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역사

 






캄보디아의 역사.
캄보디아역사를 다루는 문서.
1. 고대: 쩬라, 크메르 제국
2. 중세: 후기 크메르 왕국
3. 근현대: 프랑스 식민 시기와 독립
5. 크메르 공화국 (1970~1975)
6. 크메르 루주의 지배 (1975~1979)
7. 베트남 통치와 캄보디아 내전 (1979~1993)
8. 캄보디아 왕국 (1993~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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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쩬라, 크메르 제국


'''역사로 따진다면 정말 굴곡이 많은 나라이다.'''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로 2,000년 전 프놈(រភ្នំ, 부남, 扶南)이라는 나라가 세워졌는데, 사실 이 나라 구성원이 현대 캄보디아인의 선조(오스트로아시아인인지 아니면 참파와 동일한 오스트로네시아인인지 논란이 있으며, 둘 다 살던 다민족 국가란 설도 있다고 한다. 프놈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고, 상업으로 잘 나갔으나 비교적 내륙 쪽에서 시작된 쩬라(ចេនឡា, 진랍, 眞臘) 왕국에게 밀리기 시작한다. 진랍은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이후 부남을 밀어냈으며, 이때부터 확실한 크메르족의 역사가 시작된다. 8세기 쩬라는 내륙의 육쩬라(陸眞臘, 육진랍)과 바닷가의 수쩬라(水眞臘, 수진랍)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수쩬라는 인도네시아자바 섬에게 시달리곤 했으며, 아예 자바에게 복속되기도 했다. 그러다 9세기에 자야바르만 2세(ជ័យវរ្ម័នទី២)가 자바로부터 독립한 후 육진랍까지 통합해 9세기 앙코르 왕조의 크메르 제국이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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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워진 '''크메르 제국은 동남아를 호령하고 유구한 문명을 이룩한 대제국이었는데,''' 특히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 및 자야바르만 7세(1181~1218) 재위기가 황금기였다. 특히 수리야바르만 2세는 정복전쟁을 거듭하여 현재의 태국, 라오스, 베트남 남쪽에 해당되는 지역까지 넓혔다. 캄보디아의 대명사인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유적들도 이 시기 세워진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화려했는데 금과 보석으로 도배를 했다는 중국 사신 주달관의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자야바르만 7세는 영토 곳곳에 역참과 병원을 짓는 등 인프라 건설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엄청난 절들을 지으면서 13세기에 국력이 좀 약화되는 듯 하다가, 왕위 친탈권이 심해지면서와 동시에 태국(씨암)에 새로 만들어진 아유타야 왕조는 1351년에 크메르제국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면서 점차 쇠락했다. 2년 후에는 크메르 황실의 지원을 받던 파 응움 왕도 위성국가인 라오스(란쌍)을 자립시켰으며, 왕조가 기울어 가면서 잘 가꾸어진 관개 시설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자연 속에 묻혀졌다. 이런 식으로 지금의 캄보디아는 코친차이나, 타이의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상실했다. 결정적으로 1431년 태국의 침공으로 수도 앙코르가 대파되어 역병이 들끓는 앙코르를 버리고 천도함으로써 크메르 제국은 사실상 종결된다.[1]

