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뵐
1. 개요
독일의 소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소설 '열차는 정확했다 (Der Zug war pünktlich) (1947)', ''여인과 군상 (Gruppenbild mit Dame) (1971)',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1974)'으로 유명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영화화한 감독인 폴커 슐렌도르프에 의해 1975년에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2. 생애
하인리히 뵐은 1917년 쾰른의 목공예 가문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카이저 빌헬름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39년 쾰른대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나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다. 전쟁 중에는 부상을 당하여 야전병원 생활을 하기도 하고 꾀병과 서류 조작으로 탈영하기도 했다. "히틀러를 위해서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후 귀향하여 '전쟁에서 본 것'과 전후의 '폐허'에[1]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1949년 미델하우베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하고 첫소설 <열차는 정확했다>의 출판을 시작으로 참혹한 참전 경험과 전후 독일의 참상을 그린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1951년 '47그룹 문학상'을 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위치를 다졌고, 1953년에 출간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로 비평가와 독자들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1967년에는 독일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흐너 상'을 수상했다. 이후부터 독일 사회의 불균형한 발전과 팽배해진 물질주의로 인한 도덕성 결여에 대해 지적하고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뵐이 보기에 독일 가톨릭교회는 정부의 자본주의 경제 정책에 순응하고 동조함으로써 그 재정 기반을 확보해 갔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는 사회참여에 더욱 적극적이 되었고 독일 사회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특히 1969년과 1972년 뵐은 귄터 그라스와 함께 사회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위해 선거 유세에 직접 참여하며 빌리 브란트를 적극 지지했다. 또한 1971년 독일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펜클럽 회장으로 선출되어 세계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71년에는 성취 지향 사회에 대한 저항을 담은 <여인과 군상>을 발표하고 이듬해인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29년의 토마스 만 이후 독일이 이 상을 받은 것은 43년 만이었다. 1974년에는 한 무고한 여성이 언론의 횡포에 의해 사회로부터 매장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언론 재벌 악셀 슈프링거와 뵐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언론계에 대한 뵐의 '문학적 복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소설은 1975년 폴커 슐뢴도르프에 의해 영화화 되어 크게 흥행하였다.
뵐은 1970년대 말부터는 대안사회를 위한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을 펼쳤다. 소련이 동유럽에 SS20 핵탄두 미사일을 배치하자 나토(NATO)는 서독에 퍼싱 II 중거리 미사일과 크루즈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평화주의자들과 유럽 작가들이 양측의 무장 강화를 반대하는 시위를 펼쳤고, 뵐은 평화운동의 주요 연사가 되었다. 또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독일 시민들의 반핵운동과 환경운동의 선두에 섰으며 녹색당의 창당에도 적극 참여했다. 1970년에는 환경문제를 다룬 소설인 <신변보호>를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환경 파괴는 단독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 경제 문제와 얽혀 있으며 바로 이 사회적 모순 상황에 원인이 있음을 드러낸다.
문학 작품분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활동에 진력했던 뵐은 1985년 동맥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이후 그를 기려 '쾰른 문학상'은 '하인리히 뵐 문학상'으로 개칭되었으며, 쾰른 루드비히 박물관의 광장도 그의 이름을 땄고, 독일의 13개 학교에 하인리히 뵐의 이름이 붙여졌다.
3. 여담
- 1970년대 후반에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를 읽은 뒤, '우리 게르만 조상님들 좀 짱인듯'이라는 식의 서평을 언론에 개재했다가, 반민족주의적 성향의 지식인들에게 미친듯이 까인 흑역사가 있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절친한 관계였다. 솔제니친이 소련에서 추방된 이후 한동안 그에게 신세를 졌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
- 말년에 자신의 자필 원고나 소장 도서들을 모교인 쾰른 대학교에 기부했다. 쾰른 대학교 측에서도 이를 기려서 하인리히 뵐 문서보관소(Heinrich Böll Archiv)를 건축했는데, 2009년에 이 건물이 무너지면서 대부분의 자료들이 손실을 입었다.
- 독일 녹색당은 1996년 당의 창당과 발전에 기여한 뵐의 업적을 기려서 자신들의 싱크 탱크를 하인리히 뵐 재단으로 명명했다.
-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에서 평행세계 드립을 칠 때 높은 빈도로 이 사람이 저자로 등장한다. 누군가가 앤서니 비버의 세계 제 2차 대전사를 패러디하면서 비버 대신 뵐을 끼워 넣었기 때문. 뵐 얘기가 나오면 ‘프랑스가 6주만에 항복하다니 말이 되냐?’ ‘아돌프 히틀러가 누군데 씹덕새끼야’ 등 장단을 맞춰주는 댓글도 달린다.
[1] 그래서 독일에서는 그의 문학을 폐허 문학(Trümmerliteratu)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