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폰 라이헤나우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독소전쟁에서 유대인-슬라브족을 몰살하자는 이른바 강조 명령(Severity Order)을 내린 원흉. 독일 국방군 내에서 가장 나치당 빠돌이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 전부터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그럼에도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서 독일군 초기 전역에 대활약을 하여 원수까지 진급하지만, 뇌출혈과 후송 지연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4년 10월 8일 독일 제국의 제후국 바덴 대공국의 카를스루에에서 융커인 프로이센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당시 독일 제국에서 가장 큰 가구 회사를 가진 부자였다. 1903년 입대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참모장교로 서부전선에서 싸웠다. 이 공적으로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고, 종전 시에는 대위가 되어 있었다.
2.2. 바이마르 공화국
종전 후에도 베르사유 조약으로 축소된 군에 남아 군사국으로 이름을 바꾼 총참모부에 근무했다. 1931년 열렬한 나치였던 삼촌의 소개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고, 이때부터 골수 히틀러 숭배자가 된다. 본인뿐만 아니라 아내도 중증 나치빠였다. 당시 군인은 정당 가입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나치당에 가입했다. 대부분의 장교들은 라이헤나우의 이런 친나치 행위를 혐오했고, 이 때문에 라이헤나우는 자신의 능력[4] 과 함께 히틀러의 총애와 신임을 받고 있었음에도 다른 장성들의 견제를 받는다.
2.3. 아돌프 히틀러 집권 후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라이헤나우는 국방부 군무국장에 임명되어 나치당과 국방군 사이를 잇는 연락장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회주의적 경향이 있던 나치당의 지도자 에른스트 룀에 대한 국방군 수뇌부의 비토를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등에게 전해 장검의 밤 사건을 일으켜 룀의 숙청에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중화민국과의 친선을 강하게 주장하여 중국-독일 간 군사 지원 및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진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중일전쟁 초반기까지 진행된 중국과 독일 간의 군사 및 경제 협력은 중국의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 역량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고, 동시에 독일도 외화의 낭비가 없이 군수 생산 및 민간 경제에 필요한 희귀 물자를 조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34년 소장, 1935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5] 이후 히틀러는 나치빠였던 라이헤나우를 국방장관이나 육군총사령관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라이헤나우가 둘 중 한 곳에 오르면 국방군이 모두 나치의 하부 조직이 될 것을 우려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이를 강하게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6]
많은 국방군의 고위 장교들이 나치를 혐오했으나, 라이헤나우는 고위 장교들이 혐오하던 하인리히 힘러에게 국방군 내의 쿠데타 움직임을 밀고하는 짓거리를 하기도 했다.
2.4. 폴란드-프랑스 전역
1939년 9월에 벌어진 폴란드 침공시에 라이헤나우는 10군을 이끌고 폴란드군을 유린하였다. 그때 10군의 참모장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였다. 10군은 후에 6군으로 재편되었는데, 이 6군이 훗날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주공 부대가 되고 파울루스가 6군의 사령관이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때는 보크가 지휘하는 B집단군에 소속되었다. 6군은 벨기에군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고, 결국 50만에 달하는 벨기에군은 라이헤나우가 지휘하는 6군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이 공적으로 라이헤나우는 원수로 임명되었다.
2.5. 독소전쟁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라이헤나우는 다시 6군을 거느리고 룬트슈테트 원수 휘하 남부집단군 소속으로 다시 소련을 침공하였다. 라이헤나우가 거느린 6군은 키예프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하르코프까지 다다른다.
라이헤나우는 다른 고위 지휘관들은 무시하거나 아랫사람에게 책임으로 미루던 히틀러의 전쟁범죄적인 명령을 오히려 자기의 이름으로 더욱 강조해서 내리기도 했으며, 1941년 10월 10일 이를 문서화하였다. 이를 강조 명령(Severity Order)이라고 한다. 아래는 그 일부.
Das wichtigste Ziel des Feldzugs, woher Deutschland gegen Jud-Kommunistismus kämpft ist Vernichtung, die mit Jud, Kommunistismus, und Asienen Kultur abhängig ist. Am Osten Front ist ein Soldaten nicht nur Leute, wer den traditionellen Operationen folgen, sondern dass Repräsentant des National-Sozialistismus' harsch. So sollen Wir verstehen den geraden Schiedsrichtern für Jud, Wen minderwertiges Volk ist.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이 전역에서 최고로 중요한 목표는 유대-볼셰비즘의 힘의 원천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럽 문명에서 아시아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동부전선에서 한 명의 장병은 전통적인 전쟁 방식에 따라 싸우는 사람뿐만이 아닌, 국가적 구상을 가혹할 정도로 대표할 만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로 우리 장병은 유대인이라는 하등 인종에게 가해져야 하는, '''가혹하지만 정당한 심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The most important objective of this campaign against the Jewish-Bolshevik system is the complete destruction of its sources of power and the extermination of the Asiatic influence in European civilization. ... In this eastern theatre, the soldier is not only a man fighting in accordance with the rules of the art of war, but also the ruthless standard bearer of a national conception. ... For this reason the soldier must learn fully to appreciate the necessity for '''the severe but just retribution''' that must be meted out to the subhuman species of Jewry.)
