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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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장과 외교관으로 특히 돋보였던 독일군 장성으로 최종계급은 보병대장. 장군참모다운 빠른 두뇌 회전에 탁월한 외국어 실력, 유연한 사고력과 재치가 넘치는 유머감각, 이를 기반으로 '''독일군 장교들에게 고질적으로 부족했던 외교적 수완'''까지 겸비한 흔치 않은 인재였다.크렙스 보병대장은 모델 원수의 모든 결정적인 전투에서 참모장이었다. 2차 대전 중에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이 많았던 것은 실로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는 모델 원수의 진정한 파트너였다.
귄터 라이히헬름 대령 《US Army Foreign Military Studies, 1945-1961》 A-925 VIII. General Krebs
사령관인 발터 모델조차 2차 대전 최고의 방어전으로 손꼽히는 화성 작전, 2차 대전 최고의 역습으로 평가받는 라지민 전투 등이 종전 후 반세기가 넘게 지나서야 알려지면서 재평가되었다. 그런 만큼 이를 보좌한 크렙스 역시 오랜 시간 과소평가되어 왔지만, 당대에 그는 누구보다 경험 많고 명성 높은 참모장이었다.[1]
2. 생애
2.1. 초기 이력
헬름슈타트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고등 교사였으며 한 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크렙스 가족이 고슬라르로 이사하여 한스 크렙스도 고슬라르에서 김나지움을 다녔는데, 대입자격증 합격조차 어려운 독일의 학교 체계에서 무려 월반을 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수재였다.
2.2. 제1차 세계대전
1차 대전이 발발할 당시 크렙스는 불과 16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월반을 해서 학년이 높아서였는지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할 수 있었고 1915년과 1917년에 차레차례 철십자 훈장 1,2급을 수여받았다. 동 시기에 고슬라르에 주둔 중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2] 은 이 어린 사관후보생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지, 전간기에 크렙스와 재회할 때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1915년에 중위로 진급하였고 참모 뿐 아니라 전장에서의 경험도 쌓으며 전상장 흑장과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을 받았고, 연대 부관으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2.3. 전간기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군축에도 크렙스는 당연히 4000명의 정예 장교의 일원이 되었고, 비상한 두뇌와 타고난 참모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아 장군참모 과정을 이어나간다. 학창 시절은 월반하고 이른 나이에 장교가 되어서인지 결혼도 빨라서 1920년에 결혼 후 이듬해 장녀가, 1925년에 차녀가 태어나서 두 자매의 아버지가 된다.
1930년, 장장 15년의 중위 경력을 탈출한 크렙스 대위는 병무국, 후일의 베를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면서 러시아어를 배우게 된다. 1931년부터 크렙스는 외국 주재 무관으로 러시아와 극동까지 다녀왔고, 모스크바 주재 무관 에른스트 쾨스트링을 오랜 시간 보좌하게 된다. 쾨스트링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태어나 현지에서 학교까지 다녔기 때문에 러시아어가 굉장히 유창했고, 크렙스 또한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과 현지인들과의 친분도 좋아서 두 사람은 소련군과의 합동훈련 등 지속적으로 소련군과 독일군을 중계하는 업무를 맡았다.
1932년 베를린에 소비에트 군사 대표단이 방문하였을 때 크렙스가 "교활한 유대인", "유대인 혈통", "의심스럽고 배신자적인 공산주의"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했고, 후일 쾨스트링과 크렙스가 소련군을 저평가하는 보고서를 올렸을 때 할더가 우려했다고 하지만,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리델 하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소련군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과소평가하지도 않았으며, 쾨스트링은 소련군에 대해 잘 아는 최고의 정보통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그 정보의 신빙성을 무시했다.'며 동부전선에서 현지인 유화 정책에도 쾨스트링의 도움을 받았다고 직접 밝혔다.
크렙스 또한 직속 상관인 쾨스트링과 평가가 비슷한데 이후에도 모스크바와 바르샤바를 오가며 오랜 시간 대사관 주재 무관으로 근무하게 되어서인지, 그는 소련인과 소련군의 작전술에 누구보다 이해가 높은 참모장으로 후일 2차 대전에서 대활약하게 된다.
1934년, 크렙스가 폴란드 대사관 주재 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동프로이센 알렌슈타인 제2보병연대장이었던 발터 모델 대령이 크렙스를 만나러 바르샤바에 왔고, 크렙스도 모델의 자택에 방문하는 등 국경을 넘는 친분을 다졌다. 모델은 크렙스의 상관인 쾨스트링과 함께 1차 대전 당시 한스 폰 젝트의 오스만 제국 파견 근무 시 연락장교로 근무했고,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수행하여 소련에 체류할 때도 역시나 쾨스트링과 함께 동행했다. 또한 모델과 크렙스는 군인, 귀족과 무관한 평민 출신에 아버지가 교사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2.4. 제2차 세계대전
2.4.1. 마지막 모스크바 주재 독일 무관
쾨스트링과 함께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크렙스는 폴란드 침공이 마무리된 후,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 영토를 분할하는 협상단을 수행했고 1939년 12월부터 7군단 참모장으로 프랑스 침공에 참전한다. 7군단은 16군 예하 부대로 당시 16군 참모장이 발터 모델 중장이었다.
