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데이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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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잉글랜드 출신인 할리우드 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자'''이며, 연기로 영국 기사작위를 받은 인물이다.[4] 메소드 연기의 대표적 배우로 '''영화 역사상 최고의 남배우'''를 논할때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로버트 드 니로, 더스틴 호프먼, 잭 니콜슨, 톰 행크스와 같은 배우들과 함께 꼭 빠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연기력으로 언제나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고 있는 '''최고의 명배우''' 중 한 명이다.
무시무시한 연기력 만큼이나 수상 내역도 무시무시하다.[5] 오스카 시상식이 만들어낸 몇 안되는 괴물 중 하나. 첫 주연을 맡았던 《나의 왼발》과 2007년작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앞서 두 차례의 오스카를 가져갔으며, 2013년 영화 《링컨》으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3번이나 받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진기록을 세운 배우가 되었다.[6] 물론 외신들은 데이루이스의 《링컨》을 '''기념비적인 명연기'''라며 극찬했다.
이처럼 연기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배우이지만, 배우 생활과 별개로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분리하는 편이며 애정 관계도 그다지 별로인걸로 유명하다. 이자벨 아자니와 6년간 사귀었고 아이까지 가졌지만, 임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결별했다. 결별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게 없다. 현재는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 리베카 밀러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2017년 6월 20일, 배우 생활의 은퇴를 선언하였다. 여러가지 이유가 추측되는 가운데, 신빙성을 얻고 있는 가설 중 하나는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업을 위해서라고 한다. 다만 다니엘 데이루이스 자체가 반은퇴와 번복을 반복하던 인물이라, 지켜보겠다는 입장도 많다. 상술했던 과작 배우라는 점도 한 몫한다.
2. 생애
1957년 4월 29일 아버지 세실 데이루이스(Cecil Day-Lewis)[7] 의 두 번째 아내인 질 밸컨(Jill Balcon)[8]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잉글랜드 런던. 그의 외조부는 마이클 밸컨 경(Sir Michael Balcon)으로 영화사 일링(Ealing) 스튜디오의 대표였다. 다니엘의 누나인 태머신 데이루이스(Tamasin Day-Lewis)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이다. 다니엘이 두 살이 되자 가족은 런던 동남쪽의 그리니치(Greenwich)의 크룸즈힐(Croom's Hill)로 이사갔다. 그리니치에 살면서 다니엘은 런던 남부의 거친 아이들과 살았고 유대인 혈통과 잰 체(posh) 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곤 했다. 이 때에 다니엘은 런던 남쪽의 억양과 습관, 지역색 등을 남부 출신인양 완전히 익혔는데, 이를 두고 그의 첫번째 ‘연기’라고 생각한다고 한다[9] . 이 때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좀도둑질 등의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고 현재 자주 회상하는 편이다.
1968년 다니엘의 부모는 다니엘이 너무 거칠다고 생각해 켄트의 기숙학교인 세븐오크스(Sevenoaks) 스쿨로 보냈다. 그는 이곳을 싫어했다. 여기서 그가 그나마 관심을 둔 일은 목공과 연기, 낚시 정도였다. 2년 뒤에 피터즈필드(Petersfield)의 좀 더 진보적인 사립학교인[10] 버데일스(Bedales)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곳은 좋아했다. 그의 누나도 이곳에서 공부했다. 널럴한 곳이었다고 한다.
14살에 1971년작인 사랑의 긴 여로(Sunday Bloody Sunday)로 데뷔했으나 크레딧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본인은 그 경험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가 맡은 역은 동네 교회에 주차된 비싼 차를 파손하는 역이었고 그 역으로 2파운드를 받았다고 한다. 1975년 베더일을 떠나면서 그의 제멋대로인 태도는 많이 누그러졌다. 그는 경력을 선택해야 될 나이가 됐다. 비록 그가 런던의 국립청소년극단에서 잘 하기는 했지만 5년짜리 가구공 견습직에 지원했으나 경험 부족으로 반려되었다. 그러자 브리스톨 올드 빅 스쿨(Bristol Old Vic School)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나중에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에서 함께 연기한 피트 포스틀스웨이트(Pete Postlethwaite)[11] 의 대역을 맡기도 했다.
1982년까지는 영화 대신 브리스톨 올드 빅과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연극을 했다.[12] 1982년 처음으로 간디(Gandhi)에서 단역으로 성인 연기자 데뷔를 했다. 맡은 역할은 콜린이란 이름으로 주인공을 따돌리는 불량배이나 신경 예민한 엄마에게 맞기나 하는 역. 그 해에 영국의 TV 드라마인 5월의 서리(Frost in May)에 바빌론까지는 얼마나 먼가?(How Many Miles to Babylon?)[13] 출연하였다. 82년부터 83년까진 어나더 컨트리(Another Country), 84년 드라큘라(Dracula), 86년 퓨처리스트(Futurists) 등에 출연하였다.