2. 중세: 후기 크메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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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듯, 16세기까진 여전히 강국으로서 란상왕국, 아유타야, 베트남 레왕조 등과 동등했으나, 같은 시기 내부에서부터 썩어가면서 캄보디아는 '''암흑시대로 일컬어질 정도로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기 시작한다.'''[2]
앙코르 천도 후 크메르는 몇 군데를 거쳐서[3] 짝독목(현재 수도인 프놈펜)까지 천도했다. 설상가상으로 침공하러 온 중국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두 장군을 역관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에 조공을 보내느라 국고가 바닥이 나버렸다.
1593년에 미얀마 퉁구 왕조가 아유타야를 침략하자, 오히려 아유타야는 화풀이 겸 세력 과시를 위해 크메르를 침략했다. 그러나 속부터 썩어 온 크메르군은 아유타야에 변변한 대응조차 못한 채 점차 무너졌고, 사실상 아유타야의 속국 취급을 받았다. 그러자 크메르의 지배층은 '이이제이' 수법을 이용해 필리핀스페인인이나 마카오포르투갈용병을 고용해서 공격하기도 했지만, 아유타야 왕조의 흑태자 나레쑤언에게 대패하고 만다. 그래도 캄보디아는 무역으로 먹고살긴 했으며, 내륙의 수도 프놈펜보단 바닷가의 쁘르이 노꼬(ព្រៃនគរ)를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졌다.
1620년에 베트남 레왕조로부터 구원군을 불러다가 아유타야를 몰아내도록 했으나, 남한테 도움만 받는 습관이 독이 되어 왕정은 베트남에게 간섭만 당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태국과 더불어 캄보디아 전토를 집어삼키려 든 베트남까지 끌어들이는 꼴만 되고 말았다.''' 17세기부터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던 응우옌 씨참파를 병탄하고 계속 세력확장을 위해 캄보디아에 쳐들어왔다. 마침 캄보디아의 내분과 캄보디아로 이주한 중국인들의 협조가 겹치면서 응우옌 씨는 코친차이나를 점령했다.[4] 더불어 현 캄보디아의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 서남부 해안지대까지 빼앗는다. 그리고 태국도 앙코르 와트가 있는 씨엄리업 지역을 뜯어갔다. 마침 캄보디아가 혼란에 빠지자 1772년엔 프놈펜을 점령하기에 이르렀고 거의 속국 수준이 되었다. 이로 인해 캄보디아는 태국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속국도 되었으며, 더 나아가 베트남에 의하여 꼭두각시 여왕이 세워져 심지어 진서성(鎭西城:쩐떠이성), 프놈펜은 진서부(鎭西府:쩐떠이부)로 베트남의 한 지역으로 완전 병합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모든 문물을 베트남식으로 고쳐서 완전 동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인의 봉기와 합쳐서 태국이 베트남을 몰아내고 다시 캄보디아를 속국처럼 만들었다. 결국 캄보디아는 태국에는 1년, 베트남에는 3년에 한번씩 조공을 하는 속국 이 되어 완전 종속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태국과 베트남은 메콩강(구룡강)을 경계로 캄보디아를 분할하자고 꾸미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가뜩이나 철천지 원수인 태국베트남 양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한 것. 특히 남부 베트남에서는 원주민이었으나 월족에게 밀려나 버렸다.[5] 서쪽과 북쪽은 태국이 동쪽과 남쪽은 베트남이 호시탐탐 노리고 국력이 발달치 못하였으며 캄보디아 내부의 결속은 친태파와 친월파의 왕위계승으로 혼란하여 양국이 내정을 간섭하다 못해 걸핏하면 충돌하고 땅까지 삥뜯었으니 이러한 정세가 이어졌다면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에 분할되어 멸망해서 아예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참파나 아예 19세기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와 독일의 속령이 된 폴란드처럼 멸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근현대: 프랑스 식민 시기와 독립


그런데 캄보디아 입장에서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6] '''바로 프랑스의 동남아 침략 및 식민지 건설'''.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자진하여''' 프랑스에 보호를 청하게 된다. 캄보디아 국왕은 1853년 프랑스의 보호[7]를 요청했으나 태국에 의해 좌절되었다가, 1863년 다시 보호를 요청해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렇게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프랑스는 옆나라 태국에게서 시엠렙 땅을 좀 뜯어서 캄보디아에게 주었고, 역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베트남으로부터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을 뺏어서 캄보디아에 돌려주었다. '''프랑스의 개입으로 캄보디아는 민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절반 가량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가 캄보디아 영토를 불려준 것은 어디까지나 원할한 식민통치를 위해서 였을 뿐 프랑스는 캄보디아인들 자체는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하면서 친불 베트남인 부역자에게 통치를 맡기기도 하였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이렇다 할 자원도 없는 동네였기 때문에 프랑스 식민당국이 실망해서 캄보디아보다는 좀 더 삥뜯을 거리가 많은 베트남 개발에 더 집중하면서 캄보디아엔 별다른 개발과 투자도 하지 않았고, 그나마 철도가 좀 깔린다거나 길이 좀 생기는 수준에 그쳐 전 국민 중 95%가 빈농으로 남았다. 교육 수준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귀족들은 그나마 여러 고급 교육을 받았지만, 평민들은 단순한 불교 교육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1930년대까지도 캄보디아는 국민의 95% 가량이 가난한 농부어부인 나라로 남아 있었다. 그나마 캄보디아는 고무옥수수 재배지가 되었으나, 이마저도 '''대공황 이후 또 망했다'''(…). 또한, 아직 군주가 남아 있어 완전히 나라가 망했다기에도 애매하였고, 교육 수준도 심히 낮았던 캄보디아에선 민족주의 열기가 그렇게 강하지도 않았다[8]. 그래서인지 프랑스는 물론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지식인들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았으나, 도시의 엘리트 중심으로 캄보디아 민족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국가 모두를 일본이 점령했기 때문에 캄보디아도 일본의 관할 하에 있다가 일본이 1945년에 패망하면서 철수하였고, 이어 1953년에 캄보디아 왕국으로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령 캄보디아캄보디아 왕국(괴뢰국) 참조.

