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공방전

 

'''한중 공방전
漢中攻防戰'''

'''시기'''
219년
'''장소'''
한나라 익주 한중군
'''원인'''
조조의 한중 침략
'''교전'''
유비
조조
'''황제'''
황제 유협
'''지휘관'''
'''좌장군 유비'''
'''위왕 조조'''
'''장수'''
<^|1>정로장군 장비
양무장군 법정
평서장군 마초
토로장군 황충
익군장군 조운
편장군 황권
아문장군 위연
면양장 장익
부군중랑장 유봉
의성태수 맹달
오란
뇌동
진식
고상
장저
임기
<^|1>정서장군 하후연
편장군 장합
도호장군 조홍
중령군 조휴
승상병조의령사 곽회
오관장 하후상
중령장군 허저
주부 양수
한호
상서 장기
시중 두습
서황
조진
왕평
저왕 강단
'''병력'''
불명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유비의 한중왕 자칭과 정서장군 하후연 전사
1. 개요
2. 발단
3. 전개
3.1. 탕거 전투
3.2. 가맹관 전투 (삼국지연의)
3.3. 유비 북진
3.4. 정군산 전투
3.5. 정군산 전투 (삼국지연의)
3.6. 조조, 유비, 양웅 대결하다.
4. 결과
5. 참전 무장과 모사
5.3. 기타
6. 기타 창작물에서


1. 개요


219년 한중에서 유비군과 조조군이 벌인 전투로 유비의 최전성기를 대표하는 전투이기도 하다. 전세계 촉빠들과 촉한정통론자들이 대부분 삼국지에서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부분이기도 하다.
파촉이 한중을 소유했느냐 여부는 유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한중은 알다시피 법정이나 양홍#s-2이 언급하길 '최소 영토를 보전'하면서 '파촉의 인후'가 될 수 있는 지역이고 이 지역을 차지하면 파촉은 굳이 형주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력 방어가 가능하게 만드는 곳이었으며 북벌의 전초 기지로서 사용될 터였다.[1] 즉, 파촉 대신 최전방 역할을 할 한중을 가지고 있다면 형주군이 굳이 파촉으로 들어갈 필요나 이유가 없고 다른 방향으로 자유로이 공격을 갈 수 있게 되어 융중대에서의 형익 양동 작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한중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병력과 물자를 파촉에서 형주로 자유롭게 이동시킬수 있는 장점이 생기게 되니 관우가 한중 공방전 이후 곧바로 양번을 공략한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2. 발단


적벽대전 이후 생겨난 불순 세력을 처리하며 집안 단속을 하던 조조는 211년 초 종요에게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라 명한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마초를 비롯한 관중 군벌들은 일제히 봉기하여 동관을 공격한다.
한편, 조조의 장로 공격소식에 마초와 마찬가지로 불안감을 느끼던 익주의 유장장송의 건의에 따라 유비를 불러들이기 위해 장송을 사신으로 보내고, 유비는 이에 촉으로 들어와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 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선주전)'''
마초의 봉기를 물리친 조조는 212년 위공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권위를 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이 해, 장송이 내통 혐의가 드러나 처형이 되자 유비는 본격적으로 유장과 전쟁을 벌인다. 213년 방통이 전사하자 제갈량, 조운, 장비가 추가로 파견되었고 다음 해인 214년 갈 곳을 잃은 마초까지 유비에게 합류하여 위용을 갖추자 유장은 마침내 항복한다. 유비가 서천을 점령한 것이다.
한편, 오후 손권은 자신의 익주 원정을 막아 자기를 속이고 유비가 대신 서천을 먹은 것에 분노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빌미로 빌린 형주를 내놓으라고 제갈근을 사자로 파견했고'''(오주전)''' 유비는 "(나는 지금 양주를 평정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오나라에 다 상여토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선주전)'''
그러자 몹시 노한 손권은 여몽을 보내 장사, 영릉, 계양을 빼앗자 유비는 몸소 5만 대군을 이끌고 공안으로 내려가고, 관우를 익양으로 파견하여 손오동맹에 긴장감이 드높아진다.'''(선주전)'''
그런데 215년, 조조가 마침내 장로의 항복을 받고 한중을 손에 넣게 된다. 위협을 느낀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을 손권에게 속하게 하고 자신은 남군, 영릉, 무릉을 갖기로 합의한다.[2] 한중을 점령한 조조는 이대로 유비를 공격하라는 사마의유엽의 말을 듣지 않고(득롱망촉) 하후연장합에게 한중을 지키게 한 뒤 자신을 일단 철수한다.
한편 대략 216년 무렵 조조는 위왕의 자리에 오른다. 장합은 군사를 움직여 파서(巴西)로 내려가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였고 탕거(宕渠)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장비가 나섰고, 장합은 장비와 50일간 겨뤘으나 패퇴한다.
217년 말(혹은 218년), 마침내 유비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진격한다. 이에 조조는 조홍을 보냈고, 그해 7월에는 결국 조조 역시 군대를 이끌어 서쪽으로 향하며 싸움을 개시할 준비를 한다.

3. 전개



3.1. 탕거 전투


태조(조조)는 산관(散關)을 지나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또 다시 먼저 장합을 보내 보졸 5천을 이끌고 선두에서 길을 뚫도록 했다. 양평(陽平)에 도착했는데 장로가 항복하자 태조는 돌아왔고, 장합과 하후연을 남겨 한중을 수비하며 유비에 맞서도록 했다. 장합은 따로 여러군대를 이끌고 파동(巴東), 파서(巴西)의 2군을 항복시키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겼다. 탕거(宕渠 - 익주 파군 탕거현)로 진군하여 유비의 장수인 장비(張飛)와 겨루었고, 군을 물려 남정(南鄭 - 익주 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왔다. 탕구장군(盪寇將軍)에 임명되었다.

《정사 삼국지》 장합전


11월, 장로(張魯)가 파중(巴中)으로부터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장로와 그 다섯 아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유비가 유장(劉璋)을 습격해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다.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

12월, 공이 남정(南鄭)으로부터 돌아오며, 하후연을 남겨 한중에 주둔하게 했다.

《정사 삼국지》 무제기


장비는 정졸(精卒 -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南鄭 - 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

《정사 삼국지》 장비전

한중전투 중 일종의 간보기 같은 전투. 장비의 군은 1만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나 장합의 병력이 어느 정도 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연의에선 3만) 5천여에서 수만여 내외가 아닐까 추측되는데, 요격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 별동대 작전으로 앞뒤가 분산되어 연계가 전혀 안 되는 채로 대파한 것으로 보인다.
215년 9월 파군의 7성(七姓)의 이민족왕 박호, 종읍후(賨邑侯) 두호가 파군의 이(夷)족, 이민족들을 들어 항복해왔고 이를 황권이 격파했으며 11월 장로가 항복했다. 무제기에 따르면 이때 유비가 유장을 습격해 익주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는데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고 한다. 조조가 대군을 들어 한중을 점령하고 남정에 있을 당시에 장합을 시켜서 보낸 것으므로 그 병력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2월 조조가 돌아가며 하후연장합을 남겨 한천을 수비하도록 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로가 파중으로 달아나 항복했을때 황권두호박호를 격파하였고 이때 위공 조조가 장합에게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3파 지역을 순행하며 그곳의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여 군대를 탕거로 진군시켰다. 유비는 파서태수 장비를 시켜 장합과 서로 대치하게 하였고 50여일이 지나자 장비가 장합을 습격하여 크게 대파하였으며 장합은 남정으로 달아났고 유비도 성도로 돌아갔다.
장비전에 따르면 장합은 별도로 제군(諸軍)을 지휘해 파서와 파동으로 내려가 항복을 받고 그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려 하니, 탕거, 몽두, 탕석으로 진군해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겨루었다. 장비는 정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을 따라 장합군을 요격하여 교전했는데 장합군은 산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고 장비가 마침내 장합을 격파했다. 장합은 말을 버린 채 산을 타며 단지 휘하 10여 명과 함께 샛길을 따라 퇴각했고, 장합이 군을 이끌고 남정으로 돌아가니 파(巴) 땅은 안정을 찾았다.
연의에선 이 과정이 한층 극적으로 각색되어서 장비가 지략을 발휘한다. 장비는 일부러 술에 취하고 긴장을 풀어 장합의 공격을 유도하여 장합을 섬멸하는데, 장비의 바보짓을 쭈욱 보고 있던 독자들이 그 성장에 감탄하는 부분.[3] 마음 졸이던 유비도 감탄한다.[4] 장합이 이 부분에서 조홍의 충고도 무시하고 억지로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대패하는 야라레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그래도 한중전에서 조홍이 격퇴시킨 뇌동을 이 전투과정에서 목을 베는 것으로 나오는 등 전공을 얻은 측면도 있다.

3.2. 가맹관 전투 (삼국지연의)


자기 말도 안 듣고 나갔다가 발리고 돌아온 장합을 보자 분노한 조홍이 목을 베려다가 곽회를 필두로 주위에서 만류하자 단념하고 벌로서 가맹관을 공격하게 한다. 정사에서 두 명의 전공을 생각하면 흠좀무.
유비가 장합이 만만찮은 인물이라며 걱정하자 제갈량은 장비를 파서에서 불러 막아야겠다고 한다. 주위의 장수들을 대놓고 무시하자 모욕감(?)을 느낀 장수들 중 황충이 나서서 "파서는 어찌하고 장 장군을 불러오려 하십니까? 신이 나서 적을 막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제갈량이 "장합은 무서운 인물이라 상대할 만한 인물이 장 장군밖에 없소."라고 하자 황충은 옆에 있던 무거운 칼을 들고 칼춤을 보이더니 강궁까지 단숨에 꺾어 버렸다. 이에 제갈량은 그의 출진을 허락했고, 황충은 부장으로 엄안을 데려가면서 "그 역시 노인이나 실력이 나쁘지 않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조운이 나서서 아이들 장난을 그만두라며 노장 둘을 보내선 안 된다고 간언하지만 제갈량은 괜찮을 거라며 황충과 엄안을 내보낸다.
가맹관을 지키던 곽준맹달은 두 노인을 보자 어이가 없어져서 "제갈량이가 드디어 미쳤나보다. 보내라는 원군은 안 보내고 어찌 살아있는 송장을 보낸단 말이냐!"하고 쑥덕거리자 속상한 황충은 엄안을 불러 "늙은이들의 힘을 보여줍시다."하고 말한다. 엄안이 찬성하자 황충은 자신이 일부러 져서 장합을 끌어낸 뒤 엄안이 뒤에서 기습하기로 작전을 세운다.
황충을 우습게 보는 건 아군뿐만 아니라 적군도 마찬가지라, 장합도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다가 황충과 엄안의 공격에 크게 혼이 나고 달아난다. 조홍은 제대로 열받아서 장합을 불러내 목을 베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곽회가 나서서 그를 너무 몰아붙이면 투항해버릴지도 모른다며 만류하자[5] 하후연의 조카인 하후상과 뜬금없이 연의에서 한현의 아우로 나오는 한호에게 군사를 주어 장합을 구원토록 한다.[6]
적군의 기세가 높자 황충은 일부러 패배를 거듭하여 적을 교만케 하는 교병지계를 써서 방심하게 한다. 하지만 곽준&맹달은 '역시 늙은이들이 다 그렇지 뭐'라고 어이 없어하고, 본진에 있는 제갈량이 "황충 장군은 교병계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유비의 부하들 역시 개무시한다. 이에 유비가 제갈량의 말을 믿으면서도 "그래도 불안하니까 유봉을 보내서 돕게 해야겠소."라고 말하자 제갈량도 그렇게 생각하여 유봉을 보낸다. 이후 영채에 도착한 유봉이 유비의 말을 전하자 황충은. "그것은 나의 교병계이니 작은 주군(유봉은 유비의 양아들)께서는 뒤에서 구경이나 하시오."라며 곧바로 하후상과 한호를 몰아붙인다. 이때 유봉이 따라와서 "너무 뒤쫓으면 위험합니다"라고 했지만 황충은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겠습니까?"라고 말한 뒤 맹추격하고, 군사들도 이에 힘을 얻어서 끝까지 몰아붙인다.
결국 하후상과 한호는 장합과 함께 천탕산에 있는 하후덕에게 도망간다.[7] 이에 황충과 엄안은 천탕산에 불을 지른 뒤 앞뒤로 양동작전을 가해 한호는 황충에게, 하후덕은 엄안에게 목숨을 잃는다. 간신히 살아남은 하후상과 장합은 하후연이 있는 정군산으로 목숨만 건져서 도망치게 된다.

