 있다. 후에 그가 몇 차례 겪음으로서 위키나 일부 언론 보도에서 매우 혹독한 평판을[9] 듣게 된 계기인 '''유재흥이 전선 우익을 맡은 경우 전 전선이 유재흥 담당 방면을 시작으로 붕괴하는 현상'''은 이때 처음 발생했다. 덕분에 제1보병사단은 우측면에서 침투하는 T-34 전차를 막지 못해 임진강 주진지선에서 밀리게 된다. 참고로 해당 현상은 나름 유명해서 훗날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현리 전투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유재흥 장군이 군단장일 때 발생한 청천강 전선 붕괴를 언급하며 '''이번에도 또 그랬다'''고 대놓고 섭섭해했다.
다만 고려할 점은 있는데, 당시 한국군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3개 보병연대 편성이었으나 당시 7사단은 '''개전 직전 내려진 명령'''에 따라 예비대였던 3연대가 수경사(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로 배치돼 떠났고, 대신 오기로 했던 25연대는 여전히 경상도 빨치산을 소탕하였기에 결국 개전 당시 '''2개 연대 편성'''으로 북한군을 맞이했고, 북한군의 주공축선 역시 7사단 방면이라 전차가 다수 포함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6월 26일에 있었던 당시 한국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의 무리한 반격명령을 받아 이를 수행해서 '''자신이 담당한 전선에서는 작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채병덕이 투입한 포천 방면의 부대는 숫자가 적어서[10] 의정부 근처의 축석령을 지키다가 일거에 돌파당하는 바람에 7사단의 퇴로가 차단돼서 사실상 붕괴한 것까지 감안한다면, 최소한 개전초기 그가 지휘한 7사단의 붕괴로 인한 전선붕괴는 그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당시 북한군은 4개 축선으로 공격했는데 수색 방면에서는 백선엽의 1사단이 비록 임진강 철교 폭파에 실패하긴 했지만 6월 27일까지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심지어 국군이 총반격중이라는 라디오의 개구라를 진짜인지 알고 북진하기 까지 하였다. 춘천 방면에서는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이 북한군 2개 사단을 작살내고 있었고, 동해안 방면에서 이성가가 이끄는 8사단은 일시적으로 강릉을 빼았겼지만 재탈환 하는등 1, 6, 8사단은 잘 막아 내고 있었는데 유독 의정부의 7사단만 무너진 것이다. 심지어 7사단은 개전 첫날 무너져서 북한의 전차부대가 서울 입구까지 밀고 들어 갔다가 전차가 진입하기 길이 너무 좁아 선두 부대가 후진하다가 아군의 길막으로 인해 그자리에서 돈좌되어 다른길로 다시 돌아가는데 3일이 걸린 것이지, 유재흥과 7사단이 잘 싸워서 그나마 3일을 버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사단장 백선엽은 6월 10일에 시흥의 육군 보병학교에 고급 지휘관 교육 과정을 이수하러 가서 사단장 공석중이었다. 춘천의 6사단은 비상 경계령 해제에도 불구하고 사단장 김종오의 지시로 부대원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주지 않고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동해안의 8사단은 2개 뿐이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사단장 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섣부르다. 북한군의 전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론이기 때문이다. 1사단의 개성-문산 축선, 6사단의 춘천-홍천 축선, 8사단의 동해안 축선과 달리 7사단이 담당한 의정부 축선은 그야말로 북한군의 주공 중의 주공으로, 북한군 3, 4사단과 제105땅크여단이 공격해와 전력차가 가장 극심한 축선이었다. 북한군 작전 기도상 의정부 축선으로 돌파한 주공이 한강 북방 서울에서 1차적으로 한국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이 의도였기 때문에 1사단, 8사단 담당구역은 상대적으로 압력이 덜했으며, 6사단의 춘천 축선도 한강 이남에서의 이중포위망 완성을 위해 중요한 공격축선이기는 했지만 의정부 축선만큼의 병력집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객관적 전력차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전차화기가 태부족한 2개 연대로 6개 연대와 1개 땅크여단을 집중, 돌파를 시도하는 적 주공에 맞섰을 때는 '''막는 것이 대단한 것'''이고 '''막아낸 사람이 명장'''인 것이다. 패했으니 명장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졸장인 증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11]