프랑스 침공의 승리 후 크렙스는 1940년 10월 모스크바로 복귀하였다. 스탈린은 영관급 장교인 크렙스를 대단히 총애했는데 ‘우리는 영원히 친구로 남을 걸세, 어떤 일이 있어도!’라며 크렙스에게 볼맞춤 인사를 할 정도였다. 1941년 초에 모스크바 기차역에서 일본 외무 장관을 환송하는 자리에서도 스탈린은 크렙스에게 '나는 확신하네!'라며 변치 않는 신뢰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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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스트링의 병가로 크렙스가 모스크바 주재 독일 무관이던 1941년 6월 22일, 불가침 조약이 파기되고 바르바로사 작전과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된다. 쾨스트링과 크렙스는 외교 면책 특권으로 독일에 귀국할 수 있었고, 쾨스트링은 건강상의 이유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크렙스는 OKH에서 근무 중 1942년 1월, 사령관과 참모장이 교체된 9군의 참모장으로 임명된다.
2.4.2. 2차 대전 최고의 사령관-참모장 콤비
모스크바 전투의 패퇴 직후, 9군은 르제프 전역에서 삼면이 포위되고 후방에 소련군 공수부대까지 강하하면서 절대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9군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는 해임되었고[3] , 참모장인 호프만 대령은 병가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슈트라우스의 후임은 전임 사령관보다 12살이나 어린 41기갑군단장 발터 모델 기갑대장이 임명되었고, 참모장에 임명된 크렙스 대령은 멀리서 오느라 모델보다 이틀 늦게 시쵸프가 9군 사령부에 도착했다.
2.4.2.1. 단지 사령관과 참모장이 변경됐을 뿐
크렙스가 9군 사령부에 도착할 무렵, 9군 사령부와 예하 부대 참모장교들 중 신임 사령관이 요구한 업무 기준인 ‘전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와 긍정적인 관점, 최소한 3개 이상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참모들은 모델에게 처참하게 박살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23군단 사령부 소속의 28살의 젊은 참모 장교, 귄터 라이히헬름 대위는 모델의 패악한 질책에 격분한 나머지 '''모델의 면전에서 서류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나가 버렸다'''. 라이히헬름 대위는 자신이 군기를 어지럽히고 상관 모욕죄를 저질렀음을 깨닫고, 암울한 심정으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 20대의 젊은 참모 장교와 방금 사령부에 도착한 참모장의 첫 대화는 다음과 같다.[4]
그리고 라이히헬름에겐 처벌 대신 9군 사령부 작전참모로 영전[5] 하여 모델과 크렙스의 직속 참모가 되었고, 1년에 한 번 씩 진급하여 국방군 장군참모 출신 중 최연소 대령으로 임관하게 된다.[6] 7월 2일의 자이들리츠 작전 당시 사령관 모델이 중상으로 부재 중임에도, 결혼을 위한 라이히헬름의 휴가는 취소되지 않아서 7월 4일에 무사히 식을 올릴 수 있었다.크렙스: '''혹시 귀관은 애인이 있나?'''
라이히헬름: 약혼했습니다.
크렙스: 오, 미래의 신부 분께선 어디 계신지?
라이히헬름: 파리입니다.
크렙스: 아차, 내가 실례했군.
누구보다 모델과 크렙스를 가까이서 지켜본 라이히헬름은 크렙스가 정말 뛰어난 유머 감각과 지적인 면모를 갖춘 장군참모이고, ‘부하들에게 극한을 요구하였지만 스스로에게 불가능을 바라는’[7] 사령관 모델이 참모들을 극한으로 몰아붙일 때, 크렙스가 특유의 친화력과 외교적 수완으로 이들을 중재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라이히헬름이 제대로 보고도 올리지 못할 만큼 당시 9군의 상황은 암울했는데, 신임 사령관 모델은 신임 참모장 크렙스가 도착하자 '''둘이서 10분간 대화하며 작은 종이에 연필 몇 번 튕기는 것만으로, 르제프 북서 방면의 간격을 닫는 공격 작전과 부대의 재배치 계획과 이를 기반으로 한 전선 재건도까지 완성시켰다'''고 한다. 다음 날, 모델은 이 작은 종이를 들고 가서 늑대굴로 가서 히틀러를 설득하여 작전 승인을 받았고, '''3주 후에 그들은 정말로 간격을 닫아버렸다'''.[8]
9군의 불리한 전황은 그대로인 채로 단지 사령관과 참모장이 바뀌었을 뿐인데, 제1차 르제프 전투에서의 대역전 승리를 거둔 9군은 이를 기점으로 독일군 최대 최강의 야전군으로 거듭나게 된다.
