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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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차르는 없다. 하느님도 없다!"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였던 가폰 신부가 들은 누군가의 외침

순수한 러시아민중은 인자하신 아버지 차르가 자신들을 안아주실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차르의 대답은 냉혹한 총칼이었으니...

역사만화-소련의 실험[1]

1. 개요
2. 발단
3. 성당 대신 황궁으로
4. 인민을 쏘지 말아라
5. 차르 체제의 일면
6. 기타
7. 같이보기


1. 개요


  • 러시아어 : 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Krovávoje voskresénʹje)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05년 1월 22일 러시아 제국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터진 유혈사태이다. 이 사건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타협책으로 두마를 설치하였고 표트르 스톨리핀 주도의 개혁 정책을 병행하였다. 사실상 근현대 러시아사의 '''격변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2. 발단


'''우린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억압받았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해오고 노예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린 힘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 우리는 삶 대신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당시 러시아 노동자의 탄원

농업국가였던 러시아 제국크림 전쟁에서의 처참한 패전 이후 자국의 뒤쳐진 현실을 파악하고 근대화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화와 동시에 러시아의 빈약한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농지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터무니없이 높은 액수의 돈을 토지상환금 명목으로 국가에 납부해야 했고, 이는 상당 부분 농노들을 해방시킨 귀족에게 돌아갔다. 결국 러시아의 농노 해방은 농노들을 봉건적 종속에서 해방시킨 대신 과중한 경제적 종속으로 묶어 놓는 정책인 셈이었다.[2]
당시 러시아 농민 공동체는 가족이 많을수록 땅을 더 많이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출산율이 폭증하기 시작했고 결국 다수의 농민들은 농토가 부족해지자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과도한 토지상환금과 인구 폭증으로 농촌에는 기근이 만연하게 되었으며, 반강제적으로 도시로 가게 된 농민 출신 노동자들도 저임금과 향수병, 과도한 노동 시간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제국 정부는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세르게이 비테 주도의 공업화와 철도 건설 자본을 얻기 위해 과격한 수출장려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국내에서 생산되고, 국민들이 먹어야할 농산물들마저 외부로 유출되면서 물가가 폭등하였다. 이런 비인간적인 수출 정책은 '''기근''' 중에도 계속되어서 민중의 고통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3]
결국 민중의 불만은 극에 달했으며 일부 도시노동자들은 공산주의 이념과 결합하여 강력한 반정부세력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경찰 당국은 이들을 '보다 덜 위협적인' 존재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여러 가지 비밀스런 조치를 취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조치는 '어용 노동단체'를 만든 것이었다. 차르 정권의 경찰과 정보기관들은 노동운동과 반체제 조직에 수많은 프락치들을 침투시켰으며, 이들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최대한 어용단체로 모아서 노동자들의 불만이 정권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관리하였다.[4] 그러나 이런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분노는 갈수록 과격해져서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게 되었다.

3. 성당 대신 황궁으로


1905년 1월 22일[5] 일요일, 여느 때라면 성당에 갈 시간이었으나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차르의 만수무강과 로마노프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성가를 부르며 눈길을 걸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황제의 겨울 궁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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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30만 명[6]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이콘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리고 최선두에서 행렬을 이끄는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게오르기 아폴로노비치 가폰(Георгий Аполлонович Гапон, 1870년 2월 17일 ~ 1906년 4월 10일) 신부였다. 훗날 알려지게 되지만 그는 '''비밀경찰의 스파이'''였다. 분노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덜 위협적인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가폰 스스로도 과격한 혁명보다는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믿고 첩자가 되었다. 노동자의 진정한 이익과 당국의 선한 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신부라는 직위와 고결한 이상을 내세워서 노동자들의 민심을 얻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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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가폰(1870~1906)
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4명이 부당해고를 당한[7] 것이 원인이 되어 폭동이 일어날 듯하자, 가폰 신부는 이들을 다독여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도록 만들었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비상수단이었던 것이다.

