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폴란드 전쟁
1. 개요
소파[3]전쟁, 혹은 폴란드-볼셰비키 전쟁이라고도 한다. 소비에트[4] -폴란드[5] 전쟁은 1919년 2월 14일부터 1921년 3월 18일까지 약 2년 간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848년 혁명 때부터 널리 퍼진 연속혁명론과 무력 혁명수출을 결정적으로 분쇄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정치사와 군사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또한 이 전쟁에서는 기병의 기동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이때의 전훈을 분석하여 종심 전투 이론을 개발하게 된다. 폴란드인에게는 2차 빈 포위와 더불어 가톨릭 국가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2. 전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일자별 경과.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17년 독일 제국 정부는 전쟁 수행에 따른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해 폴란드인의 협력이 절실해졌다. 따라서 독일은 러시아 제국령이었던 프리비슬린스키 크라이를 포함한 지역에 폴란드 섭정왕국을 부활시켰다. 이로써 폴란드인들은 명목상으로나마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전신이 된다.
한편 과거 폴란드 영토였던[6] 우크라이나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멸망한 이후 러시아의 지방으로 편입되 어있었으나 19세기 말부터 민족주의가 발흥함에 따라서 우크라이나 고유의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2월 혁명 이후 라다를 소집해 모스크바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연방국가로서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 조건에 케렌스키 정부는 사실상의 승인, 페트로그라드는 명시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10월 혁명 이후 키예프 라다는 모스크바에 더 이상에 기대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립국가 건설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이루어진 괴뢰 체제를 앞세워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었으나, 5백여명의 사관학교 출신 결사대가 크루티에서 기차를 타고 진군하는 볼셰비키를 저지하는 사이에[7] 키예프 라다는 하르카우로 이전할 수 있었고 결국 우크라이나 정부를 붕괴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리가가 함락당하자 전쟁 수행능력을 잃어버린 볼셰비키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가 아니었다.[8] 폴란드가 러시아를 침략했다는 주장은 당시 동유럽 역사에 무지하거나 볼셰비키측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명목상 동유럽에는 평화가 도래하였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한 두 당사자 중 하나인 독일 제국이 소멸하고 볼셰비키는 아직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당 구역은 실질적으로 무주지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생각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폴란드는 연방을 멋대로 분할해버린 당사자[9] 들이 모두 소멸한데다가 독일과 러시아가 국력을 회복할 상황을 대비해서 최대한의 완충장치를 확보하려 한 반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민족[10] 을 아우르는 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볼셰비키는 러시아 제국의 유산을 최대한 승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독일과 헝가리 지역에서 발생하는 소비에트 혁명을 최대한 지원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군이 벨로루시로 진격하였다. 1919년 2월 14일, 폴란드는 베레자 카르투스카(Bereza Kartuska)에 주둔하던 소비에트 러시아군을 공격하여 80명을 사로잡았다. 이후 폴란드군은 북동쪽의 소비에트 러시아군을 몰아내면서 빌뉴스와 민스크를 점령했다. 이후 1920년에는 볼셰비키를 몰아내기 위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의 동맹요청을 받고 5월 7일에 키예프를 점령,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절반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소비에트 러시아가 폴란드에 대한 반격을 결정, 세르게이 카메네프가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전쟁을 지휘했다.
반격은 성공적이어서, 6월 10일 키예프가 탈환되고 리투아니아와의 연합공세로 빌뉴스도 함락시켰다. 이 무렵 영국이 폴란드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개입하여 더 이상 진격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당 중앙위원회는 7월 16일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7월 23일 정치국은 율리안 마르칠레프스키를 지도자로 삼은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를 수립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새로운 국경선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바로 당시 영국 외무장관 조지 너대니얼 커즌의 이름을 딴 커즌 라인이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초기에는 이 제안을 잠시 고려했으나 붉은 군대의 진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자 이를 무시하였고 레닌은 폴란드 침공을 주장했다. 트로츠키와 라데크는 레닌의 이러한 주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남서부 지역에서 크림 반도의 표트르 브란겔이 지휘하는 백군과 싸우던 스탈린도 폴란드에 정신을 쏟는 사이에 백군이 회생할 가능성,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치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점,[11] 폴란드 노동계급의 강성한 민족주의를 경고했다.