2.4.2.2. 이상적인 참모장
모델은 여타의 사령관들처럼 저녁 식사 후 참모들과 테이블에 둘러 앉아 브리지 게임을 하며 여가 시간을 가지는 대신, 늦은 시간까지 수많은 작전안을 수립하고 수정하며 고심하곤 했는데 크렙스는 그러한 모델의 작전과 지시 사항을 가장 잘 수행하고, 항상 사령부를 비우고 전선에 나서는 모델 대신 9군 사령부에 남아서 예하 부대와 모델과 사령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조율하는 능력자였다.
예를 들어 사령부에서 모델이 아침 작전 회의를 마치고 전선 시찰에 나섰는데 모델이 시찰한 예하 부대에서 사령부로 보낸 연락이 아침 작전 회의 내용과 다를 경우, 크렙스는 모델이 전황을 직접 확인한 후 작전안을 수정했음을 깨닫고, 이렇게 수정한 내용을 우선하여 9군 사령부 참모장교들에게 전달하고 다시 예하 부대 사령부에 순차적으로 전달하였다고 한다.
르제프 전역의 폭은 최대 450km에 달했고 모델의 동선은 선 단위가 아니라 광범위하게 면적 단위로 움직였는데, 모델과 크렙스는 이를 매일 매일 해냈다.
또한 크렙스는 방대한 작전안을 정확하고도 간결하게 정리하고, 색연필을 사용하여 이를 작전도로 그리는 것에 능숙했다.[9] 이는 모델이 늑대굴에서 히틀러를 설득할 때 유용했다. 이에 대한 묘사는 총통 벙커 최후의 나날을 다룬 전사 서적에서도 등장하는데 작전도조차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크렙스는 백지에 지도와 부대 배치도를 직접 그려가며 히틀러에게 전황을 보고했다.
2.4.2.3. 중부집단군 참모장
제1차 르제프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소장으로 진급한 크렙스는 1943년 3월, 중부집단군 참모장으로 영전하며 중장으로 진급한다. 오랜 시간 주재 무관으로 근무한데다가 야전 지휘관 경험이 없고, 군사적 배경이 없는 평민 출신임에도 크렙스의 진급 속도는 이례적으로 빠른 편이었다. 역시 진급 속도가 빠르고 크렙스처럼 최종 계급이 대장이었던 핫소 폰 만토이펠조차 크렙스보다 한 살 많은 나이에 200년이 넘게 프로이센 군인을 배출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고 야전 지휘관으로 전공을 다수 올렸다. 그만큼 크렙스는 당대에 인정받는 참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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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도 활동형 지휘관이어서 사령부를 자주 비웠는지, 쿠르스크-오렐 전투에서도 9군 사령관 모델이 중부집단군 사령부와 통화할 때 그 통화 상대는 크렙스였다. 기존 전사 서적의 부실한 자료와 달리, 최신 전사 서적들은 1차 사료인 당대 독일군 통화 기록을 상당수 반영하고 있는데 그 상당수의 통화 기록에서 크렙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귄터 폰 클루게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예비역으로 편입된 후, 9군 사령관 모델도 집단군 사령관으로 영전을 앞두고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있는 동안 크렙스는 신임 중부 집단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 원수와 호흡을 맞춘다. 그리고 운명의 1944년 6월 22일,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고 초기 대응에 실패한 부슈 원수는 해임, 북 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모델 원수가 중부집단군 사령관을 겸임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며 크렙스는 오랜 상관과 또다시 위기 상황에서 재회한다.
2.4.2.3.1. 바그라티온 작전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9군 사령관 취임 시절부터 모델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해임된 사령관 후임’이었고 항상 전선 붕괴의 위기 상황에서 사령관으로 취임했으며, 이번에도 참모 장교들과 대면하여 ‘전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와 긍정적인 관점, 최소한 3개 이상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이들을 박살내고 있었다.
모델과의 첫 대면에서 완전히 박살난 군수참모 헤르만 테스케 대령은 크렙스에게 전임을 요청했으나, 항상 유머러스하고 참모들에게 관대한 크렙스조차도 이번만은 단호했다.
