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론 브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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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말론 브란도는 '''영화 연기계의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자 '''영화 연기론의 정전(正典)을 다시 쓴 위대한 명배우[7] '''다. 동시에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며, 근세의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전 배우'''이기도 하다.[8]
그는 1950년대에 엘리아 카잔 감독과의 협업을 통해 반항아의 아이콘이자 메소드 연기의 선구자로 '''할리우드 역사상 최고의 인기와 영향력'''을 자랑했으며, 전성기가 지난 1970년대에 대부를 통해 다시금 '역시 말론 브란도'라는 말이 나오게 할 만큼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말론 브란도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를 넘어 '''20세기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이다. 그리고 말론 브란도 만큼 한 명의 배우로서 연기계에 거대한 충격을 준 인물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9]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상 '''할리우드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배우'''로써 1950~1990년대까지 수많은 명연기를 쏟아내 수많은 사람들을 웃게 하고, 때로는 감동을 주고 울리기도 한 할리우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2. 상세
1950년대, 할리우드 황금기의 마지막 시기를 화려하게 장식하며[10] 잘생긴 외모와 넘치는 야성미로 당시 젊은 세대(비트 세대)에게서 가장 큰 열광을 받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또한 일부 연극판에서만 사용되던 비주류 연기방법론이었던 메소드 연기를 영화판에서 처음으로 도입시킨,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로서 작품성, 흥행성 모두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1960년대에 스스로 감독한 영화 《애꾸눈 잭》(1961)의 실패 이후 몰락하기 시작, 과거의 영광을 잃고 쇠락하는 듯 했으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1972)'''에서 마피아 가문의 보스 비토 콜레오네역으로 재기하여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배우로서 중장년기에 접어든 1970년대에는 단순히 본인의 건재함을 넘어서서 전성기였던 1950년대보다 더 뛰어난 연기력과 명작들을 남겼다.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 이후 가정사 스트레스에 의한 폭식으로 인해 체중관리에 실패하여 나중에는 무려 150kg의 뚱보가 된, 어떻게 보면 암울한 노년을 보낸 사나이다. 참고 그리고 후술할 성추행 의혹과 괴팍한 성격 탓에 많은 구설수에 오른, 문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3. 생애
1924년 4월 3일,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출생하였다. 청소년기에는 문제아 취급을 받았으며, 보다못한 아버지의 강권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내 중퇴하고 뉴욕에 상경하여 뉴욕 배우 학교에서 연기 수업을 쌓았다.
1944년에 《엄마를 기억해》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데뷔하였다. 1947년 브로드웨이의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에서 스탠리 코왈스키 역을 맡으면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이로써 일약 브로드웨이의 간판스타로 자리 잡은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할리우드는 온갖 공을 들였지만, 말론은 장기적인 계약에 따르는 제한들 때문에 모두 거절했다. 그러나 6년 후에는 그도 뜻을 굽히고 신체가 마비된 군인들의 이야기인 《맨》(1950)으로 장편 영화에 데뷔했다. 그 이후 1951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동명의 영화판(엘리아 카잔 감독)에서도 주연을 맡으면서 생애 첫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 다음에는 위험한 질주(The Wild One 1953년작)에서 1950년대 막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른 청년세대의 반항기를 표현함으로서 당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영화에서, 도시를 휘젓던 폭주족으로 출연한 브란도는 당시 반항적인 미국의 '비트 세대'에게 우상이나 다를 바 없었고, 그의 모터사이클과 가죽자켓, 청바지, 엔지니어 부츠는 반항적인 젊은이의 상징이 되었다.
이 영화 속 말론 브란도의 패션은 매카시즘 시대의 청춘 비트세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반항아 연기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제임스 딘도 원래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를 모방한 것이며, 그를 동경하며 여러 면에서 닮으려고 노력했다 한다.
1954년에는 엘리아 카잔 감독의 《워터 프론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정상급 배우로 성장했다. 이후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화한 《아가씨와 건달들》(1955), 《젊은 사자들》(1958), 《바운티호의 반란》(1962) 등으로 연기력과 흥행력을 과시했다.
