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90/녹색당
Bündnis 90/Die Grüne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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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독일의 정당. 전세계 녹색당 운동의 본류이자 녹색정치운동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 (사회민주당과의 연정을 통한) 실제 집권경험까지 있는 독일의 제도권 정당이다. 당대표는 로버트 하베크.
2. 정책 및 지지층
주요 정책은 경제활동 및 세제에 있어 친환경적인 정책변화,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의 사용, 동물의 기본권 보장 등이다. 외교정책에서는 대부분의 유럽인이 부정적인 터키의 유럽 연합 가입을 지지하고 있다.
경제정책의 경우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해 다소 유연한 반대입장을 취하고 있고[2] , 사민당과의 적녹연정 역시 주로 이 맥락에서 이뤄지고 있긴 한데, 분배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좌파 경제정책과는 다소 궤가 다르다. 노동자를 위한 분배보다는 자연과 환경을 위한 분배라고 보면 대충 맞다. 이 때문에 범좌파 그룹 내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좌파그룹에서는 좋아하지 않으며, 녹색당 내에서도 강경파 생태운동가나 동물애호가 그룹은 전통적인 좌파를 좋아하지 않는다. 덕분에 지지자도 고학력 부유층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한국식 표현으로는 이른바 강남 좌파. 그나마 이건 냉전 종식 이후의 온건해진 정책의 덕분이며 극단적 성향이 강했을 시절에는 NATO 탈퇴와 군비 축소 등을 요구하여 대중성이 낮았었다.[3] 그래서인지 녹색당 지지자들의 1인당 탄소배출량은 독일 국민 평균보다 높다는 우스개가 있다(…) 사회적 부유층이다보니까 아무래도 에너지 소비율이 높다.
타 국가에 비해 녹색당의 힘이 제법 세다보니 독일 내에서도 친환경적인 정책이나 인식이 곳곳에 퍼져있다. 독일 내에서 발행한 독일어 교재의 지문이나 작문 예시를 봐도 환경보호에 대한 내용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는 편이다.
여러 정책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띄는 점은 페트병이나 유리병에 담긴 음료를 구입할 때 병의 보증금(Pfand)을 함께 지불해야 한다는 것. 페트병의 경우 크기에 무관하게 보통 하나당 0.25유로씩 하는데 좀 저렴한 생수를 한 병 사는 경우 물보다 병값이 더 비싼 경우도 발생한다. 보증금이기 때문에 대형마트에서는 이런 병들을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을수 있는 기계가 보통 비치되어 있다.[4] 그리고 이러한 보증금이 노숙자들같이 돈이 없는 사람들이나 유치원생과 학생들의 부수입원이기도 하다. 뒤지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데 그냥 내다버린 병들이 제법 나오기 때문에 이런걸 주워다가 보증금을 돌려받으면 소소한 수입을 챙길 수 있다. 페트병 2개만 반납해도 대형마트에서 작은 빵 하나 정도는 사먹을 수 있고 페트병 4개를 반납하면 맥주 한 병 정도 사먹을 돈이 나오기 때문에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간혹 관광객이 많은 기차역 인근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있으면 슬쩍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더니 그 병좀 자기한테 줄 수 없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종종 있다. 이 공병보증금 정책의 목표는 빈 병의 재활용률을 높여 자원과 에너지의 소모를 줄이고 쓰레기의 양을 줄이자는 것이다.[5]
독일 녹색당 당수이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연정의 2인자 부총리였던 요슈카 피셔는 독일 내에서 흙수저였으며 2차대전 종전 당시 헝가리에 살던 독일계 유민으로 독일의 패전 당시 현재 서독으로 추방되어 살던 도축공의 아들이었고 최종학력도 고퇴 노숙자 택시 운전기사 출신이다. 피셔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전임총장 코피 아난의 둘도 없는 친구이기도 하다.