하지만 레닌은 폴란드로 들어가면 모든 노동자들과 유럽의 좌파 정당이 혁명을 일으켜 소비에트 러시아를 맞이할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폴란드를 거쳐 독일까지 모두 적화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러시아 공산당은 폴란드를 넘어 독일까지 진출, 독일 공산당을 원조하여 정권을 장악하여 러시아-폴란드-독일을 아우르는 거대한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을 만들자는 대소련 구상도 하였는데,[12] 이것이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폴란드를 원조하는 계기가 되었다.[13] 참고로 이 구상은 소비에트 군대가 폴란드 국경선을 넘기도 전부터 거론되던 것으로, 당시 레닌이[14] 얼마나 낙관에 빠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한 전략 계획을 승인했고 이에 소비에트 러시아군은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서 바르샤바까지 진출했다. 한편 스탈린은 레닌의 의지가 확고하자 확전 반대파에서 찬성파로 돌아섰다. 5월 26일 남서부 전선에 배속된 스탈린은 7월 12일 레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스탈린은 크게 고무되어 다음과 같이 답장했다."스탈린에게 요청하는 바, 1) 공세를 강화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2) 내게 그의 의견을 전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영국의 중재는) 크림 반도를 합병하겠다는 야심을 감춘 순전히 사기라고 생각합니다."
계속된 승리에 고무된 소비에트는 커즌이 런던에서 평화협상을 열어 휴전을 맺자고 제의했을 때 이를 다시 무시했다. 스탈린은 영국의 제의를 비웃었다."폴란드군은 완전히 궤멸되고 있으며, 폴란드는 통신과 행정이 마비되었고, 폴란드에서 내리는 명령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우리 수중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폴란드인들은 쉽게 회복되지 않을 붕괴를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에서의 전황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낙관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스탈린이 경고한 대로 보급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협조하기는커녕 소비에트를 침략자로 인식하여 맹렬히 저항했다. 그리고 투하쳅스키는 전선에서 한참 떨어진 민스크에서 지휘하느라 전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낙관했으며 폴란드인들이 수도 방위를 위한 힘을 비축하기 전에 싸움을 끝내야 한다면서 신속한 바르샤바 점령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나는 폴란드가 패배한 지금처럼 제국주의가 약했던 적이 없고 우리가 지금처럼 강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단호하게 대처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나 세계혁명에 모두 좋을 것입니다. 정치국의 결정을 알려주십시오."
결정적인 전환점은 8월 12일부터 25일까지 계속된 바르샤바 전투였다.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서부전선군은 폴란드군의 저항이 약한 바르샤바 북방에서 전선을 돌파, 서쪽으로 종심 깊게 돌진하여 바르샤바를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피우수트스키가 파놓은 함정이었다. 폴란드군은 의도적으로 바르샤바 북쪽에서 약하게 저항하여 투하쳅스키가 종심 깊은 공격을 실시하도록 유도한 뒤, 서부전선군의 허술한 남쪽 측면을 돌격대로 들이받아 포위 격멸시키는 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바르샤바의 작전은 폴란드가 입안한 것이었고, 전투에 참전한 병력도 전부 폴란드 병사들이었다. 물론 이전에 프랑스에서 건너온 폴란드 자원병(폴란드 출신 프랑스 이민자와 폴란드 출신 독일군 포로로 구성)과 각종 물자, 프랑스 장교들이 상당한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이 승리의 주연은 단연 폴란드와 폴란드의 독립 영웅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였다. 투하쳅스키는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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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 근방에서 폴란드군에게 노획된 붉은 군대 군기.