이후 1960년대에는 다소 주춤하는 듯 했으나, 1970년대 들어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명작 《대부》(1972),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3)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6년 뒤에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에서 카리스마적인 연기력을 보여줬으며, 《슈퍼맨》(1978)에도 슈퍼맨의 부친 조-엘 역으로 출연[12] 하기도 했다.
영화 연기의 역사에서 말론 브란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비중이 대단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사 불멸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스타를 꿈꾸며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 오디션 장의 문을 두드리는 신인 남자 배우들에게 심사위원들은 반드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대부》에서의 브란도의 즉흥 연기를 시켜본다. 실제로 브란도는 즉흥 연기의 귀재였고 순간적으로 그 상황에 맞는 정확한 감정을 표현해내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뉴욕스쿨의 드라마 워크숍(크리스천 베일, 톰 히들스턴 모두 이 학교 출신들이다.)에 등록한 말론 브란도는 거기서 스텔라 애들러 여사[13] 에게서 연기를 배웠는데 그녀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론을 적용하여 연기에 진정성을 불어넣기 위해서 메소드 연기법을 강조했다. 메소드(Method) 연기란 액터즈 스쿨 시절 러시아의 연출가 스타니슬랍스키가 주장했던 연기법[14]
이러한 메소드 연기의 방법론은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 연극계에 수입되었으며, 1940년대부터 뉴욕 액터즈 스쿨 출신의 배우들이 이러한 연기 스타일을 영화에 이식시키기 시작했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폴 뉴먼 등이 모두 액터즈 스쿨 출신으로 메소드 연기를 익힌 대표적인 배우들이다. 1960년대 전의 영화를 보면 배우들의 연기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는데, 그게 다 연극무대식의 연기 기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라 그런 것이다. 한번은 애들러 여사가 수업 시간 중 제자들에게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닭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연기해보라 했고, 모든 학생들은 제각기 푸드덕거리는 온갖 난리 요란법석을 떨며 닭들을 연기하는데 반해 브란도 혼자만 조용히 웅크리며 알을 품는 닭을 연기했었다. 애들러 여사는 말론 브란도의 연기만 인정하며 푸드덕거리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 바보 멍청이들아! 닭들이 전쟁난 걸 어떻게 안단말야!'''"라고 호통치고 데꿀멍 시킨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렇게 브란도는 메소드 연기법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고 이 연기론을 적극 수용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깐깐한 오디션 심사위원장들이 알길 원하고 평가하는 것은 오디션 참가자들이 얼마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스탠리 코왈스키란 인물이나 《대부》의 비토 콜레오네를 잘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얼마나 말론 브란도에 근접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브란도 연기는 '''영원한''' 모범 답안이니 그것을 바탕으로 너는 얼마나 즉흥 연기에 능한가를 평가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론 브란도는 남자 배우들의 영원한 연기력 기준기로서, 지금 이 시간에도 치러지고 있는 수많은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 오디션 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말론 브란도는 이런 연기력을 바탕으로 할리우드에 이른바 성격파 배우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모든 성격파 배우들은 말론 브란도에게 빚지고 시작하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건 브란도 이전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언제나 정의로운 보안관이나 역사상 유명한 전쟁 영웅 아님 장애를 이겨낸 실존 인물 등등의 바른 생활 사나이들에게만 주어졌고 안 그러면 주연상 후보에도 못 오르는 게 당연시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톰 행크스 스타일의 배우들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거나 후보에라도 오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브란도는 술먹고 도박하며 마누라나 패고 처제를 강간하는 쓰레기(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돈 받고 사람 패주는 해결사(워터 프론트), 깡패 두목(대부), 섹스 중독에 빠진 중년 변태남(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전쟁의 광기에 미쳐버린 군인(지옥의 묵시록) 등의 기존 체제에 반항하는, 홀딱깨는 비정상 캐릭터로도 얼마든지 스타가 될 수 있음을 그 스스로 증명해냈고, 잭 니콜슨 같은 성격파 배우들이 설자리와 무대를 마련해주었다![15]