즉 동부 전선에서는 장병들이 통상적인 전쟁방식이 아니라 '''유대인-볼셰비즘을 절멸시키는 전사'''로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관할하던 영역에서는 아인자츠그루펜과 같은 학살 부대들이 다른 곳보다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는 이 명령문을 자신의 부대뿐만 아니라 남부집단군을 포함한 동부전선 모든 부대에 회람시켰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는 그것을 '''적극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자신의 휘하였던 제6군의 사령관인 라이헤나우의 싸이코 같은 언동을 막지는 못할지언정 찬동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국방군 장성들의 동조로 인해 동부전선에서도 특히 남부집단군의 점령 지역에서는 슈츠슈타펠이 저지른 것과 동급의 인종 범죄가 발생하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독소전쟁 민간인 학살은 대부분 중북부전선이 아닌 남부전선이었는데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부터 쿠르스크 전투 패배까지 42-43년 격전지였던것도 있지만 '''남부군이 침공직후 부터 열심히 강간 살인 방화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악명높은 벨라루스 대학살 역시 남부 집단군과 친위대의 합작품이다.'''' 그리고 바비야르 학살 또한 라이헤나우의 6군이 저질렀다.
이 명령을 당시 남부집단군 일선부대의 고급 장교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안 그래도 바쁜데 병사들이 친위대와 학살에 나서면서 진격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지휘관 파울루스는 아예 대놓고 명령을 씹고 불태워 버렸을정도.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 전세가 밀리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군 고위 지휘관들을 해임하기 시작했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룬트슈테트 원수도 전선이 교착상태에 이른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히틀러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 총사령관 후임으로 자신이 총애하는 라이헤나우를 앉히려고 했으나 라이헤나우의 지나친 친나치 성향을 알고 있는 참모본부의 반발에 직면했고, 이에 히틀러는 자신이 직접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라이헤나우를 남부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2.6. 최후
라이헤나우는 6군 사령관직을 자신의 전(前)참모장이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7] 에 넘기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취임했으나 임명된 지 1달쯤 지난 1942년 1월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켰다. 수술 시설을 갖춘 본토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도중에 수송기가 사고가 나는 바람에 소련 영토에 불시착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병원으로의 이송이 늦어진 라이헤나우는 심장마비로 사망했다.[8]
3. 평가
친나치 군인이라는 부정적인 평가에도 라이헤나우의 군사적 재능은 인정받고 있다. 그가 지휘하던 6군이 프랑스 침공 때 벨기에군을 차단한 것은 프랑스 침공전의 대승리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 사람이 너무 일찍 사라져서 부대 지휘 경험이 전간기에 연대장을 잠시 맡은것 외엔 전혀 없는 참모장교 출신 파울루스가 제6군을 지휘하다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참극을 빚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9] 라이헤나우가 일찍 죽는 바람에 그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된 파울루스는 참모장교 출신답게 결단에 서툴렀고, 결정적일 때 히틀러의 명령 때문에 위치를 사수하다가 결국 독일군의 대패를 자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친나치 군인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개전 이전에도 독일군 내부에서 평판이 안 좋았고[10] , 그 때문에 육군 총사령관 자리도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게 밀릴 정도였다. 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야전 지휘관들보다 총통 사령부에 근무하던 장성들만이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현실을 보면, 사형이 언도되었어도 집행까지는 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여러 모로 국방군이 아니라 물론 한 행위를 보면 사형을 때려도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다.
4. 일화
- 처제가 유대인과 교제하고 유대인들을 돕고 있던 것을 알고도 눈감아 주었고 유대인 학살에서 도망치는 것도 도와주었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의 유대인 가족 주치의가 프랑스로 망명하도록 해 준 적이 있고, 헤르만 괴링 또한 동생 알베르트 괴링이 자신의 배경을 이용해 유대인들을 구해주는 것을 눈감아 주었던 일이 있었던 만큼 당시 독일군 내에서도 유대인 친지들을 눈감아 주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5. 주요 보직 내역
- 1935.10.01 : 뮌헨 주둔 7군단장
- 1938.02 ~ 1939.09.01 : 라이프치히 주둔 4집단 사령관
- 1939.09.01 ~ 1939.10.19 : 10군 사령관
- 1939.10.20 ~ 1941.11.30 : 6군 사령관
- 1941.12.01 ~ 1942.01.17 : 남부집단군 총사령관
6. 진급 내역
- 1904.08.18 : 포병 소위(Leutnant)
- 1912.08.18 : 중위(Oberleutnant)
- 1914.11.28 : 대위(Hauptmann)
- 1923.07.01 : 소령(Major)
- 1929.04.01 : 중령(Oberstleutnant)
- 1932.02.01 : 대령(Oberst)
- 1934.02.01 : 소장(Generalmajor)
- 1935.10.01 : 중장(Generalleutnant)
- 1936.10.01 : 포병대장(General der Artillerie)
- 1939.10.01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40.07.19 : 원수(Generalfeldmarschall)
7. 주요 서훈 내역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시기 미상 : 호엔촐레른 왕가 검 기사 십자 훈장
- 1939.09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09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09.30 : 기사 철십자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