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르클레르
1. 개요
프랑스의 군인으로, 2차 대전 시기 자유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2. 초기 경력
르클레르는 1902년 북프랑스의 피카르디 지방[13] 에서 귀족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2년에 상 시르 사관학교를 입학한 르클레르는 기병장교로 졸업해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에서 근무했는데 반란을 일으킨 부족민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군 제 4 군단의 참모대위로 재직중이던 르클레르는 1940년에 벨기에를 침공한 독일 국방군과 대항했지만 부상을 입고 인근 병원에 수용되었다. 다행히 독일군의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한 르클레르는 파리로 돌아온 후 레지스탕스 활동을 부르짖는 샤를 드골 장군의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되었다.
3. 자유 프랑스군의 일원으로
그는 이때 자유 프랑스군으로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는 보르도에서 피난중이던 처자식을 만난 후 혼자서 중립국이던 스페인, 포르투갈을 경유하여 런던으로 건너갔다. 이 때 프랑스에 남겨진 그의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르클레르라는 가명을 썼다. 런던에서 드골을 만난 르클레르는 아프리카의 차드에서 임무에 성공해 1940년 11월에 차드 주둔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1년에 차드를 출격해 이탈리아령이던 리비아 남부의 오아시스 도시였던 쿠플라 점령에 성공한 르클레르는 8월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1942년 12월에 3,000명의 차드 주둔군을 이끌고 리비아를 공격한 르클레르는 1943년 1월에 수도 트리폴리를 점령했다. 그 후 이집트에서 온 영국군과 합류한 르클레르는 몽고메리 원수의 제 8군에 편입되어 튀니지 침공작전에 동행했는데 이 해 5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드골의 명령으로 모로코를 경유해 자유 프랑스군 제 2 기갑사단을 조직한 르클레르는 조지 패튼 장군의 미국 제 3군과 함께 1944년 8월 1일에 노르망디로 상륙했다. 파리 주둔 독일사령관인 코르티츠 장군이 항복전에 파리를 파괴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자, 드골은 아이젠하워와 회담 후 르클레르가 이끄는 제 2 기갑사단을 재빨리 파리에 입성시키기로 했다.
8월 23일에 제 2 기갑사단의 레이먼드 디오스터 대위의 전차가 파리에 첫 발을 내딛었고, 다음날에 르클레르 장군이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과 회담해 연합군은 파리의 무혈입성에 성공했다. 르클레르가 이끄는 프랑스군 제2 기갑사단의 파리 입성은 프랑스가 스스로의 힘으로 수도를 되찾았다는 정치적 상징성을 부여했으며, 이 점에서 파리 시민들을 포함한 프랑스 인들에게 큰 자부심을 주었다.
이어 제 2 기갑사단은 3개월만인 11월 23일에 스트라스부르를 해방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프랑스의 모든 영토가 나치 독일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를 가졌다.[14] 현재 스트라스부르 시에 르클레르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도 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4. 전쟁 이후
1945년 8월 18일, 태평양지역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르클레르 장군은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 호 함상에서 이뤄진 일본의 항복조인식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그 후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으로 건너 가 코친차이나를 평정한 후 1946년 3월에 제 2 기갑사단을 이끌고 하이퐁에 상륙해 하노이에 진주했다.
당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일본군이 항복한 후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군의 복귀로 인해 농촌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 때 르클레르 장군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해 '''살육자 르클레르'''라는 오명을 얻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대 베트남 식민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지는 않았던지 베트민 지도자 호찌민과 협상도 하고 프랑스 정부에게 독립운동 유혈 진압 중단과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다.
1946년 7월 18일에 북아프리카 총감으로 임명된 르클레르는 현지에 부임했다가 1947년 11월에 승선중이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알제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파리의 오텔 드 장발릿트 지하 성당에 묻혔는데 프랑스 정부는 1952년 8월 23일 고인이 된 그에게 원수 칭호를 추서했다.
현대 프랑스군의 3.5세대 전차 르클레르 전차가 이 장군의 이름을 따게된다.
5. 관련 항목
[1] 본명은 필리프 프랑수아 마리 '''콩트''' 드오트클로크였다. 르클레르란 이름은 자유 프랑스군 시절에 그가 썼던 가명이다.[2] 외래어 표기법상 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3] Marshal of France[4] Grand Cross of the Legion of Honour[5] Order of Liberation[6] Médaille militaire[7] Croix de Guerre 1939–1945[8] Croix de Guerre des TOE[9] Companion of the Order of the Bath (UK)[10] Distinguished Service Order (UK)[11] Silver Star (US)[12] Commander of the Legion of Merit (US)[13] 현 솜므.[14] 특히 스트라스부르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 지대로 양국이 오랫동안 쟁탈전을 벌였던 알사스 로렌 지역에 위치했다. 그러한 지역을, 프랑스군의 주도로 탈환했다는 점에서 프랑스는 큰 정치적 승리를 달성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