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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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黃忠
(? ~ 220)
후한 말의 유표#s-1, 한현의 수하 장수이자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
자는 한승(漢升) 또는 한숙(漢叔).[2] 남양사람으로써, 시호는 강후(剛候)이다.
익주 정벌과 한중 공방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여 유비의 영토 확장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장수. 조운과 더불어 굳세고 강직하여 편입된 장수지만 유비의 남다른 신임을 받았다.
동시에 삼국지연의를 통해 삼국지 최고의 명궁으로 알려진 인물.
2. 정사
2.1. 유비를 따르기 전까지
형주목 유표가 그를 중랑장으로 삼고 조카 유반을 보좌하게 했다. 유반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인데, 그 이유는 유표가 영역 확장을 피하고 현상유지에 더 관심이 있었던 데 비하여, 그는 강동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유반을 경계한 손권은 태사자를 배치해 수비하게 했다.[3]
황충은 유반 아래서 유현을 수비하다가 조조가 형주를 점령한 후 임시로 비장군직을 받고 장사태수 한현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2.2. 유비를 따르다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형주에서 철수하고 유비가 세력을 확장하자 그를 따랐다.
황충은 유비가 입촉했을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적진으로 달려가 용맹을 과시했는데, 그 공이 삼군의 으뜸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을 보면 많은 활약을 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선주가 대노하여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 양회(楊懷)를 불러 그의 무례함을 질책하며 그를 참수했다. 이에 황충(黃忠)과 탁응(卓膺)을 시켜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도록 명했다. - 선주전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침투하여 함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 황충전
2.3. 한중 공방전
한중 공방전 때 황충은 말 그대로 맹활약을 했고, 법정과 협력하여 조조의 친족이자 조조군을 대표하였던 명장 하후연을 전사시키는 대공을 세웠다.
하후연의 전사를 접한 조조가 친정에 나서자, 황충은 조조의 진지를 몰래 기습하여 적의 군량을 탈취하려 시도했으나, 성공여부에 대한 언급은 기록에 없다. 부장이었던 조운이 염려했을 정도로 그의 귀환이 늦어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성공했을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듯하다.
건안 24년(219년),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서 하후연(夏侯淵)을 공격했다. 하후연의 군대는 매우 정예했으나, 황충은 적의 예봉을 꺾어 어김없이 전진하고 사졸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환성은 골짜기를 뒤흔드니, 한번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斬)하고 하후연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랐다. - 황충전
건안 24년(219년) 봄,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定軍山)에 영채를 세웠다.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선주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 선주전
정군산에서의 활약에 대해 과연 황충이 하후연을 직접 죽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어왔으나, "一戰斬淵"라는 표현만으로는 두 장수가 직접 무기를 주고받았다고 생각하기 부족하다. 여기서의 "斬"은 한 사람의 물리적인 공격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군사를 동원한 전투 중 하후연을 패사시켰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자세한 사항은 일기토 문서 참조.하후연이 패하자 조공(曹公)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米)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黃忠)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4]
를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 조운별전
한중 공방전 때 하후연의 전사 상황을 보면 황충은 하후연을 잡기 위해 준비된 조커였다. 유비는 하후연을 꾀어낼 사전 작업으로 1만 명으로 구성된 10개 기습부대에게 장합이 지키는 방향인 주마곡의 위군 진영을 공격시켜 그를 압박해 장합이 하후연에게 구원 요청을 하게 만들어 하후연이 직속 부대 절반을 장합에게 보내주자 정군산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법정이 유비에게 하후연을 칠 기회가 왔다고 진언하자 유비는 곧바로 따로 대기하던 황충의 기습부대에게 하후연을 직접 공격하게 지시하였고, 기지 방어에 정신이 없던 하후연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하후연이 장합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기습공격으로 장합을, 구원을 하면 황충을 통해 하후연을, 적의 대장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잡고 간다'''는 치밀한 법정의 계획을 황충으로 실현시킨 전략이었다.
싸움 후 황충은 한중에서의 공을 인정받아 사정장군인 정서장군이 되었다.
