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삼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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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吳三桂'''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장수이다. 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 후 사망하고 아들 대에 이르러 반란은 실패한다.
한족 입장에선 민족의 배신자이자 기회주의자의 전형이며, 그가 투항하였던 만주족 입장에서도 기회주의자이자 배신자이다.
2. 명나라의 장군
오삼계는 1612년 6월 8일 지금의 랴오닝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양(吳襄)으로 명나라의 장수였는데 원래 오양의 집안은 강소성 고우(高郵)에 살았지만 오삼계가 태어날 때쯤 만주족이 건국한, 후일 청으로 이름을 바꾸는 후금이 맹렬한 기세로 팽창해서 명나라 군 상당수가 요동 근처에 주둔하게 되었다.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도 이때 요동에 정착하고 아들 오삼계를 본다. 소년시절 오삼계는 아버지 오양이 만주군에게 포위되자 필마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했다. 나름 효자이자 맹장이라는 멋진 컨셉으로 데뷔한 것이다.
1641년에 29세에 제독이 되었다.[2] 명나라군은 송산 전투로 결국 만주지방에서 패퇴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삼계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결사적으로 청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1만의 군대라도 건져서 산해관 안으로 후퇴했기 때문에 송산 전투의 패배로 산해관까지 공짜로 넘어가는 것은 막았지만. 송산 전투에서 명나라의 손실이 너무 치명적이라 이자성의 반란군을 막을 수 있는 군사력까지 소멸되었다.
결국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서 멸망하였고, 그때를 틈타 청군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산해관에 임박했고 오삼계는 긴급징병으로 겉으로는 10만의 대군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송산 전투에서 겨우 수습한 1만과 어떻게든 명군으로 다시 복귀한 군대를 합쳐 제대로된 군대가 3만명 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군사적 규모차이, 이자성으로부터 제대로된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등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서 결국 항복했다고 할 수 있다.
3. 청나라의 번왕
그런데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청나라군과의 전쟁으로 국력에 심대한 타격이 있었는데다가 결정적으로 송산 전투로 오삼계가 결사적으로 이끌고 퇴각한 1만정도의 병력을 제외하고 사실상 송산 전투에 참여한 명나라 정예군 13만 중 대부분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농민반란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기존에는 송산 전투등으로 인한 명나라의 피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경에 있던 자신의 첩을 이자성군의 한 지휘관 유종민이 뺏었다는게 이유였다나. 이 첩은 '진원원(陳圓圓)'이라는 여성으로, 본래 기녀였으나 오삼계가 그녀의 자태에 반해서 애첩으로 삼았다. 이후 오삼계가 외지에서 근무하다가 이자성이 봉기하자 마음을 돌려 이자성군에 투항했는데, 진원원을 이자성 봉기군의 지휘관이 빼앗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를 내더니 이자성군을 뭉개버리고 진원원을 되찾기 위해 '''청군을 산해관으로 들였다'''는 것.
첩 때문인 것이 사실이라면 오삼계의 첩 진원원이 중국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나라가 쇠잔하기는 했어도, 산해관에서 청나라를 막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원원은 당대 오삼계의 배신에 분개한 이들이 '고작 여자 때문에 오랑캐에게 나라를 내어준' 존재로 비하하기 위해 강조된 설명이기도 하다.[3]
고작 여자 하나라는 원인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면 다른 한가지 원인은 이자성군의 만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자성군에게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이 많았는데 이자성군은 이들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투항한 명나라 관리들을 고문하고 이들의 재산을 삥뜯었다.[4] 그리고 여기서 삥뜯긴 관리들 중에서는 오삼계의 아버지인 오양도 있었다. 명나라는 없어지고 이자성/청나라 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오랑캐에 투항하긴 좀 그러니 그나마 같은 한족 정권인 이자성군에게 투항하려던 오삼계였으나 북경으로 가던 중 아버지가 감금과 고문과 약탈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포기했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국가에서 아버지 원수와 손을 잡는 것일 텐데, 사대부로서 체면이고, 명분이고 다 사라진다.
