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드라마)
1. 개요
1980년 JTBC의 전신인 동양방송 폐국 당시 마지막 주말연속극인 '축복'과, 마지막 일일연속사극인 '의녀 미사' 이후로 31년만에 방송된 사극이다.
종합편성채널 JTBC의 대하사극이자 종편 사상 첫 사극으로 2011년 12월 3일부터 2012년 6월 24일까지 매주 토요일, 일요일 오후 9시에 방송되었다. 주인공 인수대비(소혜왕후)의 어린 시절은 아이돌 티아라 출신의 함은정, 인수대비역에는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를 연기한 채시라가 다시 연기하게 되었다. 작가도 왕과 비와 같은 정하연으로, '''사실상 왕과 비의 2010년대 리메이크작'''이다. 시대상 배경의 차이만 일부 있을 뿐 대사까지 왕과 비와 100% 동일한 장면이 대다수였다.
연출자는 이태곤·노종찬·김재홍.[1] 나레이션은 유강진. 기획 당시 총 50부작으로 예정되었으며, 이후 60부작으로 연장 방영되었다. 2012년 6월 30일 스페셜 1회가 추가로 방송되었다. 제작사는 같은 중앙일보 계열 회사인 드라마하우스.
7월 23일부터 월화드라마 시간대인 월, 화요일 밤 8시 50분에 방송된다고 한다. 이후 10월 1일부터는 시간대가 변경되어 월~금요일 저녁 6시 25분에 방송되고 있다.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편성이 수목 드라마에서 월화 드라마로 변경되어서인 듯. 10월 29일부터는 월~금요일 오후 2시 40분에 방송되고 있다.
2. 내용
어린시절부터 당돌하고 야심만만한 인수대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등 신선한 캐릭터 해석[2] 과 화려한 세트등이 주목받는 중. 작가 정하연씨는 장녹수, 왕과 비에 이어 세조~성종 연간 드라마만 3개를 집필하는 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다. 또 이 사극이 방영되기 얼마전에 KBS에서 절찬리에 방영된 공주의 남자와 같은 시대를 그리고 있고 SBS에서 한창 인기를 끌었던 사극 뿌리깊은 나무의 바로 다음 시대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더 끌었다.
작가가 나이가 들어 귀찮아졌던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한건지 10여년 전에 같은 시기를 다룬 자신의 작품 왕과 비를 그대로 배낀듯한 장면이 많다. 단종의 사사장면이나 폐비 윤씨의 사사장면, 폐비 윤씨 폐출 시 대사, 연산이 총애하는 내관을 목매다는 장면 등등 <왕과 비>와 대사가 완전히 똑같은 장면이 곳곳에 눈에 띈다. 어쨌든 <왕과 비>에서의 장면과 대사, 줄거리가 그대로 재탕되는 왕과 비 2012 HD 리마스터가 될 가능성도 엿보였는데.... 현실은 '''왕과 비 마이너 카피'''라는 평이 대세. 특히 배우의 연기에서 많이 비교되고 있는데 '''거의 모든 배역'''의 연기가 왕과 비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다. 특히 사극팬들 사이에서는 수양대군의 연기가 많이 까이는 편.[3]
사실 나쁜 평이 있긴해도 오랜만에 나온 정극인 이 사극에 대해서 호의적인 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사극 경향이 트렌디나 퓨전사극의 형태를 많이 취하는데다가 연기력 문제만 해도 최근에 문제점으로 지적된 사극들과 비교하면 나름대로 괜찮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그 만큼 현재의 한국사극이 많이 열화된 감도 있지만.
2.1. 역사관
정하연 사극이 이 시기를 다룰 때의 문제점인 세조(수양대군)를 지나치게 띄워주는 모습이 여기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대표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양녕대군이 대놓고 병약한 지금 세자보단 수양으로 세자를 바꿔야한다고 세종에게 주장한다는 것이 대표적. "세자시절 문종에게 효도밖에 한게 뭐가 있냐고 면박을 주는 모습(…)"이 등장[4] 하거나 소심하고 문약하며 다른 형제를 견제하는 문종에 대비되는[5] 재치있고, 호탕한 인물로 그려내는 수양대군이라든지...[6] 물론 왕과 비에서처럼 점차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하게 되는 모습도 그려지고 있긴 하지만...