3.3. 유비 북진


건안 23년(218년), 선주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다. 장군 오란(吳蘭), 뇌동(雷銅) 등을 나누어 보내 무도(武都, 양주 무도군)로 들어가게 했으나 모두 조공의 군대에게 함몰되었다. 선주가 양평관(陽平關)에 머물며 하후연, 장합 등과 서로 맞섰다.

《정사 삼국지》 선주전


(건안 22년(217년) 10월), 유비는 그(법정)의 책략이 훌륭하다고 여기고 이에 제장들을 인솔하고 군사를 한중으로 진군시키고 장비, 마초, 오란 등을 파변하여 하변(下辯, 량주 무도군 하변현)에 주둔시켰다. 위왕 조조가 도호장군 조홍을 파견하여 그들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자치통감》 68권


유비가 장수 오란을 보내 하변에 주둔하게 하자 태조는 조홍(曹洪)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는데, 조휴를 기도위로 임명해 조홍의 군무에 참여케 했다. 태조가 조휴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참군(參軍)이지만 실제로는 장수(帥)이다.” 조홍이 이 영을 듣고 조휴에게 군무를 맡겼다.

유비가 장비를 보내 고산(固山)에 주둔케 하여 군의 배후를 끊으려 했다. 의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자 조휴가 말했다. “적이 실제로 길을 끊고자 하면 응당 복병으로 몰래 행군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먼저 성세(聲勢)를 과장하니 이는 실제로는 그들이 이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적군이 아직 집결하지 못했을 때 급히 오란을 공격해야 할 것이고 오란이 격파되면 장비는 달아날 것입니다.”

조홍이 이를 좇아 진병(進兵)했고, 오란을 공격해 대파하니 과연 장비는 달아났다. 태조가 한중을 함락시키고 제군(諸軍)이 장안으로 돌아온 뒤 조휴를 중령군(中領軍)에 임명했다.

《정사 삼국지》 조휴전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 등을 보내 하변(下辯)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했다.

(중략)

조홍이 오란을 격파하고 그 장수 임기(任蘷) 등을 참수했다.

(중략)

3월, 장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음평(陰平)의 저(氐)족 강단(強端)이 오란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

《정사 삼국지》 무제기


“조조가 일거에 장로를 항복시켜 한중을 평정하고도 이 기세를 틈타 파(巴), 촉(蜀)을 도모하지 않고 하후연, 장합을 남겨 둔수(屯守)케 하고 자신은 황급히 북쪽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그의 지모가 미치지 못하거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필시 내부에 우환이 닥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하후연과 장합의 재략(才略)을 헤아려보면 우리의 장수(將帥)들보다 낫지 못하니 군사를 일으켜 가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기는 때에 이르러 농업을 일으켜 곡식을 쌓고 (저들의) 빈틈을 엿보고 기회를 노린다면, 상(上)으로는 구적(寇敵)을 무너뜨려 왕실을 받들거나, 중(中)으로는 옹주, 양주를 잠식해 영토를 넓힐 수 있고, 하(下)로는 요해지를 굳게 지키며 오래도록 유지하는 계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정사 삼국지》 법정전

217년(촉서 법정전, 화양국지 유선주지,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해 10월), 또는 218년(촉서 선주전), 유비는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북진한다. 법정전에 따르면 법정이 선주(유비)를 설득하여 선주가 좋게 여기어 출진하였다고 하고, 또한 법정이 종행(從行, 수행)하였다 하니 유비의 북진에는 법정의 영향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법정이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장담할 수 있던 이유는 몇가지가 있다. 우선 유비세력은 적벽 이후 계속 연이어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장수들도 연이어 승리하면서 전체적인 역량이 증진되어 조조군와의 전투에서도 탕거의 승리 뿐만 아니라 황권이 조조에게 장로와 함께 투항하여 파군일대를 수비하던 두호와 박호를 격파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또 황권은 하후연을 치고 한중을 정벌할 플랜을 이미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 전략이 실행될 때가 드디어 온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조조 세력의 내부 문제였다. 그 동안 한실을 위해 협천자한다던 조조의 무리한 위왕 즉위는 내외적으로 조조세력에 엄청난 우환을 안겨 주었다.[8] 이로 인해 의문을 가졌다는 이유로 최염이나 모개같은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신료들이 숙청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가 위왕으로서의 봉국인 업에 가 있을때 한실의 친위세력들이 허현에서 반조조의 기지를 들고 조조는 한실을 겁박하는 역적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운 유비세력과 협조해 조조를 몰아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감에 휩싸인 조조는 허현의 조정관료들을 반란자로 몰아 대다수를 처형하는 등 불안정한 모습도 보여 주었다. 외부에선 배잠의 통치에 반발한 오환족과 선비족이 하북을 침입하자 아들인 조창을 파견하는 등 이족의 침입이 잇달았고 손권과도 전투를 벌어고 있는 상황에서 조조 세력은 예전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때 앞서 먼저 군대를 보내 무도 땅에 들어가게 하는데 이때 언급되는 이름이 장비, 마초, 오란, 뇌동 등등이다. 전부 주둔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무도 하변에 자리를 잡긴 했으나 조홍조휴 등의 활약에 물러나게 된 듯 보인다. 오란은 격파되어 죽었고 장비, 마초는 퇴각하였다.

유비가 진식(陳式) 등 10여 영(營)을 보내 마명각도(馬鳴閣道)를 끊자 서황이 별도로 군을 이끌고 이를 쳐서 깨뜨렸는데, 적은 스스로 산과 계곡에 투신해 죽은 자가 많았다.

서황전

보낸 진식도 서황에게 깨진다. 이는 전투가 치열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한중지역 총사령관 하후연의 지휘능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그는 장합을 광석에 주둔시켜 공격하는 유비의 주력군을 상대하게 하고 서황을 보내 마명각도를 끊어 한중일대의 조조군의 연락, 행군체계를 꺾으려 했던 시도를 막아냈던 것이다. 유비군 역시 마초와 저족의 능력을 이용해 무도와 하변을 찔러보고 양평관에 주둔해 마명각도를 끊어 적을 고립시키는 등 다양한 전술적 시도를 보여 주었다. 어쨌거나 하변에 보냈던 병력이 쫓겨나자 유비는 양평관에 자리를 잡게 되고, 이에 하후연도 군대를 이끌고 와 양군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게 된다.

건안 23년(218년), 유비가 양평관에 주둔하자 하후연들이 제장들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서로 지키면서 해를 넘겼다.

《정사 삼국지》 하후연전


장합이 광석에 주둔하였는데, 유비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자 못하자 급히 편지를 보내어 익주의 군사를 징발하도록 했다.

《자치통감》 68권


유비는 한중을 차지하려고 다툴 때, 긴급 문서를 내려 병사를 보낼것을 요구했다. 군사장군 제갈량은 이 문제를 양홍에게 물었다. 양홍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한중은 익주의 인후로서 존망의 기회가 되는 지역입니다. 만일 한중을 잃는다면 촉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각 가문의 화근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남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여자는 수송을 담당해야 하는데, 병사를 파견함에 있어 무엇을 의심합니까?" 당시 촉군태수 법정은 유비를 수행하여 북쪽으로 갔었다. 제갈량은 이 때문에 표를 올려 양홍에게 촉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양홍은 각종 사무를 모두 처리했으므로, 결국에는 정식으로 태수가 되었다.

《정사 삼국지》 양홍전

당시 유비는 법정, 황권 등을 작전참모로 데려가고 제갈량에게 성도를 맡겼었다. 그 후 따로 연락을 취해 병력을 추가로 보내줄 것을 말했는데, 익주내에는 유비가 한중으로 이동한 사이 도적의 무리인 마진과 고승이 수만의 무리를 일으켜 소란을 부리고 남부에선 이족인 고정이 소란을 부렸다. 제갈량이 양홍#s-2에게 어찌해야 할지 묻자 양홍이 대답하길, "한중은 익주의 인후로서 존망의 기회가 되는 지역입니다. 만일 한중을 잃는다면 촉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각 가문의 화근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남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여자는 수송을 담당해야 하는데, 병사를 파견함에 있어 무엇을 의심합니까?" 라고 답하였고 이에 제갈량이 곧바로 지원병을 파견하였다.[9] 당시 촉군에게 한중의 존재가치가 어떠함을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양홍의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제갈량은 그를 법정이 종군하여 공석이 된 촉군의 태수로 임명했고 그는 제갈량의 의도에 부합하는 믿음직하고 유능한 인재로 성장하였다. 익주에서 일어난 반란도 물론 이엄의 능력도 있었겠지만 그 뿌리가 얕은 것이어서 이엄은 불과 5천의 병력으로 수만 도적의 무리를 순식간에 격파하여 수괴들의 목을 베었고 고정의 소란도 가볍게 진압하였다. 이전 시기 익주 반란이 지속적으로 잘 소탕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보면 그만큼 이 시기 유비의 익주지배력이 확고해졌다는 의미도 된다.[10]

3.4. 정군산 전투


유비가 양평에 주둔하자 장합은 광석에 주둔했다. 유비가 정예병 1만 여명을 10부로 나누고 밤중에 장합을 급습했다. 장합은 친병(親兵)을 이끌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유비는 이길 수 없었다. 그 뒤 유비가 주마곡에서 도시 주변을 불태웠다. 하후연이 불을 끄러 다른 길로 왔다 유비와 서로 만났다. 단병(短兵)으로 서로 칼을 맞부딪치며 교전하다 마침내 하후연이 죽었고 장합은 양평으로 돌아왔다.

