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위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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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위건(韓偉健)
이명
이철악(李鐵岳)·이영식(李永植)
한광우(韓光宇)·이광우(李光宇)·이철부(李鐵夫)
본관
청주 한씨[1]
생몰
1896년[2] ~ 1937년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동촌리[3]
(현 함경남도 신포시 신풍리)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조선공산당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자.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한위건은 1896년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동촌리(현 신포시 신풍리)에서 아버지 한효순(韓孝淳)과 어머니 진주 강씨 강기하(姜璣夏)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의 용원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경성부로 이주하여 간동(현 종로구 사간동)에 거주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관립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대표로서 만세운동을 위해 종교단측과 연합전선 형성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는 등 만세시위에 앞장서 나갔다.
3.1 운동 직후 일제의 체포망을 피한 그는 서울에서 생겨난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곧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 임시의정원 함경도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여운형의 일본 방문에 비판적 태도를 보이면서, 신채호가 상하이에서 발간하던 주간신문『신대한(新大韓)』발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0년 잠시 귀국한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 당시인 1923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에 참가하여 위원·총무 등을 맡았으며 국내 순회강연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1924년 1월 이광수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자, 재동경조선인대회 명의로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한 뒤 시대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 등 사회단체에 가입하면서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공감해 오던 사회주의 사상의 실천을 위해 1926년 11월 정우회에 가입하여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2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초 신간회 발기에 참가하여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정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을 맡았고,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중국에 머물면서 잡지『계급투쟁』을 발간하면서 당 재건운동과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론가로 활동하는 한편 이철부(李鐵夫)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면서,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학생공산당(學生共産黨)·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베이핑시 당부위원회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인 1932년 7월 21일 대구지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은 기록이 형사사건부에 남아 있다.
1933년 한때 중국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출옥 후 중국공산당 허베이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노선상의 차이로 중국공산당과 잠깐동안 단절한 뒤에도 1935년 12월 톈진에서 항일집회 및 시위운동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6년 봄 중국공산당 북방국(北方局) 서기 류사오치에 의해 허베이성위원회 서기 겸 톈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1937년 5월 옌안에서 소비에트구역 당대표대회가 열릴 때 국민당지구 대표로서 참석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던 그는 당대표대회가 끝난 후 옌안 요양소에서 별세했다.

3. 기타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9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한위건을 비롯해 오복원·김중화·나창헌·이의경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1] 예빈윤공파 27세. 족보명은 한위건(韓偉'''鍵''').[2] 용의조선인명부에는 1900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