하지만 브란도는 자신에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혁명아 자파타 Viva Zapata!》(1952)처럼, 같은 전쟁 영웅이라도 오늘날까지 역사적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역할에만 흥미를 보였고 이런 역할만 찾아다녔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라 일본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던 1950년대 미국에서 과감히 일본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파일럿 《사요나라 Sayonara》(1957)을 연기하거나, 당시 A급 톱스타들에겐 금기시되었던 나치장교 역<젊은 사자들 The Young Lions>(1958)도 앞장서서 거침 없이 해버리던 것이 말론 브란도였다. 그로 인해 이제 배우들의 캐릭터는 단순한 선역, 악역의 경계를 넘어서서 기존의 극연기법보다 더 현실적인 리얼리즘과 입체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또 다른 위대한 배우, 폴 뉴먼에게도 동경과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고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상실감을 안겨준 거대한 존재이기도 했다.[16]
영화 속 이미지 만큼이나 실제로도 반골 기질이 다분했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대부'로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을 때, 인디언 협회 대표라는 젊은 네이티브 아메리칸 여성을 대신 내보내 수상 소감 대신 미국 내 원주민 인권 문제를 거론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일화. ‘미국원주민운동(AIM)' 창립 멤버로 관여했고 원주민운동 지도자들의 보석금과 거처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아메리칸 원주민의 인권문제를 다룬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고 이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참여했으나 아쉽게 무산되었다.
그가 인권운동에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영화 촬영계약이 개런티를 최소화 하는 대신 출연분을 단기간에 집중해서 찍는 방식이었던 데 있다. 그렇기에 사실상 브란도 필모그래피의 마지막 불꽃은 《대부》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커리어의 전성기가 일찍 끝난 것의 가장 큰 원인은 브란도 개인의 불우했던 신변문제와 우울증에 있었다. 1979년의 《지옥의 묵시록》이 마지막 걸작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체중조절에 실패하고 다소 불성실하게 촬영에 임하는 등 배우로서의 자의식과 집중력이 예전에 비해 확연히 떨어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코폴라는 촬영에 상당한 제약을 받아야만 했으며, 수많은 재촬영과 편집을 거쳐야만 했다.
불과 30살에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모두 수상한 천재 배우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아이러니와 회의를 깨닫고 느껴버렸다. 말론이 인터뷰에서 "'''나는 배우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낍니다.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겁니다. 마르크스, 간디, 헤밍웨이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꿉니다. 배우는 너무도 하잖은 존재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시점에서 그의 배우로서의 경력은 끝났다고 봐야한다. 본디 '''진정한 천재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법이다'''(...).
4. 사생활
동시대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타와 달리 자신의 '''양성애 성향에 대해 감추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커밍아웃하지 않았던 다른 동료들까지 본의아니게 끄집어내는 결과가 되기도 하는데, 2006년 출간된 자서전에서 브란도와 관계를 맺었을 거라 주장하는 유명인들만도 폴 뉴먼, 몽고메리 클리프트, 버트 랭커스터, 로런스 올리비에, 제임스 딘, 타이론 파워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전형적인 난봉꾼 할리우드 스타의 가쉽 같은 이야기 속에 나름 순애보 같은 이야기도 있는데, 바로 평생 친구 겸 '동성'애인으로 지낸 배우 겸 코미디언 월리 콕스의 경우. 말론 브란도는 1973년 사망한 콕스의 화장하고 남은 재를 평생 보관하며, 가끔 외로울 땐 재를 담은 단지를 앞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 브란도 사망 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콕스의 재와 섞여 같이 데스 밸리에 뿌려졌다.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콕스가 여자였음 결혼해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한 그였으니. 이 부분은 2015년 1월 4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해당 기사,마성의 양성애자 말론 브란도. 작가이자 접지 편집장이었던 뷰리가드 휴스턴-몽고메리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대마에 취해 있을 때 콕스와 사랑하는 관계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
연기자로서의 성공과는 달리 사생활에서는 여러모로 불운했다. 여러 번의 결혼 실패에다 1990년엔 아들이 살인죄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아들이 살해한 상대는 다름아닌 딸의 약혼남. 말론의 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다.[17] 이처럼 평생동안 안정된 가정을 꾸리지 못했고 우울증과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다. 말년에는 우울증으로 인한 폭식으로 몸무게가 무려 150kg을 넘는 뚱보가 되기도 했다. 사실 청년기의 인기에 비해서는 말년으로 갈수록 출연작이 드문드문하고 아들이 재판을 받느라 돈이 급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영화에 나오느라 작품의 수준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슈퍼맨이나 지옥의 묵시록 이후론 사실상 인상적인 출연작이 없었을 정도. 다른 남자배우들이 대부분 50대에 전성기를 맞는다는 걸 생각하면 40대 이후 브란도의 필모그래피는 좀 부실한 감이 있다.