《정사 삼국지》 장합전


건안 24년(219년) 정월, 유비가 밤에 녹각(鹿角)을 불사르며 포위하자 하후연이 장합에게 동쪽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경병(輕兵)을 이끌고 남쪽을 지켰다. 유비가 장합에게 싸움을 걸었는데 장합군이 불리했다. 하후연은 지휘하던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장합을 돕게 했는데, 유비의 습격을 받아 마침내 하후연이 싸우다 죽었다. 시호를 내려 민후(愍侯)라 했다.

《정사 삼국지》 하후연전


건안 24년(219년),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서 하후연을 공격했다. 하후연의 군대는 매우 정예했으나 황충은 적의 예봉을 꺾어 어김없이 전진하며 사졸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환성은 골짜기를 뒤흔드니, 한 번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斬)하고 하후연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랐다.

《정사 삼국지》 황충전


법정이 말했다. “가히 공격할 만합니다.” 선주가 황충(黃忠)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 등은 참수당했다. 조공(曹公)이 서쪽을 정벌하며 법정의 계책임을 듣고 말했다.“나는 예전부터 현덕(玄德 - 유비)이 이 같은 일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 필시 남의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알았다."

《정사 삼국지》 법정전

218년 9월 조조는 마침내 군을 일으켜 장안에 주둔하나 그 후 하후연을 도와주기는커녕 장안에 주둔하면서 사태를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단순히 후방에 주둔해 든든함을 유비에게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하후연 군의 상황이 유비군의 맹공에 힘들었던 점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 셈이다. 직접 와서 결전의 의지를 보여주고도 실제로 현지 사령관에게만 맡기고 관망하는 점은 분명 이전의 조조가 보여준 전략적 판단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조조가 본거지를 떠난 이 와중에 완에서는 동리곤의 많은 노역 부여에 후음을 비롯한 백성들의 반발로 반란이 일어나는 등 내부에서 소란이 끊어지질 않았는데 조조가 반란 진압이나 하후연 구원 중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상당히 의문스럽다. 당시 위의 상황을 고려하면, 한중을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여력이 없어서 못 도와주고 있었던 것'''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반란 진압이야 조인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후음의 난에서 그와 연계한 배후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그는 결국 후일의 근심거리를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하후연 참살 이후 발언을 보면 그 동안 조조 본인이 유비를 격파하던 것을 생각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이미 유비의 역량은 이전에 조조가 생각하던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해를 넘기는 지리한 대치 상태에서 먼저 공습을 가한 건 유비였다. 그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양평(陽平)으로부터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으로 주둔지를 옮긴다. 면수에도 조조군이 주둔해 있었을터이므로 유비는 그 지역의 조조군을 격파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태를 파악한 하후연과 장합 역시 정군산에서 유비를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동원해 공격을 가했지만 이미 요지를 장악한 유비는 주도권을 쥐고 기세를 타고 맹공을 퍼붓는다. 때 마침 유비와 법정은 조조군을 상대할 계책을 다 수립해 놓은 상태였고 한중공방전의 가장 화려한 전투가 이로서 막을 올렸다.
시작은 하후연 주둔지 동쪽의 주마곡을 지키고 있건 장합의 주둔지였는데 유비는 군사 1만을 선발해 10개 기습부대를 만들어 야습을 가하는 전술을 구사한다. 장합 역시 이에 치열하게 맞섰지만, 화공까지 동원해가면서 전례없는 치열한 전투력을 보이는 유비군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장합은 본영인 하후연 군에 구원을 요청하는 지경에 이른다.
바로 그 지원 요청이 유비의 노림수였지만 말이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 유비의 의도를 알아차리는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유비의 의도를 알아챘더라도, 하후연과 장합은 이미 외통수에 몰린 상황이었기 때문에[11] '일단 주마곡의 급한 불을 최대한 빨리 끈 다음 하후연을 노리는 기습이 있을 경우 그걸 어떻게든 막아내는' 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도 없었다.
급보를 받은 하후연은 바로 군사의 절반을 장합에게 지원해 주었지만, 정군산에 올라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법정은 마침내 이 공격의 진정한 목적인 하후연군의 격파시기가 왔다고 보고했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한중방면 사령관인 하후연을 참살해 한중 조조군의 지휘체계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에 장합을 공격하는 군사 말고 또 다른 기습부대가 하후연을 향해 돌입한다.
장합을 공격한 군세가 후속부대는 걱정없을 정도로 장합을 몰아붙이던 유비군의 정예였던 만큼 이 부대는 그보다는 미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은 유비군의 히든카드이자 관영에 비견되는 맹장 황충이었다. 이들은 여기저기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하후연군을 공격하고 녹각에 불을 지르며 파괴했는데 징과 북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병력이 이곳을 쳤다 저곳을 쳤다 어김없이 전진하였다 하니 그 기세가 얼마나 급작스럽고 번개같았을지 짐작이 된다.
하후연은 녹각을 수리하고 직접 황충을 상대로 맞서기 위해 자신에게 남아있던 정예병력들을 이끌고 출진하지만 이미 전략, 전술 단계에서 수세로 밀려 완전히 악전고투하고 있던 상황에서 맹장 황충의 맹렬한 공격까지 받아내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결국 황충은 녹각을 수리하던 위의 군단장 하후연을 참살하고 그의 정예병력을 모조리 대파하는 대공을 세운다.[12]
이때 조조가 법정의 계책임을 듣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유비는 그런 수를 쓸 수 있는 놈이 못 됨 ㅇㅇ"이라고 까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이에 대한 배송지의 의견이 재미있다.

'신 송지가 보건대, 촉과 한중은 입술과 이의 관계와 같으니 유주(劉主-유비)의 지모가 어찌 이에 미치지 못하겠는가? 장차 계략을 펼치기 전에 법정이 먼저 말했을 뿐이다. 무릇 좋은 모책을 들어 써서 공업을 이루는 것은 패왕된 자로서 누구나 그러하지 않던가? 위무(魏武-위무제 조조)가 이를 남의 가르침으로 여겼다면 또한 용렬하지 않은가! 이는 아마도 욕되고 한스러운 나머지 한 말로, 사실을 헤아려서 마땅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패배하고 하후연이 죽은 데 빡쳐서 별 생각없이 한 말이라는 것. 화용도에서 패퇴하여 돌아는 형편에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구나. 만약 일찍이 불을 놓았다면 내가 비견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하고 비웃은 것이나 적벽대전 이후 "곽가가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지지 않았을 텐데"와 비슷한 급이라는 이야기. 쉽게 얘기해 허세.
조조는 장합을 몰아붙이고 하후연을 참살한 군사적 활동은 총사령관 유비가 직접 지휘한 것임에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애당초 이런 고단수의 전략으로 적군의 사령관을 완전히 박살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처음부터 사령관의 목을 노리고 이를 실행한 유비와 법정의 책모가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조조 역시도 자신이 영웅으로 보고 있고 음험하면서도 인덕을 갖춘 기이한 인물 정도로 알고 있던, 아니 알고 있었다고 여기던 유비의 역량이 상상 이상이었음에 내심 놀랐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략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비록 하후연이 도독(都督)이었으나 유비는 장합을 (두려워해) 꺼린 반면 하후연은 경시했다. 이에 하후연이 죽자 유비가 말했다, "응당 우두머리를 잡아야지, 이 자를 잡아서 무엇하겠는가!"

이는 휘하 장수들을 독려하기 위한 발언임과 동시에 장합에 대한 경계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장합은 당시 한중군의 2인자였고 <무제기>, <하후연전>, <장합전>, <서황전>을 보면 한중을 가기 위한 무도(하변) 진입부터 조조의 한중(장로)정벌과 파군 점령을 위한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조조의 한중 정벌을 보면 실제로 군대를 이끌고 실제 전투 및 평정을 하러 다닌 인물이 장합이니, 유비가 장합을 더 우선시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즉, 본인이 추후 한중, 무도, 파군에 영향력 및 과시를 하기 위해서는 (그 부근의 저족 등의 이민족이나, 민심에 대한 영향력) 실제로 그 지역 거주민들이 직접 보고 겪은 장합을 격파하는 것이 더욱 유리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하후연이 살해된 후, 군대안의 인심은 불안하였다. 곽회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탕구장군 장합을 군주로 추천하자 각 진영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 다음날, 유비가 한수를 건너 공격해 오려고 했다. 각 장수들은 의논한 결과, 중과부적이고 유비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있는 이상 물에 의지하여 진을 만들고 유비에 대항하려고 했다. 곽회가 말했다.

『이것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을 꺾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쳐서 적을 유인하여 반쯤 건넌 후에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반드시 유비를 무찌를수 있을것입니다.』

진을 친 후, 유비는 의심스럽게 여겨 건너지 않았다.

《정사 삼국지》 <곽회전>

하후연이 죽자 위군은 크게 흔들렸다.[13] 일단 비어 있는 사령관은 장합에게 맡기고 곽회의 기책으로 한수 안쪽에 진을 치고 유비가 도하하는 사이 기습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이것 역시 유비가 강가의 복병을 파악해 도하하지 않았다. 이렇게 곽회의 기책으로 강을 넘어오는 것은 막았으나 전선은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장안에 있던 조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3.5. 정군산 전투 (삼국지연의)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황충과 엄안이 장합, 하후덕, 하후상, 한호를 모조리 패퇴시켜버리자 제갈량의 권유에 따라 유비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게 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조도 유엽의 권고에 "내가 공의 지난말[14]을 듣지 않아 이 지경이 되었구려!"라 말하며 무려 40만 대군을 집결시켜 하후돈을 선봉장으로 삼아 한중으로 진격한다.
가는 길에 겸사겸사 동관 무렵에서 자신이 지난 날 좌현왕에게서 구해주고 남편까지 짝을 만들어준 채옹의 딸 채염을 만나 안부를 묻기도 한다. 이때 채옹이 기록한 비문에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 外孫題臼)라는 글이 있자 채염에게 그 뜻을 물었고, 채염은 한단순이 쓴 비문을 채옹이 읽고 그 뒤에 쓴 것(자세한 것은 채옹 문서 참고)이라고 답했지만 뜻은 모른다고 했다. 이에 조조는 자신도 뜻을 알 수 없어 모사들에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물어본다. 모두 대답하지 못하고 오직 양수만이 알겠다고 하자 오기가 생겨서인지 "내가 답을 알 때까지 대답하지 말라"고 이른다. 이후 돌아가던 도중 양수에게 "나도 그 뜻을 알았다. 자네가 먼저 얘기해 보라."고 하고 양수가 뜻풀이를 해준다.

"황견유부(노란 명주실과 어린 여자)는 절묘[15]

의 뜻이고, 외손제구는 호사[16]의 뜻이니, 이는 절묘호사(絶妙好辭, 굉장히 잘 쓴 글이라는 찬사)를 말합니다."