크렙스의 말이 이번에도 옳았다. 그리고 6월 말의 첫 만남에서 모델에게 박살났던 테스케 대령은 7월 10일, 모델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웠던 격전의 와중에도 테스케의 생일을 진심으로 챙겨주는 모습에 감동 받았고, 모델의 본래 심성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귀관은 뭘 바라는 거지? 모델은 오랜 참모장이었던 나를 패전의 책임으로 군사법정에 세울 기세였어.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만이 작금의 믿겨지지 않는 위기를 이겨낼 수 있어. 이 순간 우리에게 모델이 유일한 희망이라고'''."[10]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한 7월 20일 저녁, 테스케는 모델에게 자신이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비롯한 암살자 그룹과 잘 알고 지내왔음을 고백했다. 모델은 오늘 밤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당부했다. '''"SD 놈들이 얼마나 재빠른지 자네는 모를 걸."''' [11]
덕분에 테스케는 그날 밤 모델, 크렙스와 함께 히틀러의 연설을 들었다. 모델과 크렙스는 별 말이 없었고, 암살 미수 사건을 카프 폭동에 연관지어 생각하는 등 굉장히 냉소적인 태도였다.
7월 21일에는 중부집단군 예하 2군단 주둔지에서 작전참모 헤닝 폰 트레슈코프가 자살했다. 트레슈코프는 역시나 중부집단군 사령부 참모 장교인 페터 폰 데어 그뢰벤 중령의 친우였다. 크렙스는 트레슈코프의 죽음 닷새 후에야 그가 암살자 그룹의 일원임을 알게 되었지만 바로 다음 날인 7월 22일에 슈토르히로 착륙 중 폭격을 당해 부관과 조종사를 중상으로 잃고[12] , 자신도 죽을 뻔하고, 지도와 사진 자료까지 전부 잃어버린 모델이 이 사실까지 알게 되면 부담이 너무 크다고 판단, 자신의 선에서 정리하고 모델에겐 알리지 않았다.
이렇듯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히틀러 암살자 그룹의 온상이었음에도, 정작 중부집단군 사령부 소속 참모들은 아무도 조사를 받지 않았는데, 후일 연방군 장성의 지위에 오르는 폰 데어 그뢰벤은 히틀러가 모델을 신뢰하며 나치당과 SS도 모델을 신뢰했고, 모델은 이러한 신뢰를 이용해서 테스케와 자신을 비롯한 수하의 참모들을 보호했기 때문에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고 한다.[13]
결국 모델과 크렙스는 바르샤바 외곽에서 ‘2차 대전 최고의 역습’을 성공시키며 소련군 제2전차군을 궤멸시키고 기어이 동부전선을 재건해낸다. 모델은 다이아몬드 백엽 검 기사 철심자 훈장 서훈을 위해 라슈텐부르크의 총통 사령부에 도착한 바로 그 날 서부전선 총사령관으로 전임되었고, 크렙스도 전공을 인정받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는데, 뜻하지 않게 사령관을 빼앗긴 중부집단군 사령부였건만 히틀러는 이미 크렙스마저도 서부전선으로 전임시킬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14]
2.4.2.4. B집단군 참모장
2.4.2.4.1. 물을 이용하여 탈출하라
모델이 팔레즈 포위망의 독일군을 최대한 탈출시키고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복귀한 후인 9월 초에 크렙스도 서부전선으로 전임되면서 B집단군 참모장으로 모델을 또다시 보좌하게 된다.
9월 중순에 벌어지는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독일군 승리에는 15군의 전력 보존도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데, 이러한 15군의 전력 보존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크렙스였다. 히틀러 암살 미수 혐의로 게슈타포에 연행된 한스 슈파이델의 후임으로 갑작스레 B집단군 참모장에 임명된지 고작 3일 만이었던 크렙스는 9월 5일, 총통 사령부의 발터 바를리몬트 장군의 전화를 받았다.
"총통께서는 포위된 15군의 탈출이 불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있으니 차라리 안트베르펜 항구 방면으로 돌파해 나가도록."
당시 15군 사령관 폰 창엔 장군 또한 스헬데 강 건너편으로의 퇴각 대신 돌파 작전을 염두에 두고 세부 계획까지 전부 세워두었다. B집단군 사령관 모델 원수는 돌파와 스헬데 강 건너편으로 퇴각 중 결단을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모델에게서 최상의 판단을 이끌어낸 것은 크렙스였다. 크렙스는 바를리몬트가 재차 전한 '''총통의 명령을 괘념치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스헬데 강 도하 작전을 구상, 15군에 '물을 이용하여 탈출하라'고 명령한 뒤 9월 6일에 네덜란드에 위치한 해군 사령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15군의 생사는 해군에 달렸으니 스헬데 강을 통행하는 선박을 최대한 확보할 것'을 촉구하였다.
