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왕표

 

1. 개요
2. 본문
2.1. 원문
2.2. 번역문[1]


1. 개요


유비한중 공방전에서 승리하고 천자에게 상주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한중왕으로 높인 표. 정사 삼국지 촉서 선주전에 나온다. 진수는 조조의 위왕 즉위조서는 누락[2]했으면서도 유비의 한중왕표와 황제즉위 조서를 중요하게 기록했다.[3] 진수가 이 부분을 얼마나 중요한 기록으로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표라고 하겠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한의 시조인 한고조 유방이 처음 터전을 잡고 천하통일을 시도한 발원지가 한중이기 때문이다. 즉, 유비의 한중왕 등극은 '나는 한 황실의 종친으로서 유방처럼 항우와 같은 역적 조조를 토벌하고 한중에서 다시 한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중 공방전 문서에 나와 있다. 그렇기에 한중왕표는 특히 제왕의 종실이 제후로 서서 왕실을 보좌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참고로 계한보신찬 주석 화양국지에 따르면 이 표는 이씨삼룡이라고 불렸던 이조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또 청나라의 역사학자 하작은 '이 글이 제갈공(=제갈량)의 손을 거치지 않았는가' 추측하기도 했다.

2. 본문



2.1. 원문


「平西將軍都亭侯臣馬超、左將軍長史領鎮軍將軍臣許靖、營司馬臣龐羲、議曹從事中郎軍議中郎將臣射援、軍師將軍臣諸葛亮、盪寇將軍漢壽亭侯臣關羽、征虜將軍新亭侯臣張飛、征西將軍臣黃忠、鎮遠將軍臣賴恭、揚武將軍臣法正、興業將軍臣李嚴等一百二十人上言曰:昔唐堯至聖而四凶在朝,周成仁賢而四國作難,高后稱制而諸呂竊命,孝昭幼冲而上官逆謀,皆馮世寵,藉履國權,窮凶極亂,社稷幾危。非大舜、周公、朱虛、博陸,則不能流放禽討,安危定傾。伏惟陛下誕姿聖德,統理萬邦,而遭厄運不造之艱。董卓首難,蕩覆京畿,曹操階禍,竊執天衡;皇后太子鴆殺見害,剥亂天下,殘毀民物。乆令陛下蒙塵憂厄,幽處虛邑。人神無主,遏絕王命,厭昧皇極,欲盜神器。左將軍領司隷校尉豫、荊、益三州牧宜城亭侯備,受朝爵秩,念在輸力,以殉國難。覩其機兆,赫然憤發,與車騎將軍董承同謀誅操,將安國家,克寧舊都。會承機事不密,令操游魂得遂長惡,殘泯海內。臣等每懼王室大有閻樂之禍,小有定安之變。夙夜惴惴,戰慄累息。昔在虞書,敦序九族,周監二代,封建同姓,詩著其義,歷載長乆。漢興之初,割裂疆土,尊王子弟,是以卒折諸呂之難,而成太宗之基。臣等以備肺腑枝葉,宗子藩翰,心存國家,念在弭亂。自操破於漢中,海內英雄望風蟻附,而爵號不顯,九錫未加,非所以鎮衞社稷,光昭萬世也。奉辭在外,禮命斷絕。昔河西太守梁統等值漢中興,限於山河,位同權均,不能相率,咸推竇融以為元帥,卒立效績,摧破隗嚻。今社稷之難,急於隴、蜀。操外吞天下,內殘羣寮,朝廷有蕭墻之危,而禦侮未建,可為寒心。臣等輒依舊典,封備漢中王,拜大司馬,董齊六軍,糾合同盟,埽滅凶逆。以漢中、巴、蜀、廣漢、犍為為國,所署置依漢初諸侯王故典。夫權宜之制,苟利社稷,專之可也。然後功成事立,臣等退伏矯罪,雖死無恨。」


2.2. 번역문[4]


평서장군(平西將軍) 도정후(都亭侯) 신(臣) 마초, 좌장군장사(左將軍長史) 영진군장군(領鎭軍將軍) 신 허정, 영사마(營司馬)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議曹從事中郎) 군의중랑장(軍議中郎將) 신 사원(射援), 군사장군(軍師將軍) 신 제갈량, 탕구장군(盪寇將軍) 한수정후(漢壽亭侯) 신 관우, 정로장군(征虜將軍) 신정후(新亭侯) 신 장비, 정서장군(征西將軍) 신 황충, 진원장군(鎭遠將軍) 신 뇌공, 양무장군(揚武將軍) 신 법정,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 등 120명이 삼가 아룁니다.