극중에서는 세조를 미화하기 위함인지, 친동생 안평대군이 귀양 중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나오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안평대군은 세조에게 사사당했으며, 단종의 장인 송현수도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그려지나... 사실은 교형당했다. 세종의 후궁으로 단종을 양육한 혜빈양씨 또한 정업원으로 내쳤다고 나오지만 사실은 가산을 적몰하고 귀양보냈다가 교형에 처해졌다.
단종도 나름 똘똘해지고 수양대군(세조)에게 정을 붙여 세조를 따르던 왕과 비에서의 모습과 달리 이번에는 도원군(훗날의 의경세자, 덕종)과 매우 절친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말이 많은 만큼 철없어 보인다. 또 궁궐에 답답해 하는 모습을 보이며 세조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도원군과 세조는 맹한 아내 바보, 며늘아기 바보(...)가 되는 분위기. 거기다가 계속 '''세자를 지키겠다'''라고 말하면서 '''김종서와 안평대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쿠데타를 하는'''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다.[7] 안평대군은 음모만을 꾸미며 책사 이현로가 거들고 있다.
보듯이 우선 현대의 의견들과는 다른 역사관의 사극이다. 대표적으로 세조의 미화. 세조에 대한 대중적인 여론이 비호의적인 쪽으로 많이 바뀌었는데 작가는 이것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예전 작품인 왕과 비에서의 캐릭터를 그대로 사용했다.
2.2. 고증
전작과는 다르게 호칭이나 인명 자막 등등은 세세한 실수가 많다. 예를 들면 정2품 자헌대부, 정헌대부 이상의 당상관이 아닌 정3품 도승지를 영감이 아닌 대감이라고 부른다든지, 후궁들끼리 위계에 맞지 않는 호칭을 사용한다든지, 후궁들의 직첩이 시기에 맞지 않게 나온다든지, 세자빈의 위치를 거치지 않고 동궁의 후궁에서 바로 중전에 올랐던 안순왕후(인혜대왕대비) 한씨에게 "'''소훈'''한씨(세자'''빈''')"[8] 이라는 알 수 없는 자막이 붙은 상태로 나오고, 월산대군의 부인인 '승평부대부인' 박씨는 '월산대군부인박씨(박씨)'로 박씨가 2번 나오는 등 자잘한 실수가 계속되었다.
결정적으로 연산군 말기에는 신하들도 연산군을 '연산'이라고 마구 불러대고, 연산군도 스스로를 '연산'이라고 부르는 어이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역시 역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왕실의 적장자로 원자를 거쳐 세자위에 바로 오른 연산군은 왕이 될 때까지 대군이나 왕자군에 봉군된 적이 없으므로 그런 호칭이 붙었을 리 없다. 당연히 연산군이라는 이름은 폐주가 된 이후에 왕자로서 대접한다며 붙여진 이름. 비슷하게 일부 사극이나 영화 등에서 양녕대군을 세자 시절부터 '양녕'이라고 불러대는 경우도 가끔 있다. 광해군의 경우는 조금 다른데 세자가 되기 전까지 계속 임금의 서자인 '광해군'의 지위에 있다가 세자가 되었으므로 왕이 맘에 안 드는 사람이라면 그 전의 호칭인 '광해'로 낮춰 불렀을 수 도 있었다라고 추측 할 수도 있겠지만, 연산군 때에는 미래를 예측한 사람들도 아니고, 아직 붙여지지도 않은 호칭을 그것도 왕을 별명 부르듯이 '연산'이라고 하며 왕 스스로가 스스로를 '연산'이라고 칭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고증이라고 할 수 있다. 고증대로는 연산군 자신을 '''과인'''이나 '''나'''로 칭해야 하며 신하들도 연산군을 지칭할때는 '''주상'''이나 '''전하'''라고 해야한다. 이런 문제는 작가의 후속작인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 되풀이된다.
