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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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캄보디아에 존재하던 프랑스의 보호령이다. 1887년부터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다.
2. 역사
캄보디아는 19세기 당시 태국과 베트남에 의해 고초를 겪고 있었다. 두 국가 모두 서부와 동부에서 캄보디아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영토를 빼앗기도 했다. 이에 지친 노로돔 국왕은 베트남 남부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베트남이 점령당한 후인 1863년 8월 11일 보호조약이 체결되며 프랑스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노예제를 폐지하는 등 많은 개혁을 시도했다. 1887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고, 이후 태국으로부터 영토를 뜯어서 주거나 베트남으로부터 빼앗긴 지방도 되찾아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사실 캄보디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렇다 할 지하자원도 없고 해서 이용가치가 별로였기 때문이다. 이런 동네를 개발할 바에는 차라리 옆동네 베트남(특히 코친차이나)이 훨씬 인프라도 괜찮고 인구도 많으니 프랑스 입장에서는 거기야말로 좀 더 이득이었다. 그나마 농업이 조금 성장했고 도로와 철도가 깔렸지만 전체 국민 중 95%가 빈농으로 전락했으며, 교육 정책 역시 '가르치면 오히려 반항한다'며 소홀히 했고, 그나마 귀족 계급의 사람들 정도만 고등교육을 받았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 민중들은 프랑스는 물론 중국, 베트남, 태국, 자국의 지식인층 등으로부터 '노예근성 쩐다'며 멸시당하고 차별당했으며, 그 때문에 독립운동이나 민족주의 운동도 상당히 늦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당시를 경험한 캄보디아 사람들은 오히려 어리석게도 프랑스 식민지 때를 그리워한다고 했는데, 식민지 시기 동안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용하고 멍청한 평화가 오히려 캄보디아의 진보에 발목을 붙잡아 훗날의 비극적인 역사로 이끄는 원인이 됐다.
1936년에 와서야 크메르어 신문이 나오는 등 이때서야 민족주의가 출현했으며, 불교기관 소속 사립학교와 프놈펜의 프랑스어 고등학교, 독립언론 <나가라바트>가 대표적인 원동력이었고, 손 녹 탄 같은 독립영웅들도 조금씩 나왔다. 한편 그 무렵부터 캄보디아는 일본을 우러러 보기 시작했으며, 1940년에 일본 제국이 캄보디아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고, 일본은 프랑스의 지배를 인정했지만, 군대주둔권을 이용해 사실상 캄보디아를 단독으로 지배했다.
이에 프랑스는 독립운동가 탄압에 나서며 관련 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인 뒤, <나가라바트>를 검열시켜 1942년에는 폐간시켰다. 이에 손 녹 탄 등 지도부가 일본으로 도망가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캄보디아 민중들은 일본을 동경하자 프랑스가 나서서 크메르 문자를 로마자 '꾸르뜨나'로 개편하는 등 일본에 대한 저항을 선동했지만, 쯔놈과 다르게 크메르 문자는 표음문자인데다가 동남아에서 쓰이는 문자 중에서 가장 일찍 쓰였던 문자였기 때문에 이에 자부심이 있던 민중들은 민족적 자존심을 구겼다며 민심은 일제 쪽으로 기울었다. 1945년 3월 명호작전을 통해 프랑스를 축출하고 프랑스 거류민들을 억류한 뒤, 캄보디아 왕인 노로돔 시아누크에게 독립을 중용해 독립시켰다. (캄보디아 왕국(괴뢰국)) 하지만 이조차도 그저 일본의 괴뢰국 신세에 불과했고, 게다가 5달 후 일본이 패망해서 독립은 취소되었고, 프랑스가 돌아왔다. 비록 형식적인 독립이었지만, 캄보디아인들은 독립을 맛 본 이후로 격렬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결국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협상하기 시작했으며 의회가 설립되고 헌법도 선포되었다. 1953년에 시아누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정식 승인받아 캄보디아 제1왕국으로 재탄생하였다.
3. 출처
- 먼나라 이웃나라(가로세로 세계사)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114~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