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고속
[image]
1. 개요
한진 고속사업부의 브랜드명이며, 면허는 경기도 성남시 차적이었으며, 전세부는 용인시 면허를 이용했다. 동양고속에 넘어간 후 현재 성남시 차적의 차량은[1] 유니버스 노블 몇 대와 비교적 최근에 출고된 뉴 그랜버드 이노베이션 실크로드 일부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에어로 하이클래스들은 동양고속에 넘어간 후에도 성남시 차적으로 운행하다가 2016년 2월에 모두 퇴역했다. 전세버스 차적인 용인시 면허는 그대로 유지 중이다. 현재 성남 차적을 이용하는 고속버스 회사는 중앙고속뿐이다.[2]
과거에는 서울역 인근에 터미널을 두고 있었다. 현재 서울역에서 염천교 방향을 바라보면 한진택배 간판과 진에어 광고판이 설치된 건물[3] 을 볼 수 있는데 이 자리가 과거 한진고속의 서울역 터미널 자리라고 한다. 물론 현재도 이 건물과 부지 소유권은 한진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4]
2. 역사
한진그룹의 고속버스 사업은 1961년 한진관광 설립에서 비롯된다. 창립 당시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사서 서울~인천 간 좌석버스 운행을 개시했는데, 당시 도입한 좌석버스가 에어컨까지 단 첨단 차량이라 기존 버스 운송업체들이 수입 감소를 우려해 새 포장도로를 주지 않자, 궁여지책으로 낡은 도로를 이용하면서도 불도저와 물차까지 동원해서라도 적자까지 감수하며 계속 운영했다. 이에 놀란 경쟁 업자들은 새 포장도로까지 주며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 개통으로 고속버스 사업을 개시했고, 1971년 풍전여객운수를 합병하고 이듬해 한진상사로 합병되어 고속사업부로 개편했다. 1992년부터 우등고속버스 사업을 개시하고 1996년 고속버스소화물 수송까지 개시하는가 하면, 1997년에는 고속버스 승차권 예약/발권서비스를 PC통신에도 확대했다. 2004년에는 택배부문과 함께 퍼스트 브랜드로 선정된 바 있었다.
위와 같은 성과를 뒤로 하고 2006년 4월 8일에 한진 측이 고속버스 사업부를 동양고속에 375억 원에 매각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5] 한진고속이 있을 당시만 해도 한진그룹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고속버스와 항공운송 그리고 렌트카 부문에서 서로 경쟁 체제였다.(한진그룹 : 한진고속, 대한항공, 한진렌터카 금호아시아나그룹 : 금호고속, 아시아나항공, 금호렌터카)[6] 하지만 한진고속이 동양고속에 인수된 뒤 두 회사가 경쟁하는 분야는 항공운송과 렌터카 사업밖에 안 남았었으나, 금호렌터카 브랜드는 KT렌탈로 넘어갔다가 그 회사가 롯데에 팔려서 롯데렌터카로 브랜드명이 변경되어 두 회사가 경쟁하는 분야는 아시아나항공만 남게 되었다.[7]
3. 특징
[image]
1970년의 한진고속. (미쓰비시 후소 B905N 세미데커)
1970~1980년대에는 오페라 글래스(선루프)와 UFO 안테나를 설치한 높은 차고의 버스(미쓰비시 후소 B905N 세미데커, 동아자동차 HA50)가 한진고속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초기인 1970년대에는 다른 고속버스 회사에서도 많이 사용하던 벤츠 고속버스를 함께 굴리기도 했지만, 1980년대 들어서는 동아자동차의 HA50을 거의 독점적으로 굴렸다. 반대로 1980년대 당시 공전의 히트를 치며 다른 회사의 고속버스들의 주기종이었던 B909 계열은 소수에 불과했다. 동아자동차의 HA50 버스는 오페라 글래스가 적용되어 다른 고속버스들보다 높이가 높아 보였고 거기에다가 전면부에 UFO 안테나라고 불리는 TV 안테나가 있어서 더 높아 보였다. 1970년대 초중반 2층 버스 이미지를 가진 그레이하운드가 있었지만, 운영사 코리아그레이하운드가 중앙고속에 인수합병된 후에는 한진고속이 높은 차고의 이미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4. 보유했던 차량
- 에어로 HSX, 퀸, 하이클래스[8]
- 그랜버드 블루스카이, 썬샤인, 슈퍼프리미엄 썬샤인[9]
- BH120H 로얄슈퍼/BH120F 로얄크루저[10][11]
- 미쓰비시 후소 B905N : 260ps 8DC2 엔진을 장착한 11.2m짜리 모델로 일본에서 직 수입해 서울 - 부산 노선에 투입했다.
