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정벌

 



<colcolor=#000000> 나선정벌
雅克萨战役
Русско-цинский пограничный конфликт(러시아-청 국경 분쟁)

시기
1652년 ~ 1658년(1689년)
장소
만주연해주 아무르 강(흑룡강) 일대
원인
청나라루스 차르국의 국경 분쟁
교전국
[image] 청나라
[image] 조선
[image] 루스 차르국
카자크 민병대
지휘관
[image] 순치제
[image] 해색
[image] 희복
[image] 밍가다리
[image] 사르후다
[image] 효종
[image] 변급
[image] 신류
<^|1>[image] 아파나시 파시코프
[image] 예로페이 하바로프[1]
[image] 아파나시 베이톤
[image] 알렉세이 톨부진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
바실리 폴랴코프
병력
약 3,500 명
(조선군 260여 명 포함)
약 2,000 명
결과
청나라-조선의 승리
영향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 체결
1. 개요
2. 발단
2.1. 본격적인 개전
3. 양국의 목표
4. 나선정벌, 1차와 2차.
5. 과정
6. 성과
7. 평가
8. IF: 조선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면?
9. 기타
10. 미디어에서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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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루스 차르국에 대항하여 청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벌인 전투. 나선정벌은 한국에서만 쓰이는 용어로 중국과 러시아 모두 '청-러시아 국경분쟁'을 표제어로 쓰고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나선정벌'이 실제론 정벌 같이 거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표제어를 이와 같이 고쳤다.

2. 발단


1500년, 1600년, 1700년의 러시아 영토.
조선과 청나라의 머리 위에 러시아가 난데없이 등장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동~북유럽에서 러시아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몽골계 킵차크 칸국오랜 간섭으로부터 2백 년만에 독립하여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던 모스크바 대공국(이하 러시아)은 이반 4세의 치세에 이르러서는 군주 명칭을 차르(황제)로 개칭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러시아는 주변국에 여전히 밀리는 부분이 많았다. 서쪽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이 동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남쪽 우크라이나와 흑해 연안에서는 강력한 오스만 제국의 후원을 받는 크림 칸국이 노예사냥과 학살을 일삼았으며, 서북쪽 스칸디나비아와 핀란드에서는 덴마크에서 독립한 스웨덴 왕국이 착실히 힘을 다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덴마크 왕국도 세력이 저물어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강대한 해군 전력을 바탕으로 발트 해에서 위상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황제 칭호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는 제국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저 루스 차르국으로만 불렸다. 러시아는 덩치만 컸지 여전히 유럽의 변방국이었다.
검은 선 안이 1200년대의 리보니아 연맹. 현재의 라트비아에스토니아 지역에 해당한다. 청록색은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직할 영지, 그 외의 지역들은 주교령[2]들이다. 오른쪽으로 러시아의 전신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접한 모습이 보인다. 1500년대 중반에도 큰 변동은 없었지만, 위의 에스토니아 공국 지역을 덴마크에게서 넘겨받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뇌제" 이반 4세는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서유럽과의 무역을 크게 늘렸지만,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한계가 있자, 유럽 세계로 나가는 좋은 출구를 얻기 위해 독일계 기사단의 식민지였던 리보니아 지역으로 쳐들어갔다.
원래 러시아는 북쪽 백해에 아르한겔스크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이반 4세의 치세에 와서는 핀란드 만에 접한 이반고로드 항구도 추가로 건설했다. 하지만 두 항구 모두 그다지 좋은 항구는 아니었다. 아르한겔스크는 너무 북쪽에 있었던데다 겨우내 얼어붙는 기간이 너무 길었고, 이반고로드는 내륙으로 들어와 있어 수심이 너무 얕았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한자동맹 시절부터 개발되어 수백년째 발트 해의 핵심 항구로 기능하던 리가[3]탈린[4]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1558년에서 1583년까지 20년 넘게 벌어진 이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리보니아 연맹을 해체시켜버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곧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한 스웨덴, 폴란드, 그리고 덴마크의 합동 공격을 받아 전세가 역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의 사주를 받은 크림 칸국 군대가 남쪽에서 쳐들어와 모스크바를 쑥대밭 만들고[5], 귀족과 농민들의 반란까지 속출하자 러시아는 더 이상의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졌다. 러시아는 패배했고, 리보니아는 승전국들에게 덴마크령 사레마,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공국, 폴란드령 리보니아쿠를란트-젬갈렌으로 삼등분되어 갈라먹혔다. 특히 스웨덴은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서부의 주요 항구들을 덴마크가 장악하고 있어 러시아처럼 항구 확보에 목숨을 건 상황이었고, 에스토니아의 탈린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이반고로드마저 가져갔다. 이로써 러시아는 완전히 패배한 걸로도 모자라 있던 항구마저 잃어버린 채 유럽 진출은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거기다 표트르 1세[6] 사후 벌어진 왕위 계승 분쟁에 폴란드가 개입해 차르를 갈아치우고 이후로도 수십년 간 러시아를 위협하면서, 러시아는 더더욱 유럽 내로 진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서쪽으로의 팽창이 좌절되자, 러시아는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담비 가죽 같은 것들은 유럽 상류층의 사치품으로 고가에 거래되는 품목이었는데, 러시아는 숲에서 잡은 많은 담비가죽을 유럽에 수출하며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담비는 야생동물이라 사냥당할수록 개체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죽 수요를 맞추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리보니아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552년에 러시아는 동쪽의 카잔 칸국아스트라한 칸국을 먼저 병합함으로서 동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볼가 강 수운 체계를 장악해 놓은 상태였다. 이로써 러시아는 강한 적들이 버티고 서 있는 서쪽과 남쪽과는 달리 동쪽으로 마음놓고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시작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침략은 튜멘 지역에 자리잡은 시비르 칸국이 우랄 산맥 서쪽에서 광산업을 하던 스트로가노프 가문[7]의 사업장을 약탈한 사건을 계기로 더 가속화되었다. 열 받은 러시아는 예르마크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카자크[8] 부대를 고용해 시비르 칸국을 단숨에 밀어버렸고, 이후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영토를 확장하다가 끝내 청나라의 영토에 맞닿게 되었다. 아무르강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한 러시아의 카자크들은 여기에 을 쌓고 모피나 목재, 광물 자원 등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청나라의 영토 확장과 조공국들을 보여주는 지도. 만주 중간의 빗금 쳐진 부분이 바로 청나라의 발원지다. 러시아가 침투해들어오는 아무르 강 지역과 인접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지도에서 볼 수 있듯, 당시에는 동남아시아와 인접한 서남부 , 지역의 정복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거기다 정성공의 세력도 대만 섬과 동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청나라에 대항하고 있었다.
문제는 청나라도 아무르강 일대를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이곳의 원주민들도 여러번 폭력을 사용해 겨우 복속시킨 상황이었고, 이곳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큰 상황이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갑자기 생뚱맞게 튀어나오더니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우수리강 하구를 지나 송화강 방면으로까지 내려왔다. 만주의 북쪽 경계인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으로는 별다른 자연방어선이 없었기 때문에, 만주를 근거지로 건국했던 청나라는 후방에서의 러시아의 이런 급격한 확장을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팔기군과 화기를 다루는 녹영병 주력군은 남명을 포함한 각지의 명나라 잔당과의 전투에 투입해야 했기에, 만주 북방의 청군은 취약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몇 번의 패전을 겪은 청나라는 조선군을 보조병으로 동원하여 러시아군을 상대하고자 했다.