해군의 노련한 지휘 하에 소규모 제대 별로 진행된 도하 작전은 큰 사고 없이 순조롭게 9월 9일에 완료되었고, 분명 포위되었던 15군이 무사히 퇴각한 것은 서부전선 총사령부조차 깜짝 놀란[15] 육해군 합동 작전의 성과였다. 서부전선에서 장기간 종군했던 폰 창엔을 비롯한 서부전선 총사령부 장교들보다, 계속 동부전선에 있다가 불과 사흘 전에 도착한 크렙스의 분석과 결단이 제일 정확했는데 크렙스의 대표적 장점이 그 어떤 새로운 상황도 빠르게 파악해내는 '''직관적인 판단력'''이라고 한다.[16]
2.4.2.4.2. 작은 해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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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헴 전투에서도 모델과 크렙스는 바로 인근에 영국군 공수부대가 낙하했음에도 미리 준비했던 사령부 퇴각 매뉴얼에 따라 중요 문서를 소각하고, 위험 분산 정책에 따라 서로 차량을 다르게 이동하여 B집단군 사령부를 고스란히 보전했다. 9군, 중부집단군에 이어 모델과 크렙스는 서부전선에서도 또다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며 전선을 재건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뿐, 서부전선 총사령부 참모장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장군과 함께 10월 28일 베를린으로 호출된 크렙스는 아르덴 대공세라는 예상치도 못한 작전을 알게 된다.
모델은 크렙스에게 이를 전해 듣자마자 “나한테는 말이야, 이 모든 게 박살난 목발로 서 있는 것처럼 보여.”라고 그답게 반응했고, 11월 2일 룬트슈테트와 모델, 예하 부대 지휘관이 모인 작전 회의에서 크렙스는 ‘작은 해결책’을 제안한다.[17] 히틀러의 초기 작전안을 ‘큰 해결책’으로 정의하고, 총통의 고집을 꺾고 이를 완전히 갈아 없는 건 불가능하니, 차라리 ‘작은 해결책’이라는 차선책을 제시하며 설득 가능성을 높여나갔다는 점에서 크렙스의 유연한 대처 능력을 볼 수 있다.
2.4.3. 마지막 육군참모총장
이러한 노력에도 결국 ‘큰 해결책’이 관철되어 아르덴 대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활력을 잃지 않았던 모델이 처음으로 침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모델의 생일에 핫소 폰 만토이펠 기갑대장이 모델의 아들인 한스게오르크를 보내주면서 B집단군 사령부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으나, 2월 13일부터 진행된 드레스덴 폭격의 여파로 모델이 가족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로 혼란스러웠던 바로 그 시기에 크렙스는 갑작스레 OKH 작전참모차장으로 전임된다.
OKH에서 육군참모총장인 구데리안의 다음 가는 자리이니 장군참모로서 영전이라 할 수도 있지만, 후임 B집단군 참모장인 카를 바게너는 모델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았고, 가뜩이나 독일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시기에 서로 잘 알지도 못한 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며 크렙스 장군이었으면 나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18]
이와는 별개로 OKH에 도착하여 총통 벙커에 첫 보고를 올린 크렙스는 전혀 다른 이유로 구데리안과 오토 귄셰를 놀라게 하는데, 오토 귄셰는 '''모델 원수의 오랜 참모장이었던 크렙스 장군은 쾌활한 성격, 낙천적인 태도, 심지어 제스처마저도 모델과 너무 똑같아서''' 놀랬고[19] 구데리안은 도착하자마자 전쟁대학 동기인 빌헬름 부르크도르프의 소개로 총통 벙커의 모두와 친해지는 크렙스의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사교성'에 내적 경악했다.[20]
2.4.3.1. 마지막 저항
OKH 작전참모차장으로서 크렙스는 알베르트 슈페어, 모델, 구데리안과 뜻을 같이 하여 네로 명령에 반대했다. 3월 27일, 구데리안의 갑작스러운 해임으로 제3제국 최후의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오른 크렙스는 자신의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루르 요새 명령(Ruhrfestung)’을 취소하고 모델의 B집단군에게 행동의 자유를 부여하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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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B집단군 사령부의 작전참모 귄터 라이히헬름 대령은 자신을 12군 참모장으로 임명하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을 받았다. 라이히헬름은 이를 거부하려 했으나 모델은 라이히헬름이 최대한 안전하게 포위망을 탈출 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그럼에도 두 번의 공습 끝에 초센에서 35마일 떨어진 곳에 불시착하여 인근 포병학교까지 뛰어가 차량을 빌린 라이히헬름은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부장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에게 B집단군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고, 요들은 다음날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 함께 갈 테니 라이히헬름이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다음 날 라이히헬름은 자신을 깨운 발터 벵크[21] 보병대장으로부터 전말을 듣게 된다. 벵크가 라이히헬름을 12군 참모장으로 추천한 것은 그의 실력과 인품을 잘 알고 있었고, 12군이 루르 포위망 안의 B집단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창설된 만큼 B집단군의 사정을 잘 아는 자가 직접 히틀러에게 보고할 수 있기에, 한스 크렙스도 라이히헬름 전임에 동의한 것.