- 미쓰비시 후소 B906R : V형 12기통 19,910cc 엔진을 장착한 12m짜리 모델로 일본에서 직수입해 서울 ↔ 부산 노선에 투입했다.
- 벤츠 O303
- 동아자동차 HA50[12] , HA60 코스믹에어로[13] , MCI 고속버스 [14]
- 동아자동차(쌍용자동차) DA66 하이퍼 에어로[15]
- 아시아자동차 B909S, L[16] , AM919[17] , AM939EF[18]
5. 운행했던 노선
노선은 영남권 위주로 편중됐으며, 특히 포항발 노선은 전부 한진고속 배차가 있었다. 호남권은 광주, 전주(시외), 전주(고속), 순천, 동광양/광양 노선을 운행했다. 특히 서울 ↔ 전주(시외) 노선을 비롯해 일부 단독 노선[19] 을 특별 서비스 노선으로 지정해 신차를 투입했고, 무사고 10년 이상의 베테랑 기사들을 배치했으며, 위성 TV 외에도 KTX 특실처럼 장르별 오디오 채널 서비스도 했다. 특히 서울 ↔ 전주(시외), 동서울 ↔ 전주(시외) 노선은 전주시외버스터미널 착발로 엄청나게 공을 들인 노선으로도 유명했다. 물론 동양고속으로 넘어간 후에는 전주고속버스터미널로 통합됐으며, 이 영향으로 현재 서울 ↔ 전주, 동서울 ↔ 전주 노선에는 동양고속의 비중이 많은 편이다.
단, 동서울/서울 ↔ 대구 노선에는 동양고속과 마찬가지로 타 노선에서 운행했던 구형 차량을 투입했었고, 인천 ↔ 대구 노선에도 구형 차량을 투입했었다.[20]
서울발 : 천안, 대전(청사), 부산, 대구, 포항, 구미(황간 경유), 창원, 마산, 전주(시외)
동서울발 : 대전, 대구, 마산, 전주(시외), 광양(동광양)
수원발 : 순천
성남발 : 대구, 창원, 마산
인천발 : 대구
대전발 : 대구, 울산, 포항, 전주(고속)
대구발 : 부산
포항발 : 마산, 광주
전주(고속)발 : 부산, 울산
6. 특별 서비스 노선
이 노선은 회사에서 별도로 지정해서 항시 신차 투입 및 10년 이상 무사고 기사 투입, 장르별 오디오 채널 운영 등 특별히 신경 쓰는 노선들이었다. 신차가 출고되면 항상 최우선으로 투입되며, 천일고속과 더불어 차내에 업계 최초로 중간에 LCD TV를 설치, 운용했다. 차량은 전량 에어로 하이클래스 차량이였다. 서울 ↔ 전주(시외), 동서울 ↔ 전주(시외), 성남 ↔ 마산, 전주 ↔ 부산 노선이 특별 서비스 노선이었다.
하지만 한진고속 배차분 흡수에 따라 동양고속의 비중이 꽤 높은 서울 ↔ 전주 노선은 한진고속이 동양고속에 인수된 후 구형 차량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21]
7. 일화
고속버스 운행 초기이던 1970년에 한진고속 소속의 고속버스가 추풍령 인근에서 사고가 나서 약 30명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22]
이에 따라 한진고속에서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게 되었는데 당시 버스 인사 사고의 경우 보상금이 1인 당 2~30만 원 선에서 정해지는 게 보통이었다. 당시 한진고속 사고 몇 달 전 그레이하운드에서 최초의 고속버스 인사 사고가 터졌을 때 보상금을 당시로서는 거액이던 1인 당 50만 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당시 사망자는 5명이었다.)