2.1. 본격적인 개전


1649년부터 예로페이 하바로프[9]의 지휘를 받는 러시아 군인들이 청나라의 보호를 받는 원주민들(다우르족, 에벤키족 등)의 영토로 쳐들어가서는 이들에게서 본격적으로 약탈을 시작한다. 원주민들이 공물 바치기를 거부하면 즉각 무력을 동원했다. 이런 폭압에 시달리다 못한 원주민들이 결국 근처에 주둔한 청나라 군부대로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고, 결국 1651년 청나라는 이들에 대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할 것을 결의한다.

3. 양국의 목표



3.1. 청나라


[image]
아무르 지역 일대에 대한 지배권 유지 및 러시아군의 남하 저지가 물론 1차적인 목표였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미처 복속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넓히고, 보호령으로 선포된 곳을 가능하면 청 정부의 직접 통치령으로 바꿀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3.2. 루스 차르국


아무르 강 일대를 점령해 기존에 원주민들이 청나라에 바치고 있는 모피를 빼앗고, 특히 농사짓기에 좋은 아무르 강 남부를 점령해 본격적으로 식민화하는 것이 목표.

4. 나선정벌, 1차와 2차.


패배를 거듭한 청나라는 무기 수준이 낙후하여 러시아를 저지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 운용 능력을 양성해온 조선에 총수병(銃手兵)을 요청하였다. 모순적이게도 조선이 보내준 군사들이 바로 북벌을 하기 위해 만든 포수부대이다. 사실 나선정벌도 조선 입장에선 북벌이긴 하지만.
조선에서는 1654년(효종 5)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에게 포수 100명과 초관(哨官)[10] 50여 명을 주어 지원군으로 파견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무단 강(牧丹江) 상류지역의 영고탑에 이르러 밍안다리(Mingandali, 明安達哩명안달리, 明安達禮명안달례)가 이끄는 청군 3천여 명과 합세하여 북상하다가 4월 28일 쑹화 강 중류 지점에서 러시아군을 만나 교전하였다.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그 후 청나라는 단독으로 러시아군 거점을 공격하였으나 또 실패를 반복하자 다시 조선에 포수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658년(효종 9) 조선은 혜산 첨사 신유에게 포수 200명과 초관 60여 명을 주어 다시 파견하였다. 신유는 영고탑에서 만주족 장수 샤르후다(Šarhūda, 沙爾虎達사이호달)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북상하였고, 6월 10일 아무르 강과 쑹화 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스테파노프'의 러시아 군사와 접전을 벌였다. 이것이 제2차 나선정벌이다.

