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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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현철(金賢哲)
출생
1959년 3월 8일 (61세)
본관
김녕 김씨
부모
아버지 김영삼, 어머니 손명순
가족
김은철, 큰 누나 김혜영[1], 작은 누나 김혜경, 여동생 김혜숙, 이복동생 김상만[2] 부인 김정현, 슬하 2남 1녀[3]
학력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경복고등학교
한성대학교 (사학 / 학사과정 중퇴)
고려대학교 (사학 / 학사)[4]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 / 석사)
고려대학교 (경영학 / 박사)
현직
동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석좌교수
김영삼민주센터 상임이사
경력
중앙여론조사연구소 소장
유엔한국청년협회(UNYA) 회장
미국 텍사스오스틴대학 초빙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경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특임강사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 공동선거대책위원장
고려대학교 지속빌전연구소 연구교수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특임교수
병역
대한민국 해군 일병 만기전역
정당

종교
개신교 (장로회)
SNS
페이스북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의 아들
2.2. 몰락
2.3. 이후 활동
3. 이야깃거리
4. 저서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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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9년 3월 8일 생.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의 차남이다. 김영삼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 ‘황태자’,’소(小)통령’ 소리를 들으며 막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실세였으나[5] 현직 대통령 아들로서 처음으로 구속된 인물이다. [6]

2. 생애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7], 경복고등학교(53회)[8]를 졸업하고, 한성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였다가 고려대학교 사학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미국 USC에 유학하여 MBA 과정을 밟았고, 1984년 귀국하여 쌍용투자증권에 취직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아버지가 출마하자, 퇴사하고 선거를 돕기 시작했다. 주먹구구식 선거 전략이 횡행하던 시절, 자체 여론조사 팀인 동숭동팀을 꾸려 김영삼의 선거전략을 짜는 등 김영삼 진영의 브레인으로서 활약했다. 당시까지의 여론조사나 선거정세 분석 등은 주먹구구식에 머물러 있었으나, 김현철과 동숭동팀의 분석은 당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어서 아버지 김영삼이 크게 신뢰했다고 한다. 1988년에는 중앙여론조사연구소를 설립해 초대 소장이 됐고, 1990년에는 '민주사회연구소'로 확대 개편시켰다.

2.1. 대통령의 아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공식적으로 맡은 직책은 없었으나, 기존의 동숭동팀을 정권의 싱크탱크처럼 활용해 비선 라인의 축을 맡으며 문민정부의 최고 실세로 군림했다. 1996년에는 유엔한국청년협회 회장으로 피선됐다.
당시 김현철의 위세는 대단해서 국정운영과 인사권에 개입한 것은 물론, 차기정권 창출을 위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였다. 심지어 그가 방송사 인사뿐 아니라 지역민방 허가에도 관여한 의혹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여권 핵심 관계자는 ‘정부여당, 군, 검찰, 국영기업 등 요직에는 그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는 주장을 할 정도였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 오정소 제1차장, 김기섭 운영차장 등 '문민시대 안기부 3인방'이 김현철 대표 인맥으로 손꼽혔다.
특히 당시 청와대 근무자들은 김현철이 대통령이 보고받는 수준의 고급정보까지도 이미 알고 있었으며 청와대 각 수석이나 안기부로부터 정보를 보고받고, 국정을 논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문민정부 출범 첫해 이미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안기부 등 공조직 고위층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았다.
국가정보원 출신으로 퇴직 후 여러가지 증언을 남긴 김기삼에 따르면, 당시 김현철은 대한민국의 모든 주요 인사를 주무르다시피 했다고. 개각 때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5배수의 추천 명단 보고서를 올리는데, 이러한 초극비 인사 보고서가 김현철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현철에 비판적인 자세를 보인 사람은 가차 없이 잘려나갔다. 김영삼 정부 초대 경호실장이었던 박상범도 그런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심지어 김영삼의 최측근 중 하나인 국회의원 김덕룡도 "현철이를 유학보내십시오"라고 김영삼 대통령에 건의했다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을 정도라고.[9]
다만 김영삼 정부의 중요한 치적으로 꼽히는 금융실명제 실시나 하나회 숙청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특히 하나회 숙청의 경우엔 김현철 본인이 자기도 몰랐다며 직접 부정하였다.