옛적 요(堯)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조정에는 네 명의 흉적[5]

이 있었고, 성왕(주)(周成王)[6]은 어질고 현명했으나 네 곳의 나라가 난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고후(高后)[7]가 칭제(稱制)[8]하자 여씨들이 천명을 훔치고, 효소제(孝昭帝)[9]께서 나이 어리시니 상관걸(上官桀)이 역모를 꾀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은총을 빙자하여 나라를 짓밟고 흉악하게 난을 일으켜 사직을 위태롭게 한 자들입니다. 순(舜)임금과 주공(周公), 주허후(朱虛侯)와 박륙후(博陸侯)[10]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이들을 토벌하여 나라를 안정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성스러운 덕을 타고나시어 만방(萬邦)을 다스리셨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액운을 만나 이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동탁이 먼저 난을 일으켜 도읍을 휩쓸었으며, 조조가 뒤이어 화를 일으켜 천자의 권위를 훔쳤습니다. 황후와 태자께옵서 짐살(鴆殺)당하셨고, 천하가 어지럽혀졌으며, 백성들은 크게 상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오래도록 몽진(蒙塵)하시어 재액을 근심하시며 텅 빈 도읍에 유폐되셨습니다. 사람과 신령이 주인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왕명의 드나듦이 가로막혔습니다. 역적이 나라의 법도를 가리고 마침내 신기(神器)[11]

를 도적질하고자 합니다.

좌장군(左將軍) 영사례교위(領司隷校尉) 예형익삼주목(豫荊益三州牧)[12]

의성정후(宜城亭侯) 유비는 조정의 벼슬을 받은 몸으로서 힘을 다하며 목숨을 바쳐 국난을 막고자 했습니다. 일찍이 그 조짐을 보고 혁연(赫然)히 분발하여 거기장군 동승과 더불어 조조를 주살하고자 했습니다. 이로써 나라를 안정시키고 도읍을 안녕케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동승이 일을 꾀함이 치밀하지 못하여 마침내 조조의 악행이 커져 해내(海內)가 모두 쇠망하고 말았습니다. 신(臣) 등은 크게는 염락지화(閻樂之禍)[13]를 겁내고 작게는 정안지변(定安之變)[14]을 염려하며 늘 왕실을 근심하기에 아침저녁으로 두려워하고 떨면서 숨죽이고 있을 따름입니다.

옛적 우서(虞書)[15]

에서는 돈서구족(敦序九族)[16]이라 일컬었고, 주나라 때는 이전의 두 나라를 거울삼아 같은 성씨들을 제후로 삼았으니, 그 뜻이 시경(詩經)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한나라가 처음 흥하였을 때도 동생과 아들들에게 강토를 나누어 주어 왕으로 높였습니다. 이것이 여씨 일가의 난을 끝내고 태종(太宗)[17]의 기업을 이룰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신 등이 살펴보니, 유비는 황실과 가까운 일족이자 울타리처럼 종실을 지키는 후예로서 항상 나라에 뜻을 두고 난을 그치게 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조를 한중에서 격파하니 해내의 뭇 영웅들이 우러르며 앞다투어 귀부하고 있으나, 작위가 충분치 않고 구석(九錫)을 받지 못하였기에 사직을 보호하고 만세에 빛을 밝히기 어렵습니다.

먼 곳에서 천자의 명을 받들고자 해도 조정의 책명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나라가 중흥(中興)할 때, 산과 강의 길이 가로막히고 여러 사람들의 지위와 권한이 동일하여 아무도 능히 통솔하지 못하게 되니 결국 하서태수(河西太守) 양통 등이 두융[18]

을 받들어 원수(元帥)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끝내 외효[19]를 격파하고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직의 어려움이 실로 그 때와 같습니다. 조조가 밖으로는 천하를 집어삼키고 안으로는 뭇 관리들을 해쳐 조정에 위험이 닥쳐왔으니, 마땅히 이 욕됨을 막아내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얼어붙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 등이 옛 전례(典例)에 의거하여 유비를 한중왕(漢中王)에 봉하고 대사마(大司馬)로 삼아 육군(六軍)[20]

을 이끌고 동맹을 규합하여 흉악한 역적을 멸하고자 합니다. 이에 한중(漢中), 파(巴), 촉(蜀), 광한(廣漢), 건위(犍爲)를 영토로 삼고, 한나라 초기 제후왕의 예에 따라 관청을 두었습니다. 대저 임시방편이라도 진실로 사직에 이롭다면 사사로이 이를 행할 수 있습니다. 공을 세워 큰일을 이룬 연후에는 신 등은 물러나 엎드려 죄를 청하겠사오니, 비록 죽더라도 한이 없겠습니다.