한진고속에서는 그레이하운드의 2배인 1인당 100만 원을 제시한다. 그런데 유족들은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150만 원을 요구한다. 회의 끝에 중간 타협점으로 1인 당 120만 원으로 정해지고 그렇게 보상금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소공동 한진그룹 본사 앞에서 유족들이 나무로 된 관을 들고 시위를 벌인다. 어떻게 된 것인고 하니 전날 보상금 협의가 끝난 후 유족 대표가 마지막 인사 차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을 만났는데 헤어지는 자리에서 조중훈 회장이 죄송하다는 뜻으로 인사치레차 "최소 300만 원은 되어야 하지만 그 정도로 못해드려 죄송하다." 라고 한 말을 들이밀며 보상금으로 인당 300만 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23]
당연히 한진그룹 본사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당시 한진그룹에서 감사직을 하던 조중훈 회장의 처남이 조 회장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신문 1면에 '''한진고속 보상금 300만 원 지급''' 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된다. 보고를 받은 조중훈 회장이 그 자리에서 보상금 3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죽더라도 한진고속을 타고 죽자."는 말이 돌 만큼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당시의 운수 회사 별로 분리되어 있던 고속버스 터미널들 중 한진고속 터미널만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관이 펼쳐지게 된다.
이는 당시 지금의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의 전신 격인 한국여객운수조합의 이사장이기도 했던 조 회장의 선견지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당시에는 고속버스들도 지입제로 인해 업체와 차주, 차주와 차주 간의 분쟁 등 각종 문제점이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한진고속이 보상금으로 1인 당 300만 원을 지급해버리자 다음에도 만약 인사 사고가 벌어질 경우 유족들이 전례가 있어서 300만 원을 요구할 것이고 꼼짝 없이 300만 원을 지급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보통 1~2대에서 많아야 5대 안팎의 차량을 소유하고 있는 차주들은 사고가 날 시 1인 당 300만 원이나 되는 보상금을 지급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고 결국 너도나도 회사에 차를 팔거나 회사 주식에 출자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레 차량이 회사 소유가 되게 된다.
이후 얼마 가지 않아 문제점이 많던 지입제는 고속버스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회사 직영제가 정착하게 된다.
[1] 56XX~59XX 넘버 차량.[2] 한진 기사들도 자연히 같은 차적을 쓰는 중앙고속으로 이직했다. 그 이유는 금호속리산고속 참고.[3] 중구 통일로 26. (봉래동1가 132-4)[4] 한진에서 보유하고 있던 건물 중 대구에 있었던 서대구고속터미널 은 코리아와이드 경북에 매각되고, 동대구고속터미널은 코리아와이드 경북에 운영권을 넘겨줬다.[5] 참고로 당시 회사 규모는 오히려 한진고속이 동양고속보다 거대했다.(금호고속 - 중앙고속에 이은 3위의 규모였다. 동양고속은 그 다음) 한진고속이 경영난이나 기타 이유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한진그룹에서 다른 분야로의 진출 및 집중을 위해 고속버스 사업부를 동양고속에 매각한 것이다. 매각 직전까지도 한진고속은 상당히 건실한 회사였다.[6] 그런데 그래봤자 노선망은 이미 금호고속이 우세했다.