3.2.2. 영천 전투


지연작전기간(1950.7~8월. 한강방어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의 철수 과정)에서 수 차례의 지연전투를 비교적 양호한 지휘 끝에 그럭저럭 제대로 치른 후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의 두 번째 군단인 제2군단 군단장이 되었다. 이후 북한군의 9월 공세에서 8사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방어선이 안정돼 있던 2군단 예하 1, 6사단에서 증원병력을 쉽게 차출하기 위해 2군단으로 소속이 변경됐는데, 이에 따라 영천 전투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2군단장 유재흥 준장은 영천 시내를 피탈당한 8사단장 이성가 대령에게 사단 병력을 영천 동남쪽 금호강변에 배치하여 15사단의 남진을 저지토록 한 후,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를 차출하여 이전에 증원된 7사단 5연대, 8연대와 함께 영천 시내로 역습을 실시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습 위협과 지형상의 문제로 2제대가 후속하지 않았던 북한군 15사단의 공세탄력은 완전히 꺾이고 만다. 그리고 9월 9일 2군단장 명령에 의거, 영천 일대에 낚싯바늘 형태로 포진한 한국군 6개 연대가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완전히 둘러싸인 북한군 15사단은 4,000명 이상의 손실을 입으며 와해됐고, 한국군은 영천 시내는 물론 북방의 고지군까지 장악하면서 13일 경에는 원 방어진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영천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붕괴 위기를 드라마틱한 승리로 바꿨다는 점에서 '대회전'으로 평가된다.
유재흥 준장은 영천 전투에서 8사단을 2군단 예하로 예속변경한 육본의 의도를 잘 파악하고 예하부대에서 절약한 병력을 차출하여 역습, 영천 탈환이란 부여된 목표를 달성함은 물론 북한군 15사단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북한군은 영천 방면에서 국군의 선전으로 사실상 적화통일의 기회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정일권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재흥 준장은 군단 좌인접 미 제1기병사단장 조지 게이 소장에게 영천의 상황이 급박하니 전차 1개 소대만 빌려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는데, 왜관 정면도 전황이 좋지 않아 안 된다는 소리를 듣고 정일권에게 군단장이 돼서 고작 전차 다섯 대를 빌리러 갔다 퇴짜를 맞는 가난한 지휘관임을 한탄했다고 한다. 다행히 월튼 워커 장군이 이 소식을 듣고 게이 소장에게 증원을 지시한 덕분에 2군단은 영천 방면 역습에서 미군 전차소대를 요긴한 직사화력 플랫폼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북한군 전차에 당하기만 하다 드디어 아군 전차가 나타나자 보기만 해도 사기가 올라가는 국군 장병들은 덤.

3.2.3. 모래성


1950년~1951년 동계전역과 1951년 춘계 공세에서 유재흥은 두 차례에 걸쳐 군단장으로서 적 주공을 우익에서 받고, 먼저 붕괴해 버림으로서 전 전선이 붕괴되는 상황의 주역으로서 등장했다. 두 번 모두 그 자리에 장기간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본 참모부장/참모차장 등으로 발령을 받아 잠시 일선을 비웠거나 다른 부대의 지휘권을 맡았다가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원대복귀한 상황이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적절한 수준으로 전장 상황을 파악할 충분한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는 견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정작 1950년 동계 후퇴전 직전의 백선엽 장군은 유재흥과 비슷한 경험(1사단장에서 2군단장으로 일시 자리를 옮겼다가 1사단으로 복귀)에서 '''"더 높은 곳에서 상황을 보고 왔기 때문에 심각성을 잘 알 수 있었고, 효과적으로 후퇴 지휘가 가능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물론 백선엽 장군이 워낙 명장이라 더 비교되는 감도 있지만.
어쨌든 1950년 청천강의 도미노 현상에서는 워낙 중국군에게 의표를 찔린데다 최고지휘부인 맥아더 GHQ의 실책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을 만큼 심각했기 때문에 유재흥의 지휘책임이 딱히 거론되지는 않았다. 이 역시 당시 미국에서 반전 여론이 매우 강하였으며 맥아더는 미국 대통령과의 심각한 불화가 있었고, 차후 공개 문서에서 미국이 이미 전역을 결정하고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 등 실패를 맥아더에게 떠넘기기 위한 묻어가기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백선엽 대장1950년 청천강 패전 직전 그와의 만남에서 "전 지휘관은 원복하라"는 육군본부 명령을 '''"어, 다 토라카라 크래"'''라고 전했다고 기억했다.
1951년 1월 5일 북한군 제 2, 5군단이 원주를 뚫고 안동, 풍기 인근까지 침투하자 1950년 말 패배로 지리멸렬되었다 상태였던 국군 제 3군단을 재규합해 3주도 안 되는 시간에 원주에서 동해안까지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 제 2군단을 포위섬멸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바로 그 해, 유재흥 본인에게도 불명예가 됨은 물론 우리 전쟁사에 길이 남을 흑역사를 창출하게 되는데...'''

