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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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서장남으로, 어머니는 영빈 강씨이다. 전주 이씨 화의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2.1. 초기
1433년(세종 15년)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고# 1436년(세종 18년) 성균관에 입학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종의 한글 창제에 협력했으며, 훈민정음처의 감독관을 맡기도 했다.
1441년(세종 23년)에 넷째 형 임영대군과 함께 평민 여성 2명에게 남자 옷을 입혀 궁 안으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들켜서 실패한 후,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했다.# 1447년(세종 29년)에 다시 화의군에 봉해졌으나 그 뒤로도 처백부[2] 박대손의 첩과 다른 신료들의 기첩을 빼앗은 일로 다시 직첩이 몰수되었다.# 이듬해에 큰형 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복권되었다.
1455년(단종 3년)에는 이복동생 평원대군의 첩이었던 초요갱과 몰래 간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또 다시(...) 직첩을 몰수당하고 가벼운 유배형을 받았다가 곧 방면되었다.
2.2. 세조 즉위 이후
화의군은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과 함께 세조(수양대군)를 지지하지 않는 몇 안되는 왕족이었다. 이에 1456년(세조 2년) 세조가 사육신을 친국할 때, 화의군을 떠보려고 “성삼문 등을 파직함이 옳으냐”고 물었는데, 화의군은 대답하지 않아 세조의 눈 밖에 났다. 거기에다 그 다음해에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부사인 이보흠과 모의한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 이후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익산에 유배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비참하게 생활하였다. 성종 때에는 화의군의 아들 이원이 먹고 살기 힘들어 성종에게 도움을 청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1482년(성종 13년) 성종의 호의로 외방으로 가서 살았고, 2년 뒤에는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살 자유를 얻었다.
3. 사망과 이후
정확한 사망일은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의 이 기사를 볼 때 1489년(성종 20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묘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60-2동에서 있으며 화의군과 그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되어있다. 묘역은 2005년 12월 8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1518년(중종 13년) 화의군의 손자 이윤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자손도 종친록에 이름을 올렸다.
1791년(정조 15년) 단종의 능인 장릉의 충신단에 배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