이를 기점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폴란드에 유리하게 되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붉은 군대를 수차례 더 격파했다. 카메네프는 서부전선과 남서부전선에서 동시에 진격하여 상황을 타개하려 했으나 남서부전선의 경우에는 폴란드뿐만 아니라 백군과도 싸워야 했으므로 두 전선의 조율은 무척 힘들었다. 무엇보다 남서부전선에는 독불장군 스탈린이 있었다. 스탈린은 리보프 점령 계획을 수립하여 군사적 영광을 차지하려 했고 7월 22일 예고로프가 리보프와 루블린으로 진격함에 따라 서부전선과의 조율은 불가능해졌다. 8월 2일 정치국은 남서부전선을 둘로 나누어 절반은 폴란드와의 전쟁을, 절반은 우크라이나 방위를 맡겼으나 남서부전선의 움직임은 없었다. 카메네프는 남서부전선에 병력을 이동시키라고 지시했으나 스탈린은 이는 불가능한 명령이라며 노발대발했다. 이미 리보프에 투입된 남서부전선 병력은 바르샤바로부터 32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늪이 가득한 습지 때문에 신속한 이동도 불가능했다. 거기에 폴란드 주민들의 저항도 극심했다. 스탈린은 카메네프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그의 잘못된 명령으로 남서부전선 작전이 좌절되었다고 비난했다. 예고로프는 카메네프의 명령에 복종하려 했으나 스탈린은 작전 승인을 거부하고 리보프 공격에 매달렸다. 하지만 세묜 부됸니의 기병대가 인근에서 발생한 전투 때문에 빠지면서 더 이상 공격이 불가능해지자 8월 20일 스탈린은 리보프 공격을 포기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서부전선 전체가 궤멸된 상태였다.
이후 투하쳅스키와 트로츠키는 서부전선의 궤멸이 스탈린이 멋대로 병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이후 이것이 정설처럼 알려졌으나 이는 명백한 책임 전가로 바르샤바에서의 패배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투하쳅스키가 지나친 낙관을 기반으로 무리한 바르샤바 공격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에게 책임이 없진 않으나 그것은 투하쳅스키의 책임보단 현저히 작은 것이었다. 게다가 스탈린이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작전에 협조했다 쳐도 보급망이 붕괴되고 도로도 형편없는 320킬로미터를 달려서 바르샤바의 전투에 스탈린의 병력이 투입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8월 19일 모스크바로 돌아간 스탈린은 크림의 브란겔을 무시하고 남서부전선을 무시한 중앙에 책임이 있다고 맹렬히 비난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고수했고 트로츠키가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국은 브란겔 전선을 주요 전선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레닌과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보인 태도가 적절치 않았다고 비난하면서 2주의 공식 휴가를 주었다. 격노한 스탈린은 9월 1일 정치국에 복귀하여 군사활동에서 물러나게 해달라고 요구,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혁명군사위원회를 떠났다.
한편 폴란드는 벨로루시 영토만이라도 확보하려 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 측은 폴란드 말고도 각지의 반소련 백군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15] 폴란드와의 전쟁에만 신경 쓸 수가 없었고, 폴란드 역시 힘이 부친 탓에 전쟁을 지속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소비에트에서 긴급히 소집된 정치국 회의는 트로츠키가 폴란드와 타협해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안을 제출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소비에트 내부에서도 무리한 전쟁을 주장한 레닌에 대한 비난이 거세졌다.