이에 조조는 내심 자기보다 유능한 양수의 재능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의 지식을 칭찬했고 좌중에서도 감탄했다.
조조가 도착할 무렵, 하후연을 공격할 장수에 대해 유비와 제갈량이 또 다시 "하후연 존X 짱이잖아. 막으려면 장비나 관우를 불러와야 하잖아. 근데 장비는 파서에 있고 관우는 형주에 있잖아. 그 사람들 안 불러오면 우린 안될거야 아마" 이러고 있자 한참 기세가 오른 황충은 또다시 자신이 나서겠다고 말한다. 제갈량이 말려보지만 노인네 옹고집이라 듣지를 않고 있으니 대신 법정을 부관으로 데려가라 하면서 꼭 법정의 의견을 들으라 명한다. 그러고도 불안해 조운, 유봉 등등에게 따로 군을 내주어 도와주게 한다.
황충은 도와주겠다는 젊은 사람들도 뒤로 하고 하후연과 일기토를 벌이는가 하면, 하후상을 사로잡기까지 하는 등 물 오른 활약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때 부장 진식이 하후연에게 사로잡히자, 하후연에게 인질 교환을 제시한다.
양군의 부대가 모두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진식과 하후상은 자군에게로 잽싸게 달려가나 하후상은 진지에 도착하려는 순간 황충의 활에 맞아 고꾸라지고 만다. 황충의 활에 눈 앞에서 조카가 크게 다치는 모습을 본 하후연은 대노하여 황충과 싸우나 황충은 하후연을 싸워 물리친다.
그리고 법정이 반객위주책[17]을 진언하여 하후연이 있는 진영보다 더 높은 곳에 진영을 설치해 완전히 내려다보게 한 후, 슬금슬금 진형을 전진시켜 나간다. 위험하다 느낀 하후연은 장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감행.
그러나 황충은 침착하게 대응해 하후연의 예봉을 피하자 하후연은 조바심을 내서 나와서 덤비라고 한다. 이에 높은 곳에 있던 법정이 하얀 기를 휘둘러서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님을 전했고, 이후 하후연의 군세가 지쳐서 쉬자 붉은 깃발을 휘둘러서 곧장 공격하라고 전했다. 이에 황충이 닥돌해 기습을 가하니 하후연은 힘 한번 못써보고 두 토막이 나고, 유봉 등은 그 사이에 정군산의 진영을 장악, 장합은 남은 군사들을 추스려서 간신히 도망을 친다.
그리고 연의 한정으로, 이는 관로가 이미 예언했었다. 관로 문서 참고.

3.6. 조조, 유비, 양웅 대결하다.


이때 하후연이 양평(陽平)에서 죽어 태조가 이를 우려했다. 정촉호군(征蜀護軍)으로 임명되어 서황 등을 지휘해 양평에서 유비의 별장인 고상(高詳)을 격파했다. - 조진전

조조가 한중에 도착하기전 조진과 서황이 고상을 격파한다.

'''(218년) 가을 7월, 군사를 조련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중략)

'''9월, 장안에 이르렀다.

(중략)

(219년) 3월, 왕이 장안으로부터 야곡(斜谷)을 나왔는데, 군(王)이 요지를 차단하며 한중에 임하여 마침내 양평에 도착했다. 유비는 험지에 의지해 거수(拒守 - 막아서 지킴)했다.

《정사 삼국지》 무제기

조공이 장안으로부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했다. 선주가 멀리서 이를 헤아려 말했다. “비록 조공이 온다해도 할 수 있는게 없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차지할 것이다.” 조공이 도착하자 선주는 군사들을 모아 험고한 곳을 지키고 끝내 교봉(交鋒 - 교전)하지 않자 (조공이)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점령하지 못하고 도망자가 날로 많아졌다.[18]

《정사 삼국지》 선주전

218년부터 군사를 일으켜 장안에 주둔하던 조조는 219년 하후연이 참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 군사를 일으킨다. 3월, 조조는 장안에서 드디어 야곡을 통해 나와, 군사로 요해(要害) 지역을 차단하고 한중으로 접근했다. 이는 은폐된 요충지를 말하는 것으로 호삼성은 야곡의 길은 험하여 조조는 유비가 길을 끊어버릴까 두려워하여 먼저 군대를 가지고 요해처를 차단하고서 한중으로 나가려는 것 이라고 했다.
이 소식은 유비에게도 알려졌으나 유비는 기세에 고무되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대단히 자신만만했다. 장안에 있던 조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유비는 조조가 오더라도 아무것도 못 할 것이며 자신이 한중을 차지할 호기라 봤다. 즉, 하후연이 죽고 한중의 요충지를 대부분 유비가 손에 넣었으니 이미 한중쟁탈전은 유비군의 승리로 끝난것이나 다름없고 요충지만 굳건히 지키면 교전을 할 필요도 없이 조조는 와 봤자 할 게 없어 철퇴한다는 것이었다.
조조의 친정은 '''"설령 조조가 직접 온다 하더라도 한천은 반드시 내가 차지하고야 말겠다"'''라며 유비의 자신감만 불타게 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이 한중공방전이야 말로 '''조조와 유비 이 두명의 영웅이 동등한 역량을 갖춘 상태에서 벌인 처음이자 마지막 대결'''이였고 그 옛날 낙양에서 우연히 만나 30여년에 걸친 세월을 건너 수많은 인연을 겪었던 두 사람의 '''마지막 싸움'''이었기도 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조는 그 동안 유비를 자신에 필적하는 영웅이라고 보면서도 그동안의 불안정한 유비의 기반과 군사력, 그가 유비를 패퇴시킨 전적을 돌이켜보고 무의식적으로 유비는 내가 격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면에 있었던 듯 싶다. 적벽부터 시작된 위의 허세 발언들도 그렇고. 반면 유비는 수차례의 패배로 인해 조조의 역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조조가 오더라도 아무것도 못할것이라는 발언은 그만큼 이제서야 동등한 위치에 선만큼 필승의 각오로 한중을 손에 넣겠다는 각오로 임하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선주(유비)가 조공(曹公)과 함께 다툴 때 형세가 불리했다. 의당 퇴각해야 했으나 선주가 크게 화를 내며 퇴각하려 하지 않으니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법정이 선주의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선주가 말했다,“효직은 화살을 피하시오.” 법정이 말했다, “명공께서 친히 시석(矢石- 화살과 돌)을 당해내시는데 하물며 소인이겠습니까?” 이에 선주가 말했다, “효직, 내가 그대와 함께 물러나겠소.” 그리고는 퇴각했다.

《정사 삼국지》 법정전 주석

야곡을 통해 한중에 당도한 조조는 곧이어 유비의 본대와 조우했다. 험준한 곳을 방어하며 지형의 우세함을 이용해 끝내 교전을 하지 않고 끈덕지게 버티는 유비와 어떻게든 교전을 통하여 유비를 몰아내려는 조조와의 대치국면이었다. 유비는 교전을 하지 않고 조조를 제풀에 물러가게 할 마음이었지만 조운이 벌인 전투 등 일단 한번 벌어진 교전들은 대단히 치열하였다. 법정전 주석에 따르면 실제로 바로 유비의 군영 근처에서 화살이 떨어지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후퇴하지 않고 지휘를 했었다고도 하니 그 치열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비군이라고 마냥 싸우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고 먼저 도발하거나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실제 위서 조창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유비는 산 위에 주둔하면서 유봉을 내려보내 싸움을 걸었다. 조조가 분노하여 욕하며 말하길

돗자리나 짜던 작자가 감히 가짜 아들(=유봉)을 보내 나에게 맞서는가. 내가 황수아(=조창)를 불러 너를 상대할 테니 기다리거라.

라고 했다. 유비군이 조조군에 맞서 먼저 공격하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록되진 않았지만 두 진영 사이에 여러 교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비군이 조조군을 공격한 또 하나의 일례로 조조의 보급을 노려 원정 온 조조군의 역량을 약화시키려고 조조 진영을 공격했던 것을 들 수 있는데 조운별전에서 그 숨막히는 상황의 일부를 볼 수 있다.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曹公- 조조)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圍- 군사시설의 일종)를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때마침 조공(曹公)이 양병(揚兵- 거병; 군세를 떨침)하여 대거 출전하니 조운이 조공의 전봉(前鋒)에 의해 공격받아 바야흐로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하여 형세가 핍박되자 적진에 전돌(前突-돌진)하고 한편으론 싸우며 한편으론 물러섰다.

조공의 군(조조군)이 패했다가 다시 합치니 조운이 적을 무너뜨리고는 위(圍)로 달려 되돌아왔다. 장수 장저(張著)가 상처를 입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적의) 영(營)으로 되돌아가 장저를 맞이했다. 조공의 군이 추격해 위(圍)에 이르렀다.

이때 면양장(沔陽長) 장익(張翼)이 조운의 위(圍) 안에 있었는데 장익이 문을 닫고 막아 지키려 하였으나 조운이 영(營)으로 들어와서 다시 문을 활짝 열고는 깃발을 내리고 북치는 것을 멈추었다. 조공의 군은 조운이 복병을 두었을까 의심하여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조운이 하늘을 뒤흔들 듯 북을 울리며 오로지 뒤에서 조공의 군에게 융노(戎弩)를 쏘아대니 조공의 군이 놀라고 어지러워져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았고 한수(漢水)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선주(先主)가 다음날 아침 조운의 영위(營圍)로 친히 와서 전날 싸운 곳을 둘러보고 말했다.

“자룡(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덩어리(膽)로다.” 음악과 술자리를 베풀어 저녁까지 이어졌고,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 범 같은 위용을 갖춘 장군)이라 했다.

《정사 삼국지》 조운별전

당시 조조는 북산인근을 목적으로 한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실행했다. 이에 유비는 황충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습격하게 하고 조운에게 보조를 맡겼는데 마침 기한을 넘겨도 황충이 돌아오지 않자 뭔가 문제가 생겼으리라고 보고 북산으로 황충을 전송하다가 조조군의 대군과 조우했다, 불과 수십기의 기병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조운은 능수능란하게 기병을 가지고 조조군에 돌격하여 대형을 흐트리고 정신차릴만하면 다시 공격하면서 여기저기서 기동전을 펼쳐 조조군을 당황하게 하고 뜻밖에 돌진에 당황한 조조군을 상대로 아군까지 구출하면서 진영으로 돌아가기까지 했다.[19] 이에 조조군이 다시 추격했는데 조운은 오히려 공성계를 펼쳐 후퇴하려는 조조군을 상대로 화살비를 쏟아부어 조조군을 대파한다.
이후 기록을 보면 유비와 조조는 서로 진영을 지켰고 조조는 유비진영을 함락시키지 못하니 산발적 교전외엔 대치국면만이 한달 가량 지속되는 상황에서 조조군은 도망자가 날로 늘어났다. 대치로 인해 조조의 군대 장악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조조는 회군하고자 생각하며 '''계륵(雞肋- 닭갈비)'''이라 영을 내렸다. 이에 다들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양수가 군장을 꾸리자 어찌 회군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았냐며 사람들이 놀라 묻자 양수는 대답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먹기에는 얻을 것이 없는것, 그것이 계륵입니다. 그것이 한중이니, 왕께서는 회군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정사 삼국지》 구주춘추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유봉(劉封), 맹달(孟達), 이평(李平)[20]