5. 과정


러시아는 1581년 코사크 예르마크 탐험대가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에 진입, 시비르 칸국을 멸망시키고 수도 튜멘을 점령한 이후 계속 동쪽으로 원정대를 보냈다. 1598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 식민도시 톰스크를 세웠으며, 17세기에는 바이칼호 부근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후 1647년, 기어이 러시아는 북태평양 연안에 도달했으며, 이를 오호츠크 해라 이름붙인다. 이후 러시아는 예니세이 강에 세운 식민도시와 레나 강 중류의 야쿠츠크를 바탕으로 1638년 남진을 시작, 헤이룽 강(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당시 헤이룽 강에 도달한 탐험대는 포야르코프 원정대로, 이후 하바로프[11] 원정대가 1649년, 1651년 두 차례에 걸쳐 강 근처 원주민 부락들을 공격하고 부락의 물품들을 노획하는데, 이때 주로 노획한 물품은 가죽이었다.
문제는 하바로프 원정대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청의 영토까지 들어가서 청나라 영토 내의 원주민 부락에서도 행패를 부렸다는 것. 이에 원주민들은 청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청은 이를 받아들여 1652년 영고탑 주둔 사령관 하이써의 지휘 하에 군사 2100명을 헤이룽 강에 파견한다. 당시 헤이룽 강에서 열심히 행패를 부리던 하바로프 원정대는 206명의 군인밖에 없었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하이써가 손쉽게 이들을 무찌를 것처럼 보였지만....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대패한다.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하이써의 청군은 패배하고 만다. 당시 청나라는 중국을 완전히 휘어잡은 상태가 아니었던 탓에 정예병을 만주 쪽으로 돌리기가 힘들었는데, 이 때문에 군사 2100명 중 1500명은 기껏해야 냉병기로 무장한 현지 부족민이었고, 청나라 정규군은 600명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청군 600명 역시 대다수는 냉병기로 무장한 탓에 이들 중 총을 다루는 군사는 30명. 그나마 대포를 동원했지만 대포가 6문뿐이었다. 결국 하바로프 원정대의 전사자는 10명. 하지만 청군은 무려 676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고야 만다.
청군의 무기가 뒤떨어진 것도 있지만, 하이써가 하바로프 원정대를 포로로 잡아 더 큰 전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이들을 해치지 말고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참패의 직접적인 패인이었다. 이 때문에 청군은 대포로 요새의 벽을 부수고 돌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공격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원정대원들이 근거리에서 대포를 발사하면서 치명타를 입게 된다. 순치제는 이에 하이써에게 책임을 물어 하이써를 처형한다.
이후 하이써의 후임으로 나선 정벌군 지휘관으로 임명된 자가 앞에 언급되어 있는 샤르후다였다. 샤르후다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들어온 장수 중 하나였는데, 그는 2년에 걸쳐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인 화력의 차이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 화기를 잘 다루는 한족 출신의 정예 녹영병들은 남명 정권과의 전투에 모조리 투입해야 했기에 만주의 소규모 적군 좀 해결하겠다고 빼서 보내 줄 정도로 상황이 여유롭지가 않았다. 샤르후다만큼이나 이들 때문에 골치를 썩던 청나라는 결국 조선군 포수들을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1654년 2월, 조선에 청의 사신 한거원이 도착한다. 한거원의 서신에는 조창선수 100여 명을 보내시오. 나선을 정벌하려 함이오.라는 말이 적혀져 있었다. 이에 효종이 "나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며, 한거원은 "영고탑 인근 별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재미있는 점은 당시 청은 러시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이 러시아 원정대가 러시아인임은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모스코비아(말할 것도 없이 모스크바를 말한다)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보는 들어와 있었는데, 선교사들은 중국에 있으면서 유럽의 소식을 들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거나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니 모스코비아라는 먼 나라에서 청까지 원정대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따라서 청은 이들을 그냥 나선이라고 불렀다.[12]
효종은 이에 변급을 지휘관으로 삼고 포수 100여 명, 초관, 통역들을 포함하면 총 152명의 부대를 결성, 파병시킨다. 조선군은 1654년(효종 5년) 3월 23일 두만강을 건너 청의 영토로 진입했다. 이후 8일간 걸어서 행군한 끝에 영고탑 인근에 주둔하던 샤르후다 지휘하의 청군과 합류한다. 이들은 쑹화강과 무단 강이 만나는 합류점인 삼성까지 가기 위해 무단 강의 흐름을 따라 배를 타고 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결성된 조청연합군은 총 1천여 명 규모였다.[13] 이들은 한 가지 크기가 아닌 여러 가지 크기의 배를 타고 쑹화 강 하구까지 내려갔는데, 배는 120척이나 되었다. 이들과 마주친 러시아 원정대는 이전 하이써를 대패시킨 하바로프가 아닌 그의 후임 스테파노프였다. 하바로프는 공로를 인정받고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였다. 당시 스테파노프가 거느린 군사는 400여 명 규모였다. 스테파노프의 함대는 헤이룽 강에서 쑹화 강으로 가고 있었는데, 마침 쑹화 강 하구로 진입한 조청연합군과 마주친다. 이 때가 4월 28일이었다.
원래 샤르후다의 전략은 이들이 타고 온 함선을 이용, 수전을 벌이고 선두에 조선군이 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함선의 크기 및 위력 차이가 심했다. 청은 당시 온 전력을 남방에 집중하고 있었으니만큼 크고 위력적인 함선들 역시 그 쪽에 투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매우 작은 배였다. 게다가 러시아군의 함선은 두껍고 튼튼한 대형 범선이었고, 청군이 동원한 배는 자작나무 껍질이 주 재료인 '자피선' 이라는 매우 약한 배였다.[14] 샤르후다는 적의 전선이 꽤나 강력함을 인지하고 전략을 변경한다.
[image]
샤르후다는 전투 전에 군사들을 시켜 강변에 참호를 파게 하고 나무 방패와 토벽을 세운다. 그리고 조선군과 기병대를 모두 강변에 투입한다. 이후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청군이 러시아군의 주의를 끄는 동안 조선군이 강변에서 러시아군을 내려다보며 사격하여 러시아군의 피해를 누적시키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조선군은 수도 적었고 전원이 조총병이었기에 근접전에서 취약할 수도 있었으나 조선군보다 더 많은 수의 기병대가 함께 배치되었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15]
전세는 러시아군에게 불리해졌다. 러시아군은 전투 중 강변에서 사격하는 조선군이 자신들에게 매우 큰 피해를 입혔음을 알아채고 강변을 향해 사격을 가했으나 조선군과 청 기병대는 총알이 날아오기가 무섭게 재빨리 토벽 뒤로 후퇴한 뒤 엄폐했다. 이에 러시아 측은 강변에 상륙한 뒤 조선군에게 돌격했으나, 조선군의 침착한 조준 사격과 기병대의 철통같은 엄호에 막혀 조청연합군에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퇴각한다.[16]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헤이룽 강 상류로 퇴각하기 시작하는데, 청군이 이를 추격한다. 청군의 함선은 4일 동안 쉬지 않고 러시아군을 추격했지만 마침 동풍이 불어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돛을 올리고 빠르게 퇴각하여 헤이룽 강 상류에 러시아 원정대가 세운 쿠마르스크 요새[17]에 들어가 버린다. 요새를 공격할 수준의 무기나 병력을 동원한 건 아니었던지라 조청연합군은 퇴각하여 6월 13일 영고탑으로 돌아간다. 조선군은 이후 조선을 떠난 지 84일만에 돌아오는데, 사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후 청은 희한하게도 겨울 내내 쿠마르스크 요새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이에 스테파노프는 러시아 본국으로부터 지원 병력과 물자를 보급받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등 힘을 키워 나갔고 결국 이듬해 봄 완전히 세력을 회복, 활동을 개시한다. 이때 러시아 원정대를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청군의 사령관은 밍안달리였는데, 밍안달리가 이끄는 군사들은 베이징 수도 방위를 맡은 군사 3000명이었고, 대포 역시 15문을 동원했다. 반면 쿠마르스크 요새의 스테파노프 원정대는 원정 도중 만나 새로 합류한 베케토프 중위 휘하의 기병대를 합해도 5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청군은 또 패배했다.밍안달리는 쿠마르스크 요새에 3개월 간 공격을 퍼부었으나 러시아군항복을 받아내는 데에 실패했으며, 설상가상으로 식량 보급까지 끊기는 바람에 북경으로 철수했다. 당시 밍안달리의 지휘는 졸렬하기 그지없었는데, 단순히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는 걸 넘어서 반격까지 당해 대포 2문과 포탄 및 화약 다수를 러시아 측에게 빼앗긴다.[18]
이에 청은 1658년 대규모 공격을 준비한다. 지난번의 공격이 그랬듯이 청은 또다시 조선군의 파병을 요청했으며, 이에 파견된 조선군의 지휘관 자리에 함북병마우후 신류 장군이 임명된다. 신류 장군이 이끈 포수들은 지난번 1차 나선정벌 때의 2배인 200명이었다.
허나 지난번 정벌과는 달리 이번 정벌은 시작부터 뭔가 순탄치가 않았는데, 일단 청나라 통역관이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 통역관은 조선군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늦게 오는 바람에 조선군은 급하게 행군하는지라 도중에 말이 쓰러져 죽고 물건이 진흙에 빠지는 등 별별 고생을 다 하게 된다. 조선군은 5월 6일 영고탑에 도달한다.