9월 22일 개최된 9차 당회의에서 레닌은 '엄청난 패배와 파멸적 상황'을 인정하고 자신이 폴란드를 그저 독일을 적화하기 위한 교두보로 여기고 얕보았다고 시인했다. 레닌은 "나는 군사학 지식이 있다고 조금도 자부하지 않는다."라면서 붉은 군대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맡긴 것에 대해 자아비판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게 책임을 돌리며 비난했고 리보프 공세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서 정치국은 그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찼다. 레닌 역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스탈린의 전략적 오판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전쟁의 근본적인 책임은 트로츠키와 스탈린 모두 전쟁을 하기 어렵다고 경고했음에도 낙관에 차 전쟁을 계속한 레닌에게 있었다. 결국 당 회의에서 일부 당대표가 레닌에게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었다. 9월 23일 스탈린은 자신이 전쟁에 반대했음을 알리는 짧은 연설을 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는데 변명거리가 궁색했던 리보프 공세에 대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폴란드 침공의 실패의 책임을 오랫동안 뒤집어쓰게 되었다. 스탈린은 이 원한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보복하게 된다.
결국 양측은 일단 1920년 10월에 정전을 합의했고, 이후 협상에서 소비에트 러시아 측이 폴란드에 대폭 양보해서 벨로루시를 분할하여 3분의 2는 폴란드에게, 민스크를 비롯한 3분의 1은 러시아가 분할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것이 바로 1921년 맺어진 리가 조약이다.
3. 영향
사실 폴란드 정부는 이번 협상을 조금 더 끌고 갈 경우 이득을 볼 여지가 남아있었으나 전쟁에 참여한 장성들이 전후 국민영웅으로 떠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멋대로 협상을 종결짓고 말았다. 덕분에 단독강화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었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공중에 붕 떠오른 새가 되어 소멸하고 말았으며[16] 우크라이나 영토에 살고 있던 수십만명의 폴란드인과 폴란드 영토에 사는 우크라이나인들 역시 졸지에 실향민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폴란드는 전쟁에서 이득을 보기보다 당장의 국가안전을 보장받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인데 이런 문제는 곪아들어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스테판 반데라를 위시한 상호간의 증오범죄로 폭발해 수십만명의 학살 피해자를 낳고 말았다.
한편 폴란드는 소련 이외 다른 이웃 국가들과도 영토 문제로 잦은 갈등을 벌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폴란드는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전쟁 기간 동안 한때 연합을 이루던 나라인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인구의 60%가 폴란드라는 논리로 현지 봉기를 선동해 그 일대를 괴뢰국화한 뒤 얼마 후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당연히 리투아니아는 이 사건 직후 격분하여 즉시 폴란드와의 외교를 단절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때의 앙금이 남아 폴란드에 대한 국민 감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 한편 교통적 요충지이자 석탄 주산지인 테셴에도 마찰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분할하기로 한 것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때 체코가 뒤통수를 치고 무력으로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폴란드는 뮌헨 협정으로 독일이 체코를 분할 강점할 때 꼽사리 껴 폴란드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체코의 테셴 지방을 강탈하고 얼마 후에는 슬로바키아 국경의 야보리나와 토르스테냐까지 합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도로 가져갔다가 냉전 붕괴 이후 테셴 지역은 폴란드 제3공화국과 슬로바키아 간 협상을 통해 1/3-2/3 분할안으로 돌아갔다.
추가로 이때 폴란드군은 소비에트 러시아군을 대파하고 붙잡은 포로들을 학대하여 8만 명 포로 중 15,000명에서 2만명 가량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사망률을 보면 약 20-25%인데, 이는 2차대전 당시 독일군 관리하의 소련군 포로 사망률과 비슷하다. 소련 시절 카틴 학살 같은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공산주의 시절은 물론[17] 공산주의가 몰락한 현재까지도 러시아가 사과를 거부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이때의 포로 사망률이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소비에트 측에 붙잡힌 폴란드 포로들도 5만 명 중 2만여 명이 사망했기에 적어도 포로 대우 측면에서는 러시아도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4. 결론
폴란드는 최소한 당장의 국가존속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를 지배했던 독일과 러시아(소련)는 여전히 존재했고,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한 폴란드는 핀란드에서 루마니아까지 1차 세계대전으로 독립한 신흥국가들을 아우른 미엔지모제(Międzymorze)라는 연방국가로의 개편을 검토하였지만 결국 이론적인 차원에서 머무르고 말았다.
