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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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dric March'''
'''Ernest Frederick McIntyre Bickel'''
''(1897년 8월 31일 ~ 1975년 4월 14일)''
'''클래식 할리우드에서 온 연기의 교과서'''
또 한명의 위대한 배우인 말론 브란도의 유년 시절 우상이었던 프레드릭 마치는 동시대를 풍미했던 게리 쿠퍼나 클라크 게이블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빼어난 미남이었으며 지금까지도 할리우드의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연기력으로 단순한 잘생긴 배우를 넘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토니상을 각각 두 번씩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다. [1]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포병으로 참전했고 데뷔 전까지 은행원이었던 특이한 이력을 가진 마치는 1926년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 첫발을 들인 이후 천부적인 연기력을 바탕으로 명성을 쌓아나갔고 1929년 <The Dummy>라는 코미디 영화의 주연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이 잘생긴 마스크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배우가 성공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고 성공가도를 달리며 1930, 40년대를 자신의 전성기로 만들었다.
1897년 8월 31일 미국의 위스콘신 주 라신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어네스트 프레더릭 매킨타이어 빅켈(Ernest Frederick McIntyre Bickel). 어릴 적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으며 1920년대 초반에 4편의 무성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한 그는 1924년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 예명을 프레드릭 마치로 지었다. 평소 배우 존 배리모어[2] 를 존경했던 그는 1930년, 배리모어 가문(Barrymore family)의 일대기를 각색한 영화 <브로드웨이의 로열 패밀리(The Royal Family of Broadway)>에 출연해 존 배리모어를 모델로 한 토니 캐번디시 역을 열연하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후보에 올랐던, 실제 배리모어 가 사람이자, 존 배리모어의 큰형인 라이오넬 배리모어[3] 에게 수상의 영광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마치는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을 과시했고 불과 2년 뒤인 1932년, 고전 스릴러의 명작이자 시대를 앞서는 특수효과로도 유명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두가지 인격을 넘나드는 역할을 소름끼치게 사실적으로 소화해 그의 첫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신하는 장면
이후 게리 쿠퍼, 미리암 홉킨스와 <삶의 설계>에서. 그레타 가르보와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리고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과 <스타 탄생>에 이르는 여러 훌륭한 작품에 출연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착실히 쌓아나가며 전성기를 누렸고 1936년 마치의 개런티는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셜리 템플 등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올라갔다. 이렇게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스튜디오에서는 마치에게 장기 계약을 요구했으나, 그는 스튜디오와 제작자의 입맛에 맞추는 연기를 했던 당시의 배우들과 달리 본연만의 연기를 추구하여 장기 계약을 거부했고 제작자들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다. 따라서 할리우드에서 그에게 배역을 잘 주지 않자 마치는 주무대를 다시 브로드웨이로 옮겨 연기력을 맘껏 발산하였고 그러는 와중에도 제2차 세계 대전의 귀향 군인을 그린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46년작 명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에서 주연을 맡아 배역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훌륭한 연기를 하며 그의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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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우리 생애 최고의 해>에서
이로써 마치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 수상한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튜디오와의 마찰은 풀리지 않았고 마치는 계속해서 스크린과 무대를 옮겨다니며 활동해 이듬해에는 그의 첫번째 토니상을 수상했다. 50년대를 지나 베테랑이 된 그는 숙성된 연기력으로 역시 전설적인 배우인 험프리 보가트나 평생의 라이벌로 불리었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번 수상한 또 다른 배우인 스펜서 트레이시와 같은 작품에 출연해 연기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1951년에는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베니스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957년에는 두번째 토니상을 받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토니상을 각각 두번씩 받은 지금까지도 유일한 배우가 되었다.
이후 60년대에 들어서며 부쩍 출연작이 줄어들기 시작한 마치는 1973년 <얼음장수 코멧>을 마지막으로 모든 연기 활동을 종료하고, 1975년 전립선암으로 숨을 거둔다. 향년 7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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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코멧>에서의 프레드릭 마치
'''Fredric March'''
'''Ernest Frederick McIntyre Bickel'''
''(1897년 8월 31일 ~ 1975년 4월 14일)''
'''클래식 할리우드에서 온 연기의 교과서'''
1. 개요
또 한명의 위대한 배우인 말론 브란도의 유년 시절 우상이었던 프레드릭 마치는 동시대를 풍미했던 게리 쿠퍼나 클라크 게이블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빼어난 미남이었으며 지금까지도 할리우드의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연기력으로 단순한 잘생긴 배우를 넘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토니상을 각각 두 번씩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다. [1]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포병으로 참전했고 데뷔 전까지 은행원이었던 특이한 이력을 가진 마치는 1926년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 첫발을 들인 이후 천부적인 연기력을 바탕으로 명성을 쌓아나갔고 1929년 <The Dummy>라는 코미디 영화의 주연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이 잘생긴 마스크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배우가 성공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고 성공가도를 달리며 1930, 40년대를 자신의 전성기로 만들었다.