지휘관은 예전의 샤르후다였다. 영고탑에 도착한 신류 장군은 샤르후다를 그곳에서 만날 줄 알았으나 샤르후다는 이미 출동한 상태라 조선군은 환영식은 받았으나 적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한다. 신류 장군은 헤이룽 강과 쑹화 강 근처의 오랑캐(왈가, 혁철...)들의 정세를 궁금해하며 잠에 들었고, 5월 10일 비 오는 날씨를 뚫고 30리를 행군하여 샤르후다의 부대가 주둔한 곳에 도착한다.
이들은 왈가족 사공이 모는 왈가족 배를 타고 쑹화 강 어귀까지 올라가는데, 쑹화 강 어귀에는 5월 15일에 도착했다. 5월 14일 왈가족 사람 4명이 청군과 조선군에게 러시아군이 헤이룽 강 어귀에 도착했음을 알렸기에 신류는 걱정을 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때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투입될 전선이 아직 다 건조되지 않았던데다 북경, 선양, 영고탑에서 장수들이 파견되고 선양에서 지원군이 오며, 북경에서는 잠수병이 온다고 소식이 왔었는데 이들도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까지 조선군은 그곳에서 머물며 사격 훈련을 진행한다. 이때 혁철족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난번 전투에서 적군이 조선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보았습니다. 그 일 이후로 도적들은 말끝마다 머리가 큰 사람이 두렵다고 했습니다."라고 전한다.[19] 즉 대두인은 혁철족이 벙거지나 전립처럼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머리가 커보이는 조선군을 부르는 표현이었는데[20] 이들과 러시아가 교류하면서 러시아 역시 조선군을 대두인이라 칭하게 된 것. 참고로 당시 러시아는 혁철족을 나나이라고 불렀다.
이후 늦게나마 청군이 도착하고, 전선 역시 도착했다. 신류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선은 총 48척이 왔으며, 생긴 건 판옥선이랑 비슷한데 더 튼튼했으며 지붕이 없고 단청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이들 중 대형 함선은 36척이었고 소형 함선은 12척이었다. 전선 한 척마다 조선 포수를 5명씩 탑승시키고 청나라 갑군을 한 척마다 25명씩 탑승시키는 식으로 군대를 정리한 뒤 6월 5일 함대는 진격을 시작한다. 참고로 갑군은 갑옷을 걸쳐 입고 창칼과 활로 무장했으며, 등패를 보유했다고 한다. 이들은 며칠 동안 나아가 열벌마을에 도달했고, 6월 10일 아침 일찍 마을을 떠났다. 이들은 헤이룽 강 어귀를 지나 20리쯤 가서는 러시아 함대와 마주쳤다.
러시아 함대의 규모는 총 전선 1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러시아 범선들은 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조청연합군의 함대가 다가오자 닻을 올리고 돛대를 세워 10리쯤 물러난 뒤 강가에 자리를 잡았다. 러시아군은 그곳에 머물며 지붕 위로 올라가 조청연합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함대는 적선과 한 마장(400 m) 정도로 가까워지자 포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러시아군도 응사했다. 이때 청군이 아직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던 전선까지 모조리 한번에 밀어넣어 러시아군에게 활, 대포, 작살[21], 총 등으로 공격을 가하자 범선 위에서 총을 쏘던 러시아군은 버티지 못하고 배 안이나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다.
이에 청 전선들이 러시아 범선들을 포위하고 쇠갈고리를 던져 배들을 끌어당겼고, 포수들이 적선에 올라타 배를 태우고자 했다. 이때 샤르후다는 러시아 배에 실린 많은 물건을 탐내 화공을 하지 못하게 명령했다. 조선군이 적선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 조선군들이 탑승했던 배의 포수와 사수들 모두가 러시아 배로 옮겨 탔다. 이때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빈 청 전선에 올라타 강가를 따라 상류로 끌고 갔다. 이때 러시아군은 중국식 정크선을 처음 몰아본 탓에 조종하는 법을 몰라 일부 인원들이 강가에 상륙하여 뱃줄을 잡고 배를 끌고 가는(...) 식으로 도망치고 있었다고 한다.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면 사실 전원 뛰어내려 달리는게 더 좋았겠지만, 청군의 청야전술로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군의 입장으로서는 보급품이 가득 찬 배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원정이 항상 강 따라 배 타고 이동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배가 굉장히 중요하기도 했고.
이에 뒤에 있던 배들이 일시에 그 배를 추격했는데 선두의 배에는 신류 장군이 타고 있었다. 배 여러 척이 러시아군이 탈취한 청나라 배를 포위하자 뱃줄을 끌던 러시아군들이 숲 속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졸지에 배 위에 갇혀버린 나머지 러시아군은 청나라 갑군들이 뛰어들자 4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전멸했다.
그동안 청 전선 위에 있던 포수와 사수들은 풀숲으로 도망친 러시아군에게 사격을 가했는데, 이들이 쏜 총에 청군과 조선군에 사상자가 생겼으며, 또한 화공을 위해 올라탔다가 샤르후다에게 저지당한 포수들 역시 아군 전선으로 돌아간 뒤 배 안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튀어나와 연달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 사망자는 7명으로 이름과 출신은 길주의 윤계인과 김대충, 부령의 김사림, 회령의 정계룡, 종성의 배명장과 유복, 온성의 이응생이다. 이들은 러시아군의 총격에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이후 청의 갑군과 청 사공들에게도 계속 사상자가 나왔는데, 이에 상황이 다급해지자 기어이 화공을 가해 러시아 함선 7척을 불태웠다. 이후 청군은 청 전선 3척은 닻을 내리고 적선을 감시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맞은편 기슭에 모이게 하고 밤을 샜다. 단 화공을 가한 것은 어디까지나 긴급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가한 것으로 샤르후다의 뜻이 아니었기에 기어이 샤르후다는 적선 4척만은 태우지 않고 남겨 둔다.
당시 러시아 원정대는 말 그대로 참패를 당했다. 원정대는 어찌어찌 구한 배 한 척에 생존한 사람들이 탄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생존한 군인 중 하나인 페트릴로프스키가 남긴 기록을 통해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페트릴로프스키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파노프와 카자크 270명이 전사했으며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80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을 실은 배 1척에 생존자 95명만 태우고 탈출했다고 한다. 페트릴로프스키가 연합군에 대해서 묘사한 것은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중국 범선 47척이라고 했다.
이 전투에서는 1차 정벌과는 달리 피해자가 꽤 나온 편인데, 조선군의 전사자는 7명이고 크게 부상당한 사람은 25명이었다. 게다가 온성 출신의 이충인은 부상이 덧나 사망하기에 이른다. 샤르후다는 시체를 화장하는 데에 쓰라며 러시아 함선 1척을 내주지만 신류는 거절하고 강가에 매장한다.
전투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 함선에서 부싯돌이나 러시아 총 등을 노획했는데, 샤르후다는 러시아군이 보유하고 있던 담비 가죽을 모조리 챙긴 것도 모자라 조선군이 챙긴 총과 부싯돌도 빼앗는다. 조선군은 이후 러시아 함선의 구조를 살펴본다. 신류의 표현에 따르면 러시아 범선은 몸체가 크고 갑판 위는 모두 널빤지를 둘렀으며, 배 위에는 방을 세워 두었는데, 넓은 널빤지로 서까래를 만들어 작은 나무 엮은 것을 얹었고, 그 위에 벚나무 껍질을 씌운 뒤 그 위에 또 흙을 깔고 또 두꺼운 널빤지를 덮었기에 "살림집도 이만큼 튼튼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어 배 위의 집이 이 정도로 튼튼한데 배 또한 바닥이 통나무에 홍이포로 공격해도 잘 부서지지 않는데다 갑판 주위를 두꺼운 나무로 두르고 있어 만약 적이 배 속에 숨거나 육지에 내리거나 하지 않고 끝까지 배 위에서 싸웠다면 승부를 가리기가 만만찮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후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 10여 명이 빠져나와 조선군과 청군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다. 샤르후다는 이들을 배에 나누어 수용하고는 갑군과 포수들을 시켜 수풀을 뒤져 생존자를 찾아 보라고 명했으나 이들 외에는 모두 총알과 화살에 맞아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이때 조청연합군을 안내했던 왈가족과 혁철족은 러시아군의 시체에 칼질을 하며 보복했다.
청군은 전투에서 총 80여 명이 전사했고 사공 역시 30여 명이 사망한데다 부상자는 200여 명에 달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조선군은 상태가 꽤나 안 좋아지고 있었는데, 샤르후다가 사전 통보 없이 조선군의 주둔 기간을 연장해 버리는 바람에 조선에서 가져온 식량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신류는 이에 샤르후다에게 요청하여 쌀을 빌리는데, 샤르후다는 조선군이 원래 조선에서 들고 왔던 쌀의 절반 수준만을 빌려 준다. 게다가 쌀을 옮길 때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지 배에 물이 샌 나머지 쌀의 30% 가량이 썩었다. 쌀뿐만 아니라 장작도 별로 안 빌려줘서 조선군은 떨어질 때마다 청군에게 사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류는 끊임없이 청나라 수석 통역관을 통해 러시아 총을 전리품으로 들고 가게 해 달라고 샤르후다에게 요청했는데, 샤르후다는 계속된 간청을 이기지 못해 러시아 총 한 자루를 내준다. 참고로 청군은 수백 정의 총기를 노획했다. 신류는 당시 러시아 총기가 수석식이었기에 화승 없이 쇠붙이와 부싯돌로 일으킨 불꽃으로 사격하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다고 적었다. 조선군은 8월 27일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로서 2차 나선정벌까지 완료되었다.