또한 조선 초기임에도 어쩐지 가체(加髢)에 상당히 인색한데, 드라마 초반부에는 정1품 부부인(대군의 부인)급 이상이 아니라면 가체를 올린 여인들이 거의 없었고 그냥 쪽머리로 나온다. 이후 갑자기 세월이 흐르면서 인수대비 역이 함은정에서 채시라로 바뀌는 시기가 되니 웬만한 여인네들은 거의다 가체를 올리고 나온다. 한편 아무리 수절 중이라지만 정1품 빈의 위치에 있던 수빈 한씨(인수대비)는 그냥 쪽머리로 나온다.[9] 그러다가 궁에 들어가서 인수왕비를 거쳐 대비로 올라가며 다시 가체를 착용. 다시 세월이 흘러 연산군 대에 이르러 대왕대비가 되자 또 다시 쪽머리에 첩지 같지도 않은 첩지를 착용하고 나온다. 제작진은 새로운 인수대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하였지만
인수대비 말년. 폐비 윤씨의 죽음에 분개하여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칼을 빼들고 패악을 부리는 장면에서 "실록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가슴을 밀쳤다'고 적고있다" 라며 나래이션까지 써가며 설명하지만, 실록에 그런 기록없다. 단 '불손한 말이 많았다.'고 적혀있다. 칼을 빼들긴 하였으나, 그것도 인수대비가 아닌 양모인 정현왕후(자순왕대비) 침전 밖에서 빼든 것이다.
여담으로 폐비 윤씨를 어려서부터 등장시키려고 아역으로 진지희 역을 맡아 단종과 플래그를 잠시 세우는데, 애초에 폐비 윤씨가 궁녀 출신이었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지만, 폐비 윤씨는 1455년, 그러니까 세조 즉위년에 태어났다. 폐비 윤씨의 나이가 역사적으로 확고한 상태에서 최소 10년 가까이를 올려버리는 셈. 네이버 백과사전 등에서 1445년생으로 나와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까지 오류를 저지른 적은 있지만, 설마 정하연 작가까지?
또 하나의 오류.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성종의 생모인 수빈(인수대비)의 지위를 놓고 논쟁이 오간다. 이때, 임영대군(세종의 4남)이 나와 수빈을 디스하며 지위 격상에 반대하는데, 이는 사실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예종이 죽은 것은 1469년 (음력) 11월 27일인데 임영대군은 그 10개월 전인 1469년 (음력) 1월 21일에 죽었기 때문이다. 즉, 죽은 사람이 나와서 조카 며느리를 면박 준 셈.
2.3. 특징
주로 정희왕후-인수대비-폐비 윤씨 간의 고부갈등이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내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인수대비가 시어머니인 정희왕후 면전에 대드는 장면도 여럿 있다.
인수대비는 역사대로 야심이 크고 당돌하며 완고한 성향으로 등장한다. 처녀적부터 왕비가 되겠다는 야심이 강해서 훗날 시아버지가 되는 수양대군에게 자신을 왕비로 만들어 달라고 당돌하게 부탁하는가 하면 시집와서도 워낙 되바라지고 야심이 컸기에 사가에 있던 시절 시어머니에게 몇 번 대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정희왕후가 특히 싫어하는 면도 크다.
오죽했으면 중간에 의경세자가 상왕 단종의 일로 세조와 잠시 갈등을 빚는데 세조가 며느리를 옹호하는 반면 정희왕후는 '세자가 얼마나 착한데 저런 행동을 했겠느냐, 그건 다 빈궁 잘못이다.'라고 할 정도. 세자가 그 일로 잠시 사가에 내려가 있다가 다시 궁으로 복귀할때 인수대비가 집에 돌아왔다고 기뻐하는데 그 모습이 세자가 기가막혀 혀를 내두를 정도다.[10]
중반부의 인수대비는 나름 온화한 편이긴 하지만 이런 면이 없어진 건 아닌데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견제로 이런저런 수모를 당할때도 '한명회'가 '설마 힘으로 하면 못 이기겠사옵니까?'라고 하여도 '이게 다 아들(성종)이 성군이 되는 길이라며, 계속 참기만 하다 결국 폭발하여서 시어머니 멘붕 올 만큼 행동으로 나서는 모습도 보여준다. 사실 폐비 윤씨 관련 행동을 보면 절대 성질이 죽었다고도 할 수 없고...
