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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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52-54대 내각총리대신
하토야마 이치로
鳩山一郎 | Hatoyama Ichirō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83년 1월 1일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사망'''
1959년 3월 7일 (76세)
도쿄도 분쿄구
'''재임기간'''
제52대 내각총리대신
1954년 12월 10일 ~ 1955년 3월 19일
제53대 내각총리대신
1955년 3월 19일 ~ 1955년 11월 22일
제54대 내각총리대신
1955년 11월 22일 ~ 1956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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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가족'''
아버지 하토야마 가즈오
어머니 하토야마 하루코
배우자 하토야마 가오루
아들 하토야마 이이치로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 하토야마 구니오
'''학력'''
제1고등학교[9] (졸업)
도쿄제국대학 (영미법학 / 학사)
'''정당'''

'''지역구'''
도쿄 1구
'''의원 선수'''
'''15''' (중)
'''의원 대수'''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5, 26, 27, 28
'''약력'''
하토야마 가즈오 법률사무소 변호사
도쿄시회 의원
중의원 의원
제28대 내각서기관장
제40대 문부대신
입헌정우회 총재대행위원
초대 일본자유당 총재
초대 일본민주당 총재
제52-54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자유민주당 총재

1. 소개
2. 생애
2.1. 초기
2.2. 요시다 시게루와의 악연
2.3. 자민당 시대를 열다
2.4. 집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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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 제국일본정치인. 제52-54대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냈다.
장남은 하토야마 이이치로 전 외무대신, 장손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이다. 조부는 자유민주당의 초대 총재를 지냈는데 손자는 자유민주당에 맞서는 민주당의 첫 총리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또한 전범 행위를 한 조부와 달리 손자는 일본의 과거사를 인정하고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2. 생애



2.1. 초기


도쿄 출생. 명문 정계 가문인 하토야마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하토야마 가즈오는 도쿄에서 중의원 의원을 지내고, 후일 중의원 의장을 지냈던 정치 거물로, 이치로는 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생일이 1월 1일이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영미법학과를 졸업 후,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이치로도 젊어서부터 정계에 입문해 1915년, 32세에 중의원 입성을 시작으로 이후 정계에 매진했다.
젊어서는 일본 군부에 협력하는 관료층 중의 한 명으로 활동했다. 문부상 시절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 대학 교수들의 처분을 놓고 의회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그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문부상 하토야마의 질의답변이 걸작이었다. '''"상관 없습니다. 따르지 않는 교수가 있다면, 전부 해고시키면 됩니다."''' 이런 과격한 행동으로 군부 치하에서 계속 중용되는 반사이익을 누렸지만, 패전 이후에는 일본을 점령한 미국 등 연합군에게 '''요주의 인물로 불이익을 받게 된다.'''
패전 이후 하토야마는 순식간에 전후 일본의 정치 지도자급의 인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던 하토야마는 패전 직후인 1945년 발빠르게 보수 우익 정당을 하나 창당했는데, 그것이 자유당이다. 그러나 하토야마의 과거 전력과 성장세는 이후 들어온 GHQ에게 눈엣가시로 작용했고, 결국 1946년 하토야마는 GHQ에 의해 '''공직 추방 명령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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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시절.

2.2. 요시다 시게루와의 악연


[image]
1953년 11월 17일, 요시다 시게루(왼쪽)와의 만남.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일본판
공직 추방을 당하자 정계에 나설 수 없게 된 하토야마는 부랴부랴 그가 세운 자유당을 맡길 만한 인물을 찾아나섰는데, 그렇게 찾아낸 인물이 친밀했던 '''요시다 시게루'''였다. 요시다 시게루가 자유당을 접수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첫 총리직에 오른 걸 보면, 하토야마는 권력 접수 직전에 뼈아픈 추방을 당한 것이다.
하토야마는 요시다에게 자유당을 넘겨주며 '''네 가지 약속[2]'''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요시다와 하토야마의 관계는 친밀했었지만, 1951년 하토야마가 공직 추방령에서 풀려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다.''' 하토야마는 공직 추방령에서 풀려난 이후 1952년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로 정계에 복귀하여 자유당에 복당했고 요시다에게 약속대로 총리직을 요구했지만, 이미 권력을 확고하게 틀어쥔 요시다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두 사람은 앙숙지간이 되어 버렸다.
이는 두 사람 간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자유당 내부의 파벌 갈등으로 이어져 요시다파와 하토야마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요시다 총리의 연이은 원맨 행보와 '바카야로 해산'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하토야마는 결국 1953년에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과 함께 탈당하여 '분당파 자유당(分党派自由党)'을 결성한다. 동년 4월에 실시된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35석만을 얻어 요시다파의 199석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를 받자 다시 자유당으로 복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내 분열상태는 지속되었으며 1954년 4월에 터진 조선의옥(造船疑獄)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의 '지휘권 발동 사건'[3]으로 요시다 내각이 정치력에 큰 타격을 입고 여론도 염증을 내기 시작하자 하토야마는 다시 동년 11월 24일에 탈당하여 개진당 의원들과 함께 일본민주당을 창당하였다.