6. 성과


1차의 경우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루스 차르국 소속 카자크족은 조선 포수의 위력에 놀라서 대두인(나나이)라고 말하며 두려워 했다고 한다.
2차의 경우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불화살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청군은 조선군을 선봉으로 세우려 했는데 조선군은 작은 자피선만 가지고 있어서 러시아의 큰 군함에 대응할 수 없어 취소되었다. 방심하고 배에서 대기를 하던 러시아군을 향해 기습적으로 불을 저질러 큰 혼란을 주는 방법으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조선군은 전사자 7명을 냈는데 전사자가 나온 경로가 황당하다. 조선군의 조총 사격에 러시아인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배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배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뻘짓을 해야 했다. 그때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뒷치기에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 청군은 조선군 시신을 나포한 러시아 함선에 올려 화장하면서 강에 떠내려 보낼 것을 명령했으나 조선군은 조국의 산하에 묻어주진 못할 망정 이국에서 그것도 이국의 배와 함께 태워 가라앉게 할 순 없다고 하며 근처에서 매장을 했다.
이후 러시아군은 북방으로 밀려나 더 이상 조선군이 파병되지는 않았으며, 한동안 북쪽에서 대치하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한다. 훗날 러시아 제국은 200여 년 후 19세기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동네북이 됐을 때에서야 남진에 성공하여 조선과 재회한다. 그 때의 두 국가의 위치는 넘사벽.

7. 평가


효종의 북벌 정책 가운데 그나마 가시적인 성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대에는 누구와 싸워 이겼는지도 불확실하고, 소규모 전투였으며, 청나라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렀다는 점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결국 북벌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선정벌이 조선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 일인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후술하겠지만 조선군의 실제 파병 규모와 그 전과에 비해서 '정벌'이라는 과장된 용어가 사용되었기에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미국의 요청에 의해 파견된 이라크 파병군의 활동을 이라크 정벌이라 표현하면 좀 이상하듯이 말이다.[22] 하지만 정벌의 사전적 정의는 '적 또는 죄 있는 무리를 무력으로써 침'이므로 실제 언중들이 생각하는 거창한 '정벌'의 이미지뿐 아니라 작은 정벌도 있을 수 있다며 나선정벌이라는 용어 사용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정벌이라는 단어도 청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거고, 조선-청 군과 달리 정규군도 아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 러시아를 응징한다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조선은 나선정벌을 통해서 얻은 이익이 아무것도 없었다. 굳이 얻은 게 하나 있다면 200년간의 평화기간의 시작 이전 마지막 실전경험을 얻었다는 것 정도다.
다만 중국의 퉁구스계 민족들에게는 평가가 매우 좋은 편이다. 만주족은 청나라의 지배민족이었고, 나나이족·어웡키족 등 만주의 다른 퉁구스계 민족들은 나선정벌 당시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다우르족 또한 조상들이 루스 차르국의 약탈에 시달린 역사 때문에 나선정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오늘날 만주의 퉁구스계, 몽골계 민족들 중 친한 성향인 이들은 나선정벌을 자기 민족과 한민족의 좋은 인연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8. IF: 조선이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면?