전작에서 온화하고 후덕한 모습으로 나오며, 며느리의 독주에 무슨일이 생길 때마다 '나무아미타불'하며, 염불만 외던 정희왕후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오는데, 단종을 사사시키려던 세조를 한사코 말리며 단종이 죽자 절에가서 또 염불을 외우던 독실한 불교신자 정희왕후, 하지만 이번 작에서는 절에는 한 번도 가지 않고 나무아미타불도 외지 않는다.[11] 그리고 어서 빨리 단종 처리 안한다고 오히려 더 중신들을 볶아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며느리는 아무리 며느리가 좀 건방지고 나설 때 안 나설 때 나선다지만 인수대비에서 정희왕후는 사사건건 며느리를 견제하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사실 역사적으로 따지면 며느리에게 의지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잘 지냈던 역사상의 정희왕후와는 완전 딴판인 묘사이긴 하다. 인수대비가 겪는 고난을 강조하기 위해서 실제 고증을 바꾼 사례라고 봐야 할 듯.
며느리 잘 되는 꼴은 절대 못 봐서 며느리가 입궐할 때 세조가 보내준 연[12] 을 치워버리고 가마 하나 달랑 갖다 놓고, 성종이 즉위하자 즉위식 보고 싶다는 며느리가 싫어 여인네들 자리 앞에 차일을 쳐서 가려주고, 며느리와 손주 며느리가 입궐할 때 손주 며느리[13] 에게는 연을 보내고 며느리에게는 일반 가마를 보내는 등 거의 이정도면 놀부나 뺑덕어멈 심보다. 게다가 며느리에게 안 좋은 일만 생기면 신나서 소리내어 죽도록 웃어댄다. 전작에서 이 시기에 인수대비의 최대 견제자는 한명회인데 이번에는 한명회가 거의 인수대비 편이고 그래서 정희왕후는 한명회마저 싫어하고 견제한다. 역시 정도가 너무 심하고 정희왕후 수렴청정 당시 정희왕후가 글을 몰라 인수대비가 정사를 좌지우지했다는 흔히 알려진 상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희왕후 혼자서 다 해먹는다. 그러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해 끝까지 그 자리를 계속 해먹으려는 모습. 어찌보면 작중에서 단순히 며느리에 대한 미움과 자격지심, 피해망상 때문에 폐비윤씨를 중전으로 삼는일 등을 저질러 추후엔 조선 왕조를 말아먹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정도면 인수대비의 며느리 갈구기가 시어머니한테 대물림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거의 막장 드라마에 필적하는 고부간의 갈등에 괜히 정희왕후 캐릭터가 비호감이 되었다. 결국 막판에 가서 겉으로는 화해하기는 하였으나 속마음은 그렇지도 않은 듯 하다.[14]
폐비 윤씨는 몰락한 양반가의 서녀로 궁에 들어와 인수대비를 모시게 되는데 인수대비가 그녀를 자산군(성종)의 잠자리를 돌보게 하면서 자산군의 총애를 받아 후일 왕비에 오르는것으로 설정된다. 여기서는 성종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사가에 있을때 자산군은 후일 공혜왕후가 되는 정실부인을 놔두고 그녀만을 찾았을정도.
궁인으로 있을 때도 몰락한 양반가의 자손으로서[15] 높은 자리에 올라 영화를 누리겠다는 야심이 강한 여인이었으며 중전이 되고 나서는 그야말로 성종에 대한 집착과 권력욕, 시어머니 인수대비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인물이 된다. 어찌보면 또 다른 의미의 인수대비라고 할 수 있는데 인수대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할머니 정희왕후의 비호를 받기도 한다. 해당 역을 맡은 배우 전혜빈의 소름 끼치는 광년 연기를 그대로 볼 수 있다.