3. 역사
3.1. 창당
1979년에 정치운동결사체로서 출범하였다. 1979년 브레멘 주 의회 선거에서 환경운동에 관심을 보인 후보자들이 '브레멘 녹색 후보자 연합'을 결성한 것이 시초이다. 선거 결과, 4명이 당선되면서 자신감을 얻어 전국정당으로 확대하게 된다.
1980년에 정식으로 서독의 연방정당인 녹색당으로 창당하였다. 1980년 총선에선 1.5%를 득표했는데, 당시에 기민/기사연합,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을 제외한 기타 정당의 득표율 합계가 2%를 넘지 않았으니 1.5% 득표는 기타 정당 득표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 된다.
창당 이래 꾸준히 지방선거에서 의석을 확보하면서 발판을 넓히다가, 1983년 총선에서 5.6%를 득표, 창당 4년만에 연방의회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도권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비타협적인 강경파와 제도권에 순응하여 타협하는 온건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결국 온건파가 승리, 오늘날의 녹색당이 있게 되었다.
1985년에는 헤센주에서 사회민주당과 적녹연정을 이루며 처음으로 정부운영을 해보았으며, 이후 1987년에는 전년에 있던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여파로 득표율이 더욱 더 높아져서 8.3%를 기록했다. 이 당시 녹색당이 보여준 주요한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당의 좌경화인데 제도권 정당으로 진출하면서 환경문제에 대한 입장 자체는 온건해졌지만, 경제문제에 대한 좌파적 입장(반 자본주의 노선)은 오히려 강경해졌다. 녹색당 구성원 중 상당수가 좌파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고, 이들과 우호적인 좌파집단들이 당세가 커진 녹색당에 가세한 데다가 더구나 주 연정상대인 사민당과 보조까지 맞추는 과정에서 경제적 입장이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이 당시 녹색당을 비꼬는 별명 중에 녹색 외투를 입은 마르크스주의자라거나 토마토(처음에는 초록색이지만 익으면 빨개지니까) 같은 것이 있을 정도.[6]
다만 이것도 꽤 된 얘기고 지금은 전세계 녹색당들 중에서 제일 온건하다.
3.2. 독일 통일 이후
그러나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이라는 시대의 급변에 따라가지 못해[7] , 1990년 총선에서 의석획득기준인 5% 득표에 실패하며 크게 쇠퇴하게 된다. 다만, 이 때에는 동독 지역에만 별도의 봉쇄조항을 적용하여 전국에서 5%를 넘지 않아도 동독 지역에서 5%를 넘으면 의석을 배분할 수 있도록 하였고, 녹색당이 전국 득표율과 서독 지역 득표율은 5%를 넘지 못 했지만, 동독 지역에서는 녹색당이 동독 지역의 좌파 정치 조직인 동맹90[8] 과 연대한 '동맹90/녹색당'이 5%를 초과함으로써 연방의회에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9] 이후 1993년 아예 동맹90과 통합하여 동맹90/녹색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하여 오늘날까지 쓰고 있다.
1996년에는 당의 창당과 발전에 기여한 하인리히 뵐의 이름을 따서 당 산하에 싱크 탱크인 '하인리히 뵐 재단'을 창립했다.
1998년 총선에서는 6.7%를 득표하며, 사회민주당과 함께 연방정부 연립내각인 적녹연정을 구성했다. 이는 녹색당이 국가내각에 참여하는 세계 최초의 케이스가 되었다. 이를 통해 녹색당은 현실정치에 녹아내렸으며 이때 내각 외무장관겸 부총리로 입각한 요슈카 피셔같은 스타 정치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2002년에도 8.6%의 득표율로 적녹연정을 이어갔으며, 200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11.94%의 득표율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2005년 선거에서는 패배하여 다시 야당이 되었지만, 이후 권토중래를 노려 2009년 총선에서 독일 국내 선거로는 최초로 두자리수 득표인 10.7%를 득표, 68석의 의석수를 확보했다. 그러나 그거 이상을 사회민주당이 까먹어서(…) 집권에는 실패했다.