한무제가 장건을 흉노와 원한관계인 대월지로 보내서 동맹을 맺으려 한 일을 예로 들며 차라리 그 때 조선군은 비밀리에 러시아군과 접촉해서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협공했으면 어떠한 결과가 일어날 지 상상하는 가상역사 시뮬레이션을 구상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러면 진짜로 효종과 사대부들이 원하는 진짜 북벌을 수월하게 이룰 수 있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이들도 많다. 이들은 왜 효종은 나선정벌군에게 러시아와 접촉하여 비밀동맹을 맺으라는 지령을 내리지 않았느냐며 효종의 어리석음을 까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심지어는 아무르강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의 옛 고구려, 발해 땅은 조선이 다시 되찾는다는 부류도 있지만 사실에 가깝게 생각하자면 청나라가 과연 러시아와 조선 두 나라가 공조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지 의문이다. 비밀동맹도 계속 공고화하기 위해서는 서로 주기적으로 사신들이 오가야 되는데 과연 러시아와 조선의 사신들이 몰래 청나라 영토를 통과해서 서로 오가는 게 가능한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23][24] 조선과 러시아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청나라에 대한 공조를 위해 손을 잡으려 해도 당시 지리적, 물리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는 실제로 효종의 아버지인 인조가 입증하기까지 했다. 인조는 대만의 정성공, 중국 본토의 오삼계, 그리고 준가르와 이른바 대청포위동맹을 맺어 청에게 복수하려는 시도를 했다. 정성공이 다스리는 대만에 사신을 파견했고 조선 사신들에게 밀명을 내려 청나라에서 준가르 사신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청나라에 들켜서 추궁당하자 인조는 데꿀멍하고 모든 걸 없던 일로 해버린다.[25]
물론 러시아가 캄차카 반도에서 배를 타고 사할린을 지나 조선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해서 조선과 접촉하여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견제한다는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러시아가 캄차카 반도를 개척하는 건 18세기 이후고 사할린 이남까지 해로를 개척하는 건 19세기 초에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17세기 러시아는 말 그대로 동쪽에 원정대(사실상 탐험대)를 보낸 수준이지 시베리아는커녕 중앙아시아 동쪽조차 러시아의 영토라 볼 수도 없던 시절이다. 당시 러시아는 지금처럼 초강대국이 아니라 1610년 폴란드군에 모스크바를 점령당하고 차르 바실리 4세가 바르샤바로 끌려가 폴란드 왕에게 충성맹세나 하던 게 17세기 러시아의 국력이다. 1650년대면 겨우겨우 혼란 시대에서 벗어나 이때까지만 해도 담당일진 수준으로 쥐어 박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 제국, 우크라이나 카자크에게 대홍수 기간동안 정신없이 두들겨 맞을동안 루스 차르국은 그나마 국력추스려 반격에 나서려고 하는 시점이다. 이 비슷한 시기 유럽 쪽으로는 오랜 숙적 폴란드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어 키예프스몰렌스크를 획득하는 등 분명히 중흥기이긴 하나 표트르 대제가 이끈 본격적인 러시아 제국 부상보다 50년도 전이고, 문자 그대로 같은 유럽인들 상대로 파는 지도상으로만 '러시아 땅'으로 표시 되있는 시베리아 넘어 극동까지 뭘 할만한 국력, 기술력을 달성하기 수백년도 전의 일이다. 당장 러시아가 부하라, 히바 같은 현대 중앙아시아 칸국들까지 점령한게 200년 뒤인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또한 시베리아를 개발하려고 할때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로 안올려고해서 정치범까지 끌여들여서 개발을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데 아무리 러시아가 유럽에서 인구가 많다한들 그 인구의 대부분이 서부지역에 집중되어있었고, 또한 중부지역마저도 텅텅빈땅이나 마찬가지였던것이 현실이었는데. 청나라에 맞설만한 규모의 군대를 만들려고 하면 엄청난 수고가 들었으며 실질적으로 당시 러시아의 "원정대"는 실상 대부분이 모피 사냥꾼과 탐험가였다.
관에서 정식 급여를 받으며 지휘체계가 뚜렷하고 나라에서 훈련 받은 정규군 비슷무리한 존재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고, 이건 사실상 코르테스 부터 이런 17세기의 러시아 시베리아 개척까지 16-17세기 유럽의 대양, 대륙 '원정대'라는 것의 본질이 대부분 그랬다. 지구 반대편 신대륙에서도 30년 전쟁의 현지판이 본 궤도에 오를때 까지 제대로 된 깃발 달고 나라에서 급여 받는 '정규군'들끼리 맞붙은 적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유럽 식민지 서로간이나 원주민을 상대로 한 전쟁은 전투원과 비전투원 구별이 애매한 현지 정착 개척민들이 주력이었다.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와 1654년-1667년간의 13년간 전쟁을 했고, 이 전쟁의 휴간기인 1656년–1658년에는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다. 나선정벌은 1654년과 1658년의 일이다. 머나먼 극동은커녕 유럽 앞마당에서조차 스웨덴폴란드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니, 애초에 상술한 대로 이 러시아 '원정군'의 본질은 러시아 본토에서 군기 들고 행진해 온것도 아니고, 당시 거의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행정구역이었고,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극소수 현지 정착 활동과 모피 무역에서 거둔 이익을 러시아 중앙 조정에 갖다 바치는 역할이었던 야쿠츠크 총독령에서 '이건 우리가 후원하는 공식 사업 맞음ㅇㅇ'이라고 도장만 찍어주고 나머지 일체 인원 모집, 장비 준비 같은건 개인 탐험 사업가, 카자크들이 조직한 무장 탐험단에 가까웠으니 정작 '본국' 러시아는 보다 가까운 유럽쪽의 역사적 숙적들 상대로 피말리는 세월을 보낼때도 저 멀리 중국까지 접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보낸 2천여 명은 말 그대로 원정대의 전병력이었고 후속 병력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다. 엄밀히 말해 나선정벌은 세계사에서 국경분쟁으로 여겨지지 전쟁으로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고작 동맹군 2천 명 바라보고 멀고 먼 러시아와 동맹 맺고 바로 옆의 초강대국 청나라를 공격한다면 삼전도의 굴욕 시즌2라 할만큼 청나라의 무자비한 보복을 받았을 것이며 간섭도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9. 기타