한편 의경세자 역인 백성현이 1인 2역으로 써서 성종으로 재등장한 점이 눈길을 끌었는데, 사실 이점은 의외로 호평을 받는 부분이다. 인수대비가 젊은 시절 연모했던 남편 의경세자와 같은 얼굴의 아들에게 애틋한 마음으로 성군이 되길 바라고[16] 그 반동으로 부족한 점이 많은 폐비를 증오하는 것이 극의 중요한 전개 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만 1989년생인 백성현에게 20세에 요절하는 의경세자 역과 25세 즈음 폐비 윤씨와의 갈등이 극도로 치닫는 시점의 성종은 무리가 없는 나이이나, '총애하는 후궁'으로 나온 귀인 정씨로 나온 정요숙은 1971년생으로 화면상으로만 봐도 액면가가 총애하는 후궁보다는 이모 뻘로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성종의 치세 기간은 타임워프하고 성종 사후로 넘어가는데 중간중간 연산군이나 인수대비의 회상시에 말년의 성종이 등장하는데 성종 승하 직전인 30대 후반으로 보기에 비해 너무 젊다. 백성현이 수염까지 붙이고 나왔으나 아들인 1981년생 연산군 역 진태현이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차라리 말년의 성종 역에 진태현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배우를 따로 캐스팅하거나[17] 반대로 해당 회상 장면에서 연산군 역할을 백성현보다 나이가 어린 20대 초반이나 10대 후반 청소년 배우가 연기하고 진태현은 회상 장면이 아닌 본편의 성인 연산군만 연기하는 게 나았을 듯 싶다.
또한 왕과 비와 비교하면 인수대비가 어린 연산을 대하는 태도가 큰 차이를 보이는데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어린 연산을 심하게 갈구며 폐비의 핏줄이라며 혀를 차거나 정을 주지 않는 냉혹한 모습을 보인다면(단, 폐비 윤씨를 사사할 때 어미 잃은 연산을 측은히 여겼는지 직접 찾아가 감싸안고 대성통곡하는 장면이 있긴 하다.)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살갑지는 않지만 같이 잠을 자거나 내심 어린 연산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왕과 비를 본 시청자라면 가히 충격과 공포를 느낄만 하다. 오죽하면 왕과 비의 어린 연산은 어찌나 할머니의 구박이 심한지 어린 아이가 심하게 위축되어 있다. 아마 왕과 비 방영 당시의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관계에 대한 평가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변화한 것도 참고된 것으로 여겨진다.[18] 또한 인수대비의 인간적 면모가 부각되다 보니 냉혹한 정치인으로서의 모습과 달리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3. 등장인물
- 한정(수빈 한씨, 인수대비): 함은정 - 채시라
- 세종대왕: 전무송[19]
- 양녕대군: 박웅[20]
- 문종: 선우재덕[21]
- 이홍위(단종): 채상우[22]
- 수양대군(세조): 김영호
- 김종서: 한인수
- 안평대군: 이광기[23]
- 도원군(의경세자, 덕종): 백성현
- 수양대군 부인 윤씨(정희왕후, 자성대왕대비): 김미숙[24]
- 계양군 부인(인수대비의 언니): 김가연 [25]
- 정순왕후 송씨: 조정은[26]
- 혜빈 양씨(세종대왕의 후궁): 최지나
- 해양대군(예종): 박준목[27] - 노영학
- 안순왕후(예종의 계비, 인혜대비): 김원희(아역)-이연두
- 월산대군: 이지오 - 장희웅
- 자산군(성종): 최원홍 - 백성현 [28]
- 공혜왕후: 이지우
- 윤송이(제헌왕후, 폐비 윤씨)[29] : 진지희-전혜빈[30]
- 윤창년(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한보배[31] (성종 시기), 고정민(연산군 시기)
- 이융(연산군): 김진우 - 진태현
- 폐비 신씨(거창군부인 신씨): 홍소희
- 진성대군(중종): 전준혁 - 백승도
- 황보인: 심양홍
- 한확: 장용[32]
- 정인지: 우상전
- 권람: 김용희
- 전균: 박영지
- 김처선: 맹상훈
- 최 상궁: 이덕희[33]
- 박 상궁: 서이숙
- 홍 상궁: 하미혜
- 강 상궁: 강수영
- 엄자치: 전인택
- 신씨(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 권기선[34]
- 한명회: 손병호
- 신숙주: 손종범
- 한치형: 김하균
- 채수: 강성민
- 민씨(한명회 부인): 이재은
- 이현로(안평대군의 모사): 김규철
- 삼월: 황효은(문서연)
- 초선[35] : 유호린
- 장간난: 송민서
- 귀인 엄씨: 박탐희
- 귀인 정씨: 정요숙[36]
- 숙의 권씨: 강초희
- 장녹수: 전소민
- 유순: 강영구
- 안양군: 재형
- 봉안군: 김세현
4. 방송
17회부터 자막이 고딕체(스태프 자막)·명조체(인물 자막)에서 궁서체로 통일되었다. 끝날 때 나오는 스태프 자막은 계속 고딕체.
