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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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 평양시 선교구역 장충동에 1988년 건립된 가톨릭 성당.
한국전쟁 후 북한에 최초로 세워진 성당이자 현재 북한에 존재하는 유일한 가톨릭 성당이다. 공식적으로는 평양교구 관할이지만 실제로는 북한의 공인 천주교인 단체인 조선가톨릭교협회[1] 에서 관리하고 있다. 북한 잔류 가톨릭 신자들의 기부금과 북한 정부의 지원금 및 부지 제공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1988년 10월 9일 완공되었으며 같은 달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장익 십자가의 요한 신부와 정의철 다마소 신부에 의해 축성되었다.
[image]장충성당을 방문한 외국인 사제
장충성당 초대 신도회장은 박경수 바오로[2] 였고 차성근 율리오[3] 를 거쳐 2019년 현재 신도회장은 김철웅이다. 상주 사제가 없기 때문에 외국인 사제가 올 때를 제외한 주일에는 성당 신도회장과 부회장의 주관으로 공소예절을 진행한다. 봉수교회, 칠골교회와 마찬가지로 평양 주재 외국인들이 거의 매주 방문한다.
2. 상세
1987년 10월 성당 건립위원회가 발족하고, 이듬해 3월 착공에 들어가 동년 10월 250석 규모로 완공된다. 1988년 10월, 교황청의 특사 자격으로 장익 신부와 정의철 신부가 방문하여 성당을 축성하고 미사를 봉헌했다. 공식적으로는 천주교 평양교구 소속으로 교황이 임명한 평양교구장 서리인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의 감독을 받아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북한 공인 가톨릭 신자단체인 조선가톨릭교협회[4] 에서 관리한다.
해방 전 일제강점기에는 평양과 평안남북도 지역을 관할하는 천주교 평양교구 아래 20여 개소의 본당이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소련군정청과 북한 정부의 탄압으로 1950년 전쟁 직전까지 모두 폐쇄된다. 그 과정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를 포함한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순교했다. 살아남은 성직자들도 모두 남하하여 북한지역에는 한 사람의 성직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이후 평양교구 관할지역은 물론 북한 전지역에서 가톨릭의 공개 신앙생활은 사라지고 만다.
북한의 여러 종교 중 가톨릭은 소련군정과 북한 정부에게 가장 가혹한 탄압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가톨릭이 조직적 차원에서 개신교 이상으로 반공주의적 입장을 취한 종교라는 점도 한 몫을 차지했다. 다른 종교의 경우 과정이야 어떠하건 소련군정과 북한 정부에 협조적인 종교단체가 등장했지만 가톨릭은 그런 친정부적 종교단체가 일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북한 종교 중에서 가장 반공적이었다. 개신교나 불교는 친정부적 성직자[5] 들이 한국전쟁 후 한동안 공개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남아있다가 1970~1980년대 다시 공개 활동을 재개한 반면 천주교는 살아남아 훗날 활동을 재개한 성직자가 1명도 없었다.
1980년대 후반 북한 정부는 대외적 선전과 대내적 유화조치 필요성에 따라 천주교에 대해서도 제한적으로나마 공개적 활동을 허락한다. 1980년대 초 교황청과 북한 정부는 비동맹회의에서의 접촉을 시작으로 접촉을 시작했다. 교황청은 북한에 잔존한 천주교인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했지만, 북한에는 공인 천주교 단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 따라 1987년 교황청 측은 북한의 공인 개신교 단체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방문하여 북한에 남아있을 천주교인을 찾아달라 의뢰하였고,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부터 5명의 천주교인을 찾았다는 결과를 통보 받았다.
장익 십자가의 요한 신부 등 교황청 파견 인사들과 다시 발견된 천주교인들의 만남은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청사 한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만난 5명 중 2명이 1987년 바티칸을 방문하여 고해성사를 하고 미사에 참례한 다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다.[6] 북한 천주교 신자의 바티칸 방문 후 얼마 안 되어서 1987년 10월 조선천주교인협회 결성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듬해인 1988년 6월 정식으로 조선천주교인협회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4달 후 장충성당이 완공되었고 교황청에서는 다시 특사를 파견했다.
1989년 6월 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문규현 바오로 신부가 방북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판문점을 통해 돌아오자마자 현장에서 연행되었고, 국보법 위반으로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문규현 신부의 방문이 한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든지 간에, 당시 문규현 신부와 천주교 신자인 임수경의 장충성당 방문은 북한 주민들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1992년, 중국천주교주교단, 중국천주교애국회 소속 중국인 주교가 방북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교육했다. 의외로 당시 방북한 중국인 주교는 당시 조선천주교인협회 간부들과 장충성당 교인들에게, 중국 정부의 공인 천주교(애국회)에 의존하지 말고 교황청 및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관계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다.[7]
1996년부터 2015년 상반기까지 재미동포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매년 빠짐없이 북한을 방문하여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박창득 신부는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뿐 아니라 장충성당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박창득 신부는 90년대 중반 대북지원 활동을 하면서 북한과 연관을 맺었고 이어 장충성당에서의 미사 집전을 허가받았다. 하지만 박창득 신부는 2015년 9월 미국에서 선종했다.
1998년 4월, 장충성당, 명동성당, 뉴욕 오렌지 한인 성당에서 부활절 미사가 동시에 열렸고, 5월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최창무 안드레아 당시 주교가 방문하여 민족 화해와 일치를 기원하는 미사를 집전했다.
2013년 11월 8일, 장충성당 설립 25주년 기념 미사를 위한 방북계획이 승인되었다.뉴스
2015년, 장충 성당 보수와 남측 사제 파견을 두고 남북이 합의했지만 그 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어 합의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탈북자 중에서도 몇몇[8] 은 북한에 살고있던 시절에 장충성당을 구경갔던 적이 있다고 한다. 장충성당 관련 소식을 조선중앙TV 등 관제 언론매체를 통해 알고 이를 신기해하여 평양 여행을 갔을 때[9] 구경간 것이다. 이를 보아 봉수교회나 장충성당 등 공인 종교단체 소속 종교시설에 일반인이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경간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 알려진 종교 중에 그나마 북한 주민이 가장 좋게 생각하는 종교가 천주교라고 한다. 특히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북한 주민에게 천주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인 주성하 기자는 북한내부정보망을 통해 1990년대 김정일시기에 장충성당 지하가 비밀공작을 위한 아지트로 사용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1] 구(舊) 조선천주교인협회[2] 1990년 선종. 장충성당 초기 외부 방문객들에 의하면, 박경수 바오로 회장은 전쟁 전 세대로써 신앙심이 분명하게 밖으로 드러난 인물이었다고 한다.[3] 독신이었고 한때 사제를 희망하기도 했다.[4] 구(舊) 조선천주교인협회.[5] 강량욱, 이영태, 김성률, 김득룡, 고기준, 유병철, 리성봉, 홍화두, 박태화 등[6] 당시 교황청을 방문한 2명은, 한국인 가톨릭 성직자들도 "가톨릭 신자가 맞다"고 인정해준 사람들이다.[7] '북한의 종교정책과 장충성당의 건립 = (The) Establishment of the Catholic Church at Jang-Chung under the Religious Policy of North Korea, 2001'[8] 유태준 등[9] 북한은 국내여행도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일각의 주장과 달리 평양에 살지 않는 일반인이 관광을 위해 평양에 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즉, 허락은 받아야 하지만, 특별한 하자가 없다면 허락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