직전에 루르 포위망을 탈출한 B집단군 사령부의 빈리히 베어 소령이 총통이 주관한 회의에서 제대로 발언권을 얻지 못했다면, '''히틀러가 직접 12군 참모장으로 전출시켰다는 형식을 갖춘 라이히헬름이라면 총통 회의에서 발언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둔 크렙스의 조치'''였다.
이로서 한 시대의 종말 직전의 베를린 시가지에 도착한 라이히헬름은 패망을 앞둔 총통 벙커의 마지막 목격자 중 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
벙커 분위기는 죽음의 색채가 너무 짙어서 고위 장성들이나 관료들조차 라이히헬름을 신경 쓰지 못했는데, 초센의 OKH 본부가 공습에 폭파될 때 부상당한 눈에 붕대를 감은 채인 크렙스만은 라이히헬름을 보는 순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이제 헤르만 괴링 제국대원수와 총통 히틀러를 비롯한 고위 장성과 관료들 앞에서, 라이히헬름은 B집단군을 대표하여 루르의 전황을 보고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남아 있었다.
히틀러의 왼쪽에 카이텔이, 오른쪽에 알프레트 요들이 앉고 요들 뒤쪽으로 되니츠, 슈페어, 부르크도르프가 도열했다. 요들은 전체적인 전황과 11군, 12군의 주둔 상황에 대해 보고한 뒤, 라이히헬름을 소개하며 B집단군과 루르의 전황에 대한 보고를 요청했다.
라이히헬름은 모델이 어떻게든 루르를 방어해내고 있지만, 이제는 무기도 연료는 물론 식량조차 고갈된 채로 B집단군은 말라죽어 가는 중이고, 독일군은 여기서 단 하루조차 버티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루르의 전황이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던 회의실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여전히 온몸을 떨고 있고 초점이 안 맞는 시선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보던 히틀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모델은 나의 최고의 원수였지."
다시금 잠시 이어진 침묵 후, 갑자기 히틀러는 광기에 어린 목소리로 B집단군은 해방될 수 있으며, 벵크의 12군과 11군이 연계하여 루르 포위망을 역으로 포위 섬멸할 수 있다고 떠들어댔다. 그의 말투는 점점 더 빨라졌고 자기도취에 빠져 들어갔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라이히헬름은 일순 말이 막혔지만, 감히 히틀러의 말을 가로막고 나선 건 요들 상급대장이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총통 각하."
요들은 히틀러에게 11군은 이미 약체화되었고, 연합군의 공중 폭격을 피해서 이동할 여력조차 없기에 히틀러가 말한 가능성이 1%도 없음을 관련 자료까지 구체적으로 예시로 들며 반론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전투에서 소련군이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모스크바를 지켜냈던 것처럼, 우리 독일군도 베를린을 지켜낼 수 있다.'며 더욱 광기에 찬 어조로 떠들어댔다. 차분한 요들과 광기 어린 히틀러의 대화 아닌 대화가 회의실을 가득 채우는 동안, 괴링은 의자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라이히헬름이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하고 표현을 바꾸어가며 히틀러에게 재차 보고를 올렸지만, 아무 소용없었다.[22] 이날은 결국 라이히헬름이 마지막으로 본 크렙스의 모습이었고, 구데리안의 후임 육군참모총장으로 네로 명령을 막아내고 루르 요새 명령을 어떻게든 취소시키려 애썼던 크렙스의 마지막 저항이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얼마 후 발터 모델은 루르에 갇힌 B집단군을 해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2.4.3.2. 베를린 전투와 휴전 협상,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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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집단군이 와해되고 베를린이 포위되면서 크렙스는 빌헬름 카이텔에게 48시간 내로의 베를린으로의 공격을 요구하였고 카이텔은 발터 벵크가 이끄는 12군과 테어도어 부세 장군의 9군, 루돌프 홀스테 장군의 51기갑군단으로 각기 서, 남, 북쪽에서 구원해올 것을 약속하였다. 한편 몰락에서 히틀러가 굳게 믿는 펠릭스 슈타이너의 11 SS기갑군은 크렙스와 카이텔의 명령이 실현 불가능할 것이라 보고 진격하지 않았다.
1945년 4월 28일에는 하인리히 힘러가 몰래 잔존한 SS병력을 바탕으로 항복협상을 꾸미자 이에 호응하였던 SS 연락장교 헤르만 페겔라인과 SS의 장군이었던 빌헬름 몽케, 요한 라텐후버, 빌헬름 부르크도르프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렸고 이를 한스 크렙스가 주관하게 된다. 하지만 페겔라인이 패닉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재판이 이뤄질 수 없었고 재판은 종료되고 친위대 국가보안국으로 이관된다. 몽케와 라텐후버, 부르크도르프는 넘어갔지만 페겔라인은 나중에 총살당한다.