4. 인민을 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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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경찰관 두 명이 가폰 신부를 경호하며 선도하는 가운데 겨울 궁전 앞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 '''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전혀 폭력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느님이여 차르를 구하소서'라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황제 일가는 휴가를 떠나 황궁을 비우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 '''이 일제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쓰러진 행렬을 향해서 마지막으로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비무장 상태로 황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평화롭게 행진하는 군중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다. 그들의 청원을 듣거나, 어떠한 교섭도 없이.
발포를 명령한 주체는 치안 경찰 책임자인 황제의 숙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47년 4월 22일 ~ 1909년 2월 17일)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 니콜라이 2세는 수도에서 파업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도 사태해결은 커녕 가족과 같이 왕실 전용 휴가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날 그의 일기장에도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다행히 충직스러운 군인들이 이들을 물리쳤다. 하느님이시여, 이들을 보우하소서."'''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후에도 계속 파업과 소요가 발생하는데, 별다른 대책 없이 주위의 귀족들이 "발포하면 된다"고 하니까 '''검토도 안 하고 발포했다'''. 답이 없다.
인민들을 범의 아가리로 행진하도록 만든 장본인인 가폰 신부는 표트르 루텐베르크(Пётр Моисеевич Рутенберг, 1879년 2월 5일 ~ 1942년 1월 3일)라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살아서 도망쳤다. 혁명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그 동료와 함께 런던으로 망명하고, 사회혁명당에 가입한다.
1년 뒤인 1906년 러시아로 돌아왔는데, 자신을 살려 준 동료 루텐베르크에게 스스로가 경찰과 연락하는 프락치임을 스스로 밝혔고 결국 분노한 사회혁명당원들에게 암살당하였다.
사실 가폰 신부도 사전에 차르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의 노력은 기울였다. 이 편지에서 가폰은 "차르께서 노동자들을 만나서 청원을 들어 주면 노동자들은 차르에 대한 충성심을 계속 가질 것이며, 차르의 권위는 불가침으로 남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이 편지를 받지 못했거나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가폰 신부도 피의 일요일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아 니콜라이 2세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품었다. 분노한 가폰 신부는 영국 배를 빌려 무기를 러시아에 반입해 차르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지만 배가 가라앉아 실패하게 되고 결국 러시아 경찰과 손을 잡고 같이 피의 일요일 행진에 참여했던 루텐베르크에게 경찰의 첩자가 될것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고 그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니콜라이 2세가 이때까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이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

5. 차르 체제의 일면


러시아 제국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시민의식의 발달이 뒤떨어졌었고, 사건이 벌어진 당시까지도 "차르는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 있던 나라였다. 가폰 신부의 행진도, 차르에게 직접 탄원하면 "자비로우신 차르가 민중들 요구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실 거다." 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리라는 순진한 기대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느님과 같이 섬겨오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비무장 시위대를 상대로 무차별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으며, 차르 숭배 관념은 단숨에 무너지게 되었다.
당시 동쪽 변방에서 일본 제국전쟁을 하던 러시아 정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셈이 되었다. 사실 쓰시마 해전 등의 압승과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당시 일본은 국력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보다 훨씬 강대국이었던 러시아가 전쟁을 좀 더 끌었다면 일본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러시아 내부에서 터진 이 사건으로 러시아는 여유가 없어지고 서둘러서 전쟁을 끝내게 된 것이다. 1906년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세르게이 비테헌법제정과 의회인 두마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성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그 정도로는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여겨졌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8] 결국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편 한국 역시도 이 사건의 여파가 겹쳐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빠르게 항복해 버리면서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거에 무너지고 일제가 주도권을 쥐면서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5년 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흐름의 발단이 되었던 점에서 상당히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일본, 한국 더 나아가서는 세계와 역사의 운명이 흔들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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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으로 러시아가 일본에 두들겨 맞는 것을 그린 정치풍자 그림엽서[9]
결국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 중 하나가 되어 '러시아 1차 혁명' 또는 '1905년 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침 이 사건이 일어난 1905년은 러시아 혁명의 시초로 평가받는 포템킨 반란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런 엄청난 비극을 만들고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니콜라이 2세는 결국 러시아 혁명 이후 가족들과 함께 혁명군에게 처형당한다.[10][11]

6. 기타


사건 자체는 매우 우발적인 상황에 가까웠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기록한 영상이나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후대에 재현한 기록화나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의 컷신으로 남아있다.

