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왕

 


'''시호'''
난왕(赧王) / 은왕(隱王)
''''''
(姬)
''''''
연(延)
'''아버지'''
신정왕
'''생몰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256년
'''재위 기간'''
기원전 314년 ~ 기원전 256년
1. 개요
2. 치세


1. 개요


주나라의 제37대 이자, 마지막 천자. 신정왕의 아들. 난(赧)이 시호가 아닌 본명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 까닭은 본명인 연(延)자와 난(赧)자가 당시에는 통했기 때문이라 한다. 당시 주 왕실이 극도로 쇠약해져 영토는 좁고, 인구는 3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로 갈라졌는데, 주 난왕은 서주에 머물렀다.[1] 위키백과에 따르면 난(赧)이라는 시호는 喪國心懈(상국심해) : 나라를 잃고 후회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편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시호가 은왕(隱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이 당시 진나라위(魏)나라, 한(韓)나라, 조(趙)나라의 여러 지방을 차지했고, 주나라 왕실을 능멸해 주나라 왕실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2. 치세


난왕 원년(기원전 314년), 진(秦)나라초나라삼진(三晉)을 쳤다.
난왕 2년(기원전 313년), 진나라에서 장의(張儀)를 초나라에 보내 제나라와 절교하면 상오의 600리 땅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초회왕은 그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거기에 넘어가자 굴원(屈原), 진진(陳軫), 소수(昭睢)는 그 말을 듣지 말라고 권했다. 그러나 간신 근상(靳尙)과 왕후 정수(鄭袖)는 그 말을 들으라고 권해 결국 진나라에게 놀아났다. 이에 대노한 회왕은 진나라를 쳤다.
난왕 3년(기원전 312년), 진나라가 단양을 점령하는 등 회왕은 대차게 말아먹었다.
난왕 7년(기원전 308년), 진나라 군대가 함곡관을 나와 한(韓)나라의 요충지 의양을 함락시킨다. 그래서 진나라는 동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얻었다.
난왕 8년(기원전 307년), 조(趙)나라조무령왕은 유목 민족의 기사 전법을 받아들여, 호복 무사를 만들어 강성해졌다.
난왕 9년(기원전 306년), 초회왕이 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뒤에 초나라는 전국 7웅 중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그러나 오기(吳起)의 변법이 실패로 돌아가서 초나라의 귀족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초나라가 발전하는데에 장애가 되었고,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초나라는 다시 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난왕 16년(기원전 299년), 소양왕은 회왕을 무관에 회맹한다는 구실로 불러들였다. 굴원이 가지 말라고 했지만, 회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함양에 감금되었다. 그 뒤 인질인 태자가 초나라로 돌아가 왕이되니 그가 바로 경양왕이다.
난왕 18년(기원전 297년), 진나라가 초나라의 이런 행동에 분노해 초나라를 쳐서 5만명을 죽이고 15개 성을 점령했다.
난왕 19년(기원전 296년), 조나라가 중산국을 멸함으로써 호복 기사의 위력을 보였다.
난왕 22년(기원전 293년), 한나라와 위나라가 힘을 합쳐 이궐에서 진군에게 저항했으나 백기(白起)가 대승을 거두어 위나라 군대와 한나라 군대 24만명을 몰살해 국력이 깎였다.
난왕 27년(기원전 288년), 소양왕은 자신은 서제(西帝), 제민왕을 동제(東帝)라 칭하자고 했으나, 맹상군의 말을 듣고 소양왕의 말을 무시했다.
난왕 29년(기원전 286년), 이미 위나라와 한나라의 영토는 진나라에게 많이 빼앗겼다.
난왕 31년(기원전 284년), 연나라는 조나라, 위나라, 한나라와 힘을 합쳐 악의(樂毅)를 대장으로 제나라를 쳐서 임치가 함락되고 70개 성이 함락되었다. 그래서 거와 즉묵만 남았다. 제민왕은 거 땅에서 초나라 장수 요치(淖齒)에게 죽었다.
난왕 35년(기원전 280년), 진나라는 초나라의 영토를 많이 빼앗았다.
난왕 36년(기원전 279년), 제나라의 장군 전단(田單)의 활약으로 제나라는 다시 부흥하고 연나라군은 대패했다.[3]
난왕 37년(기원전 278년), 진나라는 결국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켰고, 초나라는 수도를 옮겼다. 이 일로 굴원은 멱라강에서 자결했다.
난왕 53년(기원전 262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치니, 한의 상당 군수 풍정은 상당을 조나라에 바쳤다. 이에 진나라가 조나라로부터 상당 땅을 취하려 하니 조효성왕염파를 보내 대항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 계략을 써서 염파에게 효성왕의 의심을 받게 해 실각시켰고, 대신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인 조괄(趙括)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나 장평전투에서 조괄이 패해 전사하고 조나라에서 항복한 병사 40만명은 백기의 명령으로 생매장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백기는 실각하고[4], 결국은 범저(范雎)의 압박으로 자결한다.[5]
난왕 59년(기원전 256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양성과 부서를 빼앗았다. 결국 난왕은 진나라가 마음대로 날뛰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진나라를 쳤다. 그러나 소양왕이 분노하여 장군 (摎)를 보내서 주나라를 치니 난왕은 진나라의 국력에 눌려서 투항했다. 그래서 주나라와 서주(西周)는 멸망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왕이 붕어했고, 서주공(西周公)은 탄호 땅으로 쫓겨났으며, 구정은 진나라에게 넘어갔다. 동주(東周)는 주나라와 서주가 망한지 7년 뒤에 멸망해 주나라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1] 다만 왕실이 갈라진게 아닌 주공(周公)이 갈라진 것이다.[2] 왕위에 59년이나 있었다(...) 당시에 59살까지 산 사람도 드문 걸 감안하면 엄청난 장수인 셈. 언제 태어나있는지가 미상이고 아버지 주신정왕이 왕위에 얼마 못 있었다지만 할아버지 주현왕도 48년이나 왕을 하고 죽은 걸 보면 어지간하면 70년 이상 살았다는 것이다.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엄청난 장수. 물론 이 장수 때문에 나라의 멸망을 자신의 눈으로 지켜봐여 했으니 오히려 오래 살아서 더 비참한 삶이 되고 만 것이다.(당장에 섭정 없이 재위 초기부터 실권을 펼친 왕들도 30~40대에 죽는 왕들이 수두룩했다.)[3] 그때 악의는 연혜왕의 의심을 받아 경질되었고, 그 자리를 기겁(騎劫)이 대신했다. [4] 물론 백기의 공로가 높아지자 자기 자리를 위협받을까 두려운 범저(范雎)가 손을 썼다.[5] 이때 백기는 자신이 죽는 이유를 조나라 항졸들을 죽인 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