2.3. 자민당 시대를 열다


[image]
12월 10일에 제5차 요시다 내각이 총사퇴하자 하토야마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처음 집권한 하토야마의 일본민주당은 7년을 장기집권한 자유당에 비해 세력이 약했다. 의석도 전체의 1/4 수준에 불과했고, 아직 거대정당으로 남아있던 자유당이 하토야마의 집권을 반길 리가 없었다. '''그러나...'''
1955년 2월, 중의원 총선거가 치러지면서 자유당 강세의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이른바 '하토야마 붐'으로 불리는 이 선거에서 하토야마와 일본민주당은 드디어 1당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면서 하토야마 이치로는 처음 몇 개월 간 불안정했던 권력 구도를 안정적으로 굳히는 데 성공했지만, 역으로 좌우 양파로 분열되었던 사회당이 중의원의 1/3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하토야마가 내세웠던 헌법 개정, 즉 '''평화 헌법 개정'''[4]을 무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당 좌우파가 1955년 10월 화해하고 양파로 갈라진 사회당을 통합하면서 세력면에서 사회당이 일본민주당에 맞먹는 의석수를 획득하자, 일본 내 우익 정치가 및 재벌들 사이에서 사회당 재집권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고, 사회당이 자유당과 연합하면 충분히 집권할수 있기 때문에 불안한것은 마찬가지였다. 하토야마는 원내3당으로 전락한 자유당과 다시 접촉하기 시작해, 11월에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을 같은 정당으로 흡수해 이른바 '''통합 보수우익 정당'''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자유민주당''' 이다. 사회당 좌우파와 일본민주당, 자유당이 서로 통합해 양당체제[5]로 정리된 1955년을 일컬어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일본 내 보수우익 세력의 대부.''' 새로 생긴 자민당 내에서 하토야마는 미키 부키치, 오가타 다케토라, 오노 반보쿠 등과 함께 공동 임시 총재를 맡았으나, 경력이나 집안이나 당내 세력으로 볼 때 하토야마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당 통합 이후 임시 소집 기간 동안 세 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아 첫 자민당 내각을 열었다. 이후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에 의해 자민당이 처음 실각할 때까지 '''무려 38년 간을 자민당에서만 총리가 나오는''' '''독주 체제'''를 형성했다![6] 다만 막상 55년 체제가 시작된 직후에 치러진 첫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사실상의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면서[7] 부진을 면치못해 별로 좋은 성적표를 얻지는 못했다. 이 때 소선거구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참의원에서 폐기되어 무산되었다.하토만타

2.4. 집권 후기


이후 기간부터는 정당 통합으로 안정적인 권력 기반을 갖추면서, 점차 대외적인 활동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서두르기 시작했는데, 처음 집권할 때 내세웠던 공약이기도 했지만 특히 위에 썼던 헌법 개정이 수포로 돌아가자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만 의존하는 국제적인 고립을 막고[8] 유엔 가입을 빨리 서두르기 위해 하토야마는 소-일 국교 회복에 상당한 노력을 했다.
처음 1956년 10월에 하토야마가 직접 소련으로 가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회담하였고, 이후 고노 이치로가 소련으로 건너가 협상한 끝에 1956년 12월 소련과 일본은 다시 국교를 맺는 데 합의했다. 일본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던 소련이 찬성으로 의견을 바꾸자 일본의 유엔 가입이 그대로 해결되었다. 하토야마는 일본의 유엔 가입 직후 총사퇴했다.
이후 1959년 3월 7일 오전 9시경 분쿄구의 자택에서 발작을 일으켜 돌연사했다. 향년 76세.
[image]
사망 두 달 전.

[1] 추방의 공식적인 이유는 그가 1937년부터 영국과 더불어 이탈리아와 독일을 다녀온 것을 여행기로 작성했기 때문이었는데, 1937년부터 독-이-일 추축동맹이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걸 꼬투리 잡힌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그의 전쟁 당시의 행적이었다.[2] 혹은 세 가지 약속. 요시다 시게루 참조 바람[3] 검찰이 자유당 간사장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제삼자수뢰죄 혐의로 체포하려 하자 이누카이 다케시(犬養健) 법무대신이 법안 처리중임을 이유로 검찰청에 대한 지휘권을 발동하여 사토에 대한 체포를 저지한 사건. 민주주의에 기반한 기소독점권 규제라는 명목의 지휘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오남용된 것으로, 일본 민주주의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다.[4]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의 패전국 위치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평화헌법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그러자 국방비 부담 감소와 한국전쟁 특수가 맞물리면서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부활했고, 하토야마 내각 즈음에는 완전회복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일본 내 우익들 사이에 다시금 재무장에 대한 야욕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하토야마는 이것을 간파하고 '''헌법 개정을 공약으로 걸어서 일본 우익들의 지지율을 그야말로 쓸어 모았다.'''[5] 사실상 양당제였지만, 규모상이나 조직력 상 '''자민당이 훨씬 우위'''였기 때문에 '''1.5정당 체제'''로 부르기도 한다.[6] 사실 이건 1960년대 이후 다당화와 중선거제의 영향이 컸다.[7] 자민당 61석 VS 사회당 49석[8] 이런 하토야마의 '''탈미노선'''은 그가 공직 추방을 당하고 난 직후 더욱 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