히틀러의 자살 하루 전인 29일, 크렙스는 요제프 괴벨스와 마르틴 보어만, 빌헬름 부르크도르프와 함께 히틀러의 마지막 유언을 확인하였으며, 크렙스는 육군 최고사령부에 연락하여 알프레트 요들에게 12군, 9군, 51기갑군단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알아볼 것을 요구하였다.
30일 요들은 12군은 베를린 서남부에서 더 이상 진격할 수 없고 9군은 또한 포위되어서 베를린으로 들어 올 수 없으며 홀스테 장군의 51기갑군단만이 방어전을 펼칠 수 있다고 크렙스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날 히틀러는 자살한다.
5월 1일, 히틀러 사후 총리로 지명된 괴벨스는 크렙스와 헬무트 바이틀링의 참모장이었던 테오도어 폰 듀프리 대령에게 바실리 추이코프와의 항복협상을 펼칠 것을 명령했다. 크렙스와 추이코프와의 협상 중, 이를 보고 받은 소련군 상층부는 독일의 무조건 항복에 대한 연합국 간의 협약을 근거로 협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 항복협상에서 비밀에 붙이기로 했던 히틀러의 죽음이 처음으로 연합국 측에 알려지게 된다.
항복협상이 결렬된 후 요제프 괴벨스와 마그다 괴벨스 부부가 자살했고, 하루 뒤인 5월 2일 한스 크렙스, 빌헬름 부르크도르프도 자살했다. 히틀러 사후 베를린에 남은 나치 독일의 수반이 없었기 때문에 헬무트 바이틀링이 베를린에서의 항복 협상을 마무리했다. 나중에 바실리 추이코프가 구면인 크렙스에 대해서 바이틀링에게 묻자 자살했다고 알려줬다.
트라우들 융에에 의하면 총통벙커에서 탈출을 시도하기 전에 크렙스가 자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고 한다.
3. 평가
- 발터 폰 라이헤나우는 독일군 전세가 한창 유리하던 1941년 말에 이미 집단군 사령관과 아전군 사령관을 겸임하는 걸 어려워하며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에게 6군 사령관 직위를 빠르게 넘겼는데, 모델은 독일군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에 집단군 사령관 겸임, 여기에 전선 총사령관까지 겸임했다. 그렇게 모델이 짊어진 중첩된 책임의 무게를 덜어주는 참모장이 크렙스였다. [23]
- 크렙스는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언제나 모델의 판단을 최우선하되, 항상 모든 일에 대비해놓는 모델의 작전안 중에서도 최선의 결단을 내리도록 하였고, 사령관이 부재중인 사령부에 남아서 광범위한 전역에서 최전선의 모델과 사령부와 예하 부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미 너무 많은 책임을 짊어진 모델을 배려하여 자기 선에서 정리할 건 정리하고 모델에게 전해야 할 건 확실히 전달하며, 다른 사령부에 비해 업무량이 훨씬 많은 모델의 사령부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풀어주는 참모장이기도 했다.
- 그 엄청난 격전의 연속에도, 9군 사령부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다는 것은 전사 서적과 회고록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는 B집단군 사령부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모델의 부관이었던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은 1945년 2월 5일, 바익셀 집단군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 휘하로 '복귀'했음에도 오히려 B집단군 사령부와 그 분위기가 그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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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3월 말, 초센의 OKH본부에서 작전참모차장 크렙스와 반갑게 재회한 슈프링어는 오토 뵐러와 헤르만 발크 장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바익셀 집단군 사령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약 30분의 보고를 마치고, 슈프링어는 인사와 함께 모델 원수에게 안부를 전해주길 크렙스에게 부탁하였다. 크렙스는 슈프링어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슈프링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걸세."[24]
크렙스의 최후는 종전의 혼란 속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해서, 5~60년대 출판된 서적들에서 크렙스가 실종되었다고 기록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미리 작별 인사를 들어서였는지 슈프링어는 포로수용소에서 이미 크렙스가 세상을 떠났음을 알고 있었다.