23회부터는 왼쪽 상단에 프로그램 로고를 내보내고 있다. 또한 시점이 10년 점프해 세조 13년의 이야기가 진행되며 주요 인물들의 성인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점프는 또 성인 성종 때, 연산군 때(55화 부터) 계속 반복된다. 일종의 주요시점만 보여주는 작품이 되는 셈.
12월 4일 방송이 14분 늦게 시작되는 방송사고가 있어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 이 방송사고는 앞앞시간대 편성되어 있던 칸타빌레라는 프로그램이 30분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전부 조금씩 뒤로 밀려 버린 것.
대왕세종에서 썼던 배경음악이 많이 나온다.
5. 시청률
첫 방송 후 시청률 1.183%를 찍었다. 너무 낮아 보일 수도 있는 수치이지만 '''당시 종편 방송 대부분이 1%를 못 넘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게 그나마 대박친 거다.[37] 뭐 이 방송사 계열의 중앙일보나 일간스포츠에서 초대박이라고 자화자찬과 같이 자사 드라마 땜에 지상파 드라마 시청률이 낮아졌다고 우쭐거리는 기사를 주구장창 지겹게 쓰기도 한다. 그런데 종편과 무관한 다른 신문사들, 중도 방송이나 심지어 문화일보같이 조중동에 낄려는 신문에서는 터무니없는 반응이니 부진이라고 까는 게 대조적이다. 그래도 종편 프로그램 중에선 꾸준히 상위권을 찍는 중이며 2012년 2월 5일 방영분은 2.1% 시청률을 기록했다.
후반기에 폐비 윤씨와 인수대비의 갈등을 다루며 시청률이 많이 올랐다. 4월 29일 방송된 44회가 시청률 2.85%(AGB 닐슨, 수도권 유료가구 기준)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분당 최고 시청률은 4.26%. 5월 20일 방송된 50회에는 시청률 3.11%(AGB닐슨, 수도권 유료가구 기준)과 순간 시청률 4.97%을 기록했다.