1980년 이후로는 거의 매스컴에 얼굴을 비추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다. 다만 인권운동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1990년 아들이 잡혀들어간 이후 《프레쉬맨》,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돈 후앙》, 《닥터 모로의 DNA》 등에 나오면서 오랜만에 활발한 필모그래피를 선보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01년에 에드워드 노튼,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찍은 《스코어》였다.
2004년 폐질환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스코어》 이후 3년 만에 신작에 나오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서 팬들의 안타까움이 더했다.
4.1. 가족관계
총 3명의 아내와 1명의 사실혼 관계.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의 입양과 생모가 밝혀지지 않은 아이까지 있다. 이런 자녀들 사이에서 오빠가 여동생의 애인을 살인[18] 하는 할리우드의 비극적인 가정사까지 발생할 정도로 할리우드 내에서도 여러모로 가정사가 복잡한 인물이었다. 자식들간의 유산싸움도 여러번 일어났고 법정싸움까지 여러번 갔었다.
위의 프로필에는 자녀의 숫자가 9남 8녀로 총 17명인 양 표시되어있지만, 그 중 2명은 말론 브란도가 아버지인지에 대해 상당히 불확실한 상황이고, 나머지 3명도 확인되지 않는 상태이다. 확실하게 법률상 자녀로 밝혀진 경우는 총 11명이고 그 중에 3명은 입양아이다.
- 세번째 부인 (1962년-1972년)
- 사실혼 관계
- 아버지는 말론 브란도이지만 어머니를 알 수 없는 케이스
4.2. 영화 강간씬 촬영 성추행 논란
1972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베르톨루치 감독이 오로지 말론 브란도와만 상의하고 상대 여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에게 일체의 동의 없이 강간 장면을 촬영한 것이 밝혀져 성폭행 논란을 빌었다. 베르톨루치 감독이 직접 나와 2013년 인터뷰한 내용으로 KSP 2016년 12월 4일 현지 미국에서 공개된 것. 동아일보, ''베르톨루치 감독은 "강간신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나와 말론이 떠올린 아이디어로, 슈나이더에게는 해당 장면에 대한 언질을 주지 않았다"''
마리아 슈나이더는 생전 인터뷰에서 "강간 장면은 대본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에서야 갑자기 상대 배우(말론 브란도)가 강간씬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화가 났다. 비록 실제 성적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강간 장면을 촬영하며 진짜 눈물을 흘렸다. 나는 모욕감과 함께, 솔직히 말하자면 말론 브란도와 감독 모두에게 강간을 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라고 밝혔다.한국경제 기사 슈나이더는 한동안 약물 중독과 자살 시도 등 매우 괴로운 시간을 보냈으나, 브란도는 이에 대해 어떠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베르톨루치 감독은 다른 인터뷰에서 "강간 장면은 대본에 명시되어 있었다. 다만, 강간 시 윤활제 역할로 버터를 쓰도록 하는 것은 마리아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나와 말론 브란도는 그녀가 보다 현실감 있는 반응을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마리아 슈나이더가 2011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사건의 완전한 내막은 영영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윤활제든 뭐든 사전 조율이 무엇보다 중요한 신을 촬영함에 있서 상대 배우와 충분한 합의 없이 성적 모욕감을 준 것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으로도 비판을 면할 수 없어 보인다.
5. 필모그래피
- 볼드체로 표시된 배역이 주요 배역.