  • 2차 원정을 간 신유는 출정 때부터 귀국까지 쓴 일기인 북정일기를 남겼다.
  • 조선군은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신유의 북정록 첫머리는 "북쪽 바닷가에 한 떼의 도적무리가 있는데, 그 소굴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오로지 배로 집을 삼고 흑룡강 상하를 오르내렸다."라고 하였으며, 러시아 코사크를 오로소(吳老素)[26], 노추(虜酋) 등 '러시아'와 비슷한 발음으로 적고 있지만, "적들은 바다 쪽에서 강을 거슬러 온 것이 아니라 흑룡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다. 그 나라가 흑룡강 상류에 있는지 또는 육로로 나와 흑룡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는지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흑룡강의 상류는 몽골 지방에서 흘러나온다고 하니 그 나라는 강 상류에 있는 것 같지도 않다."라고 하여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한다.[27]
  • 2차 정벌 당시 조-청 연합군이 교전했던 상대가 스트렐치인지 코사크[28]인지 논란이 있다. 영문 위키에선 사르후다가 스테파노프와 220명의 코사크를 죽였다는 내용이 있다.
  • 이때 러시아군은 조선군을 대두인이라고 불렀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들을 청군 내 정예병 정도로 생각한 것이지, 이들이 조선인이라는 것까지 알았던 것은 아니다.
  •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청-러시아 국경 분쟁의 일부로서 등재되어 있는데, 편집 히스토리를 살펴보면 작성자가 '나선정벌'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문서 내용은 러시아와 청 사이의 전투에만 집중되어 있으며, 조선 측 행동에 대해서는 '신류가 인솔한 것으로 알려진 1658년 원정에 대해서는, 파병에 응했다는 것 외에는 《조선왕조실록》 상에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는 식으로 짤막하게 작성되어 있고, 그 외의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사실 나선정벌에 대한 조선 측의 상세한 기록은 위에 언급한 신유의 북정록이 사실상 전부이다. 다만 북정록의 저술상황이 굉장히 자세하고 객관적인 면을 볼 때, 한국의 사학자들도 그 가치를 매우 크게 인정하며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들도 중요한 자료로 취급한다. 게다가 짤막하게 서술된 부분의 출처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부분을 인용한 것인 만큼 기술 자체를 일부러 축소한 것이라고 확인할 순 없다.
  • 러시아군의 포수들은 대개 진형을 길게 펼쳐서 화망을 펼치는 전열보병 전술을 사용했는데, 조선군은 산악 경보병식 직접 조준사격을 하였다고 한다. 조선군의 조총 운용에서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납탄환이 아닌 주조한 무쇠 탄환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납은 무르기 때문에 장전할 때 꼬질대로 밀어넣는데 문제가 없지만, 무쇠 탄환은 조금만 규격이 안 맞아도 나폴레옹 시절 샤프슈터들이 하듯 망치로 탄환을 때려 박아 넣어야 할 정도로 장전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만큼 총알이 총신에 꽉 물리기에 명중률이나 위력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러시아군은 조선군의 저격술을 인상적으로 보았지만, 한편으로 신유 장군도 러시아군의 함선판옥선만큼이나 견고하고 총포를 다루는 기술이 절묘하다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 발포하는 서양식 전열보병 전술에 강한 인상을 받은 모양이다.[29] 그리고 러시아군이 선실로 숨거나 강가에 배를 대어 성벽처럼 이용해서 끝까지 맞서 싸웠다면 승패를 가리기 어려웠을 것이라 보았다.
  • 전투가 끝나고 신유 장군은, 수풀에 숨어있다가 투항한 러시아군 10여 명을 잡았다. 실제 통역을 통해 러시아 포로와 이야기해보기도 했다고. 한편으로 조선군은 이 러시아 포로들에게 쌀밥과 간장을 주었는데, 난생 처음으로 한식을 접한 러시아 포로들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리며 뱉어냈다. 이걸 보고 신유는 딱히 화내지 않고 "천하의 입맛이 다 같지는 않은가 보구나..."라면서 넘어갔다. 물론 당대기준으로는 포로들에게 똑같은것을 그대로 먹인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인간적으로 대우해준것이기는 하지만 먼 러시아에서 온 포로들이 다른 북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음식이면 몰라도 한식을 접할리가 없었고, 또한 그 당시 간장은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정제된 양조 간장이 아닌 재래식 조선 간장이다. 요즘 사람들도 먹으라고 주면 냄새 때문에 잘 못 먹을 정도로 역한 냄새가 나는 물건이다. 심지어 당시 상황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러시아군 포로를 확보한 곳은 바로 나선 지역, 즉 조선의 국토가 아닌 지역이였다. 당연히 이들에게 제공한 건 제대로 생산한 간장도 아니라 조선군이 원정을 떠나면서 챙겨온 전투식량용으로 만든 간장일 것이다. 거기에다 당대의 식품유통상황을 볼 때 참기름이나 다른 재료가 충분히 들어간 것도 아닌 만큼 러시아군 입장에서는 한국인들이 베지마이트마마이트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을 것이다.
  • 이때 러시아군은 수석총인 플린트락 머스킷을 사용했고 조선군은 화승총조총을 사용했는데 조선군 군관이었던 신유가 각고의 노력 끝에 수석총을 한 자루 구한 바가 있다고 한다. 발사속도는 플린트락이 3배나 빨랐고, 습기가 찬 악조건에서도 어느정도 발사가 가능했지만 복제한 수석총의 성능도 시원찮았고 가격은 조총의 세배에 달해서 차라리 조총 3자루를 만드는 게 이득이었다고 판단하여, 양산에 들어가진 않았다.[30] 거기다 유럽과 달리 조선은 전쟁이 빈번한 국가가 아니었으니 수석총에 투자할 가치도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도 바보는 아닌지라 화승총을 꾸준히 개량했으며 적어도 강선이 상용되고 퍼커션 캡이 등장하던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총기 성능의 차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화승총이냐 수석총이냐는 결국 격발방식이 화승에 붙어 있는 불을 갖다 대냐, 부싯돌을 갖다 대냐의 차이이지 다른곳에는 차이가 거의 없었다. 다만 점화 방식에 기인한 운용상의 차이는 다소 있었는데 수석총은 화승총을 사용할 때에 비해 "불 관리"가 사라지고 장전 속도가 빨라졌으며 집단 운용에 있어 통제가 용이했던[31] 것은 좋았지만 동시에 불발률은 높아졌고, 명중률은 낮아졌다[32]. 기계 부품과 부싯돌[33]의 추가로 인해 가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결국 유럽 국가들이 플린트락을 채용했던 이유는 플린트락이 딱히 더 기술적이거나 명중률에서 우월해서라기보다는, 전열보병과 같은 집단 보병대를 사용하고, 또 이를 상시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전술 운용에 좀 더 적합했던 플린트락을 큰돈 주고서라도 제식으로 채택했던 것. 그러나 이러한 기술격차는 점점 누적되어서 훗날 200년 뒤 러시아 제국과 국교를 맺어 러시아군인들이 조선에 들어온 뒤에 조선으로 파병온 v.p 파르네프 대위는 회고록에서 나주 관아 소속 포수들과 서로의 총기를 비교하며, 사격시험을 하는데 러시아군은 미국제 버든 소총 같은 트랩도어 방식의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조선군은 여전히 조총 아니면 머스킷을 사용하고 있었다. 조선군들은 러시아군 소총의 연사속도와 정확도를 부러워 하며, 이런 소총으로 무장했으면 일본군을 몰아 낼 수 있었을 거라고 한탄했다고 한다.[34]

10. 미디어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막론하고 사극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소재이긴 한데, 의외로 만화 초롱이의 옛날여행에서 다루어진 적이 있다. 10회차인 효종과 이완 편에서 다루어졌다.

