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쿠퍼

 

'''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image]
'''남우주연상'''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

''' 제15회
(1943년) '''
제임스 스튜어트
(필라델피아 스토리)

'''게리 쿠퍼
(요크 상사)'''

제임스 카그니
(양키 두들 댄디)

'''제24회
(1952년)'''

'''제25회
(1953년) '''

''' 제26회
(1954년) '''
험프리 보가트
(아프리카의 여왕)

'''게리 쿠퍼
(하이눈)'''

윌리엄 홀든
(제17 포로수용소)

'''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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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 드라마'''
''' 제9회
(1952년) '''

''' 제10회
(1953년) '''

''' 제11회
(1954년) '''
프레드릭 마치
(세일즈맨의 죽음)

'''게리 쿠퍼
(하이 눈)'''

스펜서 트레이시
(여배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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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게리 쿠퍼
GARY COOPER
'''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ffd700 위치}}}'''
'''}}}#ffd700 6243 Hollywood Blvd}}}'''

[image]
'''이름'''
게리 쿠퍼 (Gary Cooper)
'''본명'''
프랭크 제임스 쿠퍼 (Frank James Cooper)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01년 5월 7일, 미국 몬태나 주 헬레나
'''사망'''
1961년 5월 1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직업'''
배우
'''활동'''
1925년 – 1960년
'''학력'''
그리넬 칼리지
'''신장'''
191cm
'''종교'''
미국 성공회가톨릭
'''가족'''
베로니카 쿠퍼 (1933 – 1961), 1녀
1. 미국배우 게리 쿠퍼
1.1. 소개
1.2. 작품
1.3. 스캔들
1.4. 죽음
1.5. 평가
2. 웨스턴 샷건의 등장인물


1. 미국배우 게리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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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소개


미국 몬태나 주 헬레나 출신이다. 본명은 프랭크 제임스 쿠퍼(Frank James Cooper). 전성기 시절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미남배우'''였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회 수상할 정도로 연기도 호평받은 명배우이다. 또한 존 웨인과 함께 '''서부극을 상징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몇 년간 학교에 다녔으며, 대학은 아이오와에서 나왔다. 비슷한 시기였던 1925년에 지인의 권고로 이름을 게리(Gary)로 바꿨다. 졸업 후에는 잠시 만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관두고 이후 몇 영화에서 엑스트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1927년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무성 영화 《날개》(Wings)[1]에 화이트 생도 역으로 출연했는데, 이때 190이 넘는 우월한 기럭지와 잘생긴 얼굴[2]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1929년작 《버지니아》에서 인상적인 서부극 연기를 선보였으며 1930년작 《모로코》에서는 세계적인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 출연해 스타덤에 오른다. 한때 쿠퍼는 2년 연속 가장 수입이 많은 스타였고 세금도 가장 많이 냈다.

1.2. 작품


쿠퍼는 일생동안 크고 작은 역 다 합쳐서 115개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IMDb 기준) 대표작으로는 《요크 상사》와 《하이 눈》,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있다. 특히 《요크 상사》와 《하이 눈》은 쿠퍼에게 '''2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는 영광'''을 안겨준다.[3]
그 이외에도 《Mr. 디즈씨, 도시에 가다》, 《양키스의 자존심》[4]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에 지명되기도 했으나, 아쉽게 후보에만 데만 그쳤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도 처음에는 게리 쿠퍼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본을 본 쿠퍼가 단칼에 거절했고, 이후 버틀러 역에 동갑내기 미남 배우 클라크 게이블이 낙점되자 쿠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헐리웃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이 될 것이다. 그 실패작과 함께 몰락하는 게 내가 아닌 클라크 게이블이라서 다행이다."'''[5] 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현실은...'''[6]
그리고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자신의 작품 《해외 특파원》과 《사보타주》에 쿠퍼가 출연하길 원했으나, 이 역시 쿠퍼가 거절했다. 허나 이후 개봉된 해외 특파원을 보고 쿠퍼는 "출연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국내에도 그의 영화는 많이 들어왔고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도 지상파 방송 주말 영화에서 자주 접했기에 활동 시기가 길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사망 연도가 61년이다. 그의 영화 대부분이 그가 죽은 다음에 상영 또는 방송되었다. 그 때는 직접 배급, 동시 개봉이 아니라 미국보다 몇 년씩 늦게 들어왔기 때문. 그리고 110편이 넘는 작품 중 국내 개봉작 대부분은 전쟁 영화와 서부극이었고, 손꼽을만큼 적은 스릴러, 멜로 몇몇 작품 외에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무성영화 시대의 끝자락부터 흑백 영화를 거쳐 컬러 시대까지 활동한 배우라서 그의 초기 영화는 국내 개봉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서부 영화에 많이 나왔는데, 정말로 총을 빠르게 잘 쐈다고 한다. 영화 장면을 봐도 총 뽑는 동작이 빠르다.