3.2.4. 현리 전투


1950년 10월16일 평양으로 북진 중 창설된 3군단의 지휘봉을 잡은 유 장군은 이듬해 5월 16~22일 중공군 2차 춘계공세 때에 벌어진 현리전투로 병력과 장비 60%를 상실하고 3군단 창설 8개월만에 부대가 해체되는 치욕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3.2.4.1. 현리전투 당시 실태

중공군 5월 공세 당시 3군단의 유일한 주보급로이자 퇴로인 오마치 고개 일대는 아이러니하게도 3군단이 아닌 좌인접 미 10군단의 작전구역 내에 있었다. 전술적 요충지인 오마치 고개에 방어병력이 배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악한 3군단이 지원병력을 보냈지만,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12] 전투지경선 엄수만을 주장하며 오히려 화를 내며 3군단 지원병력을 쫓아내었다. 허나 3군단이 우려한대로 중공군은 결국 미 10군단 작전구역을 통해 밀고 들어와 무방비 상태의 오마치 고개를 차단했다.
중공군 5월 공세는 5월 16일 저녁에 시작되었지만, 3군단 정면에는 적정이 없었고 미 10군단에서도 자신들의 방어선이 돌파당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전파하지 않은 탓에 3군단은 오마치 고개 차단 사실을 17일 새벽에서야 알아차렸다. 군단장 유재흥이 주재하는 작전회의는 이날 오후 열려 간단히 끝났다. 9사단이 오마치 방면으로 돌파를 시도하면 3사단이 사주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지연전을 벌이며 후퇴한다는 계획이었다.
유재흥은 오마치 탈환 및 철수 작전 실시를 일선 사단장들에게 맡기고 경비행기를 타고 군단본부가 있는 하진부리로 복귀했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이 자신의 저서에서 “이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는 내용을 놓고 유재흥이 "도망쳤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있지만원문 보기, 작전회의 불참은 21일이고, 현리서 2개 사단에게 돌파 지시를 내리고 돌아간 것은 17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현리 전투 항목으로.
당시 유재흥이 이끌던 부대는 '''본래 자신이 이끌던 병력 + 기타 패주[13] 병력으로 급편된 부대'''였는데, 이 패주병 출신들이 군단본부로 복귀하는 유재흥을 적전도주한다고 '''"오인"'''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3군단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9사단장 '''최석'''은[14] 오마치 탈환을 포기했다. 모든 중화기와 운송장비 등을 파괴하고 방태산 너머로 퇴각했다. 부득이 3사단도 그 뒤를 따랐다. 당시 9사단 군수참모였던 김재춘은 ‘군단의 패주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최석은 아예 제복도 벗어버리고 앞장서 튀었다.[15] 주변에서 총소리만 나면 꽁지 빠진 닭처럼 혼비백산했다.” 장교들도 계급장을 떼거나 겉옷을 벗어버린 채 도망쳤고 사병들은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 무전기까지 버렸다. 서울신문 기사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을 모두 해체하겠소.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정일권 장군은 최대한 패잔병과 장비를 수습하도록 하시오." [16]