2.4. 사방장군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한 후에는 사방장군 중 하나인 후장군에 봉해졌다.[5] 이는 전장군 관우, 우장군 장비, 그리고 좌장군 마초와 동급의 위상을 얻는다는 뜻으로써, 황충이 전국구급 무장으로 대우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안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관우, 마초, 장비는 가절(관리를 죽일 수 있는 권리. 관우는 가절월이라고 하는 가절보다 윗급 직책을 받았다.)을 받지만 황충은 받지 못한다.
이때 제갈량은 관우는 형주에 있었기에 그가 공을 세우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으므로 자존심이 드센 그의 성격상 황충과 나란히 같은 대열의 관직 봉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 제지했지만, 유비가 그를 직접 설득할 것이라면서 그대로 임명하였다. 역시 관우는 강하게 반발하여 불편함을 드러내었으나, 비시가 고사를 인용하여 그를 설득하였고 관우는 마음을 고쳐먹고 관직을 받아들였다. 유비군 내에서 그 두 인물의 짬밥 차이가 굉장히 크게 나긴했다. 게다가 관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원에 명성이 자자하던 장수이기도 했고. 마초야 진작부터 이름 높은 군웅이었지만(그리고 그런 마초에 대해서도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누가 더 낫냐며 물었던 관우이기도하고) 황충은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장수였지만, 군웅 마초와 너무나도 널리 알려졌던 관우의 명성과 비교될 수 없었으니…
2.5. 죽음
황충은 22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는 유비가 동오 정벌을 시작하기 일 년 전이었다. 따라서 연의에서처럼 황충은 동오 정벌에 참여한 바가 없다. 그의 아들 황서가 일찍 죽어 후사는 없었다.[6]
황충의 사망은 관우의 전사, 장비의 급작스러운 암살, 마초의 요절과 함께 유비에게 있어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홀로 형주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한 관우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익주 쪽에 있었는데 관우가 전사한 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년 단위마다 황충, 장비, 마초 순서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살아있었다면 유비 혼자 이릉대전에서 전선을 감당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이릉대전이 벌어질 무렵에 순차적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연의에서는 오호대장군, 정사에서는 관장마황조 열전으로 묶인 촉의 마지막 1세대 장수인 조운마저 1차 북벌 이후 사망하면서 유비 세력의 1세대 네임드들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하여 제갈량은 남아있는 이릉에서 살아남은 일부 2세대 장수들과 3세대 장수들을 이끌며 처절하게 북벌을 진행하다가 결국 전선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그의 사후 그에게 내려진 시호는 강후(剛侯)로써, 이는 일생을 용맹함으로 살아온 무장에게만 내려졌던 삼국시대에서 상당히 드문 시호다.(이통, 장료 등)
3. 평가
'''황충, 조운은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발톱과 어금니. 임금 호위무사, 용맹한 심복 등을 뜻 함)가 되었으니 관(灌), 등(滕)의 무리로다.''' - 진수
'''장군(將軍, 황충)은 돈후하고 웅장하여, 적군의 선봉을 부수고 난국을 극복하였으며, 공업을 세운 당시의 재간꾼이었다.''' - 양희 계한보신찬, 황한승을 찬함(贊黃漢升)
진수는 황충과 조운을 유비의 발톱과 어금니(爪牙)라 평하며 황충을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었던 관영과 하후영에 비유하며 고평가를 내렸다. 촉의 신하인 양희[7] 의 계한보신찬에서도[8] 황충은 성정이 돈후하고 웅장했다고 한다.老將說黃忠(로장설황충) 노장이라면 황충을 말하니
收川立大功(수천립대공) 서천을 얻을 때 큰 공 세우네
重披金鎖甲(중피금쇄갑) 쇄갑을 엄중히 걸치고
雙挽鐵胎弓(쌍만철태궁) 양팔로 철태궁을 잡아당기네
膽氣驚河北(담기경하북) 담력은 하북을 뒤흔들고
威名鎮蜀中(위명진촉중) 위명은 촉에 가득하네
臨亡頭似雪(림망두사설) 죽을 때 머리는 눈처럼 희건만
猶自顯英雄(유자현영웅) 영웅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네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서 황충을 평한 시
이렇듯이 황충의 용맹과 무예에 관해서는 당대 인물들이나 후세 역사가들에서나 이견이 없다. 또한 야전사령관으로서는 그다지 검증된 바가 없는 조운과 달리 황충은 한 전선을 맡아 하후연을 참살한 명장이었다.[9] 또한 정사의 저자 진수가 인물에 대해 평가할 때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인품에 있어서도 혹평하지 않은 걸 보면 인품도 최소한 평균은 갖춘 장수였다고 볼 수 있다.[10]
4.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촉장들이 늘 그렇듯 수많은 가공무장들의 인생을 끝장내는 인간백정 역을 맡고 있으며 정사에서 보여준 강인한 모습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유비와의 만남도 드라마틱하다. 형남정벌전은 적벽대전이라는 큰 이벤트 이후 유비세력이 형남 4군을 유비군의 네임드 장수들이 각각 정벌한다는 쉬어가는 전개이다. 대략적으로 남만정벌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 때 갑자기 황충이라는 장수가 나타나 유비군 최강의 장수 관우를 상대로 선전하는 것이다. 즉, 형남 4군 정벌은 연의에서 황충이라는 네임드 캐릭터의 데뷔전을 위한 포장이라는 것.
