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

 


<colbgcolor=#000> '''Thomas Mann'''
[image] '''192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colbgcolor=#fff>Paul Thomas Mann (파울 토마스 만)
'''국적'''
독일 [image]
'''출생'''
1875년 6월 6일 독일 제국 뤼베크
'''사망'''
1955년 8월 12일 (80세), 스위스 취리히
'''직업'''
소설가, 평론가
1. 개요
2. 삶
3. 주요 작품 목록


1. 개요


독일평론가이자 소설가. 문장 표현력과 구성, 주제의식 등에서 이견없이 20세기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고 있다.

2. 삶


1875년 독일 북부의 뤼베크에서 토마스 요한 하인리히 만과 율리아 다 실바 브룬스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북부 독일인으로 엄격하고 강직한 사람이었으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브라질계였던 어머니는 낭만적이고 여유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1] 이러한 부모님의 기질 차이로 인해 성장시절 그가 겪었던 고뇌와 방황은 후일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라는 자전적 소설에서도 시민 對 예술가라는 안티테제로 차용되는데, 소설 속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담겨 있다.

사려깊고 철저하고 엄밀하셨던 아버지는 청교도 정신을 타고난 북부 기질의 소유자셨다. 불분명한 이국적 혈통의 어머니는 아름답고, 감정적이며, 소박하면서도 동시에 부주의했고 감정적이며 충동적인 자유분방함을 지니셨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은 비범한 가능성과 위험의 결합이었다. 예술의 길에 잘못 발을 디딘 시민, 화목한 가정에 대해 향수를 지닌 뜨내기, 양심의 가책을 지닌 예술가가 그 산출물이었다.

(Mein Vater war ein nordisches Temperament: betrachtsam, gründlich, korrekt aus Puritanismus; meine Mutter von unbestimmt exotischen Blut, schön, sinnlich, naiv, zugleich fahrlässig und leidenschaftlich und von einer impulsiven Liederlichkeit. Ganz ohne Zweifel war dies eine Mischung, die außerordentliche Möglichkeit und außerordentliche Gefahren in sich schloss. Was herauskam war dies: ein Bürger, der sich in die Kunst verirrte, ein Bohemien mit Heimweh nach der guten Kindernisstube, ein Künstler mit schlechten Gewissen.)

본디 만 가문은 뤼벡에서 곡물상을 담당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19세기 초중반 무렵에는 지역 최대 부호 중 하나로도 꼽히기도 했으나, 상업가로의 기질이 없었던 아버지 대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2], 1891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예 가족들은 뮌헨으로 거처를 옮겨버린다.[3] 이후 1933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망명하기까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뮌헨은 그의 거처가 된다. 뮌헨에서 뮌헨 대학교청강생으로 진학한 만은 작가로의 역량을 기우기 위해 경제, 역사, 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두루 탐색한다.
이후 형인 하인리히[4]와 함께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만은 꼬마 프리데만 씨(Der Kleine Herr Friedemann)를 1898년 발표하면서 작가로 첫 발을 내딛는다. 이후 1905년 부유한 유대계 언론가의 딸이었던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결혼한다. 평생을 함께한 부부관계에서 만은 6명의 자식들을 얻는다.[5]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휴머니스트 성향의 만은 여러 정치적 논설을 발표하며 빌헬름 2세와 전쟁의 비참함을 고발한다.[6] 또한 12년이라는 엄청난 세월에 걸쳐 작성한 걸작인 마의 산을 1924년 발표하며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작가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1901년 발표했던 장편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192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7]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그는 더 이상 독일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고[8][9] 프랑스를 거쳐 1938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로 재임한다.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만은 BBC의 반 나치 독일어 방송을 진행한다.[10] 전쟁이 끝난 후 토마스 만은 유럽으로 돌아와 스위스 취리히에서 생활한다. 독일 국적을 포기한 것도, 독일 방문을 거부한 것도 아니었지만[11] 독일에서 거주하지는 않으며 여생을 보내다 1955년 취리히에서 사망한다.
독일 식자층 사이에서는 문장을 늘여쓰는 것이 보편적인데, 토마스 만은 이 문장 늘려쓰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이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마의 산> 같은 소설은 불어까지 무지막지하게 튀어나와서 독문과생들을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3. 주요 작품 목록


