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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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게오르크 폰프리데부르크[1]
Hans-Georg von Friedeburg
1895년 7월 15일~1945년 5월 23일
1. 요약
2. 생애
3. 항복 협상


1. 요약


독일 해군제독이자 나치 독일유보트 함대 부사령관을 역임했으며, 크릭스마리네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다. 그는 1945년 5월 4일 뤼네부르크 황야와 5월 7일 랭스, 5월 8일 베를린에서 이루어진 나치 독일의 항복 조인식에 모두 참석한 유일한 대표였다. 프리데부르크 제독은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해체된 후 곧바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 생애


프리데부르크는 독일 제국의 영토였던 엘자스-로트링겐슈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프로이센 육군 장교였던 카를 폰프리데부르크의 아들이었다. 1914년 4월 1일, 그는 독일 제국 해군에서 장교 후보생으로 군에 입대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중대 최연소 장교로 진급했다. 그는 이후 SMS 크론프린츠에서 근무했고,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대함대를 상대로 용전분투를 벌였다. 소위로 진급한 이후 그는 1918년 6월부터 11월까지 해군 장교로써 U-114에서 근무하며 유보트 함장으로 전역에 참전했다.
전간기에 유명한 옛 독일 제국 해군 장교로써, 그는 1941년 9월에 크릭스마리네 유보트 함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스 항구에 본부를 둔 유보트 기지들을 시찰하며 유보트의 훈련과 파견 조정을 맡았던 그는 연합군 호송선단을 효과적으로 찾아내 공격하기 위해 유보트 피켓 라인을 조직했다. 그는 1942년에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다음 해 2월 독일 유보트 함대의 지휘를 맡았고 1945년 1월 17일에는 전쟁수훈장을 수여받았다.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후 해군 사령관 카를 되니츠가 나치 독일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프리데부르크 제독은 크릭스마리네 사령관직을 맡았고 1945년 5월 1일에 해군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3. 항복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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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서 참관하는 프리데부르크 제독. 가운데는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
1945년 5월 초, 되니츠는 프리데부르크 제독을 서방 연합군 사령부에 대표로 파견시켜 항복에 관한 협상을 지시했다. 적극적인 전투 행위를 오래 전에 중지한 해군 장교가 대표로 나갈 경우, 연합군 육군 장군들의 적개심이 비교적 덜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육군 원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의 본부가 독일 뤼네부르크에 설치되면서 그는 모든 독일 국방군은 즉시 무조건 항복을 하라고 요구하며 협상이 어려울 것이라는 통보를 했다. 되니츠 제독의 승인을 받은 후, 1945년 5월 4일 프리데부르크 제독은 뤼네부르크 황야에서 네덜란드, 덴마크, 북동부 독일에 주둔한 독일군 전 병력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1945년 5월 7일, 그는 알프레트 요들 장군이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도 참관했다.

프리데부르크 제독은 1945년 5월 8일에 베를린에 있었는데, 항복문서에 두 번째로 서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해군의 대표로서, 루프트바페의 대표인 한스 위르겐 슈툼프 장군, 독일 육군 원수이자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대표인 빌헬름 카이텔 장군과 함께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게오르기 주코프 육군 원수와 아서 테더 장군이 각각 소련과 연합국 원정군 최고사령부를 대표해 문서에 서명했다. 1945년 5월 23일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었을 때, 프리데부르크 제독 역시 플뢴에 갇히게 되었다. 그의 전쟁에 패배했다는 굴욕을 견딜 수 없었고 1944년부터 결심해온 대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는 플렌스부르크 근처의 아델바이 묘지에 묻혔다. 여담으로 되니츠의 사진 액자 밑에 정복 차림으로 죽어 있는 프리데부르크 제독의 모습은 크릭스마리네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로 인터넷에 퍼져 있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