- 대전 말의 OKH에서도 크렙스는 특유의 '항상 웃는 얼굴과 분위기를 재밌게 환기시키는' 모습을 유지했다. 구데리안의 해임 시 그의 부관이었던 베른트 프라이탁 폰 로링호펜 소령은 자신을 최전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크렙스는 "어떻게 되든 이 전쟁은 끝났네. 최후의 단계에서 귀관이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군."이라고 답했고 로링호펜 또한 이에 의무감을 느껴 함께 남게 된다. 이렇듯 크렙스는 최후의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각오하고 있었다.[25]
- 로링호펜 소령은 크렙스는 나치가 아니며, '히틀러 암살자 그룹'의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한 것은 '실패 가능성이 높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로링호펜 소령은 암살자 그룹의 주동자 중 1인으로 게슈타포 검거 후 자살한 베셀 프라이탁 폰 로링호펜 대령의 가까운 친척이다.[26] 1943년 3월은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한 스몰렌스크에서 히틀러에 대한 암살 시도가 집중되었던 시기이기도 한데, 크렙스는 3월 1일 자로 중부집단군 참모장으로 영전하였다.
- 대전 초기 모스크바에선 스탈린의 총애를, 대전 말기 베를린에선 히틀러의 총애를 듬뿍 받고, 육해공 각자도생의 당시 독일 국방군 체계에서 해군의 전폭적인 협조를 이끌어내는 등 실로 놀라운 친화력을 군사 업무 영역에서도 적극 발휘했다. 윗사람 아랫사람 가리지 않고 챙기는 마음씀씀이 덕분에 상관에게도 부하에게도 호감인 참모장이었다.
- 다만 크렙스가 진정 바랐던 직위는 야전 지휘관이었다. 자신의 능력이 참모장으로서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최후엔 참모 장교로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건만, 크렙스 스스로에겐 일선 부대 지휘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비극처럼 느껴졌다고 한다.[27]
4. 매체에서
▲ 영화 몰락에서의 크렙스와 부르크도르프의 자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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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몰락에서의 한스 크렙스(롤프 카니스 분)
[1] Derek S. Zumbro 《Battle For The Ruhr》, 2006[2] 당시 구데리안은 중위였다.[3] 슈트라우스가 히틀러에 의해 대전 초기에 해임되었다고 희생양이 된 반 히틀러 군인인 양 묘사한 책자도 있는데, 슈트라우스는 정치장교 지령에 매우 적극적이었다.[4] 《Verantwortung und Gewissensnot》 Günther Reichhelm, 2004[5] 이후 1945년 4월 11일에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헤어지기까지, 모델은 단 한 번도 라이히헬름과의 첫 대면에서 벌어진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6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90대의 고령이 되어서도, 라이히헬름은 모델이 자신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신뢰하며 높이 평가했던 것보다, 대위인 자신이 무려 사령관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기지 않아 했다.[6] 모델의 사령부에서 라이히헬름과 동갑인 하인리히 슈프링어, 4살 연하인 빈리히 "테디" 베어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기갑 장교 출신답게 활동적인 면모가 강했던 반면, 포병 장교 출신으로 일찌감치 작전참모로서 능력을 발휘한 라이히헬름은 9군 사령부의 막내 참모장교 시절부터 침착하고 차분하고 이성적인 역할이었다. 라이히헬름 인생 최고의 일탈 행동이, 그의 2차 대전 경력에 결정적 분기점이 된 것.[7] Joachim Ludewig: Walter Model – Hitlers bester Feldmarschall[8] 《US Army Foreign Military Studies, 1945-1961》 A-925[9]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Walter Göriltz p.113[10]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Walter Göriltz p.176[11]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Walter Göriltz p.184[12] 8월 30일 하인리히 슈프링어 SS소령이 서부전선 총사령부의 모델에게 배치될 때까지 모델은 한 달이 넘게 부관 없이 집단군 사령관과 총사령관을 겸임한다.[13]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Walter Göriltz p.185[14]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Walter Göriltz p.191[15] 《Rückzug: The German Retreat from France, 1944》 P.217[16] 《US Army Foreign Military Studies, 1945-1961》 A-925 VIII. General Krebs[17] Derek S. Zumbro 《Battle For The Ruhr》, 2006, P.56[18] FMS B-593 Army Group B (22 Mar-17 Apr 1945)[19] 《The Hitler Book: The Secret Dossier Prepared for Stalin from the Interrogations of Otto Guensche and Heinze Linge, Hitler's Closest Personal Aides》[20] 《Panzer Leader》 Heinz Guderian[21] 원래 OKH 작전참모차장은 발터 벵크가 예정되었는데 그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으면서 크렙스가 임명되었다.[22] Derek S. Zumbro 《Battle For The Ruhr》, 2006, P.501[23] 《Generalfeldmarschall Model Biographie》 Walter Göriltz[24] 《Stationen eines Lebens in Krieg und Frieden》 Heinrich Springer, 1996[25] 《Berlin: The Downfall 1945》 Anthony Beevor[26] 로링호펜 가문의 일원들은 전부 게슈타포에 연행되었으나 베른트는 직속 상관인 하인츠 구데리안이 적극 비호해서 이를 피할 수 있었다.[27] 《US Army Foreign Military Studies, 1945-1961》 A-925 VIII. General Kre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