관우가 한현이 있는 장사성으로 침공하자 관우를 막기 위해 상대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그때 관우가 말을 바꿔타라고 하였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나 연의에서 찌질이 같이 묘사되는 한현은 의외로 자신이 아끼던 명마를 황충에게 아낌없이 내주는 모습을 보인다. 황충은 무장으로서의 은혜와 도리를 갚기 위해 또 다시 관우와 승부를 낼 때 일부러 그의 모자를 활로 맞추었는데, 이를 본 한현이 황충이 관우와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그를 가두었다. 그러나 위연과 평소 황충을 흠모하던 백성들이 봉기하여 한현은 위연에게 죽임을 당하고, 장사성은 그대로 함락된다. 그 이후 한현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슬퍼하며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유비의 계속되는 간청으로 유비군에 귀순했다. 물론 장사에서 관우와 싸운 것도, 한현의 의심을 받았다가 유비에게 감화되었다는 것도 모두 허구다.
관우와 황충의 의기를 강조하는 일화지만 이것 때문에 훗날 관우가 황충을 대하는 태도에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 연의에서도 촉의 사방장군 임명 에피소드는 그대로 나오는데[11] 이때 관우가 황충과 같은 취급을 안 받겠다며 화내는 장면도 정사와 똑같기 때문이다. 분명히 장사에서는 서로를 동등한 적수로 인정하다가 나중에 오호장군에서 같은 대열에 서게 되자 정사와 똑같이 "황충 따위와 나를 세트로 묶다니!"라는 발언을 하기 때문에 현대인인 독자가 보면 어리둥절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당대의 상식으로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당연히 이해가 되는 문제다.
'장수로서는 그 역량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 자신과 동급으로 놓는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라는 의미다. 한왕조는 고대왕조고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은 신분질서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황건적의 난 등으로 신분질서가 뒤흔들리는 시대이기는 해도 원소의 예처럼 명문가는 명문가의 혈족이라는 이유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관우나 장비는 비록 신분이 미천하지만 같은 개국공신이자 군주의 의형제로서 유비군 입장에서는 최고급 귀족이다. 마초의 집안도 한왕실에서 대대로 한 지방을 맡은 높은 관직생활을 해온 혈통귀족이다. 따라서 마초가 유비군에 참가해온다면 오히려 마초 쪽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무게추가 마초 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황충은 지방관의 부하 무관이라는 미관말직에 불과하므로 형주 토착귀족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해도 자신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는 것을 관우가 고깝게 볼 이유는 충분하다. 관우가 고압적이며 권위에 매우 민감한 성질을 가진 것은 오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모멸적인 외교적 언사로 화를 자초하는 모습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인간적인 단점은 연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므로 개연성이 없는 전개가 아니다. 다만 이런 자부심에 따르는 지휘력과 무력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주므로 귀족적인 영웅상으로 그게 단점으로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서촉정벌에서도 활약했고 위가 한중 부근 국경을 집적거리자, 7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역시 고령의 엄안과 책사 법정과 함께 원군으로서 출진한다. 이 때 성도에 있던 촉장들도 한중에 나가 있던 유봉&맹달 등도 '원군이랍시고 온 게 늙은이들이라니'라며 그들은 물론 명령을 내린 제갈량까지 비웃었고, 황충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엄안과 함께 '늙은이의 진면목을 보여주자'라며 교병계와 반객위주[12] 등의 계책을 이용해 위의 군단장 하후연을 참살하는 큰 공을 세운다. 다만 아쉽게도 정사에서는 엄안과의 노익장 듀오가 등장하지 않는다.