<출처: 승리의 신념 - 밴 플리트 장군 일대기 p339-340>

유재흥 격하운동이 벌어지던 2000년대 말 이래로, 엔하위키와 그를 계승한 나무위키를 비롯해 여러 사이트를 통해 현리 전투 이후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유재흥을 해임하며 "다른 보직이나 알아보시오!"라며 일갈했다는 좌편향 역사왜곡을 십수년간 퍼뜨리고 있는데, 밴 플리트 본인의 회상에는 그러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와는 별개로, 밴 플리트의 고압적인 어조와 유재흥의 자세가 현리에서 우리 국군이 겪은 참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점이 이승만 박사가 지휘권을 미군에 이양하는 시기라, 미군측에서 어느 정도 '''"기싸움"'''으로 분위기를 잡을 필요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봐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결과론이지만, 미국인들을 자주 상대한 이승만이나 미 군사고문단에도 할 말 제대로 했던 김홍일, 김석원 같은 숙장들이 있었다면, 알몬드 장군의 실책을 부각시키면서 배짱있게 맞붙어, 어떻게든 우리 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이다.[17]

3.2.4.2. 상세 상황

현리 전투 패전은 우리 국군이 여건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규모 확대에 몰두했지만 정예화가 요원한 상태였으며[18] 그 외 '''창군 초기'''의 서투른 시행착오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이었던 유재흥 개인 또는 미군 둘 중 하나에게 모든 책임을 최대한 뒤집어 씌우려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게, 현리전투 당시 군단 사령부는 관할 지역 최후방(전투 지역에서 30~40km 후방)에 위치하여 있었다. 거기다 산으로 막혀 길도 나쁜 데다, 그마저 육로는 미군 10군단 관할의 오마치 고개로 연결 되어 있는 병맛진 환경이었다. 그렇다 보니 전투 지역과 사령부를 오가려면 소형 정찰기를 타고 가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와중에 전방에서 작전 회의한 후 후방의 사령부에 보고하러 돌아간 상황에서, 중공군이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면서 퇴로가 막혔다. 당시 중공군은 일점집중, 즉 일제히 한곳으로 어택땅 하는 전법을 사용했는데, 그렇게 7사단 전면으로 중공군 6개 사단이 밀고 들어왔다. 결국 머릿수에서 7사단은 밀렸고, 오마치 고개까지 밀리게 된 것.
  1. 그 상황에 군단장이 후방 사령부로 간 게 비행기 타고 도주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패주병 출신 장병들로부터 퍼지며, 전투 시작하기도 전에 장병들은 사기가 급전직하 했으며, 결국 제대로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일선 사단장 이하 장병 대부분이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후방 사령부에 돌아온 상황에서 급습을 받고 군단이 와해 되고 통신이 두절되어 버렸는데, 40km 밖에 있던 군단장이 군단이 어디 있는지, 예하 사단이나 포와 수송장비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알 턱이 있나.
2. 거기다 7사단이 돌파 되고 중공군이 밀고 들어온 루트나 오마치 고개와 대암산 방면은 미군 10군단의 관할 구역이었다. 여기에 유재흥은 사전에 중공군의 의도를 읽고 오마치 고개의 취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9사단을 근방에 예비 병력으로 주둔시켰는데, 당시 미군 10군단을 맡고 있던 "알몬드 장군"이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 그것도 한국군이 있는 걸 참을 수 없다(...)며 8군단 사령부에 항의하여 9군단을 철수 시켰다. 이렇게 본다면, 현리 전투의 참패는 한국군만이 아니라 미군측의 책임 역시 막중하며, 유재흥 장군에게 일방적으로 오명을 씌워 매도하는 건 부당하다.
3. 다만, 당시 중공군 측은 오마치 고개 일대를 차단해 포위-섬멸하려는 복안을 세워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 미군 알몬드 장군이 유재흥 장군의 예비병력 지원을 "허락했으면, 중공군의 포위망이 완성된 상황에서 악전고투" 끝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잇달은 패주로 심리적 공황에 빠진 일부 패주병 출신 병력들이 전장을 이탈하는 바람에, 적들의 철저한 포초(포위-섬멸) 작전을 계획한 중공군의 작전이 어긋나는 새옹지마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
물론 위의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개인의 책임이 면피가 안된다. 어쨌든 유재흥은 모든 책임을 1차적으로 져야할 3군단장이었으니까. 이 전투에서 유재흥은 충분히 능동적이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지휘를 하였다. 사실 현리 전투에서는 적전도주를 하지 않은 고급장교가 없고 초급 및 중견장교들이 계급장을 떼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산속으로 이리저리 튀어버린 사태였으므로 모든 걸 유재흥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겠으나, 이 혼란상에 유재흥이 아무 책임도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군단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소멸했는데 군단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 누구에게 물으란 말인가? 백선엽 장군은 이에 대해 "어떠한 지휘관이라도 당시 중공군의 집중적 공세를 국군의 부족한 화력으로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라고 평했다.(월간조선 2010.06)