6. 말론 브란도에 대한 말말말
'''그는 우리에게 자유를 줬다!'''
by 잭 니콜슨
'''그는 내가 평생에 걸쳐 이룬 것을 불과 30살에 모두 이루어 버렸다.'''
by 폴 뉴먼
'''나와 같은 세대에 속한 배우가 말론 브란도를 모방해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는 스티븐 호킹 만큼 중요한...아니...더 위대한 사람이다.'''
by 조니 뎁
'''딘은 그처럼 되고 싶어했다.'''
by 데니스 호퍼
'''연기에 관해서는 말론 브란도는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다름 없었다.'''
by 마틴 신
'''말론 브란도 보다 스탠리 코왈스키를 더 잘 연기할 배우는 없다!'''
'''모두가 말론 브란도처럼 말하고 걸었다. 누구나 그처럼 되고 싶어했다.'''
by 로버트 듀발
'''말론 브란도가 이 총을 좋아합니다.'''
7. 기타
- 할리우드에서 가장 같이 일하기 싫은 배우로 젊은 시절부터 악명이 자자했다. 영화가 싫어졌는데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촬영을 해야 하면 촬영하다 말고 바지를 입은 채 소변을 봐버리기도 했다고. 덕택에 불쌍한 스탭과 조연, 그리고 힘없는 감독은 이를 갈면서도 말론 브란도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한다.
- 잭 니콜슨는 첫 장에 '너무나 젠틀한 말론에게, 잭 니콜슨 (For Marlon, who definitely is too gentle, Jack Nicholson)'이라 적은 제임스 카바노의 <늑대들과 살기엔 너무나 젠틀한 그들(There Are Men Too Gentle To Live Among Wolves)>이란 시집을 말론 브란도에게 선물했고,[38] 브란도 사후에는 그의 저택을 사들여 선배로서의 그를 경의하는 예를 표하기도 했다. 링크
- 할리우드 역대 최고 몸값을 자랑하기도 한 배우이다. 슈퍼맨 1에서 10분 정도 출연에 150억 원을 받았는데 이게 90분짜리 영화로 환산하면 개런티가 1억 불은 가볍게 넘어버린다!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사실 나오기 싫어서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하고 이만하면 제작자가 포기하겠지 했더니만 슈퍼맨 제작자인 일라이어 솔카인드가 좀 고민하다가 좋소! 라고 허락하자 오히려 브란도는 "미쳤어?"라고 어이없어했다고. 그러나 막상 솔카인드는 은근슬쩍 약속을 어기려들었다. 결국 브란도는 "그러기에! 처음부터 날 캐스팅하지 말아야지! 이래놓고 계약을 어겨? 어디 제대로 맛좀 봐라!" 분노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결국 그는 모두 350만 달러에 영화 흥행에 따른 러닝개런티까지 포함 1천 5백만 달러가 넘는 출연료를 챙겼다....우습게도 11년이 지난 뒤에 나온 배트맨(1989년 영화)에서도 잭 니콜슨이 이런 요구를 했는데 이 양반은 덤으로 영화 촬영조건으로 항상 7시까지 촬영을 마쳐야 하며 촬영 후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제작진은 간섭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니콜슨은 7시가 끝나면 칼같이 퇴근해서 자신이 묵고 있는 최고급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촬영지인 영국 여행을 했다고 한다. 문제는 조커 분장이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작업이라서 조커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은 3시간 이내에 촬영됐다. 이러니 제작진들 고생은.....브란도 못지 않았다고 한다.
- 조니 뎁이 가장 존경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조니 뎁은 1995년 <돈 후안>에서 브란도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 참고로 <대부>를 찍을 당시에는 나이가 좀 있어서 젊은 시절의 포스가 없지 않겠나 생각하는데 큰 오산이다. #
-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에서 감독 찰리 채플린과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채플린은 극중 인물의 연기를 자신이 먼저 보여주고 배우들에게 그대로 따라하라고 주문하는 스타일의 감독이었고, 브란도는 자신의 메소드 연기에 대한 자존심이 무척 센 배우였기 때문에 충돌이 자주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브란도는 자서전에서 채플린을 '자기중심적인 독재자이자 구두쇠'라고 표현했다. 채플린도 자서전에서 브란도와 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토로하면서 같이 공연한 소피아 로렌과도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 슬립낫의 노래인 Eyeless에 보면 "You can't see California without Marlon Brando's eyes"라는 가사가 있다. 보컬인 코리 테일러에 의하면 길에서 본 노숙자가 중얼거리던 말이라 한다.