4. 캄보디아 왕국 (1953~1970)





5. 크메르 공화국 (1970~1975)




6. 크메르 루주의 지배 (1975~1979)




7. 베트남 통치와 캄보디아 내전 (1979~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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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국기 (1979~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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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국 국기 (1989~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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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통치기구 "UNTAC" 기 (1992~1993)[9]
'''크메르 루주는 잃어버린 고토 회복을 명분으로 훨씬 강대국이었던 베트남에 도발을 해댔다.''' 1978년, 캄보디아와 베트남간의 국경 분쟁이 베트남의 인내심을 넘어섰고 베트남에서는 캄보디아에 대한 군사 공격을 결의하여 12월 22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12~15만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베트남군은 캄보디아의 남동 지역에서 서쪽으로 계속해서 진군해나갔으며 17일만에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의 막장 짓거리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베트남군을 환영해주기도 했다.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는 태국의 국경 지대로 도주하여, 징집령을 내리는 한편 다른 나라들과 합의하여 타이 국경지대를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게릴라전을 하였으나 이미 크메르 루주는 새로운 국가를 전복시킬 힘은 없었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가 남아 있는 한 안정은 기대할 수 없었으며, 국제사회[10]가 괴뢰정부를 인정치 않아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은 원조가 끊어진 상태로 '불법정권', 크메르 루주는 '실권 잃은 유일 합법정권'으로 비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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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지뢰와 불발탄 현황. 동북부의 진한 빨간색 점이 지뢰 지대이다. 덤으로 오른쪽 아래의 빨갛고 노란 곳은 미군이 폭격을 하여 언제 불발탄이 터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
이 때의 여파로 캄보디아에서 타이 국경과 가까운 반떼이멘쩨이, 웃더멘쩨이 지역에는 팔다리가 날아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바로 크메르 루주가 방어를 위해서 대규모로 지뢰를 매설했기 때문. 지뢰가 광범위한 지역에 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너무 많고 캄보디아의 경제상황도 막장이라 지금도 지뢰 제거는 요원한 상황이다.[11]
캄보디아를 점령한 베트남은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을 세운 뒤, 원래 크메르 루주에 있다가 베트남으로 망명한 헹삼린이나 훈 센이 지도자가 되었다. 앞에 설명했듯 크메르 루주는 일단 게릴라전을 벌였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15만여 명의 베트남군을 주둔시켰으며, 캄보디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12] 당시 베트남은 고문관을 파견하거나 베트남인을 이주시키곤 했다. 이에 시아누크 전 국왕은 아들 라나리드와 1981년에 '민족통일전선(FUNCINPEC[13])'을, 손 산(1911~2000) 전 총리는 1979년에 반베트남/반공성향 조직 '크메르인민국가해방전선(KPNLF[14])'을 각각 결성해 괴뢰정부에 저항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제재당한 베트남은 동구권 붕괴와 캄보디아의 자치능력 형성을 이유로 결국 캄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1989년 4월 30일에 국호를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에서 '크메르국'으로 바꾸고 FUNCINPEC, 크메르 루주, KPNLF 3개 조직의 논의 하에 제한적인 체제전환을 시도했다. 결국 1991년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ampuche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 또한 캄보디아 인민당[15]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92년에 UN에 의한 '유엔 과도통치기구(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 in Cambodia(UNTAC))'라는 과도 통치를 거쳐 1993년 9월 왕정이 복고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채택했던 나라중 유일하게 1992년 이후에 무너져, 2020년 현재 기준으로는 가장 최근에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나라다.
1993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첫 총선에서는 왕정주의적 정당인 훈신펙(គណបក្សហ៊្វុនស៊ិនប៉ិច)이 승리를 거두었으며 캄보디아 인민당이 뒤를 이었다. 훈신펙의 로너릇과 인민당의 훈 센이 함께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 쿠데타 기도가 일어나는 등 정국이 혼란했으며 양 계파 사이 충돌이 일어났다. 1997년 훈센과 노로돔 라나리드 총리 사이 무력충돌 사태가 일어나 결국 라나리드는 축출되었다.

