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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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 지배 시기 당시의 폴란드.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분열되어 있었던 오늘날 폴란드의 동반부이다.
이 당시의 폴란드는 독자적인 민족 정체성이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부인당하고 민족 말살 정책을 통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을 겪었고[1] , 이로 인해 러시아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해있던 상황이었다. 폴란드의 독립 직후 벌어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군이 소련군에 대해 벌인 각종 전쟁범죄의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역사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가 설치되었을 당시는 1832년 11월 봉기와 1863년 1월 봉기로 폴란드 입헌왕국이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치권을 상실하고 급속하게 러시아에 편입되어 가던 시기이다. 특히 1870년대부터는 사실상 러시아의 장군들이 통치하는 군정이 되었고 1880년대에는 폴란드어가 공용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사용이 금지되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던 폴란드 출신 물리학자인 마리 퀴리에 의하면, 학교 수업 중에 수시로 러시아군 장교가 쳐들어와서 폴란드인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테스트하고 학생들의 러시아어 실력이 서툴면 교사들을 갈궜다고 한다.[2] 이같이 가혹한 민족 말살 정책은 당연히 폴란드인들의 분노를 샀다. 마리 친구의 오빠는 폴란드 독립 운동에 가담했다가 공개 총살당했고, 이에 분노한 마리와 그 친구들은 러시아 제국의 승전비를 볼 때마다 비석에다 침을 뱉기도 했으며,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3] 이 때의 원한 때문에 뒷날 러시아 제국의 후신인 소련을 상대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군은 잡아온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구타하고, 고문과 학대를 일삼아서 2만명 가량을 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 동화 정책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제국이 폴란드 지역을 점령, 폴란드 섭정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면서 종료되었다. 러시아 제국 본토를 떠나 러시아령 폴란드로 이주하여 살던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이 러시아령 폴란드를 점령하자 이를 피해 러시아 본토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처 도망가지 못한 러시아인들은 독일 제국 및 독일 제국 편에 붙은 토착 폴란드인들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오늘날 폴란드 내 정교회 신자들 및 러시아령 폴란드의 러시아인 실향민 후손들은 폴란드에 남아있는 러시아 제국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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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련 문서
[1] 현재도 폴란드의 비아위스토크는 폴란드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러시아 색채가 강한 편이다. 사실상 러시아계 국가로 여겨지는 벨라루스와의 접경지대(소련 해체 이전에는 소련과의 접경지대)에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2] 출처는 이브 퀴리가 쓴 마리의 전기인 <마담 퀴리>로, 국내에는 2006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다.[3] 러시아 제국은 1917년에 러시아 혁명으로 붕괴되었고, 폴란드는 이듬해인 1918년에 독립했으며, 마리 퀴리는 1932년까지 생존해있었기 때문에 자국의 원수인 러시아 제국의 패망과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모두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