3.3. 현리전투 이후


현리 전투 패전 이후 유재흥은 육군참모부장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군단장으로 한 차례 전선으로 나와, 중부전선의 고지쟁탈전에서 평범한 군단장 수준의 지휘를 보여준 후 중앙부처로 돌아가서 후방에서 휴전을 맞았다.

3.4. 전쟁 이후


1957년에 현재의 합동참모의장에 해당하는 연합참모총장이 되었고, 1959년 제1군사령관이 되었다가 1960년 4.19 혁명을 전후하여 있었던 한국군 고위 장교단의 무더기 퇴임 때 중장으로 퇴역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퇴역한 백선엽 장군과 마찬가지로 거의 10년 동안 외국 대사직을 전전하다가 1970년 대통령 특별안보보좌관직을 시작으로 정부 중앙에 복귀, 1971년 국방장관이 되었다. 이후 공직에서는 은퇴하고 대한석유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91년 성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1년 11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4. 그에 대한 평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업적을 평가하자면, 전반적으로 볼 때 상대와 병력 규모가 비슷한 경우에는 잘 싸운 편이었으나 주로 그가 있었던 곳이 '''주공'''을 받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음을 감안할 때 실력은 평균보다 좀 더 나은 정도이나 운이 더럽게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그의 악명높은 패배 모두가 '''"대놓고 약한 애갑옷 입은 애가 흠씬 두들겨 팬" 싸움'''이 아니면 '''"대놓고 약한 애아주 큰 애가 단체로 몰려와서 흠씬 두들겨 팬" 싸움'''이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다만 그나마 피할 수 있었을 상황을 피하지 못한 경우가 비교적 자주 보인다는 점도 고려는 해야 한다.
개전 초 의정부 전선의 경우 7사단 구역은 적의 주공 방향으로 전력이 집중(북한군이 가용한 120여대의 전차 중 93대, 포병 화력의 1/3, 최정예 2개 보병사단이 이쪽으로 투입)되었는데 7사단은 앞서 말한 상부의 어이없는 조치로 인해 사실상 개전 당시 2개 연대 체제인데다가 개전 직전 내려진 비상경계령 해제로 인해 다수의 장병이 외박과 외출을 나가 다수의 사고자로 인해 불과 4,500명의 병력밖에 없었고, 당연히 짓밟혔다.[19] 그리고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점령당한 영천을 탈환하기 위해 2군단장으로서 휘하의 8사단에 마찬가지로 2군단 예하부대인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연대씩 차출하여 편입시켜 공격하여 영천을 탈환했다. 당시 영천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영천이 함락되면 대구경주든 곧장 함락 위기에 처하고, 동서전선이 양단될 수 있었으며, 보급로가 차단될 수 있는 무척이나 중요한 곳이었기에 그의 판단은 적절하다고 보인다.
과거에 친일반민족행위자 행적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활동한 업적이 있더라도 어두운 과거까지 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다.