이 사실을 인식한 이자성도 오양에 대한 약탈을 멈추고 풀어줬지만 이미 늦었다. 이자성은 발끈해서 오양을 죽이고 산해관을 공격했다. 북경을 점령한 이자성 군은 투항에 응하지않는 '명나라 사령관' 오삼계를 벌하기 위해 산해관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그 병력이 10만에 이르렀다. 당시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의 병력은 정예이긴 했으나 3만에 불과했다.[5] 거기에 이 전쟁을 통한 어부지리를 노리는 청 섭정 도르곤이 산해관 밖에서 역시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대기 중이었다. 혼자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오삼계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욕 먹는 건 싫으니 명분을 투항이 아닌 동맹으로 하려고 했지만 청나라는 끝까지 귀순을 요구한다. 숫적으로 열세인 오삼계군이 밀리면서 전세가 험악해지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즉 진짜 투항원인은 송산 전투의 패배로 명나라 주력군이 궤멸되어 실질적으로 청나라군보다도 명나라군 숫자가 확연하게 줄었기 때문에 산해관에서 막는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청군은 투항한 명군과 함께 무서운 기세로 중국 본토로 들어와 보병위주의 농민병인 이자성군을 박살내고 중국 본토를 급속히 장악하였다.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어준 공로로 다른 한족 협력자와 함께 멀리 떨어진 운남성의 왕인 평서왕으로 봉해진다. 청나라는 다른 한족 협력자 평남왕 상지신과 정남왕 경정충 등을 번국 왕으로 봉했다. 이는 아직 남쪽에 잔존한 남명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였고 결국 남명은 이들 손에서 사실상 끝장난다. 오삼계는 영력제 주유랑을 곤명에서 죽였다.
하지만 이민족인 청나라도 중국사의 전통인 왕조 성립후 토사구팽에 들어간다. 아무리 변경이지만 제국 내에 국가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인정받는 번국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이민족인 만주족 입장에선 부담스럽고, 무엇보다 번국이 중앙정부보다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에 중앙정부로선 큰 위협이었다. 삼번의 난도 번을 폐지하기 위해 일부러 조장했다는 설이 많다.[6]
4. 주나라의 황제
오삼계가 보기에 애송이인 강희제가 초반에 여러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자, 오삼계는 운남에서 한족 왕조를 다시 건국한다는 명분을 세워 군사를 이끌고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다른 번도 호응하여 1673년 반란을 일으키고 중원으로 군사를 몰았다. 이 때 북경에 살던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7] 과 오응웅의 2남인 오세림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어린 아이는 궁형에 처해져 내시가 되었다. [8][9] 여기에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 정하였으나 그 해 8월에 죽으니 67세였다.
그러나 강희제는 전열을 다듬어서 반격에 나섰고, 결국 삼번의 난은 1681년 뒤를 이은 손자 오세번이 자살함으로서 허무하게 진압된다. 오삼계는 부관참시되어 곤명 저잣거리에 세워진 대나무 장대에 내걸렸다. 장대는 2개가 있었는데 오른쪽에는 이미 죽은 오삼계의 두개골이 걸려 있었고 왼쪽에는 오세번[10] , 마보, 하국상, 이본심, 왕영청 등의 머리가 걸려 있었다.
5. 평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한족의 배신자"로 악평이 높았다. 한족이 중국의 주인이라는 관점을 견지한다면, 한족 국가를 저버리고 외침을 한 변방민족의 앞잡이로 한족국가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한 한간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오삼계를 일개 기회주의자로 치부하기엔 어려운 점도 있다. 그는 명나라의 장수로서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고, 그가 충성을 바쳐야 할 국가인 명나라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된다. 따라서 명을 넘보는 청나라도 적국이지만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군도 오삼계에겐 적이자 원수이다.[11] 이들 가운데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절대선이고 정의일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청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다 청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도 까이지만, 가만히 있으면 오삼계는 지나치게 강력한 군세를 가졌기 때문에 숙청당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화려한 갈아타기 전적 때문에 정권의 명분을 세우는데 실패하여 민중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삼번의 난 실패의 원인이지만, 이것을 오삼계의 간사함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더군다나 당시엔 민족이란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이기에, 민족이 애국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현대와 달리, 당시의 애국은 주군에게 충성을 하는 봉건적 형태의 충성이었기에, 현대의 관점으로 그를 민족의 배신자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
다만 숭정제가 오삼계에게 북경 구원을 요청했을 때 오삼계가 일부러 진군을 늦춘 점[12] , 진원원 사건+오양 감금과 약탈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오삼계도 이자성에게 항복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삼계를 충신으로 여기고 청나라로의 투항도 명의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식의 정당화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남명의 황제를 미얀마까지 추격하여 죽인 것도 오삼계 본인이다. 굳이 말하자면 완전한 악질 기회주의자는 아니지만, 평상시에는 자신의 나라에 충성하되 상황에 따라 그러한 충성이 자기 자신과 가문의 이익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그 충성을 그만둘 준비가 되었던 인물이라고 보는 게 나을 듯 싶다.
무장으로서는 당대 수준급 백전노장. 이 때문에 삼번의 난 초기에는 청군을 상대로 굉장한 선전을 해 강희제도 쩔쩔맸다. 오삼계 생전에 삼번의 난의 기세는 정말로 청을 뒤집고 한족 국가가 다시 들어서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일단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입장은 한간 정도의 강도 높은 비판은 아니고, 기회주의자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명말 청초를 다룬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어째 첩 진원원과 관련한 이야기 때문인지 로맨티시스트로 각색되는 경우도 많다.