[7] 아시아나항공은 HDC그룹에 인수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다만 2008년~2011년 사이에 금호가 대한통운을 갖고 있었던 덕분에 택배 부문에서 한진택배와 잠시 경쟁하긴 했다. 물론 대한통운이 얼마 안 가서 CJ그룹에 넘어가긴 했지만.[8] 특히 에어로 하이클래스의 페이스리프트 버전은 한진고속에서 최초로 운행했다.[9] 이 중 슈퍼프리미엄 썬샤인 우등형은 배게 시트(헤드레스트 일체형)가 달린 모델이었다. 단 1대뿐이었던 희귀차량[10] 로얄슈퍼 차량은 2001년에 전국에서 마지막으로 운행한 노선버스용 로얄슈퍼로도 유명했다.[11] 한진고속의 1996년식 로얄크루져 우등 차량(5845, 5846, 5847호)은 대한만국에 단 5대만 존재했다는(나머지 두대는 속리산고속 8101호, 금호고속 2261호)화장실이 달린 우등고속버스였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력 한계로 인한 화장실 악취 발생 민원으로(이 외에도 차내 화장실 안에서 흡연을 하는 무개념 승객때문에 민원도 있다는 설도 있었다.) 인해 흑역사가 된 채 1999년경에 화장실 철거 및 일부 차량(5846, 5847)은 일반고속으로 격하되었고 이 3대는 동양고속에 매각하기 직전인 2006년 2월경에 대차가 완료되었다. 여담으로 금호고속의 화장실 버스 역시 한진고속과 같은 로얄크루져 우등형이었으나 화장실 철거와 당시 일반고속으로 격하되었다.(이 때 일반고속으로 개조되었을 당시 좌석 시트가 유선형 에어로버스 일반고속 좌석이 달렸으며, 말년에 안산 ↔ 광주/익산 노선에서 운행하였다.) 속리산고속은 유일하게 1996년식 현대 유선형 에어로 퀸 모델이었고 화장실만 철거한 채 대차 직전까지 우등으로 다녔다.[12] 상기된 특징에 언급된 그 차량 맞다.[13] 한진고속에서 다수로 굴린 차량. 그러나 낮은 브레이크 성능과 1989년 10월에 일어난 호남고속도로 추돌 참사로 인해 1992년 ~ 1995년 사이에 로얄크루져로 조기 대차되었다.[14] 동아자동차에 직수입한 미국 MCI사의 고속버스 모델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아예 볼 수 없었던 자동변속기(버튼식) 적용차량이었으나 투박한 디자인과 나쁜 연비로 인해 소수로만 존재했던 모델이고 이마저도 서울-부곡, 마산 노선에만 배차되었기에 당시에도 보기가 상당히 힘든 차량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80년대 후반에 죄다 조기 대차가 되었으니 더더욱.[15] 전작인 HA60 코스믹 에어로에 비해 브레이크 성능이 개선됐으나 이번엔 출력부족으로 인해 소수 출고로 그쳤고, 이 차를 끝으로 한진고속에서 동아-쌍용차의 계보는 완전히 끊겼다.[16] 1980년대 고속버스 대부분 심지어 일부 시외버스 회사까지 굴린 공전의 히트 모델이다. 고속버스운송조합에 속한 업체 대부분이 준 대다수 내지 다수로 굴렸는데 아이러니하게 한진은 소수 보유에 그친 차종이다.[17] 한진고속에서 의외로 꽤나 많이 굴렸던 차였다. 이모델 이후로 AM939EF가 등장할 때까지 아시아자동차 계열의 버스 도입은 없었다[18] AM939 초기형이 아닌 히노의 EF750엔진을 단 후기형 모델. 소수로 보유했고 이마저도 별로였는지 2000년에 조기 대차했다고 전해진다.[19] 전주 ↔ 부산 노선은 시외가 아닌 전주고속버스터미널 착발이고, 당시에는 아주 드물게 금호고속도 들어왔다.(현재는 철수)[20] 그 당시에도 동양고속은 인천 ↔ 대구 노선에 신차를 투입했고, 삼화고속, 한진고속은 구형 차량을 투입했다.[21] 2018년 1월 기준, 서울 ↔ 대구 노선과 비슷하게 09-10년식 차량이 주로 들어간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것은 12년식도 드물게 있는 편.[22] 당시 이 버스의 운전기사는 사고를 내고 대기 중 이 노선을 다시 운행하다가 이 사고를 냈다.7면 쪽으로 넘어가면 이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23] 당시 300만 원은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장만하고도 남는 엄청난 거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