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혁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현준혁'''
'''玄俊赫'''

[image]
[1]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大砲黃成
'''이명'''
황욱(黃郁)[2]
'''본관'''
연주 현씨
'''출생'''
1906년 5월 15일[3]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용등리
(현 평안남도 개천시 천리길동)
'''사망'''
1945년 9월 3일
평안남도 평양부
(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중성동 김일성광장 부근)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북쪽 지역의 공산주의자. 한국의 항일운동가.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06년, 평안남도 개천군 북면 용등리(현 개천시 천리길동)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협성학교, 중동학교연희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졸업 후 1930년부터 1932년까지 대구사범학교에서 교유(敎諭)로 심리학, 영어, 한문, 교육사 등을 가르쳤다#.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교내 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그룹'을 지도했다. 그러나 1932년 동맹휴교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그해 12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나 학교를 떠나야 했다#[4].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현준혁은 조선통신사(朝鮮通信社) 기자로 근무하면서 1933년 8월부터 개천·영변 일대에서 적색농민조합·적색노동조합 조직 준비 운동 및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35년 4월 또 다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936년 2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2. 1939년 6월 30일 출옥한# 이후에는 한동안 고향에서 은신했다.
[image]
1935년 4월 24일, 적색농·노조 조직 준비 혐의로 검거될 당시 종로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사들과 접촉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를 결성하고 서기에 취임한다. 8월 27일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출범하자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 조만식과 함께 위원회를 이끈다. 당시 현준혁은 '합리적인 공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민족진영에도 환영받을 수 있는 유력인사였다.
그러나 9월 3일 평안남도 평양부(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중성동 김일성광장 부근)에서 조만식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차에 달려든 괴한에게 암살됐다.[5] 광복된 이후에 벌어진 최초의 정치 테러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이 이후로 이북의 공산주의 세력의 주도권을 잡은 이는 김용범의 지지를 받는 김일성이었다.
현준혁 암살범에 관해 정설은 백의사 단원이 저질렀다는 설 이며, 다른 설로 이북 내부의 권력 다툼 과정 속에서 다른 사회주의자 파벌이 보낸 사람이 저질렀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미 당시 소련군정 비밀 문서에 백의사 등 극우 조직에서 보낸 사람이 현준혁을 암살했을 것이라 추정하는 등 백의사나 그 비슷한 성향의 극우 측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한편, 자신이 백의사 단원이었다고 주장하는 백근옥은 자신의 동생인 백관옥이 현준혁의 암살범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3. 기타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1936년 1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2] #[3] 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3년생, 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4년 3월 13일로 기재되어 있다.[4] 현준혁이 체포되던 해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중 한 명이 박정희다. 현준혁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후 공산당 선언, 자본론 등을 찾아 읽게 된다.[5] 9월 28일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묘비와 여러 증언을 종합할 때 3일에 암살됐다고 보는 편이 조금 더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