그의 첫 조연은 84년 작인 바운티호의 반란(Bounty)였고 이듬해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 Beautiful Laundrette),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에도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뉴욕에서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와 전망이 좋은 방이 같은 날에 개봉하기도 하여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그의 다양한 연기폭과 재능을 보여줬다. 뉴욕 영화 비평가는 그를 최고의 조연이라고 불렀다. 1986년 리처드 아이어(Richard Eyre)의 퓨처리스트에 출연하였고 아이어가 TV로 제작한 Screen Two: The Insurance Man 시즌2 7화에 출연하였다. 같은 해, 영국과 프랑스 합작 영화인 나노(Nanou)에 출연하였다. 1987년부터 필립 코프먼(Philip Kaufman)의 1988년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의 주연을 맡았다. 그 뒤 1988년 정열과 사랑(Stars and Bars)[14] 에서 코미디 연기를 했으나 흥행엔 실패했다. 1989년 짐 셰리던(Jim Sheridan)의 나의 왼발(My Left Foot: The Story of Christy Brown)에 출연하였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15] 이 영화는 다니엘이 처음으로 메소드 연기에 몰입한 영화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 국립극장에서 햄릿 역을 맡으며 연극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탈진으로 공연이 끝나자 프로덕션을 떠나야 했다.[16] 그리고 그 이후로는 연극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1992년까지 영화도 찍지 않았으며 1992년 라스트 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으로 돌아왔다. 비평은 모호했으나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했다. 그는 1993년부터 마틴 스코세이지의 1994년 개봉작인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를 찍었다. 이어서 짐 셰리던과 다시 아버지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Father)를 찍었고 호평을 얻었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션 되었다. 1996년에는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크루서블(The Crucible)을 영화화한 동명의 영화에서 존 프록터(John Proctor) 역을 맡았다. 감독은 니컬러스 하이트너(Nicholas Hytner)였다. 촬영 중에 원작자의 딸인 리베카 밀러를 만나 뒤에 결혼하였다. 이어서 셰리던의 복서(The Boxer)에서 갓 출소한 IRA 조직원이자 전직 복서 역을 맡았다.
복서 이후로 반 은퇴한 상태로 목공 일에 열중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옮겨서 제화 일에 열중했고 제화공 견습을 따냈다. 이 즈음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니엘은 그 시절을 얘기하는 것을 거부했고 단지 "어떤 형태의 방해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시기였다(It was a period of my life that I had a right to without any intervention of that kind)"라고 술회했다.
5년간 영화를 찍지 않다가 2002년에는 다시 마틴 스콜세지와 갱스 오브 뉴욕(The Gangs of New York)을 찍었다.[17] 악역으로 갱들의 수장인 윌리엄 커팅(William Cutting), 이른바 도살자 빌(Bill the Butcher) 역을 맡았다. 그는 이 역을 위해 도살자 견습생으로 교육을 받았고 촬영 기간 동안 뉴욕 악센트를 유지하며 테이크 사이에 캐릭터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촬영 기간 동안 폐렴 진단을 받았지만 더 따뜻한 코트를 입거나 치료받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설득으로 치료를 받았다. 갱스 오브 뉴욕으로 그는 아카데미에 노미네이션 됐고[18] BAFTA에서 주연상을 받았다.
갱스 오브 뉴욕 이후에 아내인 레베카 밀러[19] 는 다니엘을 자신의 영화인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The Ballad of Jack and Rose)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이 영화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어 왔으며 10대 딸을 어떻게 길렀는지를 후회하며 죽어가는 남자 역을 맡았다. 촬영 기간 동안 "고독"을 느끼기 위해 아내와 떨어져서 살았다고 한다. 영화 자체의 평은 엇갈렸다.
2007년에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출연하였고 무수히 많은 상을 휩쓸었다. 아카데미 주연상도 수상했다. SAG 수상에서 히스 레저에게 자신의 수상을 헌사하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레저의 연기가 "특별하고 완벽했다(unique, perfect)"고 평가했다.[20]
2009년에는 롭 마셜의 나인에 귀도 콘티니(Guido Contini) 역을 맡았다. 캐스팅이 화려했는데 평은 그다지이었다.
