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석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작곡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독립유공자이자 의사인 한흥교의 차남이다.
2. 생애
2.1. 독립운동
한형석은 1910년 2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 읍내면 교동(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서 부친 한흥교와 모친 안산 이씨 이인옥(李仁玉) 사이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본에서 오카야마대학을 졸업한 부산 최초의 양의사였으며,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였다. 한형석은 1915년 5월 모친, 삼촌 한정교(韓正敎), 형 한원석(韓元錫)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부친과 상봉했다.
17살 때 조부 한규용(韓奎容)이 사망한 후 가족들이 귀국하면서, 그는 중국에 홀로 남았다. 이때 부친 한흥교는 그에게 학자금과 명주 태극기 한 폭, 조국의 흙 한 줌을 건네주면서 의학공부를 하라고 당부했다. 이에 따라 베이징의 노하고급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9년 졸업했고, 부친의 친우이자 독립운동가인 조성환으로부터 구국예술운동을 할 것을 권유받고 상해 신화예술대학 예술교육과에 입학했다.
1933년 대학 졸업 후 산둥성의 한 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한형석은 첫 작품 <신혁명군가>를 작사, 작곡했다. 이어 나라 잃은 폴란드 노음악가의 저항운동을 담은 <리나>라는 첫 가극을 발표했다. 한편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 의거를 단행한 후 한인 지사들에 대한 일제 경찰의 압박이 심해지자, 그는 한유한(韓悠韓)이라는 가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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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중국군에 입대했고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전시공작간부훈련단 제4단 음악교관으로 발령받아 산둥성, 개봉, 서안 등지에서 활동했고, 중령의 계급까지 올랐다. 이 과정에서 1934년 산둥성 당읍현(堂邑縣)의 무훈중학교 예술 교사 겸 영어 교사, 산둥행정인원훈련소 교관 겸 산둥성립여자사범 부속 소학교 교사, 1937년 중국희극학회 소속 제2항일연극대장, 1939년 중국 중앙군 34집단군 제10사 정치부 공작대장을 맡았다.
1939년 나월환 대장이 이끄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하여 예술조장을 맡은 한형석은 항일 가극 <아리랑>을 작곡하여 발표하는 등 항일 가곡과 군가를 작곡하여 보급하였다. 항일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때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후, 그가 속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한국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었다. 한형석은 광복군에서 대원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고 창작활동을 하는 것과 더불어 대대적인 위문 및 선무 공작, 공연 활동을 전개했다. 1944년 한국광복군 제2제대 선전부장 겸 중국희극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943년 10월에는 <광복군가집> 제1집, 제2집을 간행하여 보급하기도 했다.
2.2. 해방 후의 경력
1945년 8.15 해방 후, 한형석은 산둥성 제남에서 교포 송환 및 귀국 사업에 종사했다. 그러다 1948년 9월 칭다오에서 인천으로 귀국한 그는 1948년 11월 서울중앙방송국 촉탁방송위원을 맡았다가 1년만에 사퇴했고, 이범석으로부터 예술분야의 요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하고 부산으로 귀향했다. 1948년 12월 국립극장으로 추진되던 부산문화극장 설치 책임자 및 관리자 자리를 권유받고 이를 수락했다. 극장 증축공사 중 예싼 문제로 공사가 중단되자, 한형석은 사재를 털고 수백만원의 빚까지 짊어지며 공사비를 충당해 1950년 6월 18일에 개관을 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6.25 전쟁이 발발했고 유엔군이 진주하면서, 문화극장은 미군 전용 위안극장으로 징발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가 제작한 세미 다큐멘터리 영화 <낙동강>은 한형석, 김재문, 이은상, 윤이상, 금수현 등이 회원으로 참여한 향토문화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경상남도 공보과의 후원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당시 영화에 삽입되었던 이은상 작사, 윤이상 작곡의 '낙동강'이란 노래는 경상도민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전쟁이 종결된 후인 1953년 8월 15일, 그는 자신의 판잣집 언덕배기에 자유아동극장 및 색동야학원을 열어 전쟁으로 인해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비록 재정난으로 인해 2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지만, 그 기간 동안 500여 회에 달하는 공연을 했고 12만 명이 넘는 아이들이 무료 관람을 했다. 또한 색동야학원에서는 매일 밤 80~90명에 이르는 직업 아동들에게 국민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55년 6월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에 부임한 한형석은 1975년 2월까지 교수 직을 역임하면서 부산대학 문리대 제2외국어 주임교수, 한국연극협회 경남지부장, 한국예총 경남지부 사무국장, 경남 문화위원, 광복군동지회 부산지부장, 광복군동지회 경남지회 부회장 등을 겸임했다. 또한 1956년 3월 서라벌중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1975년 교수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1988년까지 부산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 경성대학교 강사를 맡았으며, 1980년부터 1981년까지 부산상록수합창단 단장으로도 활동했다.
한편 그는 예술 분야에서도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967년 3월 독일의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의 부산방문 환영행사 기획을 맡아 성공리에 치러내냈으며, 1969년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의 자격으로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의 순절을 다룬 '순절도'라는 탈극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인해 무대화되지는 못했다. 또한 그는 독보적인 필법을 창안한 서예가로도 알려졌으며, 그림에도 조예가 깊어 일요화가회의 회원전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1996년 6월 14일, 한형석은 부산 부민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7세. 그는 임종을 앞두고 매국노가 매장되어 있는 국립묘지에는 가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 때문에 그의 유해는 국립현충원 대신 양산시 솔밭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970년 5월 제13회 눌원 문화상을 수여받았고, 1977년 12월 건국포장을 수여받았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3. 작품
- 가극류
- 아동 가극: <리나(麗那)>(1937), <승리무곡>(1941), <어린 양들>(1941), <낙원행진곡>(1944) 등
- 항일 가극: <신중국 만세(新中國萬歲)>(1937), <아리랑>(1939) 등
- 가창낭송극: <다음 세대(下一代)>(1941) 등
- 서정가곡
- 가극 삽곡(新歌劇 揷曲)(1940): 출정 떠나는 님을 보내며. 오늘에서야 원한을 갚는다, 정의의 노래, 전사가, 황하강변의 달, 고향을 잃은 자매
- 광복군가
- <광복군가집>(1943): 국기가, 광복군 제2지대가, 광복군가, 여명지가, 신출발, 압록강 행진곡, 조국 행진곡, 여명의 노래, 우리나라 어머니, 흘러가는 저 구름
4. 추모
2004년 6월 14일, 한형석의 옛 지인과 유족을 중심으로 '먼구름 한형석 선생 추모사업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2005년 8월 16일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한울림합창단이 기념 음악회 ‘대륙에 묻힌 이름: 항일 독립운동 음악가 한형석’을 부산 문화 회관 중강당에서 개최했다. 또한 2006년 6월 15일부터 10월 29일까지 부산 근대 역사관 특별 기획전 ‘대륙에 울려 퍼진 항일 정신-먼구름 한형석의 생애와 독립운동’이 개최되었다.
[1] 정당공파 30세 석(錫)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