- 2007년 <브랜도>라는 그의 전기 다큐멘터리가 나왔다. 영어가 되는 분들은 한번 구해서 보시기 바란다. 알 파치노, 에드워드 노턴, 숀 펜, 존 트라볼타, 마틴 스코세이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조니 뎁, 로버트 듀발, 존 보이트 등등의 어마어마한 배우와 감독들이 말론 브란도의 존재가 얼마나 영화사에 중요한 존재였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링크
- 브랜도는 폴 뉴먼와 더불어 할리우드에서 남자 배우 스타일을 결정하는 양대 산맥 중 하나이다. "너는 반항아인가? 신사인가?"이 둘을 잘 비교 설명해놓은 좋은 블로그 글이 있어 소개한다.링크
- 그의 이름은 훗날 일본의 어떤 판타지 만화에서 악당의 정석으로 자리잡았다.
- 한때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고전 미남 배우 움짤의 주인공이 말론 브란도이다.
- 첫 애니메이션 더빙작인 'Big Bug Man'으로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말론 브란도의 사망과 더불어 제작사의 내부 사정으로 결국 제작이 중단되었다. 브랜든 프레이저가 주연을 맡고, 말론 브란도는 악역 노파 역할이었다고. 당시 에이전트에 따르면 말론 브란도는 살아 생전에 한 번은 여자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했고, 죽기 직전에도 이 캐릭터를 무척 재밌게 연기했다고 한다.
- 좋지 않은 성격을 가진 말론 브란도지만 일본의 대배우 미후네 토시로만은 매우 존경하여 미후네랑 같은 비행기를 탔다는 말을 듣고 미후네에게 먼저 찾아가 인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둘다 엄청난 미남이고 대배우지만 미후네는 미담만 가득할정도의 인격자인 반면 브란도는 성격도 안좋은데다 강간혐의까지 있다.
[1] 인도-영국계 미국인 여배우.[2] 멕시코계 미국인 여배우.[3] 보라보라 섬에서 태어난 폴리네시아 원주민이다.[4] (+2녀)[5]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하단 참조.[6]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하단 참조.[7] 말론 브란도가 메소드 연기를 활용하기 전까지 영화계의 연기스타일은 연극식 특유의 과장되고 한정된 연기톤이었다. 그러나 말론 브란도가 나타난 이후로 폴 뉴먼, 제임스 딘 등 그의 연기 스타일을 모방한 수 많은 메소드 배우들이 나타났고, 그로 인해 할리우드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영화 연기스타일이 연극식 연기와 전혀 다른 리얼리즘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연극식 연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에도 무대 공연에선 이러한 연기가 많이 활용되는데 정확한 대사 전달과 명확한 제스쳐 등 관람자에게 있어 극을 이해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며, 현실성을 추구해도 지나친 리얼리즘은 극의 긴장감이 떨어질 수도 있기에 메소드 연기와 연극식 연기를 적절히 혼합하는 배우들도 많다.[8] 보통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와 함께 제일 자주 거론된다.[9] 굳이 따지자면 로버트 드니로가 체형을 조절하는 방식을 채택하며 그것을 유행시켜 드니로 어프로치라는 연기방식이 생긴다. 그러나 드니로 어프로치 또한 말론 브란도의 메소드 연기로부터 나온 가지임을 감안해야 한다. 이제는 연극식, 정통 메소드, 현대식 리얼리즘 연기가 완전히 혼합되고 어느 정도 완성되면서 개인이 한 시장을 뒤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론 브란도보다 더 인기있을 수는 있어도 말론 브란도만큼의 후대 영향력을 끼치긴 힘들 것이라는 것.[10]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와 동시대의 인물이다.[11] 사진의 얼굴 부분이 컷아웃되어 비틀즈의 페퍼상사 앨범에 추가되기도 했다. 초기 비틀즈 멤버의 인형 뒤에 위치해있다.[12] 10분 정도 출연하는 데 40억 원이 넘는 출연료를 받았고,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자 옵션까지 붙어 총 150억 원 정도를 받았다. 자세한 건 항목을 참고할 것.