2010년 12월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에 에이브러햄 링컨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권력의 조건(Team of Rivals: The Political Genius of Abraham Lincoln)이라는 책이 원작으로 2011년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촬영이 시작되었다. 역을 준비하기 위해 다니엘은 1년을 보냈다. 링컨에 대한 책을 100권 정도 읽었으며 링컨과 비슷한 외모를 연출하기 위해 장시간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일했다. 결국 2013년 제 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세 번째로 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생활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프랑스 배우인 이자벨 아자니와 6년 정도 사귀었는데 헤어졌다.[21] 관계가 끝장나고 몇 달 뒤인 1995년에 뉴욕에서 그들 사이의 자식인 게이브리얼케인 데이루이스(Gabriel-Kane Day-Lewis)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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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리베카 밀러[22] 와 두 자식들. 사진은 좀 옛날 것 같은데 둘 사이에 난 첫 아이가 1998년 6월 14일 생인 로넌 칼(Ronan Cal Day-Lewis)이고 둘째가 2002년 5월에 태어난 캐셜 블레이크(Cashel Blake Day-Lewis)이다. 거주지는 아일랜드와 뉴욕을 왔다갔다 한다고. 다니엘은 1993년에 아일랜드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래서 현재는 이중 국적자이다. 런던 동남부의 축구팀 밀월의 팬이다.
2010년 7월 15일엔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어릴 때 브리스톨 올드 빅 연기학교에 다녔던 인연으로 그랬다. 종교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며(had no religious education) 자신을 완고한 불가지론자라고 생각(suppose I'm a die-hard agnostic)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2년엔 아버지인 시인 세실 데이루이스의 원고 등을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몸에 문신이 꽤 있다.
3. 필모그래피
3.1. 영화
3.2. 드라마
3.3. 연극
4. 기타
- 커리어 초창기에는 영국의 로버트 드 니로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실제로 라스트 모히칸과 갱스 오브 뉴욕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배역은 로버트 드 니로에게 먼저 제안되었던 역할들이다. 라스트 모히칸 때는 로버트 드 니로는 당시 마틴 스콜세지와 케이프 피어 촬영으로 이 제안을 포기했었다. 대신 마이클 만과의 협업은 그 후 히트에서 이뤄진다. 갱스 오브 뉴욕 촬영 때는 이 영화 대신 말론 브란도, 에드워드 노튼과 함께 스코어 찍는 것을 택했다.
- 메소드 연기가 독한 것으로 유명한데 영화 '나의 왼발'에서 장애인 역을 맡았을 때에는 촬영을 하지 않을 때도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 '평생 회피를 공부한다'는 말로 자신의 인생을 표현했다. (a lifelong study of evasion).
- 갱스 오브 뉴욕에서 같이 연기한 존 C. 라일리에 따르면 다니엘이 이탈리아에서 촬영하는 동안 몸이 안 좋았는데 19세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따뜻한 코트를 입고 연기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가 억지로 항생제를 놔야 했다고 한다.
- 숙련된 목수인데 제화공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다.
- 갱스 오브 뉴욕을 촬영할 때 도살자 빌로 분노하기 위해 에미넴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 반지의 제왕의 아라고른 역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 필라델피아의 앤드루 베켓 역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찍던 중이라 그 역은 톰 행크스에게 갔다. 행크스는 그 역으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 실제 성격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학교에서 유명하지 않았으며 아웃사이더였다고 한다. 인터뷰도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고 칭찬받으면 후배들도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겸손한 태도로 유야무야 임팩트 없이 넘어가는 느낌이 강하다. 이 부분은 그가 유대인 혈통에 아일랜드 혈통[24] 이라서 작용한 면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사교성을 늘리는 대신 내향적인 생활을 거치며 공상을 많이 했고 나중에 캐릭터를 깊이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으로 고려됐지만 멜 깁슨이 보기에 너무 유럽인스러워서 대신 제임스 카비젤을 골랐다고 한다.
- 갱스 오브 뉴욕 촬영했을 때 뉴욕 억양으로 얘기했고 점심 때면 칼을 다듬곤 했다고 한다. 한편 같이 영화에 출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정신적 압박이 상당했다고 한다.[25]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상대역인 일라이 선데이 역을 맡은 배우가 결국 겁을 먹고 도망갔다.[26] 폴 선데이 역을 맡았던 폴 다노가 그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는데 (쌍둥이),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데이루이스의 상대역을 해냈을뿐 아니라 자신 또한 주눅들지 않고 광적인 연기를 한 것은 매우 칭찬해 줄 만하다.
- 라스트 모히칸을 찍었을 때 카누를 만들었고 동물을 추적하고 가죽 벗기는 법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12파운드 짜리 화승총도 완벽하게 익혔는데 이 총을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심지어 크리스마스 정찬까지...
- 2008년 오스카 주연상을 탔을 때 자신의 외할아버지 마이클 밸컨과 아버지 세실 데이루이스 와 자신의 세 아들에게 헌사했다.
- 187cm로 장신이다.
- 《링컨》에서 링컨을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갱스 오브 뉴욕》에서 그가 맡았던 역할인 도살자 빌이 링컨의 초상화에 칼을 던진 바 있다. 영상
- 《데어 윌 비 블러드》 인터뷰가 올라왔다.(#)
- 다니엘이 젊은 배우 중에는 히스 레저와 라이언 고슬링에게 존경을 표한 적이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때 미국 배우 조합상(SAG)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 마침 당시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레저를 수상 소감에 언급하기도 했다.