또한 5월 26일 방송된 51회는 시청률 3.87%(수도권), 3.3%(전국)을 기록했다. 이같은 성적을 바탕으로 조기종영이 횡행(…)하는 종편 드라마계[38] 에서 홀로 60회로 10회 연장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회는 전국 시청률 3.456%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6. 관련 문서
[1] 이태곤 PD는 1회부터 38회까지, 노종찬·김재홍PD가 39회부터 58회까지 연출하였고, 59·60회는 세 PD가 모두 연출에 참여하였다.[2] 사실 그렇게 신선하다 보긴 어려운데 바로 왕과 비의 캐릭터를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채시라 씨가 분한 왕과비의 인수대비는 성질과 야심이 만만찮은 여장부로 그려지며, 사극 초반부터 종반까지 두루 등장하여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세조 미화도 비슷하고, 공인된 주인공 보정을 받아서인지 연산군에 대한 태도가 유해진 걸 말고는 사실상 왕과비의 자기복제이다.[3] 왕과 비의 임동진은 미화된 캐릭터가 문제였지 배우의 연기력은 굉장했다. 후반 출연분에서 사람이 망가져가는 감성연기, 특히 절규를 하면서 죽는 사망씬은 아직까지도 회자될 정도. 더군다나 얼마 전에 수양으로 출연했던 공주의 남자의 김영철이 보여준 포스와 연기력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본작에서 수양 역을 맡은 김영호의 연기는 저 둘과 비교하면 좀 많이 떨어진다는 평. [4] 실제로는 세종 후반 치세 '''10여년간은 대리청정'''했던 세자 문종의 공이 지대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세자 시절의 문종은 '''효도도 잘했고'''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은 '''효도도 못했다.''' [5] 그래도 수양대군과 가장 절친하다는 식으로 나온다.[6] 사실 세조는 공주의 남자에서 김영철이 맡은 세조가 더 역사인물에 부합한다.[7] 애초에 세조가 진심으로 단종을 지켜줄 생각이었다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 자체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정하연 작가가 곧이곧대로 믿는 단종실록의 내용이 얼마나 편향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8] 내명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소훈은 동궁의 후궁에게 주어지는 품계이다. 그것도 제일 아랫단계인 종5품(...). 그런 소훈을 세자빈으로 표현만 한 것이 아니라 소훈이자 세자빈이라는 모순되는 자막이 나간 것이다.[9] 수빈의 언니인 정선군부인(계양군 부인) 한씨는 군부인의 신분으로도 가체를 올리고 나오는데 빈의 지위에 있는 수빈은 쪽머리다.[10] 사가에 내려가 세자가 회의감을 느끼고 이대로 살자고 할 때는 '저도 욕심을 버렸다'라고 야심이 없는척 연기를 했다.[11] 계유정난 당시 물 떠 놓고 빌기는 하였다.[12] 임금이나 왕가 어르신들이 거동할 때 타던 큰 가마[13] 성종의 첫번째 정비 공혜왕후[14] 병석에 누워 쇠약한 모습으로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렸더라면 내가 알아서 물러났을것을.." 이라고 말하는데, 십대의 인수대비가 의경세지에게 시집온 시점부터 손자를 봐 할머니가 될때까지 살기도 엄청 오래살아서 거의 혼자서 다 해먹겠다는 심산으로 들린다.[15] 비록 서녀이고 권문세가 출신은 아니나 자신의 출신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그러나 주변인들이 폐비 윤씨의 친부는 그리 높은 관직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거나 집안 내력을 들어도 듣도보도 못한 집안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어찌보면 자부심이 아닌 자신이 가진 마지막 희망에 대한 집착에 가까웠다.[16] 성종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화가 난 인수대비가 성종을 꾸짖으려고 대전으로 행차했다가 잠든 성종의 얼굴에서 부군의 모습을 보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간 에피소드도 있었다.[17]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를 맡은 김영호를 말년의 성종 역에 중복으로 캐스팅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성종 역에 백성현이 캐스팅된 것 자체가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배우로 돌려막기한 것일 뿐더러 성종이 승하할 당시의 나이인 30대 후반은 전근대 기준으로는 사실상 중년에 가까운 나이였기 때문이다.