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왕(주)

 


'''시호'''
현왕(顯王)
'''성'''
희(姬)
'''휘'''
편(扁)
'''아버지'''
안왕
'''생몰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321년
'''재위 기간'''
기원전 368년 ~ 기원전 321년
1. 개요
2. 재위 기간
2.1. 상앙의 개혁과 최후
2.2. 명분보다는 실력
2.3. 손빈과 방연의 대결
2.4. 붕어


1. 개요


주나라의 제35대 왕. 열왕의 아우. 신정왕의 아버지이자 난왕의 할아버지. 이때 진(秦)나라는 상앙을 등용해 법가 체계를 구축하여 부국 강병을 이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국칠웅을 압도할 정도로 강해진다. 그 유명한 제나라의 손빈, 위(魏)나라의 방연의 싸움도 이 왕 때의 일이다.
참고로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은 현왕의 재위 기간과 일치한다.

2. 재위 기간



2.1. 상앙의 개혁과 최후


현왕 10년(기원전 358년), 진 효공은 상앙을 등용해 개혁을 실시하고 법가 사상으로 혹독하게 다스렸다. 그러자 진(秦)나라는 몰라보게 강성해져 상앙은 위나라의 곡옥 등 여러 땅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진 혜문왕이 즉위했는데, 그가 죄를 짓자 스승을 대신 벌한 일에 앙심을 품고 상앙을 실각시킨 뒤 상앙에게 반역을 유도해 죽음으로 몰고간다. 그러나 혜문왕도 그 유용함을 잘 아는지라 그가 남긴 제도는 그대로 썼다.[1]

2.2. 명분보다는 실력


같은 해에 제 위왕은 위나라가 이미 왕을 칭했으므로 제나라 후작일 당시에 왕을 칭했고, 이에 질세라 한(韓)나라, 조나라, 연나라, 진(秦)나라도 왕을 칭했다.[2] 이는 주 왕실을 무시한 행위였다.[3][4]

2.3. 손빈과 방연의 대결


현왕 12년(기원전 356년), 위왕은 현명한 선비 추기(鄒忌)와 전기(田忌)를 등용하여 부국 강병을 위한 개혁이 일어나 제나라 또한 날로 강성해졌다. 이 당시 위나라에 있었던 손빈이 방연의 견제로 니트족으로 있다가 제나라의 구출을 받아 제나라로 되돌아왔다.
현왕 16년(기원전 353년), 위(魏)나라의 양 혜왕은 방연을 보내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을 치니 조나라에서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제 위왕은 대장으로 전기, 군사로는 손빈을 보내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이때 손빈은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5]이 비었음을 간파하고 전기에게 대량을 칠 것을 권하니 전기는 그 말에 따랐다. 그리하여 위군은 대량을 지키기 위해 허둥지둥 돌아오는데, 제나라가 계릉 땅에서 매복해 위군을 말 그대로 개발살을냈다. 그리하여 조나라의 포위가 풀렸다. 이 전투를 계릉 전투라고 하며, 위나라를 포위해 조나라를 구한다는 고사이다.
현왕 18년(기원전 351년), 한나라는 최약체였으나 한 소후가 신불해(申不害)를 등용하여 한나라가 강성해져갔다.
현왕 28년(기원전 341년), 방연이 한나라를 치니 한나라에서 구원을 요청했고 제나라 측에서는 전기를 대장으로 전영(田嬰)[6]을 부장으로 삼고, 손빈을 다시 군사로 삼아 한나라를 구원했다. 그리고 한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에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쓴 방법처럼 역시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치니 혜왕은 태자의 군대를 되돌아 오게했다. 그러나 방연은 손빈의 계략에 넘어가[7] 마릉에서 제나라 군사들이 어지러이 날리는 화살과 쇠뇌살에 맞아 죽어가면서 말했다.
"내가 그 변변치 않은 놈의 이름을 떨치게 해주었구나."
이 전투를 마릉 전투라고 했다. 그 뒤 손빈은 사표를 내고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열국지에 의하면 귀곡자를 따라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일리 없다.[8]
이것을 그만큼 전국시대에 국가들이 얼마나 부국강병을 추구했으며,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쟁을 치뤘는지 알수 있는 사례라 하겠다.

2.4. 붕어


현왕 48년(기원전 321년), 현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인 희정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신정왕이다.
[1] 상앙은 자신이 고안한 거열형에 처해져서 죽었는데, 이 고사를 작법자폐라 한다. 자승자박의 좋은 실례기도하다.[2] 여담이지만 고조선 왕은 대외적으로 조선후(朝鮮侯)를 칭했는데, 이 때의 일을 계기로 조선왕(朝鮮王)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3] 물론 이것은 당연한 감상이나 당시 실력이 곧 명분이 되는 시대였으니 당연하다 하겠다. 물론 일단 주나라를 형식상 천자라고 대우해 주기는 했다.[4] 물론 한나라 등은 나중에 왕을 칭한다.[5] 원래 수도가 안읍이었다가 진(秦)나라의 파상 공세로 인해 이 대량으로 옮긴 까닭에 위 혜왕이 양 혜왕이라 불린다. 애초에 위에 언급된 왕이 위 혜왕이 아닌 양 혜왕이라 불리는 것도 그 까닭.[6] 바로 그 유명한 전국사군자인 맹상군의 아버지다.[7] 방연은 제나라가 겁쟁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방연과 친구였던 손빈이 그것을 알고 일부러 아궁이를 적게 파서 병사들이 탈영하는 것처럼 속여서 유인했다고 한다.[8] 열국지가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삼국지 연의보다 허구가 적은 편이지만,(사기와 비교했을 때.) 이런 비현실적인 일과 조양자가 사실보다 빨리 죽은 일 그리고 상앙이 있을 때 위나라 왕이 양 혜왕이 아닌 위 양왕의 일이라고 언급하는 등의 일은 허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