- 에런 테일러존슨이 다니엘을 존경한다고 밝히는 등 많은 배우들에게 롤모델이 되는 배우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 갱스 오브 뉴욕, 링컨(영화) 등 데이루이스가 연기한 주요 배역을 엮어 만든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살기란 동영상.
[1] 2014년 Knight Bachelor 기사작위를 받아 Sir가 붙는다. Knight Bachelor만 받은 인물은 이름 앞에 Sir만 붙을 뿐, 이름 뒤에 붙는 건 없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2] 아일랜드와 영국의 시민권 둘 다 가지고 있는 복수국적이다.[3] 비슷한 나이의 톰 행크스를 그의 라이벌이라고 할 만하다. 신들린 연기 실력이야 말할 것 없지만 연기의 방향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 우리나라로 치면 최민식과 송강호의 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당연히 소름돋는 메소드 연기를 구사하는 최민식이 DDL쪽이고 자연스러운 생활연기력이 높은 송강호와 톰 행크스가 비슷하다 할 만하다.[4] 다니엘 마이클 블레이크 데이루이스 경(Sir Daniel Michael Blake Day-Lewis)[5] 영화를 찍는 주기가 긴 편이다. 게다가 링컨 이전에도 2~3년에 한 편씩 찍었으며, 더 복서와 갱스 오브 뉴욕 사이에도 5년이라는 긴 공백이 존재한다. 바로 이때가 그 유명한 이탈리아 제화공 일을 배운 시기. 이 때문인지 네이버에 등록된 출연작 개수는 2020년 기준으로도 22건밖에 되지 않는다.[6] 심지어 여성 배우계의 본좌라는 메릴 스트립도 여우주연상 2회, 조연상이 1회다. 물론 이 쪽도 끝판왕은 끝판왕. 그런데 지금은 사망한 배우 캐서린 헵번은 여우주연상만 4번을 가져갔다.[7] 아버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혼혈이다. 영국의 계관시인(국가나 왕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임명된 시인)이며, 니콜라스 블레이크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도 발표했다. 한국에도 황금가지 밀리언셀러클럽으로 '야수는 죽어야 한다'가 출판되었다. [8] 배우며 유대인으로 다니엘의 외조부 가족이 라트비아와 폴란드에서 이민온 사람들이었다[9] 다니엘이 그리니치로 이사 전까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런던 중심부의 Kensington-Chelsea 으로 Belgravia, Westminster, Mayfair 등과 함께 런던 최고의 부촌이다.[10] 위키피디아 원문엔 independent school로 기재되어 있으며 우리의 대안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의 뜻을 갖고있다.[11] 1945-2010. 유주얼 서스펙트의 코바야시, 인셉션의 모리스 피셔 역을 맡은 바 있다.[12]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한 여름밤의 꿈에서 플루트 역을 맡았다고 한다[13] 1차 대전 참전용사가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서 고민하는 역[14] 남부 연맹기를 이르는 표현이다. 성조기(Stars and Stripes)와 표현이 비슷하다.[15] 당시 후보군이 쟁쟁했는데, '''7월 4일생의 톰 크루즈''',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모건 프리먼''','''헨리 5세의 케네스 브래너''','''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엄스'''였다.[16] 이 때 탈진했다고 알려진 장면이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는 장면이라고 한다. 쓰러진 뒤에 미친듯이 울면서 무대에 오르기를 거부했다고..... 실제로 본인이 그 때 아버지의 유령을 만났다고 했다고 한다. 데이루이스는 그 때 이후로 햄릿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공식적으로 다른 배우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메소드연기의 무서움이란)[17] 일설에 의하면 이 때 하비 와인스틴과 마틴 스콜세지가 큰 역할이 아니니까 해달라고 사정사정 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까스로 승낙하고 미국에 왔는데 알고보니 완전 중요한 역할이었던것....(속았지?) 5년간의 공백이 괜히 깨진게 아니다[18] 이때 사실 최고로 유력한 후보였지만 정작 수상은 피아니스트의 애드리안 브로디가 했다. 브로디의 깜짝 수상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사실 아직도 많다.[19] 영화 감독이다[20] 2008년 초에 히스 레저가 사망했다.[21] 이때 '''팩스'''로 이별을 통보했다고 한다. [22] 1962년생이다[23] 2017년 6월 20일자로 은퇴를 선언했기에 사실상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24]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두 집단 모두 영미권 주류에서 은근히 배척을 받아 왔으며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성향이 있다.[25] 하긴 이 영화에서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맡았던 역할이 늘 칼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위압적으로 노려보는 "도살자 빌(Bill the Butcher)"이었으니...[26] 그러나 다니엘과 감독은 이를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