1.3. 스캔들


쿠퍼는 1933년 샌드라 쇼와 결혼하고 외동딸 마리아 쿠퍼를 두었다. 그러나 쿠퍼는 결혼 전이나 후나 시도 때도 없이 염문설을 퍼뜨려댔으며, 게이라는 설도 있었다. 쿠퍼가 20대 때 배우 앤더슨 롤러(Anderson Lawler)와 수개월간 연인 관계를 맺었고 동거까지 했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진 작가였던 세실 비튼과 연인 관계였다느니, 심지어는 절친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와의 열애설도 있었다.[7]
그러나 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여성과의 염문설이 많았는데, 그 중 가장 임팩트가 컸던 것이 바로 여배우 퍼트리샤 닐과의 관계였다. 퍼트리샤 닐과는 1949년 영화 《마천루》에서 같이 공연한 것을 계기로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데 끝내 쿠퍼의 아이까지 임신했다. 그러나 아내인 쇼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끝끝내 이혼에는 응하지 않았고 결국 닐은 낙태를 하게 된다.
이 일로 쿠퍼와 쇼는 잠시 별거했고, 닐은 충격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대신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했고, 그녀의 여배우로서의 커리어가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건 두말 할 나위 없는 사실.[8]
쿠퍼도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색마''' 기질에 대해 깊이 반성하는... 듯 보였으나 '''1957년'''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밀렌 드몽조와 또 한 번 염문설을 터뜨리며 다시금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다. 이런 그의 호색한 기질은 그의 딸인 마리아 쿠퍼가 대놓고 깠을 정도.
참고로 쿠퍼는 여성을 유혹하는데 단 세마디면 충분했다고. "설마" "정말?" "처음 듣는 말인데" 이 세마디면 충분했다고 한다. 이는 짤방으로도 만들어져 있으며 요지는, 정말 저 세마디 말로 유혹이 가능하다기 보다는 그만큼 경청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쿠퍼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남에 키까지 컸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알아두면 좋은 얘기인데, 본인이 직접 한 말은 아니고, 옆에서 그를 지켜봤던 빌리 와일더 감독이 그에 대해서 한 말이다. #

1.4. 죽음


쿠퍼는 1960년 4월 자신의 전립선에 암이 생겼음을 알고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폐와 뼈로 전이된 상황이었다. 이후 쿠퍼는 요양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1961년 5월 13일 쿠퍼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다.[9]
쿠퍼가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은 절친한 친구이자 배우였던 제임스 스튜어트가 쿠퍼를 대신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던 중 "쿠퍼가 위중한 상태이다." 라고 울먹이면서 알려졌다.

1.5. 평가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사석에서 쿠퍼를 가리켜 '''"제가 만약 대통령 선거를 치룰 때, 그 친구가 나왔다면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렇게 생긴 친구는 생전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 웃음은 또 뭐라고 표현해야 합니까? 아마 여자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얻었겠죠."''' 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10]
또한 미국의 모 정치인은 '''"저 사람 너무 잘생긴 거 아냐? 이러다 정치인들 인기 다 떨어지겠군."''' 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적었듯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이는 프랭크 캐프라 감독의 작품에서 구축된 것이 많으며, 결정적으로 《요크 상사》에 출연해 원조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며 제대로 각인되었다. 1차대전에 참전했고 공화당 지지자였다가 민주당으로 바꿨다. 그러나 게리 쿠퍼가 대표적 반공주의자임은 부정할 수 없는데, 매카시즘 당시 참여하기는 커녕 월트 디즈니 등과 함께 아예 반공 단체를 손수 만들었다![11]
좌우간 당시 미국인들이 얼마나 게리 쿠퍼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는지는 Puttin' On The Ritz[12]의 가사만 봐도 알 수 있다.