2011년 3월 27일에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영향으로 보수의 아성이며,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로 우파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이 줄곧 여당을 차지하고 있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회 선거에서 '''24.2%'''를 득표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메르켈은 원전 재가동을 주장했기 때문에 환경문제에 민감했던 유권자들이 대거 녹색당에 투표했다. 그러나 역시 득표율 1위는 39%의 기독교민주연합이었지만 전통적인 파트너인 사회민주당과 득표율을 합치면 과반을 차지하게 되면서 녹적연정을 구성하며 당 역사상 최초의 주 총리를 배출하게 된다. 연정에 합류하는게 아니라 아예 지방정부의 연정을 주도하게 되었다.[10] 그렇게 주가를 올리다 2013년 총선 선거운동 기간 막판 아동성애자 논란[11][12] 이 일면서 표를 깎아먹어 10%에 채 못미치는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며 패배했다.
2017년 9월 총선을 앞두고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 18대 총선에서 원내 진입에 실패한 자유민주당과 독일을 위한 대안이 약진한대신 지지율 하락으로 독일내 최대 지자체인 이미 지방선거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총선에서 이미 참패하여 연정에서 쫓겨났고 최근 총선 지지율도 6~8%로 기민 기사연합, 사민당, 독일을 위한 대안, 좌파당, 자유민주당에 이어 6위를 달리고 있다. 다만 실제 총선에서는 여론조사대로 원내 6당을 기록하며 저조했지만 득표율은 예상보다는 선전했다는것이 평이다. 그리고 현상황에선 거의 어떤 조합이던 연정파트너로 체택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10월 기준으로 사민당과 기민련의 지지율이 급속도로 하락하는 와중에, 녹색당과 좌파당은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바이에른 주의회 선거와 헤센 주의회 선거에서 두 선거 모두 다른 정당을 제치고 녹색당이 2당의 지위에 올랐다. 대안당, 좌파당, 자민당 모두 평이한 지지율을 보이는 가운데 기민련/기사련, 사민당의 고전하고 녹색당은 점차 지지율을 올려나가고 있다.
기민련과 사민당이 난민/이민 문제에 질질 끌려다니다시피 하고, 사실상 난민 이슈의 주도권을 대안당과 양분했기에 이민에 우호적인 지지층이 녹색당으로 흘러들어 지지율이 상승한 것으로 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이민/난민 문제가 점차 저물고 교육, 복지, 환경 이슈가 중요해 지면서 녹색당이 더 확실히 주도권을 쥐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지지율대로라면 다음 총선에서 사민당을 제치고 범좌파 진영의 제 1당 자리를 꿰찰 수 있는 수준.
먼저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제2당을 차지했다. 성공적인 유럽의회 선거 이후 지지율이 큰 폭으로 상승해 여론조사에서 기민련을 제치고 무려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으며 차기 총선에서 역으로 녹-적 연정을 기대해볼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게다가 정치적 이슈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워 다른 당들이 이리저리 치이며 지지율이 하락하고, 독일을 위한 대안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주 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하다보니 기존의 연정들이 대거 붕괴하는 상황에 몰렸는데, 비교적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어 연정을 하기 쉬운 상대인지라 기민련이든 사민당이든 연정의 제1후보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아져 바이에른(기사련),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흑적연정), 니더작센(흑적연정),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흑황연정),자를란트(흑적연정)를 제외한 모든 주 의회에서 연립정부에 참가해 여당으로 활동 중이다.
2020년 함부르크 주의회 선거에서도 기존 의석보다 18석을 늘리는 33석까지 넓이는데 성공했다.
2021년 총선 앞두고 여론조사에서 사민당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대연정 명목으로 기민련과의 연정 가능성이 있는 상태이다.
4. 여담
여담으로 당의 스펙트럼은 제법 넓은 편이다. 생태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을 빼고 보면, 사회자유주의, 민주사회주의, 신좌파, 녹색 보수주의[A] ,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성향들이 존재한다.
