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소 폰 만토이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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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리투아니아 빌카브슈키스(Vilkaviškis)에서의 만토이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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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군인이자 20세기의 자유주의 정치가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괄목할 만한 전차전술을 편 전차지휘관으로서 단 27명에게만 수여된 '다이아몬드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Eichenlaubs mit Schwertern und Brillanten zum Ritterkreuzes des Eisernen Kreuzes)을 수여받았다. 종전 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자유민주당 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냉전시대 동독의 비밀스런 무장에 맞서 서독 역시 무장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독일 연방군 이라는 이름의 제창자이다.
2. 출생
1897년 1월 14일 포츠담에서 귀족 가문(남작 작위)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작은 조부는 프로이센 육군 원수를 지낸 에트빈 폰 만토이펠 남작(Edwin Freiherr von Manteuffel)이다.[3]
3. 제1차 세계 대전
1908년 만토이펠은 군사학교의 사관생도가 되었으며 1916년에는 독일 육군의 경기병 연대 장교로 복무하다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서부전선의 제6프로이센 보병사단 예하 제3경기병 연대의 제5대대 소속으로 참전하였고 10월 12일 부상을 입었다. 종전 후 사단참모부에서 근무하였다.
4. 전간기
1918년 독일 11월 혁명이 터지자 만토이펠은 쾰른 다리 경비 부대에 소속되었다. 혁명가들을 저지하고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 후퇴하는 육군을 보호하는 임무였다. 1919년에 독일 해방군에 들어갔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자 새로이 생긴 독일 국방군에 지원하여 라테노브의 제25기병연대에 소속되었다.
1921년 6월 23일에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조카 아름가르트 폰 클라이스트를 만나 결혼, 두 자녀를 낳았다. 한때 나치 독일 원수의 사위였던 것은 훗날 만토이펠의 정치적 입지에 영향을 끼쳤다. 또 1920년 제3프로이센 기병 연대의 소부대 지휘관으로도 복무했고, 연대 참모로도 있었다.
1932년 10월 1일, 만토이펠은 밤베르크의 제13바이에른 기병 연대의 중대 지휘관으로 전근 명령을 받았으며, 2년 후 에어푸르트 기병 연대로 또 전근되었다. 1935년, 만토이펠은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 예하의 제2기갑사단의 제2오토바이 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그후 약 1년간 제2기갑사단에 각종 직책으로 근무했다. 육군 기갑 사령부의 고문이 되기도 했으며 1939년 1월에 베를린크람프닛츠(Berlin-Krampnitz) 제2전차병 학교의 교수에 임명, 1941년까지 학교에서 근무했다.
5. 제2차 세계 대전
5.1.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5월, 만토이펠은 제7기갑사단 예하 제7소총연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중부집단군의 헤르만 호트가 이끄는 제3기갑집단 소속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8월 25일에 제7기갑사단 제7소총연대의 연대장이 전사하자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1941~1942년에 걸친 겨울 동안 모스크바 전투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제7기갑사단은 1942년 5월 프랑스로돌아가 재정비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 후 제7척탄병여단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5.2. 아프리카 전선
1943년 2월, 만토이펠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폰 만토이펠 사단'의 지휘관이 되었고,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집단군의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장군이 이끄는 제5기갑군 소속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만토이펠은 튀니지 전투에서 방어 작전에 참가, 성공적인 반격으로 연합군을 일시적으로 방어하는데 성공하나, 과로로 쓰러져 독일로 후송되었다. 회복 후 아프리카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5.3. 하르코프 전투
1943년 8월 건강 회복 후 동부전선의 제7기갑사단장이 되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의 반격을 받아 전투기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우크라이나에 남아 하르코프, 벨고로드, 드네르프 강 등에서 맹렬한 반격을 펼쳐 소련군의 공격을 저지하였고 지토미르를 탈환하여 도시의 북쪽에서 포위-궤멸될 뻔한 제8기갑사단을 구출해낸다. 그 후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 사단장이 되어 루마니아 북부에서 수 차례 소련의 공세를 막아내고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여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 이후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 독일 중부 집단군을 돕기 위해 리투아니아로 성공적으로 반격하여 전선을 교착 상태로 만들었지만 부대 병력의 1/3을 잃는 등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 했다. 이 전투 이후 병력이 약해진 바람에 북부집단군이 포위되어 있던 쿠를란트 돌출부를 돌파하여 북부집단군을 구출하는 작전은 실패했다.