[1] 번역과 주석은 모두 이글에서 참고.[2] 본전에 누락된 조서는 배송지 주 헌제전에 나온다. 조비의 선양조서는 누락하지 않았으나 각종 표나 조서를 누락했다.[3] 손권의 경우 조비의 오왕 책봉조서는 기록했으나 황제 즉위 조서는 누락했다. 황제 즉위 조서는 배송지 주 오록에 나온다.[4] 번역과 주석은 모두 이글에서 참고.[5] 사흉(四凶)-요임금 때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 곤(鯀), 요임금 때 순이 사흉을 쳤다.[6] 주나라 2대 왕인 희송. 무왕(주)(周武王) 희발의 아들.[7] 한고제의 아내인 여후를 말함[8] 황제의 직권을 대리로 행사하였음을 뜻한다. 황제를 자칭하는 칭제(稱帝)와는 의미가 다르다. 여러 제도와 관련된 황제의 명령을 제서(制書)라 하며, 여태후는 아들 혜제(惠帝)가 사망한 후 그의 양자가 즉위하자 어리다는 이유로 황제의 권한을 대신 행사하였다.[9] 전한의 여덟 번째 황제인 소제 유불릉. 여덟 살에 황위를 이어받자 사방에서 반란이 빈발하였고, 전대 황제인 무제(한무제)로부터 탁고를 받은 곽광과 상관걸은 서로 원수가 되어 다투었다. 소제가 곽광의 편을 들자 상관걸은 결국 반란을 시도하였지만 사전에 누설되어 삼족이 멸해졌다.[10] 앞서 언급한 ‘사직을 위태롭게 한’ 사건들을 진압한 인물들.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주공은 주무왕 희발의 동생으로 조카 주성왕을 보좌하다 이후 선양을 받았다. 주어후는 한고제 유방의 손자 유장으로 여태후가 사망한 후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한문제 유항을 즉위시켰다. 박륙후는 한무제의 탁고를 받은 대신 곽광으로 상관걸을 제거했다.[11] 신령에게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 신기를 훔친다는 것은 곧 제위를 찬탈한다는 의미다.[12] 예주, 형주, 익주 삼주의 목을 겸함.[13] 염락(閻樂)이 일으킨 화. 진나라의 환관 조고진시황이 죽자 2세 황제 호해를 섬기며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후 호해의 의심을 사게 되자 염락을 시켜 호해를 살해한다.[14] 정안(定安)의 변고. 정안(定安)은 전한의 마지막 황제 유자영을 뜻한다. 2살에 왕망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며 4살 때 왕망에게 제위를 찬탈당하고 정안공(定安公)에 봉해졌다. 이후 유폐되었다가 17년 만에 한 황실의 후예인 경시제 유현이 왕망을 멸망시키고 그를 구출한다. 하지만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유현은 결국 그를 살해했다.[15] 서경(書經)의 우서편(虞書篇). 서경은 우서편(요순 시대), 하서(하나라 시대), 상서(상나라 시대), 주서(주나라 시대)로 구분되어 있다.[16] 구족(九族)의 순서를 정하여 두텁게 대우하였다는 뜻.[17] 한나라 문제(文帝)를 뜻함.[18] 전한 말 후한 초의 사람.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망한 후 장액속국도위(張掖屬國都尉)로 있었다. 여러 사람이 천하를 다투는 과도기에 양통 등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하서지역 여러 군현의 군사를 관할하였고, 이후 광무제 유수가 즉위하자 그에 귀순하여 한나라의 충신이 된다. 광무제의 친정(親征)을 수행하여 옛 주인 외효와 싸워 격파했다.[19] 전한 말 후한 초의 사람. 왕망의 관리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왕망을 상대로 한 거병에 참여했다. 경시제 유현의 수하가 되었다가 다시 반란을 꾀하였으나 실패했고, 고향으로 돌아가 재차 세력을 일으켰다. 이때에 두융도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었다. 이후 광무제와 공손술 사이를 저울질하다 공손술에게 귀부하였고 그 때 두융은 광무제에게 귀순한다. 광무제와 싸우다 병으로 사망한다.[20] 천자가 이끄는 군대. 주나라 때 임금이 여섯 개의 군대를 이끌었던 데서 유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