2. 생애
1897년 8월 31일 미국의 위스콘신 주 라신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어네스트 프레더릭 매킨타이어 빅켈(Ernest Frederick McIntyre Bickel). 어릴 적부터 연기에 관심이 있었으며 1920년대 초반에 4편의 무성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한 그는 1924년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 예명을 프레드릭 마치로 지었다. 평소 배우 존 배리모어[2] 를 존경했던 그는 1930년, 배리모어 가문(Barrymore family)의 일대기를 각색한 영화 <브로드웨이의 로열 패밀리(The Royal Family of Broadway)>에 출연해 존 배리모어를 모델로 한 토니 캐번디시 역을 열연하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후보에 올랐던, 실제 배리모어 가 사람이자, 존 배리모어의 큰형인 라이오넬 배리모어[3] 에게 수상의 영광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마치는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을 과시했고 불과 2년 뒤인 1932년, 고전 스릴러의 명작이자 시대를 앞서는 특수효과로도 유명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두가지 인격을 넘나드는 역할을 소름끼치게 사실적으로 소화해 그의 첫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신하는 장면
이후 게리 쿠퍼, 미리암 홉킨스와 <삶의 설계>에서. 그레타 가르보와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리고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과 <스타 탄생>에 이르는 여러 훌륭한 작품에 출연해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착실히 쌓아나가며 전성기를 누렸고 1936년 마치의 개런티는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셜리 템플 등과 함께 할리우드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올라갔다. 이렇게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스튜디오에서는 마치에게 장기 계약을 요구했으나, 그는 스튜디오와 제작자의 입맛에 맞추는 연기를 했던 당시의 배우들과 달리 본연만의 연기를 추구하여 장기 계약을 거부했고 제작자들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다. 따라서 할리우드에서 그에게 배역을 잘 주지 않자 마치는 주무대를 다시 브로드웨이로 옮겨 연기력을 맘껏 발산하였고 그러는 와중에도 제2차 세계 대전의 귀향 군인을 그린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46년작 명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에서 주연을 맡아 배역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훌륭한 연기를 하며 그의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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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우리 생애 최고의 해>에서
이로써 마치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 수상한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스튜디오와의 마찰은 풀리지 않았고 마치는 계속해서 스크린과 무대를 옮겨다니며 활동해 이듬해에는 그의 첫번째 토니상을 수상했다. 50년대를 지나 베테랑이 된 그는 숙성된 연기력으로 역시 전설적인 배우인 험프리 보가트나 평생의 라이벌로 불리었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번 수상한 또 다른 배우인 스펜서 트레이시와 같은 작품에 출연해 연기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1951년에는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베니스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957년에는 두번째 토니상을 받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토니상을 각각 두번씩 받은 지금까지도 유일한 배우가 되었다.
이후 60년대에 들어서며 부쩍 출연작이 줄어들기 시작한 마치는 1973년 <얼음장수 코멧>을 마지막으로 모든 연기 활동을 종료하고, 1975년 전립선암으로 숨을 거둔다. 향년 7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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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코멧>에서의 프레드릭 마치
3. 기타
- 굉장히 유머스러운 성격이다. 패널들의 눈을 가리고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 초대 손님이 누군지 알아맞히는 미국의 TV 프로그램
에 출연해 익살스러운 말투로 방청객들과 패널들을 웃음 바다로 만들었다.
- 첫번째 부인과 1924년 결혼해 1927년 이혼하였고, 같은 해 여배우 플로렌스 엘드리지와 재혼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다. 자녀는 2명.
[1]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2회 수상은 2013년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링컨으로 3번째 수상하기까지 역대 최다 수상이였으며, 수상자도 스펜서 트레이시, 말론 브란도,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숀 펜 등 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배우들이며 10명안에 꼽을정도로 극히 적다.[2] 배우 드류 배리모어의 할아버지[3] 이전 버전에는 드류 배리모어라고 되어 있었는데 당연히 오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