7. 같이보기




[1] 90년대 초반에 나온 반공만화로 현재는 절판되었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였고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 이론과 현실을 크게 비판하였으며 공산주의가 생기도록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극단적 자본주의 또한 크게 비판했다.[2] 차르와 고위관료들은 폴란드 독립운동을 이끄는 폴란드계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폴란드, 벨로루시 출신 농노들에게는 상당히 가벼운 수준의 토지상환금만 얹은 반면, 러시아 고위관료들의 노른자위 땅이던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와 볼가 강 유역에 살던 농노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액수의 토지상환금을 얹었다.[3] 러시아 제국을 승계한 소련 역시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 강력한 중공업 육성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는 소련을 낙후한 농업국가에서 순식간에 강력한 산업기반을 보유한 강국으로 성장시켰고 파시스트와의 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일반 국민들, 특히 농민이 가차없이 희생됐다. 여기서 더 길게보자면, 결국 군수산업 및 중공업을 우선시하면서 소련의 정책이 지나치게 경직되게 만들었다. 이는 장기적으로 체제모순의 누적과 붕괴로까지도 이어졌다 할 수 있다.[4] 러시아 정보기관의 프락치 작전은 그 철저함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음모론의 소재가 될 정도다. 이 과정에서 민중들의 불만을 반유대주의로 돌리기 위해 날조해 뿌렸던 것이 시온 의정서.[5] 그레고리력 기준.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월 9일이었다.[6] 당시 대열을 이끈 게오르기 가폰 신부의 주장. 실제로는 대략 5만에서 6만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7] 단지 그들이 노동자단체의 회원이라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이에 대해 가폰 신부가 설립한 노동자단체는 회사 측과 정부에 노동자들을 즉각 복직시키고 해고를 명령한 관리자를 해고하라고 요구했지만 회사측은 노동자단체의 요구를 묵살해버렸고, 1905년 1월 15일 600명의 노동자들이 푸틸로프 공장 앞에 모여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 보장, 노동자 조직의 인정과 더불어 사측의 협상대상으로의 인정 등을 요구했지만 사측에서는 이것마저도 묵살해버렸다. 다음 날(1월 16일)에는 페테르부르크의 총파업을 위한 파업대책위가 만들어지고 파업이 시작되어, 푸틸로프사의 1만2천 명의 노동자들도 파업에 나서게 된다. 1월 17일에는 페테르부르크 지역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1월 20일과 21일에는 페테르부르크 전역에서 총파업이 실행된다.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동참하면서 교통, 우편, 신문 등이 모두 중단됐고 도시 전체는 기능이 아예 마비돼버렸다. ## [8] 참고로 이것도 일본보다 한참이나 늦었다. 일본은 이미 1889년 근대적 헌법의회제도를 시작했다.[9]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때리는 작은 망치 메이지 덴노와 멍한 표정으로 맞는 커다란 모루 니콜라이 2세,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옷차림으로 중간에 끼여 고통 받는 고종 황제.[10] 니콜라이 2세 부부와는 다르게 자녀들은 정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나이도 어렸기에 세간의 많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11] 본래 혁명 당시 차르 일가는 영국으로 망명하고자 하였고, 실제로 영국의 조지 5세가 니콜라이 2세의 사촌이였기에 망명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영국 시민들에게도 니콜라이 2세는 자국민을 학살한 폭군으로 각인되어 있었으며, 섣불리 망명을 받아들였다가 반 국왕 감정이 강해지게 되면 영국 왕실의 안위도 위험했기에 영국도 차르 일가의 망명을 받아들이기를 포기했다. '''물론 차르 일가가 처참하게 죽을 줄은 전혀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