5.4. 아르덴 대공세
1944년 9월 1일, 만토이펠은 제5기갑군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대다수의 군 사령관은 상급대장급이 맡았는데 아무리 대전 말기라 해도, 만토이펠은 기갑대장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군단장을 건너뛰고 군 사령관에 임명된 매우 파격적인 인사 조치였다. 조지 S. 패튼 장군의 제3군과 로렌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후 아르덴 대공세에서는 발터 모델 원수와 함께 초기 작전안인 '큰 해결책'을 취소하려 노력했고, 결국 히틀러가 구상한 초기 틀을 벗어날 수 없게 되자 그 안에서 세세한 작전 계획을 새로이 수립했다. 이러한 만토이펠의 과감한 판단력과 뛰어난 지휘 능력 덕분에 제5기갑군이 무장친위대인 요제프 디트리히의 부대에 비해 조공의 역할을 맡았음에도, 모델 원수의 지시에 따라 선봉 부대로 전환되었다. 뫼즈 강 직전까지 도달하며 가장 깊숙한 진격 거리를 달성한 만토이펠의 지휘는 이후 미군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만토이펠의 기갑군은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패튼의 전차부대와 결전을 치렀는데, 여기서 큰 타격을 받았고, 결국 미군을 저지하겠다던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5.5. 베를린 공방전
1945년 3월 10일, 만토이펠은 동부전선의 제3기갑군의 지휘관으로서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장군의 비스툴라 집단군에 배속되었다. 제3기갑군은 북부 오르드 강 둑을 방어하는 젤로브 고지에 투입되었다. 이 고지는 서부 포어포메른을 통해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루트를 막는 중요한 고지였으나, 소련군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장군의 제2벨로루시 전선군의 압도적인 공격을 받았는데 이때 소련군은 만토이펠의 사령부로 진입하여 4명의 참모를 사살, 4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만토이펠을 사살하려는 순간, 만토이펠은 권총으로 한명을 죽이고 나머지를 칼로 죽였다고 한다. 4월 25일 마침내 제3기갑군은 로코솝스키에게 격파당하고, 소련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4]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6. 전후
만토이펠은 1947년까지 포로수용소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된 후 독일자유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 미국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객원으로 초빙되어 팬타곤과 백악관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68년에는 미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했고, 전쟁영화[5] 의 기술 고문으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7. 기타
- 만토이펠의 키는 158cm로 굉장히 작은 축에 속했다.
- 6살 연상인 발터 모델과는 대전 초기에 갈등을 빚었으나 아르덴 대공세를 앞두고 3년 만에 재회한 모델이 먼저 화해를 청하면서, 두 사람은 각별한 인연이 되었다. 모델의 54번째 생일 선물로 자신이 사단장이었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던 모델의 아들 한스게오르크를 특별 파견시켜주기도 했으며, 모델이 자결한 후 한스게오르크를 전투임무에서 배제시켜 그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발터 모델 문서 참조.
8. 매체
[1] 본문 이름은 핫소라고 적혀 있는데, 외래어 표기법상 하소가 정확하다. 경음이나 격음 앞 글자의 종성에는 ㅅ을 넣지 않기 때문.[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만토이펠'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3] 1809~1885.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을 지휘했다. 참고로 이 사람의 사촌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시절 프로이센 총리를 지낸 오토 폰 만토이펠(1805~1882)이다.[4] 베를린 전투 당시 소련군에게 잡히면 끔찍하게 살해되거나 고문을 받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아예 근거없는 소문은 아니었다. 운이 좋아도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었다.[5] 공군 대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