한국 밀리터리 분야 중 6.25 전쟁 부분에선 채병덕, 신성모와 함께 가장 많이 까이는 인물. 하지만 4.3 사건 연구자들에겐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왜냐하면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을 막아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리 전투 보고 욕했다가 4.3 사건 때 보여준 모습으로 다시 봤다는 의견이 많다.[20] 사실 인터넷에서 까이는 것도 실제 잘못보다 부풀려져서 알려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 심지어 현대판 원균으로 비유되기도... 그러나 능력이 부족했을 지언정 4.3 사건에서 처신을 잘 해 주민 피해를 줄였을 뿐더러 적어도 적전도주는 하지 않았는데 원균에 비유되는건 유재흥 입장에서 억울할지도 모른다.[21] 오히려 원균 -보다는 이일이나 윤두수같은 평시에는 몰라도 전시에서 이미지를 다 말아먹은 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같이 싸운 미군이 각자의 작전지역 엄수만을 주장하며 경계협조해주는 유 장군의 병력들을 쫓아냈다는 점, 당시 유장군이 끌던 부대가 본래 자신이 이끌던 병력 + 패주한 7사단 등의 병력으로 급편된 부대였는데, 이 패주병 출신들이 군단본부로 복귀하는 유재흥을 적전도주한다고 오인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이 심리적 공황에 빠진 병력들이 전장을 이탈하는 바람에, 철저한 포초전(포위-섬멸전)을 계획한 중공군의 작전이 어긋나는 새옹지마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후일담도 있는 만큼, 유재흥 장군에게 일방적으로 오명을 씌워 매도하는 건 부당하다 할 것이다.
제민일보도 유재흥 장군을 양심적이라 평가했다. 부연대장 출신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증언에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으나 김정무 군수참모와 유재흥 장군은 솔직한 증언을 했다고 한다. 더욱이 제민일보가 강조한 것은 표현인데, 유재흥 장군은 산으로 피난간 사람들을 '피난민'이라 칭했다. 군 지휘관 출신의 입에선 듣기 힘든 표현이다. 그만큼 4.3 사건의 초토화작전이 미쳐돌아갔다는 뜻이며, 유재흥 장군은 당시 제주도의 군 지휘관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양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그의 재능은 정규전보다는 비정규전에 있었던 듯.
이를 볼때 만약에 그가 6.25 전쟁 당시 받은 보직이 7사단장이나 3군단장 등 고위계급 및 보직이 아니라, 제주 4.3 사건에서 진압 및 대민 관련 업무를 한 경험을 살려 후방의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거나, 한신처럼[22] 대령 혹은 준장 계급으로 연대나 여단급 부대장 경험을 더 쌓았더라면, 적어도 약점(친일파 부친 + 현리 전투에서 패주한 3군단 지휘관)이 후대까지 널리 회자되는 상황만은 피했을 수도 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노련한 적장들을 상대로 실패를 최소화하고 + 우수한 전과까지 거둔 동료[23] 장성[24]들과 "비교"해 야전지휘능력은 감점 요인이 있을지언정, 민사부문(civilization)에서만큼은 매우 선구적인 안목과 실적을 보여줬던 '''가능성'''을 감안하면 아쉬운 부분.
국내 온라인 상에서는 오랫동안 유재흥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다. '''거의 한국판 무다구치 렌야''' 수준으로 욕먹은 적도 많다. 어찌되었건 친일 행적이 있고, 현리 전투라는 국군 최대의 흑역사에 연루되어 있는데다 말년에 전작권 환수에 반대한 일로 일부에게 미움을 받은 것도 원인이었으며, 유재흥이 활약한 제주도 4.3사건의 행적이 어떻게 된건지 반대로 '''유재흥이 제주도에서 제주도민을 학살했다''' 라고 완전히 왜곡되어 퍼뜨려진 것이 원인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주도에서의 활약상이 조명 받고 팩트 체크가 되는 동시에 어느정도 재평가가 된 편.[25]