2.2. 몰락


1997년 한보사태 당시 몸통으로 지목당하며 졸지에 수사 대상이 되었고, 그의 측근인 의사 박경식의 양심선언과 김현철의 전화통화 장면이 찍힌 비디오테이프가 공개되면서 YTN 사장 인선과 고속도로 휴게소 입찰에 개입했던 흔적이 밝혀져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에 따라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어 그를 비롯해 박태중 (주)심우 대표, 전 안기부 운영차장 김기섭, 디즈니여행사 대표 김희찬 등도 같이 구속되었고, 수사 과정에서 대호건설 이성호 사장의 증언에 따라 권력형 비리에 개입했음이 드러났고, 1992년 대선자금 당시 쓰고 남은 나머지 120억원을 개인 비자금으로 관리하고 있음도 검찰 조사에서 같이 드러나 결국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당시에는 김현철보다 오히려 "홍인길 전 대통령 총무수석비서관이 이 사안의 주범 아니냐?"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홍인길은 이에 반박하며 '''“사람들이 나를 실세라 부르는데 내가 무슨 실세냐.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부인했고, ‘그렇다면 김현철이 몸통 아니겠느냐’며 김현철을 ‘몸통’이라 말했다. 이 사건 이후로 김현철은 '몸통'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에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지면 ‘몸통-깃털이 누구냐’를 따지기 시작했다.
구속 수감된 김현철은 감옥에 있는 동안 스스로를 ‘정치적 희생양’이라 주장하며 울화병까지 얻었다. 실제로 자신을 면회오는 이들에게 '''“이전까지는 나한테 도움을 청하면서 어떻게든 나한테 붙으려는 놈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 곁에서 단물 빨아 먹은 놈들은 지금 다 어디갔느냐”'''고 울화통을 터뜨렸고 심지어 면회 온 이들에게조차 '''"너네도 다 똑같다"''''며 화도 냈었다고.
한편 이성호 전 사장은 김현철을 ‘형’이라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김현철을 구속시키는데 결정적 증언을 한다. 이후 둘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이 사건 직후 이성호 사장은 김현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현철이 형과 친하게 지내면서 피해본 것도 참 많지만 한가지 크게 배운 건 하나 있다. 권력을 휘두를 때의 쾌감이 뭔지, 또 권력이란 게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도 뼈저리게 느꼈다”'''

1999년 김현철은 김대중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거제시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후보를 사퇴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에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5억 원을 선고받았다. 검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거짓말이 들통나자 송곳으로 자해 소동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상처의 깊이가 1센티미터에서 0.3센티미터(...)정도로, "상처 경미 본인도 민망"(...)이라는 이름으로 기사가 날 정도였다. 이에 아버지인 김영삼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극히 한심해 했다. 여담으로 이때 변호사가 20대 국회에서 법사위원장을 맡은 여상규.(!)

2.3. 이후 활동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 17대 대선에서는 상도동계 인사들 대부분과 더불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고, 2008년부터[10] 2012년까지 한나라당 산하 정책연구소 여의도연구원[11] 부원장을 맡았다. 2012년 총선에 새누리당 국회의원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하자 탈당했으며, 같은 해 대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아무도 지지선언을 하지 않은 아버지 김영삼과는 달리[12] 강삼재, 김덕룡, 문정수, 심완구 등 일부 상도동계 정치인들과 함께 민주통합당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13]
2014년 이후 거제미래포럼 대표, 고려대학교 지속발전연구소 교수, 국민대학교 특임교수 등으로 재직했다. 2016년 총선에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부친의 사망 후 부친의 기념사업에 전념할 것임을 시사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후보가 직접 지지 요청을 한 것에 화답하여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과 함께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걸[14]과 같이 문재인 후보 지지유세를 다녔다.
19대 대선 직후에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했던 한 인물로서 문재인 후보 지지와 동서화합에 기여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는 언급을 한 직후, 더불어민주당에 공식적으로 입당하였다. 기사 사실 자유한국당은 친박세력이 생겨나 주류를 차지한 이후 김영삼계와는 거리가 멀어졌고,[15] 오히려 친노/친문 진영은 PK 연고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이질적이지 않은 것이다. 다만 네티즌들의 평은 아버지의 명성에 비리로 먹칠을 한 불효자가 정계에 발을 들인다며 반발하거나 비난하는 중. 민주당 지지자들도 이 사람은 입당하는 것은 막지는 않아도 사고치는 것을 계속 감시할 거라고 하면서 벼르고 있다.
아버지 김영삼이 평생을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야당 정치인으로 살았던 보수 민주당계 성향이라서 박정희박근혜, 전두환과는 사이가 안 좋고 예전부터 여러차례 대놓고 비판해왔다. 다만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별 다른 언급이 없었는데, 상도동계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관계는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19년 1월 14일에 갑작스럽게 탈당하였다. 그 이전부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비판해왔으며, 민주당 당적을 갖고 있는 것을 고민 중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현재 민주당이 김대중, 노무현 정신만 강조하고 김영삼 정신은 말도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는데 정작 김영삼 초상화는 현재 미래통합당사에 걸려있으니 더 고민이 컸을지도. 부울경 지역 국회의원들과도 교류가 전혀 없었다고. 페이스북에는 자신이 문재인 정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개혁이 성공리에 끝나길 바란다고 남겼다.
2월 14일에는 "한국당 2·27전당 대회에서 과거 수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확인되면 아버님의 사진은 반드시 자유한국당 사무실에서 내려주기 바란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으로 올렸다. 홍준표가 당 대표였던 시절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의 사진을 걸어놓고 아직까지 내려놓지 않았는데 그 중 하나를 내려달라는 것.
9월 29일에는 문재인 정권을 향해 "이 집단은 정권이 아니라 아무런 국정목표도 없는 패거리 파당수준일 뿐"이라며 "조지 오웰동물농장에서 농장을 장악한 흑돼지들을 연상케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촛불정신을 받든다고 들어서자마자 적폐라는 미명아래 정적들이나 때려잡고 임기 중반까지 화합과 통합은 커녕 온 나라를 사분오열시켜 서로 증오와 환멸의 대상으로 만들어 진영전쟁이나 일으키고 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YS 차남 김현철 “文 정권, 조지오웰의 흑돼지들 연상돼”, 페이스북
이 후, 2021년에 들어선 북한 원전과 관련된 이야기로 또 문재인 정권을 비판했다.#

