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홍제업의 아들이다.
2. 생애
홍주는 1896년 2월 18일 의주부 소곶면 상단동(현 평안북도 의주군 중단리)에서 독립유공자 홍제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의주군에서 부친과 함께 3.1 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1920년 친일파 인사 최영하(崔英廈)가 홍제업이 백운한(白雲翰)의 친일파 인사 처단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밀고하는 바람에 일제 경찰이 가옥을 방화하고 홍주와 온 가족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그는 부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고 재무부장 전덕원 밑에서 회계를 맡은 그는 1920년 6월 봉천에서 윤세용의 주선으로 단총 15정과 탄환 1,500발을 구입하여 귀대했다. 그런데 봉황성(鳳凰城)[1] 대와보(大瓦堡)에서 토군(土軍) 백여명에게 포위되어 무기 일체를 강탈당했다. 이에 그는 필설(筆舌)로 무기구입의 목적과 사정을 역설, 중국 토군의 양해를 얻어 무기 전부를 반환받았다.
한편 대한독립단의 해상전권위원(海上專權委員)으로 임명되어 국내에 해륙교통기관 설치와 일제의 행정기관 파괴 임무를 띠고 국내 총지단장(總支團長)인 아버지 홍제업과 같이 입국, 몰래 고향인 의주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동지를 모으는 데 힘썼다.
1921년 3~4월 김상률(金相律)·김형모(金亨模)·한봉조·김은순(金恩淳) 등과 압록강 유초도[2] 에서 안동현의 일본영사관과 은행을 습격하기 위해 교통국장 백승서(白承瑞)와 협의 중, 일본 경찰의 포위공격으로 백승서는 체포되고 그와 다른 단원들은 밀선으로 탈출하였다.
1923년에는 남만주 지역에 위치한 참의부에 가담하여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16일 집안현(輯安縣) 고마령(古馬嶺)[3] 에서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회의를 하고 있을 때,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고 교전중 참의장 최석순 등 29명이 전사하고 그는 체포되었다.
이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 만기로 출감하였다. 이후 부친과 함께 만주 관전현 고루자촌(古樓子村)[4] 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북한에서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한국독립운동사> 집필에 착수했다. 그러나 북한의 급격한 공산화에 반감을 품고 월남하였으며, 서울에서 3.1 혁명동지회를 조직하고 총무부장에 취임, 민족 정기를 앙양하며 사료를 수집하였다.
6.25 전쟁 발발 후, 홍주는 부산으로 피난한 뒤 애국동지원호회를 조직하고 문화부장에 취임하여 김승학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를 집필, 교정했다. 그러다 1954년 5월 9일 부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홍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1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