등을 보내 상용(上庸)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정사 삼국지》 선주전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유비는 계속 그곳을 지키면서 수뇌부까지 위험에 빠질 때까지 싸움을 하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미 하후연을 격파하고 얻은 지형의 우위를 통해 버티니 조조군의 도망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야말로 수년전 한중을 정벌할 때 양평관에 있던 장위군과 맞싸우던 상황과 유사했으나 장위의 지휘와 달리 강성한 유비군을 상대로는 이를 패퇴시키기가 어려웠다. 이에 조조는 아직 자신이 관할하고 있던 한중 부분의 민호 5만을 이주시켰으나 그렇다고 전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사실 정사 삼국지에서는 유비가 교전을 응하지 않았다 나오긴 하는데 그것도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가 조조를 위해 좋게 써준 말에 불과하고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다른 사서들에는 멀쩡히 격렬한 교전이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오는데다가 심지어 유비가 양자 유봉을 시켜 조조에게 먼저 싸움을 걸며 도발하자 조조가 격노하면서 '유비 이 돗자리 장수놈이 가짜 아들로 감히 나한테 시비를 걸어? 내 아들 조창이 오기만 하면, 유비 너 가만 안 놔둔다'라며 당장은 못 싸우고 부들부들거리기만 하는 상황도 나온다. 이게 얼마나 조조가 수세에 몰린 상황이냐면 이후 조조가 진짜로 북쪽에 있던 조창을 불러서 지원하게 하려 했는데 조창이 밤낮으로 달려가 한중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조는 더 견디지 못하고 철수해버린다. 즉, 저 발언은 유비의 도발에도 싸울 생각은 못하고 열받으니까 빡쳐서 내뱉은 말이라는 것. 애초에 싸움이 아예 없었다면 조조가 회군을 결심할 정도로 그토록 많은 병사들이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5월(자치통감), 조조는 계륵이라는 말만 내뱉고 매우 많은, 대부분의 병사들이 도망가 버린 피해를 입은 채 제군을 이끌고 한중에서 철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변을 지키던 조홍과 조진에게는 진창 방면으로 물러나라고 했으며 혹시나 모를 유비의 한중 북쪽 진격을 막기 위해 장합, 곽회, 두습을 배치하여 대비하게 했다, 그동안 조조가 직접 지휘한 전쟁에서 무슨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 정면전에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상장과 정벌했던 땅까지 잃으면서 물러나야 했던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유비는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고 내친김에 양자 유봉에게 한중군에서 출발해 면수를 타고 내려가게 하고 형주 의도태수 맹달에게는 북진을 명하여 방릉, 상용, 서성까지 격파. 그곳을 차지하고 신탐에게는 영상용태수, 신의에게는 영서성태수 직을 내림으로서 추가적으로 전리품을 더 획득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종종 극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해 이 싸움에서 조조가 화살을 맞았다거나 혹은 낙마해서 이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삽입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허구다.

4. 결과


결국 조조가 후퇴를 결정함으로서 한중은 유비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이로서 한중공방전은 유비의 대승으로 끝맺어졌다.
이 승리는 단지 유비의 촉이 한중 지역을 먹었다는 것 외에도 유비에게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첫째로는 '''진영대 진영'''으로 유비가 조조를 압승한 것. 이는 여러 제후의 휘하나 떠돌아다니던 유비가 촉이라는 기반을 통해 성장해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후가 되는데 성공했고, 그 천하의 조조를 상대로 한중공방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며 신생 유비군의 저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세상에 드러낸 것이다. 이런 촉의 기세는 이후 형주 공방전때까지도 하늘을 찌르고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엄청났다.
거기에 한중공방전을 통해 유비는 제후로서 세력의 안정화에도 성공했다. 이전까진 유비나 제갈량을 포함해 극히 일부가 핵심적인 업무를 다 떠맡아야 하는 방식으로 떠돌이 생활을 할 때면 상관없었으나 한 지역의 제후로 자리 잡으면서 처리해야 할 일의 양이 폭증하자 한계가 찾아왔었으나 한중전에서 후술하는대로 역할을 상세하게 나누고 일부 실패가 있었다지만 대부분 이 역할 수행을 제대로 해내면서 역할분담이 깔끔히 처리되었다.
거기에 승전 이후 유비는 219년 7월에 한중왕을 자칭하는 사건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위'''황제'''를 자칭한 것에 비해서 격이 낮아 보일 수 있지만 유비가 계한을 목표로 한다는 것과 '''그 유방과 같이''' 한중에서 왕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유비는 자신이 추구하는 명분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심지어 이는 위가 한나라를 무시하고 짓밟으려는 것과 대비돼서 더욱 더 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유씨도 아닌 조조가 왕위에 오른지 고작 2년, 위 왕실이 살얼음판 위에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바로 이 때, 조조가 자신의 영토였던 한중에서 유비와 싸워 최측근인 하후연을 잃고 땅을 무력하게 빼앗겨 유비가 보란듯이 '위왕'으로 부터 빼앗은 그 땅의 왕에 오른다는 이런 일련의 흐름이, 당시 여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거기에 한중은 한고제 유방이 한왕으로 등극한 지역이며 한제국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유비는 '한 황실의 종친으로서 유방처럼 항우와 같은 역적 조조를 토벌하고 한중에서 다시 한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천하에 선포한 것이다. 한 황실을 사실상 손에 넣은 조조가 위왕에 오를 때도 사방에서 반대와 반란이 일어나 속을 썩였는데, 유비는 한 황실 부흥이란 명분을 들이밀며 한중왕을 칭하고도 별 탈이 없었으니 조조가 느꼈을 씁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였을 것이다.
다만 반년도 되지 않아 벌어진 형주 공방전에서 관우가 오나라측의 기습에 패사하고 이에 유비가 복수란 명목으로 무리하게 이릉대전을 일으키며 대패하는 바람에 1년도 못 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는 그대로 땅에 쳐박히게 된다.

5. 참전 무장과 모사



5.1.


  • 좌장군(左將軍)·익주목(益州牧) 유비(劉備) 字 현덕(玄德)
탕거 전투 이후 법정이 친정을 권하자 218년 법정, 황권 등을 대동하고 북진하였다. 양평관에 자리를 잡고 기회를 엿보다가 219년 일시에 기습을 하여 하후연군을 패퇴시키고 이후 조조의 대군이 오자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끈질기게 버티다가 219년 여름 경 기어코 패퇴시키고 승리를 거둔다.
  • 의도태수(宜都太守)·정로장군(征虜將軍)·신정후(新亭侯)·조아(爪牙)[21] 장비 字 익덕(益德)
탕거 전투에서 1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가 별동대 작전으로 장합 군을 궤멸시키는 공을 세운다. 이후 마초, 오란, 뇌동과 무도, 하변으로 가 자리를 잡으나 조홍과 조휴에게 패퇴당한다.
  • 촉군태수(蜀郡太守)·양무장군(楊武將軍)·모주(謀主)[22] 법정 字 효직(孝直)
218년 유비에게 말해 친정을 권유했고 자신도 직접 나아가 모사로 활약했다. 정군산에서 하후연을 패퇴시킨 기습 공격은 법정의 계책이었다.
  • 편장군(偏將軍) 황권 字 공형(公衡)
법정과 함께 한중 공방전 내내 참모로 활약했다. 황권전에 의하면 두호, 박호를 격파하고 하후연을 살해하고 한중을 점령한 것이 모두 황권의 공이라고 할만큼 대단한 활약을 하였다.
  • 평서장군(平西將軍)·독임저(督臨沮)·도정후(都亭侯)·조아(爪牙) 마초 字 맹기(孟起)
장비, 오란, 뇌동 등과 함께 무위, 하변에 자리를 잡았지만 패퇴당하고 한중으로 물러났다.
  • 토로장군(討虜將軍) 황충 字 한승(漢升)
한중전 내내 선봉장의 역할을 맡아 돌격을 하여 맹활약을 하였다. 급기야 정군산에선 위의 정서 장군 하후연을 참살하는 대공을 세워 전투의 양상을 급격하게 바꾸어 놓았다.
  • 익군장군(翊軍將軍) 조운 字 자룡(子龍)
황충이 군량을 탈취하려할때 수행하였다.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수십 기만을 거느리고 나가 맞서 싸우며 상황을 살폈다.
  • 아문장군(牙門將軍) 위연 字 문장(文長)
한중 공방전이 끝난 후 한중 태수로 임명된다.
  • 면양장(沔陽長)·서좌(書佐) 장익 字 백공(伯恭)
특별히 두드러지는 활약은 없으며 진영을 굳게 지켰다.
  • 부군중랑장(副軍中郞張) 유봉
특별히 두드러지는 활약은 없으며 자잘한 공훈을 세운다.
  • 의성태수(宜城太守) 맹달 字 자경(子敬)
한중전 내내 두드러지진 않으나 자잘한 공훈을 세운다.
마초, 장비, 뇌동 등과 함께 무도, 하변에 주둔하나 조홍과 조휴에게 패퇴당하고, 강단에게 목이 잘리어 조조에게 보내진다. 연의에서는 조창에게 참살된다.
마초, 장비, 오란 등과 함께 무도, 하변에 주둔하나 조홍에게 패퇴당하고 전사한다. 연의에서는 장합에게 참살된다.
삼국지연의 한정. 가맹관의 수비를 굳건히 하고 지켰다. 정사에서는 한중 공방전 이전에 사망.