11. 관련 문서



[1] 러시아의 극동도시 하바롭스크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2] 주교가 다스리는 가톨릭 교회의 세속 영지. 교구들이 오늘날처럼 단순히 지역의 성당과 신자들만 관할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일대를 통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주교령을 다스리는 주교를 특별히 주교후라 부르기도 한다.[3]라트비아의 수도.[4]에스토니아의 수도.[5] 이때 모스크바 시민 수만 명이 크림 칸국에 노예로 잡혀갔다.[6] 러시아를 제국으로 올려놓은 그 표트르 대제와는 다른 인물이다.[7] 러시아의 대부호 가문. 요리 비프 스트로가노프를 만든 그 가문이다.[8] 우크라이나에 살던 자유민 집단.[9] 하바로프스크를 개척한 인물.[10] 종9품 무관직으로 1초(哨 : 병사100~130명 규모 중대급 편제)를 지휘한다.[11] 훗날 이 강변에 세워지는 도시 하바롭스크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12]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러시아 원정대와 조우한 지 얼마 안 된 시기 한정이고, 곧이어 청은 이들이 러시아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나선정벌 이후에 도착한 러시아의 사절단에게 러시아 원정대가 만주에 출몰하는 점에 대해서 항의하기도 한다. 오히려 러시아 사절단 쪽이 원정대 측에서 보고한 적대적 세력이 청군인줄 모르고 있다가 청나라 쪽의 항의를 듣고 나서야 알게 된다.[13] 단, 청군은 이번에도 현지 원주민들을 동원했기 때문에 순수 청나라 정규군과 조선군만의 연합부대는 아니었다. 나선정벌의 무대가 되는 헤이룽 강과 쑹화 강 유역의 원주민들은 문명 발달 수준은 많이 뒤떨어졌지만 만주족처럼 기마민족인 경우가 많아 무장의 수준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14] 변급이 효종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자피선 중 작은 것은 너댓 명밖에 탈 수 없었고 큰 것도 17인승(...)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마저도 숫적 주력은 4~5인승짜리 작은 배였다고.[15] 이 전투를 묘사한 러시아 측의 보고서에는 강변의 청군을 보고 '전투배치 훈련을 잘 받은 군사들이었으며, 이들은 여러 종류의 깃발을 세운 채 각 깃발 아래 각각의 중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고 되어 있다. 청군의 팔기 시스템을 잘 관찰해낸 것으로 보인다.[16] 게다가 러시아 측은 전투가 계속 이어지면서 화약이 부족해졌던 반면 조선군과 청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고 있었다.[17]헤이룽장성 다싱안링 지구 후마현(呼玛县). 후마라는 이름 자체가 이 쿠마르스크라는 이름에서 기원한다. 이곳은 아무르강가에 있는데, 강 건너는 러시아 영토이고, 강건너에는 동일한 이름에서 기원한 '쿠마라'(Кумара)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18] 단, 청나라 역시 손가락만 빨고 있던건 아니었다. 러시아 원정대는 보급의 상당수를 현지 약탈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걸 간파한 청군은 러시아 원정대의 활동반경 내에 있는 원주민들을 대거 청의 영토로 이주시키고 식량들을 죄다 긁어가는 등 대규모 청야전술을 시전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 원정대는 가면 갈수록 보급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19] 신류북정일기[20] 실제로 조선 사람들을 만난 서양인 대부분은 조선 사람들이 쓰는 챙이 넓은 모자가 인상에 깊게 남았던 건지 유독 모자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묘사했다.[21] 전투가 끝난 뒤 도착한 다른 러시아 원정대의 보고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피 묻은 작살이 나무에 박힌 것을 많이 발견했다고 한다. 투창이 사용된 듯하다.[22] 물론 이라크전과 다르게 나선정벌에선 조선군이 실제 전과를 올리는 주 역할을 하는 경우가 존재했다는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23] 장건도 대월지로 가기 위해 흉노 영토를 몰래 통과하려 했지만 갈 때와 귀국할 때 두 번 모두 들켜서 유배를 가기까지 했다. 결국 탈출해서 귀국에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한나라와 대월지의 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24] 당시의 청나라는 현재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연해주가 중국 영토에서 이탈한 건 무려 200년 뒤에 청이 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러시아가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뜯어갔을 때이다.[25]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조선으로 치면 숙종 때에서 영조 때에 해당하는 강희제 ~ 건륭제 시기에 준가르청나라한테 캐발리고 씨가 말라버린 걸 생각하면, 인조의 시도가 성공했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다. 오삼계의 세력도 오삼계 본인이 거병한지 고작 8개월 만에 노환으로 죽고, 금방 청나라한테 개발살이 났기 때문에, 아마 병자호란 시즌2가 벌어졌을 것이다.[26] 몽골어로 러시아가 오로스다.[27] 단, 1차 정벌을 다녀온 변급이 나선은 서양에서 온 것 같다고 말하자 효종이 서양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나선이 서양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긴 하다.[28] 사실 코사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카자크는 해전에도 강했다. 잠깐이나마 흑해의 제해권을 잡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 교외 지역에 쳐들어가 방화를 했던 적도 있을 정도이다.[29]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전열보병 전술이 전투력 면에서 개별사격보다 훨씬 우월한건 아니었다. 일단 유럽보다 전술 발전이 늦어 18세기까지 조준사격 전술을 고집했던 오스만도 17세기까지 유럽 국가들과 전쟁하면서도 전열보병 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럽 국가들도 전열보병 외에 조준사격을 주로 하는 경보병들을 운용했는데, 경보병을 주력으로 사용하지 않은 건 지휘나 장전속도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경보병으로 쓸 수 있는 병사는 총기에 매우 숙련되어 있어야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전술적인 위력보다는 병사를 양성하는 과정이나 훈련 기간 측면에서 전열보병이 훨씬 우월했기 때문으로, 전열보병 전술을 쓰는 러시아군이 경보병 전술을 쓰는 조선군에게 밀린 것은 단기적인 전술적 차원에서의 결과이므로 의아하게 볼 것까진 아니다.[30] 근데 수석총을 만들어봤는데 3배가 비싸서 조총 3개 만드는게 더 나았니 어쩌니 하는 이 썰은 인터넷에는 널리 퍼져 있으나 정확한 출처나 근거가 불분명하다. 일단 신류의 북정록에는 수석총을 입수한 날의 기록 이후로는 수석총에 대해서 별다른 기록이 없다.[31] 모든 화승총들은 화승의 불꽃과 관련된 문제를 안고 있지만,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쓰였던 순발식 화승총은 총을 발사하면 화승이 방아쇠에서 빠져나가 뒤로 튀는 문제도 추가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빠진 화승을 다시 꽂아넣는 데 몇 초가 더 걸리는 것은 당연하며, 그 도중에 불이 꺼지기라도 한다면 다시 불을 붙여야 했다. 반면 플린트락은 부싯돌 불꽃을 즉각 일으켜 점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없었다. 덕분에 사격 속도가 보다 균일했으며, 장교들 입장에서 전열보병들의 일제 사격을 통제하기에도 용이했다.[32] 플린트락 방식으로 총을 점화하려면 부싯돌과 쇠판을 강하게 부딪혀 불꽃을 만들고, 이 충격으로 쇠판을 열어제낀 후, 그 아래 드러난 화약접시에 불꽃을 처박아야 했다. 이를 위해 강한 스프링이 사용되었는데, 덕분에 방아쇠를 누를 때마다 스프링이 퉁기며 진동을 발생시켜 명중률이 낮아졌다. 또한 불꽃의 양과 튀는 방향, 충격으로 인한 격발 부품 고장, 부싯돌 마모, 습도 등의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 불발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순발식 화승총도 스프링을 쓰기에 유사한 문제가 있었지만, 애초에 화승의 불꽃을 화약접시에 직접 갖다 대기만 하면 되는 확실한 구조를 채택했기 때문에 플린트락만큼 강한 스프링을 쓸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 뺨에 총을 붙이곤 방아쇠를 잡은 오른팔은 뒤로 당기고, 총신을 잡은 왼손은 앞으로 뻗는 조선-일본 특유의 파지법 때문에 그 정도 진동은 충분히 제어 가능했던 모양.[33] 일반적으론 흑요석이나 플린트 등의 패각상 깨짐이 나타나는 광물들이 쓰였다. 한편 프로이센 왕국군의 경우 이들 광물을 구하기 힘들어 대체품으로 마노를 사용했다. 깨지는 특성상 이들 부싯돌들은 여러번 쓴 뒤에는 갈아줘야 하는 소모품들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 브라운 베스 머스킷의 경우 대략 20발 쏘고 난 뒤에는 부싯돌을 교체해야 했다. 한국과 일본에는 이런 좋은 부싯돌 자원이 거의 없었기에, 양국은 플린트락을 도입하는 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34] 출처 '내가 본 조선 조선인' 中 V.P 파르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