5. 회고록


激動의 歲月 - 劉載興 回顧錄, 을유문화사 1994년 6월 1일
창군 원로 유재흥 장군의 회고록
참고로 제목부터 시작하여 인명, 지명이 모두 주석 없이 한자로만 쓰여있어 옥편(...)과 함께 읽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1988년부터 한겨레 신문이 순한글쓰기를 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책이 시대에 비해 좀 이질적이다.
유명한 다른 창군 원로의 책만 본 사람이라면, 같은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본 것이 정말 새로울 것이다. 상당수의 창군 원로들이 자신의 자사전에서 관동군/일본군 시절을 아예 없는 셈 쳤지만, 유재흥 장군은 일본군 시절을 상당 분량을 할애해서 집필했다는 게 특징이다. 특히 한일합방 당시 일본 육사로 유학 간 아버지 유승열 부터 다루기 때문에 일본 육사에 관한 부분은 몇십 년이 지난 현재 어떤 책 보다 자세하다. 또한 해방 직후 일본군 육사 출신들이 모여 어떤 식으로 상의하였고 창군 과정에 참가 했는지 잘 나와 있다. 이 때문에 창군 당시 전사를 다룬 책을 보면 이 책이 자주 언급된다.
말 많은 의정부 전투에서 7사단장으로 참전했을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있고, 2군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를 이끈 과정, 북진 당시 38선을 어떻게 통과했고 평양 입성은 여러 부대가 전공 다툼으로 동시에 들어갔다는 것도 잘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6.25 당시 최대의 패전이었던 청천강 전투와 현리 전투에 대해서도 그 어느 책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현리전투에 대해서는 군단의 목줄인 오마치 고개가 미10군단의 전투지경선 안에 있었는데 군단장인 알몬드 장군이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창군 당시 군번 1번이었던 이형근 장군의 <군번 1번 외길인생>, 군번 2번인 채병덕 장군의 <6.25전쟁과 채병덕 장군>, 군번 3번인 유재흥 장군의 이 책, 군번 5번 정일권 장군의 <정일권 회고록> 이렇게 4권 정도 읽어 보면 창군 당시와 6.25, 그리고 5.16 직전까지의 군의 모습을 최고지휘관들의 시점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다. 군사영어학교 졸업 후 이들만 대위로 시작하여(군번 4번 장석륜 포함) 창군과 동시에 지휘자로서 다른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을 지휘 하였다. 6.25 전후로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군단장을 돌아가면서 하였다.

6. 대중매체에서


  • 1985년작 KBS1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한현배가 연기했다.
  • 1989년작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선 성우 겸 배우 이종구가 연기했다.