[13] 스텔라 애들러 1901.02.10–1992.12.21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스타 제조기[14] 고전 연극에서는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과장되고 격한 감정의 표현을 추구했으나, 스타니슬랍스키가 주창한 메소드 연기는 과잉 액션을 자제하고 등장인물의 심리적인 디테일을 추구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실제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15] '''잊지말자!''' 험프리 보가트는 터프가이였지 기존 체제를 완전 갈아엎자는 반동분자는 아니었다! 보가트의 대표작인《몰타의 매》의 샘 스페이드는 '''말보단 주먹이 먼저'''인 인물이지만 엄연히 기존 체제 아래 순응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더티 해리의 원조격인 인물이다.[16] 신인시절 영화사측이 뉴먼을 "제 2의 말론 브란도"라는 콘셉트으로 홍보하자 뉴먼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17] 기이하게도 브란도가 《대부》에서 맡은 역할인 비토 콜레오네 역시 극중에서 아들이 딸의 약혼남을 살해했다. 배역의 상황이 비극적이게도 배우의 현실에서도 나타난 것. 이 일화가 한국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다.[18] 1990년 5월, 브란도와 첫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크리스티안 브란도가 세번째 아내와의 자녀인 5녀 샤이엔의 애인 다그 드롤렛을 살해한 사건. 사연은 이렇다. 샤이엔은 연예인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모델이 됐으나 교통사고로 얼굴을 다쳐 은퇴한 이후로 자살 시도를 수차례 하는 등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빠 크리스티안에게 애인이 자신을 학대한다고 얘기하자 분노한 그가 술에 거하게 취해 애인을 총으로 쏴 죽여버린 것.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애인이나 여동생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었다(...). 이후 여동생이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음을 알게 된 후론 우울증 환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자신이 바보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애인이 죽을 때 '''여동생은 만삭의 몸'''이었고 아이는 사건 한 달 후 태어났다. 유복자라 아버지의 성을 못 가지니 당연히 성은 브란도. 그리고 그 아이가 5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자살해버리니 사실상 이 아이는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이다. 한편 크리스티안은 살인 혐의로 1991년 구속 및 수감되었지만 5년 뒤인 1996년 출소하였다.[19] 말론 브란도의 친구가 입양하였다.[20] 첫번째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작[21] 메타 스코어 88점[22] 찰리 채플린 감독의 영화. 그냥저냥인 평가와는 달리 흥행은 제작비의 반도 못 건져내고 쫄딱 망했다. 찰리의 구식 연기 지도를 말론은 맘에 들어하지 않아 충돌이 잦았다고...[23] 메타 스코어 75점[24] 두번째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수상작[25] '''메타 스코어 100점.''' 대부의 위엄...[26] 메타 스코어 77점[27] 잭 니콜슨과 공동 주연[28] 메타 스코어 86점[29] 말론 브란도 최고의 흥행작.[30] 메타 스코어 90점[31] 메타 스코어 63점[32] 영화 배우 조니 뎁이 감독한 영화.[33] 말론 브란도 생전 마지막 출연작이다.[34] 메타 스코어 71점[35] 《지옥의 묵시록》이후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돈 문제가 급해서 돈 때문에 죄다 졸작 내지 망작 급 영화에 많이 출연하게 되었고(아니면 끽해야 평작인 작품들에) 이는 팬들이 그의 필모에 조금 아쉽게 느끼는 부분이다. 그나마 유작인《스코어》가 꽤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 할지도.[36]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비토 콜레오네)의 장남 소니 콜레오네를 연기한 배우[37]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원작자.[38] 말론은 이 시집을 러셀 크로우에게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