최후마저도 이릉대전에서 관우의 원수인 반장을 공격하여 달아나게 만드는 등 용맹을 과시하며 활약하다 전장에서 멋있게 마무리지었다. 관흥과 장포가 공을 세우고 오자 유비가 "나를 보호하던 충성스러운 장수들은 모두 늙어 쓸모가 없어졌지만 두 조카가 큰 공을 세우니 기쁘구나"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이 황충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이에 황충은 약간의 군사만 데리고 동오군을 공격했으나 복병에게 포위당해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관흥&장포의 구원을 받아 돌아오긴 했으나 위독했다. 유비가 황급히 찾아와 자신의 실언에 눈물을 흘리자, '이미 천수를 충분히 누렸다, 참된 주인을 만나서 기뻤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리고 유비는 "오호대장군 중에 세 명이나 죽었건만 원수를 갚지 못했다"며 통곡하고는 계속 진군하여 원수를 갚긴 하나,[13] 손권까지 죽이겠다는 집착이 화근이 되어 촉장 대다수가 전사하고 유비 자신도 무리하는 바람에 얼마 못 가 죽는다.
수하에게 암살당한 장비나 노환과 병으로 죽은 조운 및 마초와 비교했을 때 오호대장군 중에선 유일하게 관우와 맞먹을 정도로 '''장수다운 장렬한 죽음'''이었다. 실제로는 이릉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죽었고 사인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다. 아마 노환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을 듯하다.
5. 기타
연의 덕분에 황충에게는 두 가지 이미지가 생겼는데, 첫째는 '''명궁''', 둘째는 '''노장'''이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없다.'''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장비의 장팔사모, 조운의 청강검처럼 이름난 무장에게 고유 무장을 달아주는 과정에서 선정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활을 잘 쏜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면서도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언제나 궁술 특화로 나온다.[14]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연의에서 활잡이 컨셉을 주었으면서 적장을 사살했다는 기록은 등현 1명이 전부다. 참고로 궁술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 관우도 활로 적장 1명을 사살한 기록이 있어서 킬수로 따지면 동등하다. 실제로는 활보다는 칼을 잘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의 내에서의 묘사도 활보다 큰 칼로 적장을 해치우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가장 큰 전공인 정군산 전투에서도 하후연을 칼로 베어 죽였다.
두 번째 노장 이미지.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건강한 노인을 가리켜 황충이라고 하며, 노인의 상징이 되면서 늙은 장군 이미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다.[15] 그러나 '''황충의 정확한 탄생 연도를 알 수 없으며, 노장이라고 확증할 근거가 없다.''' 노인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오히려 호쾌한 맹장 느낌이 강한데, 이는 짧고 굵은 활약과도 맞물린다. 게다가 대를 잇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시대였는데도 황충은 후사가 없다. 늙은 장수였다면 가족 구성원이 많았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황충의 가족은 요절한 아들 황서말고는 없다. 아들 황서는 일찍 죽었고, 그 이외 아들이나 손자, 심지어 '''양자'''조차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런 점으로 보면 황충이 일반적인 노익장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제갈량이 그랬다고 황충도 그렇다고 볼 수 는 없지만, 제갈량이 늦은 나이에 아들을 얻은 것처럼 황충 역시 뒤늦게 자식을 얻게 된 걸 수도 있다. "아들이 있었지만 요절하여 후사가 없다."가 기록의 전부이고 아들이 언제 죽었는지도 언급이 안 되니 젊은 시절에 얻은 아이를 잃고 다시 자식을 가지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정확한 생년 기록이 없으니 황충이 활약한 시점이 중년이었는지 노년이었는지는 확답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황충이 노장 이미지와는 정 반대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태사자가 건창도위에 부임한 게 202년인데 황충은 그 시기 이전에 중랑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중랑장 정도의 벼슬을 약관의 나이에 꿰찼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는 않다. 물론 20대에 중랑장이나 태수직을 한 인물들을 찾아보면 의외로 있고 장료, 요립 등이 여기에 해당되는데 황충이 이들처럼 중랑장을 20대에 역임했다고 해도 사망시에는 중년의 나이이기 때문에 젊은 나이는 아니다.