  • 《꼬마 프리데만 씨 (Der kleine Herr Friedmann)》 (1898년)
  • 《부덴브로크가(家)》(Buddenbrooks) (1901년)
  • 《토니오 크뢰거 (Tonio Kröger)》 (1903년)
  • 《대공전하 (Königliche Hoheit)》 (1909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12] (1912년)
  • 《마의 산 (Der Zauberberg)》 (1924년)
  • 《요셉과 그의 형제들 (Joseph und seine Brüder)》 (1933년-43년)
  • 《자유의 문제(Das Problem der Freiheit)》 (1937년)
  • 《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 (1939년)
  • 《뒤바뀐 머리들 - 인도의 전설(Die vertauschten Köpfe - Eine indische Legende)》 (1940년)
  • 《파우스투스 박사 (Doktor Faustus)》 (1947년)
  • 《거룩한 죄인 (Der Erwählte)》 (1951년)
  •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Bekenntnisse des Hochstaplers Felix Krull. Der Memoiren erster Teil)》 (1922년/1954년)

[1] 만은 훗날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 '뤼벡에서 흑발흑안을 소유한 여성은 우리 어머니뿐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2]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본인의 가정사에서 모티브를 얻어 집필한, 4대에 걸쳐 몰락해가는 상층 부르주아 가문의 이야기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통해 만은 작가로의 위치를 확고부동하게 굳히고 부유한 유대인가문 출신의 연인 카티아 프링스하임과의 결혼을 장인어른으로부터 허락받게 된다.[3] 어머니가 먼저 뮌헨으로 이주했고, 토마스 만의 경우에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이후에 가족들을 따라서 뮌헨으로 이주한다.[4] 비록 동생인 토마스 만의 명성에 가려진 편이지만, 이 사람도 20세기 독일 문학에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작가이다. 어린 시절부터 두 형제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고 훗날 정치적, 문학적 견해(형인 하인리히는 정치적으로는 젊은 시절부터 진보적이었고, 에밀 졸라 등의 영향을 받아 자연주의 성향의 문학을 주창했다. 반면, 토마스 만의 경우에는 젊은 시절에는 외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고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대가들의 영향을 받아 유미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성향의 문학을 선호했다.)가 달라 갈라지면서 둘의 사이가 멀어졌다가 화해하길 반복했다. 하인리히는 초창기 한두 작품이 주목을 받았으나 이후 긴 슬럼프에 빠져 동생의 명성에 가려졌고, 동생과 대조적으로 여러번 결혼을 했다. 게다가 부친을 닮아 엄격하고 내성적인데다가 깐깐한 토마스 만과 달리 모친을 닮아 유쾌하고 활발한 성격에 사교계 인맥도 넓고, 조카들한테도 친절히 대했다. 그래서 엄격한 아버지에 싫증을 느낀 토마스 만의 자녀들은 사람좋고 인기많은 큰아버지를 엄청 잘 따랐다.[5] 여담이지만, 장녀 에리카 만, 장남 클라우스 만, 차남 골로 만은 모두 나중에 독일 문학계의 신진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또한 삼남이자 막내였던 미하엘 만도 문학교수로 활동한다.[6] 물론 당시 독일 내의 분위기에서 이런 행동이 어떤 반응을 불러왔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7] 토마스 본인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보다도 마의 산을 본인의 최고 걸작으로 생각했고, 마의 산을 발간하지 않았더라면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만으로는 결코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을 거라고 주변에 이야기했다고 한다.[8] 괴벨스가 주도한 반 독일적 서적 화형식에 만의 책은 1순위로 리스트에 올라갔을 정도이다.[9] 재미있는 사실로 만의 아들들 중 한 명은 이 괴벨스의 화형식에 직접 참석했는데, 평소와 달리 괴벨스는 오히려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다고 한다. 괴벨스의 생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나치의 거물이 되기 전, 꿈도 돈도 없던 청년 시절의 괴벨스는 글을 써가며 생계를 유지했고, 유대인들과도 코드가 맞으면 교류했기 때문. 암울했던 자신의 청년기가 불과 함께 사그라드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10] 다만 영국으로 가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미국에서 녹음을 해서 영국으로 보냈다고 한다.[11] 1949년 괴테 탄생 200주년 행사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을 방문하기도 했다.[12] 구스타프 말러의 죽음에 영감을 받고 저술한 작품이며, 토마스 만 본인의 동성애적 성향이 드러나는지 여부를 놓고서 문학가 사이에서 아직까지도 키배가 오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