5.2. ''''''


  • 위왕(魏王) 조조 字 맹덕(孟德)
218년부터 군사를 일으켜 장안에 주둔하다가, 하후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유비에게 대적한다. 그러나 굳건한 수비를 뚫을 수 없어 계륵이라 되뇌이며 전황의 불리함과 한중의 중요성(유비와 촉 정벌의 좌절) 및 성과를 얻지 못한 철군 사이에서 고뇌하다 결국 군을 물린다.
  • 편장군(偏將軍)·도정후(都亭侯) 장합 字 준예(儁乂)
파서의 백성들을 한중으로 옮기다가 장비와 전투를 벌이나 대패하여 수십기만 이끌고 간신히 달아난다. 이후 하후연이 전사하자 곽회의 추대로 하후연을 대신하는 임시 사령관이 되어 혼란을 수습하고 조조를 맞았다.
  •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연 字 묘재(妙才)
장합이 패퇴하고 유비가 북진하여 양평관에 머물자 그 주변에 진을 치고 오랫동안 대치한다. 허나 갑작스러운 기습에 부대가 괴멸당하고 그 역시 황충군과의 난전 중에 전사하였으며 연의에서는 황충에게 직접 베였다.
  • 도호장군(都護將軍)·국명정후(國明亭侯) 조홍 字 자렴(子廉)
조휴와 함께 무도 하변으로 들어온 적군을 패퇴시키고 뇌동을 참살한다.
  • 중령군(中領軍) 조휴 字 문열(文烈)
참군(참모)의 신분으로 참가하였지만 조홍으로부터 장수와 같은 대우를 받았기에 직접 일군을 이끌었다. 유비가 장비등을 이용해 배후를 끊으려는 의도를 깨닫고 조언하여 오란을 공격, 대파시킨다.
  • 승상병조의령사·사마(司馬) 곽회 字 백제(伯濟)
하후연이 유비에게 참살당할 때는 병이 있어 참전하지 못했다. 하후연이 죽어 군대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장합을 후임으로 추천하여 군기를 잡고 한수를 건너 공격하려는 유비군을 유인하여 패퇴시키려는 책략을 내놓아, 이를 의심스럽게 여긴 유비는 한수를 건너지 않는다.
  • 오관장(五官將)·문학(文学) 하후상 字 백인(伯仁)
크게 두드러지는 않으나 자잘한 공훈등을 세운다.
  • 중견장군(中堅将軍) 허저 字 중강(仲康)
연의에서는 술을 먹고 강짜를 부리다가 장비에게 패퇴당하는 야라레스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 주부(主簿) 양수 字 덕조(德祖)
한중전이 어렵게 전개되어 조조가 "계륵"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홀로 속뜻을 깨닫고 철군 준비를 서두르라는 월권 행위를 저지르고 미움을 사 훗날 숙청되었으며 연의에서는 곧바로 참수되었다.
연의에서 한현의 동생으로 나와 형의 복수를 위해 황충에게 덤비다 그대로 참살당한다. 정사에서는 한호를 한중에 남기자는 말에 조조가 한호가 없으면 승상부의 정무가 막막해진다며 허도로 함께 귀환했다.
  • 상서(尙書)·옹주자사(雍州刺史) 장기 字 덕용(德容)
한중전이 벌어지기전 조조에게 명해 한중의 백성 대다수를 장안으로 옮겼다. 이후 조홍과 무도 하변에서 오란을 격파하였다.
  • 시중(侍中) 승상장사(丞相長史) 두습 字 자사(子緖)
장로를 상대로 승리하고 한중을 맡아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설득하여 8만명의 낙양과 업으로의 자원 이주를 이뤄낸다. 그리고 하후연이 죽은 이후 혼란한 군사의 수습을 훌륭하게 해낸다.
  • 아문장(牙門將)·비장군(裨將軍) 왕평 字 자균(子均)
위나라 군속으로 조조를 따라 한중 정벌에 참여하다가 유비에게 귀순한다.

5.3. '''기타'''


저족의 수령. 촉군의 오란이 위군의 조홍에게 대패하고 도망가자, 오란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쳤다.

6. 기타 창작물에서



6.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image]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이 때쯤이 삼국지 시나리오 중에 인기가 많은 시점 중에 하나다. 삼국지11에선 결전제패중에 정군산 전투가 있고 오리지날 시나리오 중에 유비 입촉이 있다. 이 경우엔 형주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서천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시작이다. 그리고 PK에서 한중공방전 시나리오가 추가. 맨 위의 그림이 이 시나리오 시작시 나오는 데모의 일부이다. 유비 휘하에 오호대장군이 모두 집결한 유일한 시나리오다.[23] 삼국지 10 영웅대결 시나리오 같은 경우엔 서천과 형주를 다 먹고 있는 유비의 최전성기 시점에서 진행[24]되는데, 가만히 냅두면 게임에서도 관우 장비가 우수수 죽고 형주는 오나라 땅이 되어버린다.

6.2. 창천항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조가 죽을뻔해서 공포에 질리는 모습이 나온 부분. 특히나 다른 패배와 달리 이번의 조조는 정말 분해서 "이렇게 분통넘치는 철퇴는 처음이구나!"하고 외치기도 한다. 짤방의 조조의 말도 그렇고 하후연도 "전쟁으로 풍요로움을 더럽힐 셈이냐!"하고 유비에게 일갈하는데… 탕거 전투에 보듯이 먼저 공격한 전쟁에서 저런 말을 하니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장비가 장합을 바르는 부분은 장합이 "제가 전에 졌던 이유는…"식으로 한줄로 처리되며 조홍이 오란과 뇌동을 쳐죽이는 장면은 묘사돼있다. 간지 폭풍을 내뿜는 하후연은 다굴빵에 황충의 뒤통수 치기에 장렬하게 전사한다.
그리고 조조가 도착하고 난 뒤에는 제대로 된 전투도 안나오고 끝나버린다. 조조가 언제나처럼 유비를 끌어내서 싸우려고 하지만 유비는 응답하지 않고, 애꿎은 제갈량이 열폭하며 조조를 사로잡아라, 라는 자못 야라레스런 모습을 보이다가 기절하고 분노해서 돌아가는 조조를 보고 유비는 "네 놈 뜻대로 되게 하진 않는다"며 노려본다. 창천항로의 대부분의 싸움은 승리도 패배도 항상 조조 뜻대로 된 데 비하면 한중에선 조조가 물먹은 셈.
유비가 유장의 항복을 받아낼 때 바로 촉을 공격하자는 진언을 거절당했던 사마의는 한중에서의 철수 후 유비의 한중왕 즉위, 관우의 공격으로 번성이 고립 그리고 그에 호응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 모든 것은 적시에 촉을 공략하지 않은 결과!"라며 분통해한다.

6.3. 삼국


[image]

[image]

'''조조''': 그대는 누군가?

'''유비''': "한황실의 후예인 유비, 자는 현덕이라 하오. 건망증이 더 심해진 모양이로군."

'''조조''': "아, 이제보니 현덕이었군. 세상에 자네보다 더 건망증 심한 사람이 또 있던가? 동탁을 토벌할 때 누가 자네를 18로 제후에 넣어줬던가? 여포에게 쫓겨나 갈 곳도 없을 때 누가 자네를 거둬줬던가? 사람이 은혜를 받았으면 마땅히 갚아야 하는 법인데, 자네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 분란을 일으키고 천하를 혼란하게 만드는군."

'''유비''': "조조. 네놈은 멋대로 왕을 참칭하고, 한나라를 찬탈하며 황제를 가두고 황후를 시해하여 충신들을 도륙했다. 한나라의 백성들이라면 네놈을 씹어먹어도 한이 풀리질 않는다. 나는 오늘 천자의 혈서를 받들어 네놈을 죽여 은혜를 갚으려고 한다."

'''조조''': "하, 또 날 씹어먹겠다고? 좀 더 신선한 표현은 없나? 현덕, 내 뒤엔 40만 대군이 버티고 있다.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될 줄 알아라."

'''유비''': "조맹덕. 오늘의 이 싸움을 오랫 동안 기다려왔다. 내년 이 날에 네 무덤 앞에서 성묘를 해주마."

'''조조''': "정말 감히 나에게 맞서 싸울 셈인가?"

'''유비''': "내가 지금 허세부리는 거로 보이나?"


유비의 팬들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순간으로, 근 20년 이상 근거지 없이 적은 병력으로 이리저리 떠돌면서, 조조가 너무 유능해 분통터진다든지, 자신은 무능하다며 자결할 뻔한 장면까지 나온 유비가 마침내 수십만의 대군을 갖추고 중요한 거점을 두고서 조조가 끌고온 수십만의 대군과 전면전을 펼치는 순간이 왔기 때문. 슬슬 제작비를 아껴야 했던 시점이었는지 전투 자체는 별로 인상적이진 않는다. 그보다 조조와 유비, 진건빈과 위허웨이 두 배우가 뿜어내는 무지막지한 연기력과 포스가 엄청나다. 위의 대사만 봐도 둘사이의 말빨이 꽤 대단하다. 본래 이 드라마에서 유비가 강인한 이미지긴 하지만 입촉 후 이때쯤부터 해서 눈빛과 표정 자체가 변한다. 허세부리는 것 같냐는 유비의 말에 어이를 상실하는 조조의 표정 또한 백미.

6.4. 삼국지 영걸전


와구관, 가맹관, 천탕산, 정군산, 한수, 양평관. 총 여섯 개의 전투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와구관의 전투 1, 2(vs 장합)가 있고 가맹관으로 가는 루트와 정군산으로 가는 루트가 나뉜다. 정군산을 정벌하면 다시 천탕산과 한수 직행으로 루트가 나뉘고, 가맹관은 천탕산과 정군산으로 루트가 나뉘므로 (이후 모두 한수에서 만난다) 다섯~여섯 전투를 치러야하는 것이다.
가맹관을 갈 경우 하후덕을 엄안이 박살내고, 이후 정군산(하후연) 선택시 서황이, 천탕산(서황) 루트를 탈 경우 하후연이 원군으로 간다. 즉 어떻게 되든 하후연은 '''죽는다.''' 만약 가맹관으로 가지 않고 정군산으로 가서 바로 하후연을 박살내면 하후덕은 선택지에 따라[25] 천탕산에서 죽거나 증발한다. 서황의 레벨이 보정격으로 하후연보다 높지만 난이도는 비슷.
다른건 다 할만하지만 그냥 되는대로 키웠다면 정군산이나 천탕산 전투에서 GG치고 쓴 맛을 보게 될 확를이 크다. 정군산 전투와 천탕산 전투는 원군이 등장하게 되면 적군 전군이 튀어나와서 돌격하고, 이 때 방어진영을 제대로 짜지 않으면 웬만큼 레벨업을 해 두지 않은 경우 양쪽에서 협공을 당해 큰 피해를 입기 쉽다.
대신 양평관 전투는 적군들의 레벨도 높고 조조, 하후돈, 장합, 방덕, 허저, 사마의 등이 총출동하지만 장판파처럼 대군이 답이 없이 진군해오는게 아니고 공격범위가 되는 적과 그 주변의 적들만 진군해오기때문에 적절한 속도로 진군하면서 각개격파한다면 크게 어렵지 않게 클리어 가능하다.

6.5. 삼국지 공명전


한수전투만 등장. 유비를 다리 끝까지 이동시켰다가 다시 올려주면 조조가 혼란에 빠지며 왕평에게 아군을 인접시키면 아군으로 투항한다(왕평을 그냥 퇴각시켜도 전투후에 합류하긴 한다). 시간을 끌면 조창의 원군이 오지만 얘네도 약하다. 공명전이야 어차피 난이도가 낮으니 키우고 싶은 장수들끼리 적당히 경험치를 나눠먹자. 뭐 어차피 이 시점까지 키울수 있는 장수라곤 그렇게 많은편이 아니긴 하지만.
장비, 황충 등이 나오는 마지막 전투고 멋모르고 키우다보면 장비가 중기병까지 진급할 수도 있지만 손대지말고 조운과 제갈량, 덤이라면 왕평, 맹호대 정도만 레벨을 올려두자. 한중왕 즉위 후 역시 맥성 전투가 나오게 된다.

