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용호
洪龍浩 (1906년 10월 12일 -?)
홍용호는 한국 가톨릭의 주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이다.
1944년 천주교 평양교구 교구장 주교가 되었지만, 1949년 북한 정부에 의해 체포 · 감금되어 그 후의 소식은 불명이다. 1906년 출생이기에 현재 시점으로는 선종했을 가능성이 높다[1] .
1906년 10월 12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3년 5월 25일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평양교구를 맡고 있던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과 함께 일본제국 경찰에 간첩 혐의로 체포당해 3개월 동안 수감된다.
1944년 3월 24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평양교구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에 징발되어 있던 주교좌성당을 회복하기 위해 북한 공산당 정권과 협상하여 1946년에 성당을 되찾은 후,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했다.
1949년 5월에 덕원자치수도원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의 체포 및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몰수에 항의하기 위해 북한 정부 인사와 면담하러 가는 도중 5월 14일에 체포어 감금된 후 행방 불명되었다.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평양교구로 승격되어 설립되었을 때, 그 초대 주교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
2013년 6월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홍용호 주교가 선종한 사실을 인정했으나, 선종 시점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바 있다.
북한에는 한국전쟁 후 성당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1987년 북한 정부 후원 아래 전쟁 전 나이든 신자들을 중심으로 조선가톨릭교협회와 산하 성당건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 이름으로 1988년 평양 장충동에 장충성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은 건립 당해 방문한 교황청 사절에 의해 축성되었으나, 수십 년 넘게 상주 사제 없이 가끔 남한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 소속 사제나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사제들이 방북하거나 재미동포 사제 등 외부의 사제들이 부정기적으로 사제가 방문할 뿐이고, 평소에는 신도회장과 부회장이 나머지 신자들과 함께 공소예절을 거행하고 있다.
1. 개요
홍용호는 한국 가톨릭의 주교.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이다.
1944년 천주교 평양교구 교구장 주교가 되었지만, 1949년 북한 정부에 의해 체포 · 감금되어 그 후의 소식은 불명이다. 1906년 출생이기에 현재 시점으로는 선종했을 가능성이 높다[1] .
2. 생애
1906년 10월 12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3년 5월 25일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평양교구를 맡고 있던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과 함께 일본제국 경찰에 간첩 혐의로 체포당해 3개월 동안 수감된다.
1944년 3월 24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평양교구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에 징발되어 있던 주교좌성당을 회복하기 위해 북한 공산당 정권과 협상하여 1946년에 성당을 되찾은 후,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했다.
1949년 5월에 덕원자치수도원 보니파시우스 사우어 주교의 체포 및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몰수에 항의하기 위해 북한 정부 인사와 면담하러 가는 도중 5월 14일에 체포어 감금된 후 행방 불명되었다.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평양교구로 승격되어 설립되었을 때, 그 초대 주교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
2013년 6월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홍용호 주교가 선종한 사실을 인정했으나, 선종 시점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바 있다.
북한에는 한국전쟁 후 성당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1987년 북한 정부 후원 아래 전쟁 전 나이든 신자들을 중심으로 조선가톨릭교협회와 산하 성당건립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그 이름으로 1988년 평양 장충동에 장충성당이 건립되었다. 성당은 건립 당해 방문한 교황청 사절에 의해 축성되었으나, 수십 년 넘게 상주 사제 없이 가끔 남한 천주교 민족화해위원회 소속 사제나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사제들이 방북하거나 재미동포 사제 등 외부의 사제들이 부정기적으로 사제가 방문할 뿐이고, 평소에는 신도회장과 부회장이 나머지 신자들과 함께 공소예절을 거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