이 노장 이미지는 유비가 한중왕 즉위 이후 관우가 직위를 받을 때 황충과 동률에 있자 '이런 노병(老兵)과 같이 받을 수 없다!'며 분노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이 부분에 사용된 노병이라는 단어는 정황상 '늙은 병사'라는 의미보다는 '쓸모 없는 병사'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즉 관우의 말은 '''황충의 나이와는 전혀 상관 없이''' '내가 이런 놈과 비슷한 대우를 받다니 이게 말이 돼?!'라는 의미인 것. 다만 황충을 비하하는 표현들 중에서 '노병'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실제로 나이가 많은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다소 애매한 부분이다.
노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마찬가지로 노장인 엄안과 세트로 활약하기도 한다. 연의에선 이를 코믹하게 묘사하는데 이를 본 맹달이 유봉에게 '제갈량도 잠깐 머리가 돌았나 보오. 두 늙은이를 보내는 것을 보니 촉의 운명도 이제 다한 것 같소'라고 말한 것으로 서술한다. 이때 황충은 이 두 장수가 비웃은 것을 보고는 엄안에게 '늙었다고 업신여기는 듯한데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시다'라고 하니 엄안은 '장군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라는 대화를 나눈 것으로 서술한다.
황충은 같은 열전에 있는 관장마황조 중에선 가장 기록이 없는 장수이다. 관우, 장비, 마초, 조운은 각각 배송지가 여러기록을 가지고 본전에 주석을 붙여 넣었고, 특히 같이 관영, 하후영의 무리라고 평가 받은 조운의 경우엔 따로 사적을 모은 별전을 이용해서 내용이 매우 충실해졌다, 하지만 황충은 불행히도 별전류 같은 것도 없었는지 배송지가 아무런 주석을 붙여주지 못했다. 사방장군의 칭호를 받아 매우 용맹하고 무서운 장수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많은 공을 세워 조운과 함께 유비의 조아(爪牙)라 불리며 사방장군의 위치에 올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익주와 한중에서의 맹활약상이 없었다면 진도 같이 열전도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제 그의 나이나 활약상, 어떻게 유비군에 들어갔고 그전까지 무얼했으며 정확한 유비군 내 위치가 어땠는지 등은 상당수 추측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면에서 나관중이 연의에서 황충에게 '노익장', '명궁'이라는 이미지를 붙여 오늘날 다른 네명과 구분되는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만든게 정말 용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지방태수 휘하의 일개 장군으로 늙어가던 뛰어난 장수가 만년의 나이에 유비라는 명군을 만나 비상하여 죽을때까지 그 재능과 능력을 한껏 펼쳤다는 드라마틱한 각색은 나관중의 소설가로서 탁월한 역량을 엿볼수 있는 부분으로 삼국지 2차 장작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21세기의 작가들도 노장과 명궁 캐릭터성에 견줄만한 개성을 창작해내지 못하고 있다.
어쨌거나 후대에도 꽤 인상 깊은 활약상을 펼쳤다고 봤는지, 남북조(南北朝) 시대 송(宋)나라와 양(梁)나라 사이의 이름 난 의약학자(醫藥學者)이자 도가(道家)인 도홍경(452년 ~ 536년)이 쓴 책중에는 고금도검록이라고 하여 당대까지 전해지던 명검들에 대해 다룬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야사의 내용이긴 하지만 저 책은 삼국연의가 나오기도 한참 전에 지어진 책이기 때문에 남북조시대부터 민간에서는 대단한 용장 중 하나로 평가되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황충은 한선주(유비)가 남군을 평정할 때 칼 하나를 얻었는데 피와 같이 붉었고, 한중에서 하후연의 군대를 공격할때 하루동안 손수 벤것이 백으로 헤아려야 할 정도였다.
6. 미디어 믹스
황충/기타 창작물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