6.6. 삼국지 조조전


정군산, 한수, 사곡[26]. 총 세 개의 전투로 구성되어 있다. 박망파 전투도 그렇고, 장판파 전투도 그랬지만, '''조조군보다 유비군이 더 많다.'''
사실모드에서는 정군산에서 적을 전멸시키거나 조조의 본대가 오는 20턴 동안 버텨서 승리하면 모든 공격이 치명타가 터지는 옥새를 얻으며 후속 전투를 거치지 않는다. 정군산 진지나 한중성, 둘 중 한 곳이 점령되면 선택지가 나오는데 여기서 후퇴를 선택하면 한수 전투로 간다. 하후연이 황충과 접촉하여 죽으면 조황비전을 얻는다. 한수에서는 연의에서 묘사된 제갈량의 징소리 기만작전으로 홀수 턴마다 아군 전원 방어력이 하락하는데 북쪽 산 속에 숨은 조운을 발견하면 더 이상 걸리지 않는다. 12턴이 지나거나 적을 전멸시키면 사곡이 기습당했다는 소식이 날아오고 조조군은 후퇴, 사곡 전투로 넘어간다. 적을 전멸시켜 전투를 끝냈을 때만 제갈건을 얻게 된다. 조창이 우군으로 참전하는 사곡 전투는 어찌어찌 적을 헤치고 진내에 돌입하자마자 유비와 장비 등이 이끄는 대규모 부대가 후방에서 기습하는 힘든 구성이지만, 퇴각하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그대로 싸워나가면서 유비와 장비를 퇴각시키면 자웅일대검과 사모를 손에 얻고, 전멸 승리 시 적로도 얻을 수 있다. 옥새가 물론 굉장히 좋긴 하지만 한수와 야곡을 거치면서 얻는 세 개의 보물도 상당한 효용을 지녔으므로 취향에 따라 분기를 잘 골라야 한다.
가상모드의 경우 정군산 전투에서 옥새를 얻으려면 아군 10턴 내로 적을 전멸시켜 끝내야 한다. 적군 10턴이 되면 마왕에게 홀린 제갈량이 병력을 모두 퇴각시키며 전투 종료. 사실모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찍 치르게 되는(사실모드 35번, 가상모드 32번) 전투다. 그래서 버티기만 하면 매우 쉽지만, 제한시간 때문에 옥새를 얻는 난이도는 상당히 높다. 사마의의 모래폭풍 난사가 중요 요소. 둔갑천서까지 있으면 회귀 2번 합쳐서 한턴에 4회 공격 가능하다.
그리고 이 전투가 '''사실모드에서 유비, 장비를 마주하는 마지막 전투'''다. 한중전 이후 번성 구원전을 거치면서 유비군은 맥성에서 관우를 잃고 연이어 장비가 암살당한 뒤 이릉전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진 유비가 죽는 것으로 나라 자체가 흔들리게 되고 곧이어 조조가 양평관, 검각, 성도를 거쳐 촉을 정벌하게 되는 마지막 종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6.7.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조조전에서 조조군의 시점으로만 나온 것에서 유비군의 시점으로 나온 것도 추가되며, 황충전에서 가맹관 전투, 천탕산 전투, 정군산 전투, 북산 전투, 미창산 전투, 장비전에서 탕거 전투, 와구관 전투, 하변 전투, 양평관 기습, 자오곡 약탈, 제갈량전(상)에서는 한중공방전 상, 한중공방전 하로 나뉘어서 나온다. 사마의전에서도 상, 하로 나뉘며 상은 한중 인근에서 전투를 벌이고, 하는 결국 양평관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내용이다.
특히 유비전에서는 이제서야 힘을 갖추고 기량을 내보인 유비를 비롯한 유비군의 기세가 막강했던지라 조조는 그런 유비를 보며 '''저 정도의 기량이 있는데도 지금까지 숨기느라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라고 평한다.
사마의전에서는 퇴각하는 조조를 이끌어서 물러나야 하는데 조조를 죽이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와 온갖 버프를 두르고 달려드는 마초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경우가 더러 있다.

6.8.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2에서는 세로로 길게 만들어져 있으며, 길은 두 갈래로 정면 중앙로와 좌측 측면로다. 위는 북쪽, 촉은 남쪽에 배치되어 있으며, 적의 공세를 뚫고 나가는 것이 주된 전투다. 중앙로에 경우 말을 타고 이동하기 어렵게 녹각이 배치된데다가 달리면 가속이 붙어 매끄러운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상가상으로 2편 맹장전 최강의 적인 궁수들이 배치된 망루가 길목마다 놓여서 짜증을 솟구치게 만든다. 게다가 가장 고난도인 최강 난이도라면 측면로의 아군이 뚫리며 총대장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진삼국무쌍 3에서는 하후상과 진식의 포로교환 이벤트와 함께 전투 개시. 촉군과 위군 양쪽 모두, 자기네 본진으로 귀환하는 하후상 또는 진식을 때려잡을 수 있지만 이 때 너무 깊이 들어가면 적군 본진의 문이 닫히면서 복병이 출현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반대로 잘 키운 무장이고 각오만 되어있으면 스테이지 클리어 단축의 기회다.
촉군 시점의 진행은, 하후덕을 격파하여 천탕산을 제압하고 나면 황충이 하후연에게 돌격하지만 곧 고립된다.[27] 황충을 도와서 하후연과 장합을 격파하고 이어 나타나는 조조를 격파하면 승리.
위군 시점에서는 시작하자마자 사기 최대인 황충 부대가 천탕산의 하후덕을 압박해 온다. 하후덕 패주로 천탕산을 빼앗기면 아군 전부대의 사기가 떨어지므로 구해 주러 나가는 편이 좋다. 플레이어와 황충이 조우하면 황충 도발 이벤트가 발생. 이후 황충을 격파하면 적 총대장 유비가 이미 정군산 쪽으로 오고 있으므로 반갑게 맞아 주자. 후방에서 조운의 원군이 나타나서 유비와 합류하므로, 가능한 한 빨리 격파해서 승리를 달성.
진삼국무쌍 3 맹장전에서는 열전 모드 하후연 시나리오에서 정군산 방위전을 플레이 할 수 있는데, 하후연 혼자서 본진 입구를 막아내는 내용이다. 호위병 편성이 불가능하며, 일부의 적군은 목숨걸고 진입을 시도하기에 진입하는 병사들을 최소화하여 때려잡는 것이 핵심. 상등이 있다면 코끼리로 입구를 최대한 막아놓는 꼼수도 있다. 열심히 버티다보면 하후돈이 원군으로 온다.
진삼국무쌍 4에서는 양군의 시작 시점이 다르다. 촉군은 중앙의 보급거점을 떨어뜨려 천탕산을 공략하는 것을 1차 목표로 한다. 이때 천탕산을 수비하던 하후덕이 갑자기 사기를 끌어올리고 나서 아군 본진으로 돌격해 온다. 이를 그냥 두면 아군 장수들이 줄줄이 깨지고 총대장 유비마저 위험해지므로 하후덕을 빠르게 처리하자. 이후 하후연을 공략하고 조조를 격퇴하면 승리.
위군은 천탕산을 빼앗긴 상황에서 전투를 개시한다. 시작하자마자 본진 앞까지 쇄도해 있는 적군들을 잡아내다 보면 클론무장이 하나씩 오다가(이때 여유가 있다면 북서쪽의 위연을 격파해 두는 것이 좋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황충 부대가 본격적으로 진군해 온다. 플레이어가 하후연이 아닐 경우, 황충이 하후연에게 근접하면 하후연 전사 이벤트가 발생하고 아군이 대폭 불리해진다. 이를 막으려면 길목에서 황충을 요격하거나 미리 황충에게 가서 제압해야 하는데, 강화 상태의 황충과 그를 지원하는 엄안 관평 이엄 등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므로 꽤나 까다롭다. 일단 황충을 잡고 나면 그 뒤는 수월하다.
진삼국무쌍 5에서는 촉군과 위군이 서로 황충과 하후연을 격파하고, 3개의 산 중 상대의 산 2개를 모두 차지하며, 아군 장수가 패주하지 않아야 한다는 전공목표가 있다. 둘 다 초반이 중요한 전투이다. 위군 시나리오의 난이도는 3, 촉군 시나리오의 난이도는 4로 느낌상으로도 촉군 시나리오가 더 어렵다. 맵은 삽기산과 정군산이 소용돌이 모양이라 올라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특징이다.
촉군은 삽기산으로 공격을 가고 천탕산 남경계소 근처에서 방어를 하는데 너무 한 곳만 집중해서 싸우면 공격하는 쪽에선 제갈량이나 법정이, 방어하는 쪽에선 이엄이 쉽게 패주하여 전공목표3을 실패하게 된다. 수라모드에서는 천탕산 남경계소 근처에서 등장하는 조운을 빼고는 목표3을 달성하기 쉽지 않다. 그냥 운에 맡기도록 하자.
목표를 신경쓰지 않는다면 삽기산으로 공격을 가 아군 전체의 사기를 올리는 것이 낫다. 삽기산을 제압했다면 하후연이 정군산에서 내려오는데 강화가 되어 있으므로 주의해야 싸워야 한다. 삽기산을 제압하고 하후연을 죽였다면 그 후는 쉽게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위군은 촉군보다는 좀 더 쉽다. 왜냐하면 천탕산이 그냥 평지마냥 되어 있어 정군산처럼 빙글빙글 올라갈 필요가 없는데다 황충이 초반에 내려와 황충을 격파하여 아군 사기를 빨리 올려 클리어를 수월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아군이 삽기산으로 공격을 가는데, 먼저 삽기산 동진지를 제압하여 아군의 사기를 올리고 있으면 황충과 클론무장들이 삽기산에서 뛰어내려 하후연과 클론무장들을 공격한다. 그냥 놔두면 하후연이 패주하여 목표1을 실패하므로 신속히 황충을 격파한다.[28] 그 후 삽기산을 제압한다면 촉군 시나리오보다 훨씬 쉽게 클리어를 할 수 있다. 원군으로 조운이 오지만 그때쯤이면 이미 아군은 삽기산을 제압할 시점이므로 왕평이 쉽게 패주하지 않고 잘 버틸 것이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진삼국무쌍 6에서는 위나라 시나리오에서는 전반부를 하후연으로 플레이한다. 황충을 격파하면 포박하지만, 클리어 직후 포박을 풀어낸 황충이 활을 쏘자 거기에 맞서려던 하후연의 활이 갑자기 부서지면서[29] 하후연은 그대로 사망. 죽기 전 허탈해하는 하후연의 독백이 서글프다.
후반부에서는 장합으로 플레이하여 무사히 퇴각하는 시나리오. 후반부를 클리어하면 조조가 정군산과 하후연을 내준 건 형주에 있는 관우를 격파하기 위한 계책이었다는 식으로 비정할 정도로 냉철하게 알려주자 하후돈을 비롯한 위나라 장수 대부분이 반발.
촉나라 시나리오는 황충으로 플레이. 하후연을 잡고, 총대장 조조까지 잡아 사살 직전까지 가지만 조조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걸려들었군'''이라며 도망. 그리고 다음 시나리오는 번성 전투.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작진의 조느님 만세가 이어진다.
진삼국무쌍 7에서 위나라 시나리오는 사실모드 전투로 등장.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30] 하후연이 역사대로 전사하지만, 조건을 만족시키면 생존한다.
촉나라 시나리오에서도 IF 조건을 만족시키면, 놀랍게도 하후연이 죽지 않고 조조가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번 뒤 자신도 같이 퇴각한다. 그리고 방통과 서서가 합류한 IF 조건과 조휴 격파에 성공하면 이 전투 직후 달아나는 조조와 하후연을 황충, 마초, 마대가 추격하려고 하지만 제갈량과 방통이 도망가게 두라고 말린다.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 명에게 '''쫓아가면 조조의 의도대로 된다.'''고 이유를 설명. 6편 정군산 전투를 해본 사람이라면 묘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서서가 먼저 관우를 도우러 번성에 가고, 그 다음으로 방통이 마초와 마대를 데리고 곧장 한중에서 번성으로 지원을 간다.
진삼국무쌍 7 맹장전에서는 위나라의 경우 곽가와 전위가 한중 공방전까지 살아있다는 가정에 그들이 하후연을 돕는 시나리오고, 촉은 무쌍 캐릭터로 추가된 법정의 데뷔전으로 법정이 직접 계책을 짜고 실행에 옮겨 위군과 하후연을 박살낸다.
진삼국무쌍 8은 다시금 6편과 비슷한 전개로 가며, 여기서도 관우를 꾀어내려고 일부러 한중을 내어줬다는 병맛넘치는 무리수가 더 강해졌다.