결국 소련과 독일은 당면한 문제가 진정되자마자 다시 폴란드를 지배하려 했고 이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또한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급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발흥한 계기가 된 전쟁이며[18]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동맹(OUN)은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폴란드를 상대로 파괴, 암살공작을 벌였다. 2차대전 발발 후로도 스테판 반데라가 이끄는 OUN-B 분파는 나치에 협력하여 폴란드, 유대인을 상대로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폴란드가 버티지 못했다면 서유럽 전체의 공산화는 막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러시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일대.[2]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군 원수.[3] 폴란드를 한자로 음차하면 '파란(波蘭)'이라고 한다.[4] 소련, 즉 소비에트 '연방' 설립 이전 시점이라 이렇게 칭한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같은 편으로 참전했지만 아직 하나의 연방으로 묶이지는 않은 상황이었다.[5] 정확히는 폴란드 제2공화국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같은 편으로 참전.[6] 그냥 연방 영토가 아니라 '폴란드 왕관령', 그러니까 폴란드 국왕의 직할영토였다.[7] 당시 동원 가능한 부대는 키예프에서 볼셰비키의 봉기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사대원들은 지금도 우크라이나 민족영웅중 한명으로 추양받고 있다.[8] 10월 혁명 당시 볼셰비키가 자력으로 장악한 도시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가 전부고 나머지는 현지 행정부나 소비에트한테서 정변을 승인받은게 고작이었다.[9] 독일 제국, 합스부르크령 오스트리아 대공국, 러시아 제국.[10] 혈연적 공동체가 아닌 말 그대로 우크라이나에 사는 모든 민족을 의미한다.[11] 당장 보급과 정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고 투입할 수 있는 병력도 전성기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 전선에 100개 사단 이상을 투입할 수 있었던 반면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로 35개 사단만 투입할 수 있었다.[12] 독일은 제 2제국 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의 중심지였으며, 특히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쟁 책임론과 사회적 혼란에 힘입어 극좌파의 봉기가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13] 사실 군사 원조 자체는 폴란드 독립 직후부터 프랑스에 의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로 폴란드인들이 계속 복무해 왔던 인연으로 프랑스는 폴란드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인 입장이었고, 그래서 1차 대전중 프랑스군에 복무한 폴란드인(약 20만 명에 달했다)들을 종전으로 남아도는 잉여 군수 물자와 군사 고문단과 함께 본국으로 돌려보내 신생 폴란드군을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당시 폴란드군의 사진이나 기록화를 보면 죄다 프랑스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훗날 불의 십자가단, 프랑스 사회당을 지도한 장 프랑수아 드 라 로크도 폴란드군 고문 출신.[14] 정작 레닌의 이러한 구상에 대해 다른 볼셰비키들은 회의적으로 보았고 특히 민족 문제에 정통한 스탈린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면서 설령 독일의 적화가 가능해도 독일과 러시아의 민족 문제 때문에 독일이나 폴란드가 연방에 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15] 이 당시 러시아 내전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국의 지원으로 백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한 시기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16] 폴란드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강화조건에는 내각 요인들을 양도하겠다고 했지만 따로 신변을 확보해놓고 행방불명되었다고 우기면서 일을 흐지부지 만들었다.[17]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폴란드 공산정권도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소련에 대해 카틴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및 사과를 요구했다.[18]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근원은 18세기 코사크 민족주의나 타라스 셰우첸코의 민족담론에서 시작되지만, 우익 민족주의, 당시 이탈리아에서 막 시작된 파시즘과 유사한 연합체로 2차대전 악명을 떨친 서부지역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이 전쟁 결과 영향력을 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