8. 캄보디아 왕국 (1993~현재)


1998년, 크메르 루주의 핵심이었던 폴 포트가 캄보디아 서북부의 한적한 마을 안롱벵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어서 지도자였던 키우 썸펀과 이엥 사리가 훈 센 정부에 항복하였고 따목만이 크메르 루주 지도자로 남았었으나, 이 역시 다음해인 99년 항복하여 크메르 루주는 완전히 해체되었으며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정부가 재구성되어 망명중이던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맞아들여 정식 국왕으로 모시는 대신 실권은 주지 않는 입헌군주제로 헌법을 개정했다.
현재는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이 UN의 도움에 힘입어 ECCC라는 간판을 걸고 08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
크메르 루주 재판 및 처리에 대한 건 크메르 루주 문서를 참고할 것.
한편 1997년부터 원래 크메르 루주에 있다가 1977년 폴 포트에 반대해 캄보디아를 탈출한 후 베트남 괴뢰 정권의 지도자로 있던 캄보디아 인민당의 훈 센 총리가 2016년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다. 그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독재자란 평이 우세하다만 어쨌든 캄보디아 국내에선 경제도 살아나고 정치도 옛날보단 아주 안정된지라 지지받고 있는 편이라고 한다. 2009년 그는 캄보디아를 독재정권이라 부르면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했으며, 또한 부자세습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전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2012년 10월 15일, 노환으로 사망하고 아들인 노로돔 시아모니가 뒤를 이었다.
#캄보디아 전범재판소(ECCC) 대법원이 크메르루주 정권이 저지른 ‘킬링필드’를 집단학살로 인정했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1979년 붕괴한 지 40여년 만이다.
2021년에 캄보디아에서 인터넷 검열 시스템을 도입할려고 하자 논란을 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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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폐도(廢都)가 된 앙코르는 밀림 속에 관리가 안 된 채로 처박히고 주변 토착민들이나 아는 곳이 되었다가 후대 프랑스인 학자 앙리 무어에 의해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2] 서양 학계에서는 아예 후기 크메르 시기를 암흑시대라 부른다.[3] 이중에 그나마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도시가 프놈펜 서북부의 껌뽕짬 주에 있는 우동이라는 도시이다. 앙코르나 웬만한 관광코스를 다 둘러보고 어딘가 좀 더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어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4] 지금의 호치민시(구 사이공)를 비롯한 베트남 남부가 원래는 캄보디아의 남부 땅이었다.[5] 사실 베트남의 역사 자체가 중국 남부의 광둥성에서 기원한 월족이 남하하면서 참파와 크메르인을 밀어 내고 개척해오는 역사다.[6] 반대로 태국&베트남 입장에서는 천재지변.[7] 말이 보호지 사실상 식민지나 다를 바 없었다.[8]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가로세로 세계사> 2권 동남아편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캄보디아 사람들이 '조용하고 평화롭던' 프랑스 통치시절을 그리워한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프랑스가 캄보디아에 관심을 별로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착취 또한 덜했기 때문이라는 아이러니가 있으며, 식민지 때 상당기간 동안 어떠한 전쟁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위와 같은 조용한 평화가 오히려 캄보디아의 진보를 가로막아 비극적인 역사로 이끄는 계기가 됐다.[9] UN기의 색상에 UN 로고 대신 캄보디아의 국토 형상과 크메르어 국명을 넣었다.[10] 베트남, 소련, 일부 친소련 성향 공산국가들에게는 합법 정부로서 승인을 받았다.[11] 지뢰 때문에 출입이 불가능한 유적지도 많다. 2015년 현재 대부분의 민가지역과 유적지는 지뢰가 제거되어 일상생활과 관광에는 문제가 없다.[12] 베트남이 친중 성향의 크메르 루주 정권을 전복시키자 분노한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면서 중월전쟁이 일어났다.[13] 반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조직(Front uni national pour un Cambodge indépendant, neutre, pacifique et coopératif)의 불어 약자이다.[14] Khmer People's National Liberation Front[15] 현재의 캄보디아 인민당은 동구권의 공산당 후신 정당들과는 달리, 특별히 지향하는 이념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