[18] 다만 상술한 것처럼 본작 자체가 각종 고증오류 때문에 비판을 받았고 특히 세조에 대한 묘사는 왕과 비 때보다도 더더욱 심해진 미화 탓에 인수대비에 대한 묘사와는 반대로 역사관의 변화를 왕과 비 때보다도 더더욱 반영하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정하연 작가가 딱히 본작이 방영될 당시의 바뀐 역사관을 고려했다기보다는 고정된 주인공이 없는 왕과 비와 달리 본작은 확실히 인수대비가 주인공이며 게다가 고부갈등을 부각시키기 위해 정희왕후를 전형적인 괴팍한 시어머니로 묘사하여 정희왕후가 사실상 악역 포지션에 가까워졌고 폐비 윤씨 또한 왕과 비에서처럼 표독스런 악녀로 묘사된 만큼, 주인공이 무조건 착하게 나오는(예외도 있지만) 한국 사극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차원에서 이들과 대립하는 인수대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려다 보니 의도치 않게 인수대비 한정으로는 바뀐 역사관이 제대로 반영된 듯하다.[19] 왕과 비에서는 문종이었다.[20] 조선왕조 500년에서는 신숙주, 왕과 비에서는 정인지, 한명회에서는 한확을 연기했다(인수대비에서 자신(양녕대군)에게 말대답하는 한확(장용)의 뺨을 후려쳤다). 이 시기에 자주 출연하는 단골배우 1.[21] 왕과 나에서는 폐비 윤씨 아버지 윤기견이었다.[22] 뿌리깊은 나무에서 똘복 역. 그리고 관상(영화)에서 역시 단종 역을 맡았다.[23] 오랫만의 사극 복귀. 알려지진 않았지만 왕과 비에서는 의경세자 역이었다. # # 여담으로, 이 분이 바로 전설의 고향의 유명한 "내 다리 내놔!"의 주인공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태조 왕건의 신검이라면 다 알 것이다. [24] 앞날의 옥중화에서 문정왕후이었다.[25] 장희빈에서 장희빈의 뫼시는 나인 자경, 중간에 하차.[26]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 역을 맡았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하는 것이온데..." 대사로 유명하다.[27] 정도전(드라마)에서 의안대군 역을 맡았다.[28] 제작진 측에서 새로운 발상의 전환이 될 것으로 판단해 캐스팅하게 됐다고 한다. 극 중 대사에서도 '자산군이 의경세자와 닮았다'는 점이 강조가 되었다. 그런데 이 점은 후반부에 회상 장면을 어색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백성현은 빠른 1989년생인데 연산군 역의 진태현은 빠른 1981년생... 하물며 폐비 윤씨 역의 전혜빈도 1983년생으로 진태현보다 3년 어리다.[29] 윤송이는 작중 이름으로, 작중에서 그려진 삶이 실제와 다른 부분이 많다.[30] 왕과 나에서 노 상선(신구)의 수양 딸이었다.[31] 매직키드 마수리의 최풀잎.[32] TBC 공채 탤런트 11기 출신이다.[33] 왕과 비에서는 월산대군부인 박씨로 출연한다.[34] 전작 왕과 비에서는 인수대비의 언니인 계양군부인으로 나왔었다. 전작에서는 항상 인수대비를 걱정하며 '우리 마마가~'하는 역할이었다면, 이번 작에서는 인수대비를 '늙은 여우'라고 하며 저주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35] 극중 한명회의 첩. 왕과 비의 향이 역이다.[36] 이 드라마의 작가 정하연의 딸. 허나 성종 역의 백성현이랑 옆에 서면 완전히 이모 포스가 난다. 왜냐하면 정요숙은 1975년생(이것도 방송용 나이이다. 실제로는 1971년생), 백성현은 빠른 1989년생이기 때문. 이전 판에 자꾸 정요숙을 노안이라고 썼는데, 노안은 원래 나이보다 겉늙어보이는 것이므로, 드라마 방영 당시 38세의 정요숙이 25세의 백성현 옆에 있으면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배우 자체가 노안은 아니다. 구별해서 쓰자.[37] 2021년 JTBC가 크게 성장한 시점에서는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종편 초창기는 프로그램들이 전체적으로 시청률이 매우 낮았다. tvN을 비롯한 케이블방송도 5%만 찍어도 대박이라 여겨지던 시기였다.[38] 물론 당시 대부분의 드라마가 시청률 쭉쭉 나와주었던 JTBC라 가능한 것일수도 있지만 JTBC에서도 아침연속극 한편(여자가 두번 화장할 때)을 조기종영 한 바 있으며 연장방송을 하게 된 드라마는 이 드라마밖에 없었다. 이후 나중에 방송된 무자식 상팔자가 연장방송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