7. 기타


[image]
2009년 5월 22일 사진. 창군동우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왼쪽부터
윗줄: 황헌친(육군준장 예편 전 1군사령부 참모장), 김병휘(육군소장 예편 전 논산훈련소장), 정진완(육군소장 예편), 박춘택 재향군인회 부회장, 노창현 재향군인회장.
아랫줄: 김계원(육군대장 예편 전 대통령비서실장)[26], 백선엽(육군대장 예편), 유재흥(육군중장 예편 전 국방부 장관), 강영훈(육군중장 예편 전 국무총리), 김종면(예 육군중장 예편 전 특무부대장)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
[1] 연합참모본부총장 직무대리 수행 (1960년 5월 31일 ~ 1960년 8월 29일).[2] 미 국무부 고문 자격으로 방한했으며, 국무장관이 되는건 1953년이다.[3] 금성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책에도 나오는 사진으로,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표지로도 쓰였다. 북한에서는 이 사진을 '''북침을 모의하는 미 국무부 덜레스놈과 남조선 괴뢰국방군의 모습'''이라고 선전한다.[4] '''유언비어'''로 인한 사기 붕괴 및 대규모 전열이탈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리멸렬되었다.[5] 유재흥 외에도 6.25 때 매봉-한석산 전투 승리를 이끈 손희선 장군은 28살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생전에 관운이 좋기로 유명했던 정일권의 경우는 채병덕 참모총장이 "(야전서 본부로 불러들인) 정일권이 언제 오나"라고 물었을만큼 주변의 기대가 컸다고 한다. 물자와 인력이 모두 부족한 상태였던 창군 초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 사실 1945년 ~ 1950년 당시에도 중국군에서 장군까지 진급한 김홍일(1898년생)이나, 일본군 대좌로 중국군과의 전투경험이 풍부한 김석원(1893년생) 같은 유능한 인재들이 있었다. 하지만, 젊은 채병덕(1915년생)이 육군을 이끌게 되면서 한참 선배였던 이들은 6.25 전쟁 발발 전까지 지휘병력 없는 교육기관장 직무를 맡거나(김홍일),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재야의 예비군 신분으로(김석원) 있었다.[6] 여기.[7] 제주도 4.3사건 진상보고서. 출처: 여기[8]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9] 데스크 검열이 없는 인터넷(예, 나무위키)에서는 원균이나 하후무에 비견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10] 방어계획상으로는 편제되어 있지만, 실제 위치는 달랐던 부대(예, 광주의 5사단)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11] 냉전기에 편찬된 전사를 살펴보면 북한군의 전력은 38도선상에서 주-조공부대들이 거의 대등하게 편성되어 있었다고 서술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공산측, 특히 소련측 사료를 참고하지 않은 한계가 있다. 냉전기에는 리델 하트도 북한군이 전차를 집중운용하지 않고 전 축선에서 균등하게 운용했다고 서술할 정도였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러시아에서 구소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이러한 시각은 차츰 논거가 허물어져 갔으며, 2000년대 초 라주바예프 보고서가 발굴되면서 완전히 설득력을 상실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작전계획에서는 7사단 방면을 주공으로 땅크여단을 집중투입, 서울에서 국군을 1차 포위섬멸한다는 의도가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라주바예프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개전 당일 출동시킨 T-34 전차 120대 중 80대를 포천에 집중시켰고, 동두천 정면에도 13대가 투입됐다. 7사단 정면에만 93대의 전차가 공격해온 것이다. 90년대 후반까지 무시되던 7사단 9연대 3대대 왕규익 중위의 25일 오전 "직접 목격한 적 전차는 모두 69대였다"는 증언이 주목받은 것도 이때부터다.[12] 원래는 2차대전 때 전공을 세운 유색인종 사단을 지휘하던 사람이었으나, 인종차별 발언 및 폭언을 일삼아 부대지휘에 실패하고 해임된 걸, 마셜 참모총장 및 맥아더 장군과의 친분 덕분에 일선 지휘관으로 복귀한 것이라고 한다.[13] 싸움에서 지고 후퇴 또는 도주한다는 말. 사실 여기에 포함된 7사단도 전쟁 초기 의정부 방어전에서 유재흥이 지휘해 싸움을 치른 부대였다.[14] 비전투병과 출신이었으며 아직 전투경험이 부족한 젊은 지휘관이었다고 한다[15] 즉, 적전도주한 '''진범'''은 이 사람이었다는 얘기...[16] http://panzerbear.blogspot.kr/2013/05/blog-post_12.html 참조[17] 참고로 월남전 파병 때는 당시 미군 파병사령관이었던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이 우리측 파병사령관 채명신 장군과의 기싸움에서(의견 개진, 한국군의 미군 배속문제, 자리 배치 등등) 눌려, 우리 군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방안을(예, 지휘체계, 중대기지전술) 많이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18] 군단장인 유재흥이 당시 31살이었다.[19] 개전초에는 2개연대였지만 최우선 지역이라 그 후의 거의 모든 예비병력이 의정부 방면으로 지원되면서 최종적으로 1개군단 규모의 병력이 유재흥의 지휘하에 배속되었다. 축차섬멸을 당해서 그렇지.[20] 부흥 카페에서 유재흥으로 검색해보면 확인가능.[21] 오히려 원균과 조금 매치가 되는 인물은 신성모인데, 신성모는 원래 해양 분야의 전문가였던 덕분에, 그 방면에서는 실무진들의 의견을 적절히 수용, 초창기 토대를 단단히 다지기도 했다.[22] 유재흥과 함께 의정부 전투에 참전했으며, 전쟁 중 사단장으로 특별 복귀한 김석원 밑에서 연대장을 지냈다.[23] 6사단 7연대장으로 상관 김종오 밑에서 원리-원칙에 입각한 '''"사전"방비'''로 개전초기 유일하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동락리 전투에서도 실무 지휘를 맡아 전승을 거두었다. 전쟁 중 전사한 것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지만, 1919년 ~ 2001년 별세로 천수를 누리셨다.[24] 매봉-한석산 전투 승리를 이끈 지휘관. 이 시기에 쌓은 전공으로 28살에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며, 훗날 장군으로 중용돼 군 전력 강화에 이바지하였다.[25] 유재흥이 알고보니 천하의 명장이었다는 식의 재평가가 아니다. 만화에나 나올 수준의 터무니 없는 악당 혹은 오물 수준의 무능한 졸장이 아닌, 상식과 나름의 수완을 갖춘 지휘관이었으며, 민사작전 분야에서는 매우 선견적인 식견을 발한 군인이었다는 것[26] 10.26 사건 당시의 박정희, 차지철, 김재규와 함께 동석한 그 사람 맞다. 그 당시의 대통령 비서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