[1] 정식 명칭은 동맹 90/녹색당이지만 보통은 그냥 녹색당(Grüne)이라고 부른다.[2] 다만 기본적으로 사회자유주의 정당이라서 극단적인 반-신자유주의 노선은 타지 않는다. 오히려 당 내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친기업 보수주의자도 존재할 정도.[3] 초기에 정당이라기 보다는 운동단체의 성격이 더 강했던 때에는 독일 내에 주둔한 미군의 미사일 기지에 난입하여 점거를 시도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4] 소련에서도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쪽은 유리병의 생산량이 좀 후달리다보니 궁여지책격으로 시행한것으로 녹색당과는 별 관계는 없다. 어쨌거나 당시 소련 아이들이나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나름 유용한 수입원(?)이었다, 오늘날에도 구소련권 국가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볼수있으며 한국과 미국도 이런 보증금 시스템을 도입했다.[5] 빈 병을 회수해서 재활용하는 비용이 사실 새 병을 만드는 비용과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경제적으로 더 비효율적이라는 연구결과는 흔한 편이다. 그런데 찬성 측에서는 재활용 비용이 새 병 제작비용보다 더 싸면 일거양득이고, 비슷하면 같은 비용으로 환경 문제까지 해결하는 것이지만, 더 비싸더라도 그것은 자원소비와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비용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6] 국내에도 번역되어 소개된 '상식의 오류 사전'이란 책에서는 당시 녹색당 지도부와 지지층들이 오히려 자동차도 많이 타고 다니고, 에너지를 더 많이 사용하며 지구에 해를 끼치는 소비 패턴을 보인다면서 녹색당의 표리부동함(…)을 호되게 까버렸다. 저자인 발터 크래머 교수는 한때 사민당원이었던 좌파 경제학자.[7] 1990년 총선에서 녹색당이 내세운 슬로건은 "모두가 통일을 얘기한다. 우리는 환경을 얘기한다."였다.[8] 1989년 독일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던 노이에스 포룸(Neues Forum)이 주축이 된 당으로서, 1990년 동독 최초로 열린 자유선거에 참여한바 있다. 결과는 별로(2.2% 득표)였지만.[9] 좌파당도 서독 지역의 사회민주당 탈당파와 합당하기 전(민주사회당이던 시절)에는 이 조항의 혜택을 받아 연방의회에서 의석을 얻었다.[10] 후쿠시마 사건에 독일이 큰 반응을 보인 이유에는 체르노빌 사건의 영향이 컸다. 체르노빌 사건 당시 피해를 본 국가 중 하나가 독일이었기 때문. 그러나 환경운동 타령을 하며 탈원전을 주장했지만 원전 대신 전력을 대체에너지로 메꾸는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석탄 화력 발전소를 늘렸기에 독일의 이산화 탄소 배출량은 그대로이다.... 독일은 30%가량 감축하기로 약속해놨는데 원전 재가동없이는 불가능하다. [11] 당 관계자들이 자료를 정리했는데 초기 강령에 아동 성애자를 용인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는게 드러났다.(...)[12] 녹색당의 이념인 급진적 생태주의는 68운동으로 상징되는 <60~70년대 서구권의 급격한 문화적 변화>로 인해 나타난 산물인데, 이 문화적 격변의 산물중에는 생태주의 뿐 아니라 히피문화나 성혁명, '탈권위주의 및 기존 공동체 가치의 부정' 등 다양한 갈래가 있는 것. 물론 그중에는 긍정적인 산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동성애도 개인의 자유'와 같이 용인되기 힘든 주장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런 주장들은 대부분 이후 70~90년대를 거치며 사회적으로 걸러졌다. 녹색당의 초기 강령 내용은 이러한 '선별'이 일어나기 전에 주변에 끼친 영향 중 일부의 흔적이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