종합하자면 중국 정부의 입장과 관점은 공기화 처리+기회주의자,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나 한족주의 성향을 가진 입장에서는 한간, 만주족의 입장에선 자신들의 중원 정복을 도와줬다가 이내 배신을 때리고 청나라를 멸망시키려 한 간사한 기회주의자. 역사를 좀 아는 입장에서는 강희제가 상대해야 할 보스급 캐릭터 정도이고, 여러모로 평가가 갈리긴 하지만 명나라의 입장에서든, 청나라의 입장에서든, 현대 중국의 입장에서든 충신으로 평가받기는 힘들 것 같다.
네이버캐스트 <명청전쟁> 시리즈 마지막편에 오삼계의 활약(?)상이 나와있다.
6. 매체
무협소설작가 김용의 녹정기에도 직접 등장한다. 오삼계 자신보다는 그 가족들 위주로 등장하는데 아들인 오응웅은 건녕공주가 이미 위소보에게 마음이 있었기에 사고를 가장해 거세시켜 버리고 전부터 위소보랑 사고친 덕분에 위소보의 아이까지 임신, 결국 훗날 오응웅은 반란에 실패하여 죽고 건녕공주는 위소보에게 가버린다(...)
주성치 주연의 녹정기 2에서는 홍콩배우 진패(秦沛)가 오삼계로 분했다. 아들 오응웅은 거세당하고, 본인도 망가지다가 풍석범의 배신으로 강희제에게 아주 간단하게 토벌당한다. 구 자막에는 계와 규자가 헷갈려서 오삼규로 오역된 흑역사가 있다.
7. 둘러보기
[1] 복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한복(漢服)이 아니라 만주족 복장이다. 번왕시절 그린 그림.[2] 여기서의 제독은 해군이 아니라 그냥 육군의 지휘관을 말한다. 오히려 장성(將星)이란 말은 최근에 만들어진 조어. 현대에 들어 제독이 해군 장성을 지칭하는 단어로만 쓰이게 된 것은 일본군의 잔재다. 유럽은 육군과 해군의 기원이 다른 나라가 많지만, 기본적으로 동아시아는 이순신, 진린의 예에서 보듯이 유럽과 달리 수군과 육군의 사령관이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구분이 없다. 일본군은 해군을 차별화한다는 명목으로 해군에서는 "장군" 대신 "제독"을 썼다. 이 단어의 원조국인 중국(대만 포함)은 "提督"이라는 말은 현대에 쓰이지 않고 해군과 육군과 마찬가지로 해군장령, 계급으로서의 admiral(별넷)은 해군상장으로 번역한다.[3] 김용의 무협소설인 녹정기도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전통역사의 관점을 유지했다.[4] 참고로 이들은 숭정제가 재정난으로 자금 좀 기부하라고 할 때 모두 없다고 궁상을 떨었던 자들이었다. 아예 투항을 작정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자성군은 힘없는 백성들도 약탈했다.[5] 송산전투에서 오삼계가 이끌고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은 1만명에 송산 전투 후 궤멸되었어도 복귀했을 군대 숫자를 생각하면 실질적으로 3만의 군대가 있었다고 보는게 옳다. 거기에 긴급징병을 통해서 외형적으로는 10만을 유지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실질적으로 제대로된 군대가 너무 적었다.[6] 물론 청 왕조 입장에서야 당연히 번을 철폐하고 싶어했을 테지만 워낙 삼번이 강력하다보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상가희가 번왕을 그만두겠다고 하자 얼싸좋다 싶어서 철번을 밀어붙인 것이다. 즉, 일부러 조장했다기보다는(물론 그런 점도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7] 청태종의 사위였다. 청태종의 14녀인 건령공주와 결혼.[8] 적장자인 오세번은 북경 탈출에 성공하여 운남으로 도피할 수 있었다.[9] 청사고 열전, 오삼계전 吳應熊及其子吳世霖處絞,其餘幼子俱免死入官[10] 자살한 후 시신이 부관참시되었다.[11]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그래도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오랑캐 정권인 청나라보다는 그나마 같은 한족 정권인 이자성이 낫지 않냐는 비판을 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명을 직접 멸망시킨 게 청이 아니라 농민반란군 순나라고, 청은 한동안 명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행세했다.[12] 오삼계의 정예부대가 오면 베이징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숭정제는 이를 듣지 않았으며 오삼계가 빨리 북경으로 오면 청이 눈치챌까봐 이자성의 진군 속도에 맞춰 북경에 오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북경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던 명의 장수들이 쉽게 항복하는 바람에 이자성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한 것이다.(출저:한 권 동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