3. 이야깃거리



  • 래퍼 인세인 디지[16]가 그와 그의 아버지를 까는 곡인 Damn Ex-presidents(...)[17]에서 실명까지 거론해 가며 디스하였다.
  • 아들을 대일외국어고등학교에 보냈다. 기사

4. 저서


  • 하고싶은 이야기 듣고싶은 이야기 (1995, 고려원)
  •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 (2002, 중앙M&B)
  • 세계화와 21세기 국가경영 (2002, 중앙M&B)

5. 관련 문서




[1] 이덕화의 친구다.[2] 김현철보다 생일이 이틀 늦다[3] 장남은 정병국 前 바른정당 대표의 의원실 인턴으로 정치에 입문해서 국회사무처(국제국 의전과·현 의회외교총괄과) 인턴, 문희상 국회의장실 인턴, 의장실 비서(7급), 의장실 정무비서(6급)을 거쳐서 현재 국민의힘 권영세 의원실 비서(6급)으로 재직 중 이다.# [4] 편입[5] 형 김은철은 일찍이 미국으로 가서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째인 김현철이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있었다.[6] 부친인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호가 거산(巨山)인 것을 빗댄 표현이다. 후술할 문민정부 시절의 비리 사건을 계기로 붙여진 별칭.[7] 이 두 학교는 상도동과 가까운 흑석동에 있다.[8] 노태우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은 56회다.[9] 출처 : http://niswhistleblower.tistory.com/53[10] 부친 YS가 선친 김홍조 옹의 장례식에 조문 온 여권 인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바라보며, 과거 인연(예, 공천)을 언급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여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당의 원로이신 김영삼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뜻"을 당 인사에게 설파, 김현철이 '''"친정"''' 여의도 연구소로 복귀했다는 후문[11] 87년 대선에서 초반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패한 김영삼 진영에서 정확한 정치관련 자료를 보유할 필요성을 절감, 김현철의 주도로 업계의 실력자, 유명 학자들을 데려온 곳이다. 이 후 2010년 지선을 기점으로 신뢰도가 떨어지기 전까진 정확한 정계 설문조사 자료를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12] 박근혜가 김영삼을 직접 찾아 오긴 했으나, 지지선언은 하지 않았다. [13] 김현철이 직접 언급하기를, 문재인씨가 직접 부친을 찾아 왔더라면 아버지가 흔쾌히 문재인 지지선언을 했을 것이라고 아쉬움이 남는다는 뉘앙스로 언급하기도 했다.[14] 이쪽은 아예 직책도 있다.[15] 박정희와 김영삼은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 평생 앙숙이었다. 박정희의 후계자격인 박근혜도 당연히 김영삼계와 절대 좋다고 할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16]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구 갑 지역구에 '김원종'이라는 본명으로 무소속 출마하기도 했다.[17] 직역하면 '망할 전 대통령들'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