Dressed up like a million dollar trouper

백만장자 배우가 된 것처럼 차려입고

Trying hard to look like '''Gary Cooper''' (Super Duper)

게리 쿠퍼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게리 쿠퍼 덕후로 유명하다. 대학 시절 쿠퍼가 세상을 떠나자 추모하기 위해 결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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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굉장히 좋아했다. 생전에 자동차 만지기를 좋아했고 세차도 자신이 직접 정성들여 손수할만큼 차에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1939년 호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자 당시 최고급 차인 두센버그를 사서 라이프지에게 자랑하는 모습. 2018년 미국 페블비치 옥션에 저 차가 나타났고 2200만 달러에 낙찰됐다고..(한화 250억)

2. 웨스턴 샷건의 등장인물


웨스턴의 보안국 국장. 만 54세의 청춘(?)으로 웨스턴 전체의 치안을 책임지는 중역이지만 전혀 심각하지 않은 외모와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제니퍼 로페즈가 "여전히 긴장감 없는 얼굴이시네요"라고 틱틱거릴 정도. 평상시엔 농땡이를 피우며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국장 직위를 포커쳐서 따진 않았는지 능력있는 모습 또한 자주 보여준다.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보안국 본부가 공격당할 것을 예측하고, 오아시스가 보안국 본부를 공격할 당시 완전히 포위된 와중에도 C4를 미리 빼돌린 뒤 옥상까지 유인한 다음 C4를 폭파해서 적 병력을 날려버렸다. 이 때의 대사가 상당한 명대사. "연방 보안국 건물 따위야 새로 지으면 그만이지만, 국가는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이후 지원군을 이끌고 국회의사당에서 저항하던 쿠데타군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는 연설[13]을 하여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이 때 54세의 청춘(?)이라며 자기 입으로 말한다...
[1] 제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2] 할리우드의 대표 키다리로 유명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별 차이가 없다. 191cm면 현재도 장신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거인이었다. 당시 미국 백인 남성 평균 키는 174cm 내외였다. 지금 한국 남성키가 173~4cm 정도인데, 실감이 안난다면 여러분의 학교에 키가 190cm가 넘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되는지 세어보자. 비율편차를 고려해보면 사실상 상위 0.5% 이내라고 보아도 좋다. 사실 이는 당시 제작자들이 키 크고 잘 생긴 백인들을 배우로 뽑은, 인종주의적 사상 배경도 이유 중 하나다.[3] 참고로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최다 수상 기록 역시 2013년까지는 2회였다. 쿠퍼 이외에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2번 수상한 배우는 프레드릭 마치, 스펜서 트레이시, 말론 브란도,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숀 펜 등이 있다. 이후 이 기록은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링컨 그 자체였다는 찬사를 받았던, 이 시대 최고의 배우로 손꼽히는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세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유일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자로 남아있다.[4] 이 영화에서 쿠퍼는 루 게릭 역할을 맡았다.[5] "Gone With The Wind is going to be the biggest flop in Hollywood history. I'm glad it'll be Clark Gable who's falling flat on his nose, not me."[6] 알다시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해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평정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헐리웃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되었다. 덤으로 1억 9000만 달러를 벌며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요새 10억 달러 넘게 버는 영화가 널렸는데 2억이 뭐가 대단하냐고? '''이 때는 1930년대였다.''' 이 흥행을 깬 것이 죠스 1으로 무려 36년이나 지난 1975년 일이다. 오죽하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거둔 1억 9천만 달러를 넘어선 2억 달러 이상 벽을 부수긴 어렵다고 하여 블록버스터라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미국 영화 흥행 순위에서 여전히 1위를 차지할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7] 쿠퍼가 사망한지 2달도 안 되어 헤밍웨이가 권총 자살을 함으로써 그런 의혹에는 더욱 불이 붙었다.[8] 티파니에서 아침을에 남자주인공을 내연남으로 둔 부자 유부녀 디자이너역으로 출연. 이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수상하였다. 그녀는 2010년 타계했다.[9] 사망 6일 전은 쿠퍼의 생일이었는데, 쿠퍼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10] 보통 대통령같은 최고지도자의 경우 거구가 플러스 요인인데, 사실 FDR의 경우 게리 쿠퍼 못지 않게 거구(188cm의 장신)였다.[11] 다만 이들의 경우 비난의 강도가 적은데, 그 이유는 이들은 반공 신조를 지키기 위해서 한 것이고, 매카시즘의 경우 조지프 매카시 본인이 권력을 얻기 위해 조작하여 공산당몰이를 한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하기는 어렵다.[12] 어빙 벌린이 1929년 작곡한 곡. 1982년 독일의 뮤지션 타코(Taco)가 리메이크하면서 인기를 끌었다.[13] "군대의 최고사령관은 국민일세. 자네들은 지금 그 국민에게 총을 겨눴다는 것을 생각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