6.9. 삼국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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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관우, 장비, 제갈양이 주로 활약하던 이전에 비해 유비 측의 여러 장수들이 골고루 활약하는 파트이자, 이전까지 계속 여기저기서 치이고 채이던 유비군이 드디어 제대로 된 군세를 이끌고 조조군과 맞대결을 벌이는 중요한 시점이다. 최전성기에 다다르기까지의 웹툰 초반부터 헛짓거리만 하고 얼빠진 유비를 봐 왔던 독자들에게 있어서 하후연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표정이 한번에 뒤바뀌면서''' 진정한 군주의 모습과 결의를 보이는 이 때의 유비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
위나라군은 법정이 짠 계략대로 움직이고[32] 황충하후연을 죽이는 것을 기점으로 여러 장수들의 활약에 조조군의 사기가 하나둘 꺾이기 시작하며 마침내 조조 또한 더 이상 한중에서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퇴각하고 만다. 또한 이 전투에서 문빙의 매복에 의해 위기에 처한 황충을 구하기 위해 조운이 활약한 장면은 합비2 전투에서 나타난 장료의 무지막지한 작화력과 비교될 정도로 잘 나타나 있다.

6.10. 진 연희무쌍


위나라 루트에서 나온다. 정군산에 하후연이 출병한 이후 카즈토가 정군산이란 말에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하다가 알아채고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구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한번 기절.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위 루트 새드엔딩의 플래그를 꽂기 시작한다. 그래도 하후연이 위기에 처한 순간 구원군이 도착해서 위기를 모면하고, 이후 조조가 스스로를 미끼로 적군을 꾀어내려 하다가 위기에 처한걸 카즈토가 구해준다. 이 한중 공방전에서 손실을 최소화 하고선, 이후 적벽대전을 기점으로 위나라가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서는 계기가 마련된다.

[1] 대표적인 예로 익양 대치시 조조가 장로가 있는 한중을 침공하자 유비는 황급히 형주의 병력을 이끌고 돌아가야 했지만, 한중을 확보한 이릉 대전 때는 일 년 이상 파촉의 방비를 걱정하지 않고 형주로 공격을 들어 갈 수 있었다.[2]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계책으로 위군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오나라를 움직여 합비를 치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 각색된다.[3] 장합조차도 전쟁터에 와서 술부터 쳐마시는 장비를 보며 저 자식이 돌았구나 하고 갔다가 제대로 얻어터진다.[4] 그런데 제갈량은 이걸 미리 알았는지 술을 보내달라는 장비의 요구에 성도의 좋은 술을 보내주었다. 그래도 불안함을 토로하는 유비에게 그렇게 걱정되면 장비의 술판에 동참하지 않을 위연을 보내주라는 타협안을 제시한다.[5] 사실 또 장합은 여기서 굴욕을 겪긴 했지만 조조군에서 명장에 속하는 장수였다.[6] 연의에서 한현은 황충(정확히는 위연)에게 살해당했고, 한호는 이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7] 연의에서는 장합이 한호와 하후상을 말렸는데 그런 소리나 하니 늙은이들에게 패한다고 했었다.[8] 왕은 유씨 황족에게만 내려지는 작위였다. 제국의 창업자 한고조가 죽음을 앞두고 황실과 외척, 공신들에게 백마의 피를 마시며 맹세시킨 내용이 바로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그를 치고, 공로가 없는 자가 제후가 되어도 천하가 함께 그를 친다'''' 였다(이를 백마지맹白馬之盟이라고 한다). 고조가 죽은 직후 고황후 여씨가 외척인 여씨들을 왕으로 봉해 날먹을 시도했으나, 여후가 죽자마자 고조의 남은 공신들이 이 백마지맹에 의거해 여씨들을 천하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죽였다. 왕망도 찬탈 직전까지 공작위에 머물렀으며, 동탁이나 이각, 곽사 등 조조 이전의 실세들도 상국이니 대장군, 대사마 등 번쩍거리는 관직은 차지했을지언정 왕위는 노리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관직들은 공이 크(다고 우기)면 받을 수 있는 지위였으나, '''공이 많건 어쨌건 황족이 아니면서 왕이 되는 건 그 자체로 반역'''이었으니 이는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였다.[9] 이 질문의 본의는 촉 출신의 양홍을 통해 촉의 원주민들이 완벽하게 유비군에 동화되었는지를 알아보는데 있었다.[10] 이릉대전 이후에도 반란이 한차례 일어나긴 했지만 그 인물 자체가 촉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인물이었을 뿐이고 결국 아무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다만 아직 확고히 촉한이 장악못한 남중의 반란이 문제였는데 이 문제는 제갈량이 해결한다.[11] 당시 유비군의 계획은 하후연이 장합을 도울 경우 하후연을, 하후연이 장합을 돕지 않거나 장합이 하후연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경우 장합을 노려서 누가 됐든 한 명을 확실하게 잡는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장합의 지원요청을 받은 하후연이 즉시 군사의 절반을 원군으로 보내준 사실을 통해 당시 장합이 단순히 수세에 몰린 정도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성동격서를 위한 낚시성 공격이라기에는 너무 과한 전력이다. 즉 상황이 어떻게 되든간에 일단 적의 수장을 조지고 보자는 것이었다. 이러니 장합이 하후연에게 원군을 요청할 수밖에. 만약 장합이나 하후연이 자신의 진지를 버리고 합류하게 된다면 남정으로의 진격로를 내주게 되며 보급로를 차단당할 수 있으므로 역시 힘든 선택이다.[12] 정사에는 一戰斬淵이라는 구절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황충이 하후연을 직접 베었다고 볼 수는 없다.[13] 하후연의 전사로 인해 당시 한중 방면에 주둔했던 조조군의 지휘체계가 붕괴되었고 결국 한중 공방전 동안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으며 조조가 한중에서 퇴각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또 이 싸움에선 익주자사 조옹도 전사하였다.[14] 한중의 장로를 무찌른 후 잠시 쉬고 있었는데, 유엽과 사마의가 조조에게 "이대로 밀어붙여서 서천을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했는데 조조는 군사들이 지쳐 있다는 이유로 무시했었다.[15] 絶妙, 노란 명주실은 실(絲)에 색(色)이 있는 것이고 幼는 少, 婦는 女와 바꿔 쓸 수 있으니 이렇게 되면 妙라고 다시 쓸 수 있다.[16] 好辭. 딸(女)이 낳은 자녀(子)는 외손자. 그리고 제구는 다섯 가지의 맛을 담는 그릇이고 그 중 매운(辛) 맛을 담는(受)이니 이렇게 글자를 재구성하면 나온다.[17] 손님이 주인의 집으로 서서히 쳐들어가되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한다. 그러면 열받은 주인이 먼저 달려나올 것이고,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한다는 계책.[18] 호삼성은 여기서 나온 '망'은 도망이라고 했다.[19] 애당초 조운의 군 커리어 시작이 북방의 기마술에 능한 이민족이 포함된 군세를 다루는 기병대장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조운의 기병운용도 이해가 간다.[20] 개명한 이엄이다. 그러나 삼국지집해에 인용돤 조일청의 글에선 '이엄전에서 이엄이 평(平)이라 개명함은 후주 건흥 8년으로, 이 때는 아직 이름이 엄(嚴)이고, 한중왕표의 대열에서 받들며 여전히 엄이라 하니, 대응되지 못하고 가지런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리고 이엄전에서 또한 신탐(申耽)을 공격한 일이 없으니, 이는 다른 사람으로 의심된다'고 하였고 반미가 이르길 '이엄은 건안 19년에 건위태수(犍爲太守)가 돼, 장무(章武) 2년에 이르러 징소돼 영안궁(永安宮)에 이르렀으니, 응당 유봉, 맹달이 상용을 공격할 때, 이엄은 계속 건위에 있었다. 촉에서 또한 두 이평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으니, 아마도 이는 군더더기 글자다'라고 했다.[21] 용맹한 장수라는 칭호.[22] 중요한 모사라는 칭호[23] 유비 입촉의 경우 마초가 독립군주로 서량 지역에 따로 떨어져 있고(군주인지라 세력 멸망 전에는 등용도 안되고 마초 특기 때문에 붙잡기라도 하면 살려두기도 까다롭다.) 그 다음 시나리오는 유비가 죽은 이후이기 때문에 시작부터 오호대장군이 모두 유비 밑에 있는 건 PK의 이 시나리오 뿐이다.[24] 217년에서 시작되며 처음으로 나타나는 역사 이벤트가 장비가 장합을 격퇴시킨 탕거 전투다.[25] 서황이 원군으로 가고 비어있는 천탕산에 하후덕이 오는데 정군산 이후 천탕산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선택지가 나온다.[26] 야곡이 정확한 번역이지만 게임에서는 한자 그대로인 사곡으로 번역.[27] 반대로 이쪽이 갈 수도 있다.[28] 난이도 보통 이하에선 사기에 따라 반대로 하후연이 황충을 때려잡아버려 목표를 실패하는 기현상도 발생한다;;[29] 전투 시작 전 이벤트 영상에서 황충이 하후연과 장합에게 활을 쏘는데, 장합은 화살을 그냥 피했으나 하후연은 그 화살을 직접 활로 '''쳐 버린다.''' 여기에서부터 복선이 깔려 있었던 셈.[30] 일정 시간 후 황충이 천탕산을 통해 '''백도어'''를 시전하는데 이걸 막아내는 것이 IF 조건.[31] 이미지의 인물들은 좌측 상단부가 법정, 하단부가 유비, 우측 상단부가 황충, 하단부가 조운. [32] 한중 공방전 시작 전에 법정이 말그대로 코피까지 줄줄 흘려가면서까지 '''혼'''을 불사르며 계략을 짜는 장면이 있는데 꽤나 인상깊은 장면, 이후 자신의 명이 다했음을 깨닫고 유비에게 충고 또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