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 도성
1. 개요
현 대한민국 전주시에 위치한 (후)백제의 도성이다.
스스로 '백제대왕(百濟大王)'이라 칭한 견훤은 37년간 완산주, 즉 전주에 성을 쌓아 수도의 모양새를 갖추었다. 허나 고려가 천하를 손에 넣은 이후 전주도성은 몰락하고 만다.
2. 역사
2.1. 후삼국 시대
신라 말기, 천하는 혼란에 빠지고 이 와중 견훤은 신라의 장군에서 점점 군벌로 성장하여 스스로를 상주국(上柱國) 한남군 개국공(漢南郡 開國公)이라 칭했으며 점차 한반도 서남부를 자신의 거점지로 확대하였다. 900년, 견훤은 당시 신라 완산주, 현 대한민국 전주시 일대를 수도로 선포하고 백제(百濟)의 부활을 천명한다. 견훤대왕은 수도에 궁궐과 성벽을 쌓았는데 정확한 시기는 미상이다.
2.2. 이후
고려 태조가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제압한 이후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직접 완산주까지 내려와 후백제 도성에 입성, 자신이 이겼음을 천하에 공표했다. 이후 도성은 역사에서 잊혀진다. 현 대한민국은 도성의 유적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고려가 후백제 도성 자리를 '''저수지'''로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https://www.ytn.co.kr/_ln/0115_201311240624157184
후백제 도성의 결말에 대해 (YTN 기사)
군사시설인 안남대도호부를 전주 부근에 설치하면서 옛 견씨 왕실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리고자 그곳을 아예 '''수몰'''시켜 버렸다는 것. 물론 주장이고 아직 정설은 아니지만 한참 옛날인 오리지널 백제의 도성들, 위례, 웅진, 사비성들은 얼추 위치의 윤곽이 다 드러났는데 그보다 현대에 가까운 시기에 지어진 후백제 도성은 아직 위치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려가 이들의 자취를 없애는데 매우 신경썼다고 대충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심지어 한 때의 라이벌 태봉의 도성 철원성도 연구불가지역이라서 그렇지 도성의 위치, 대략적 구조는 진작 다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후백제는 그런 것도 없다.
2.3. 사서에서
고려사에 단 한번 등장한다. 태조 세가 19년(936년) 9월에 고려 태조 왕건은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의기양양하게 '백제도성(百濟都城)'에 들어간다.[1]
여기서 거괴는 괴물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적자는 자신의 피붙이를 말한다. 신검대왕을 '''황산벌'''에서 체포하고 백제 군대는 해체 됐으니 더 이상의 살상을 피하겠다는 의미이다. 태조는 이 명령을 내린 뒤 철저히 백제 국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좋아 했다고 한다.[2] 근데 이건 고려사 기록이고 고려사는 고려왕조실록의 기록을 가져 온거라 실제 후백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알기 어렵다.'''"거괴(渠魁)는 이미 빚을 갚았다. 내 적자(赤子)들을 해치지 말라."'''
3. 유적
후백제의 궁전이 있던 곳은 현재 네 곳 중 하나로 추정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엔 현 전주 시청 동쪽인 물왕멀 일대,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동고산성, 21세기 들어서는 조선 시대 전라 감영이 있던 완산구 중앙동 일대, 이후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리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후백제 당대에 지어진 목조 건물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일부 석조 건축의 터들이 남아 있다.
2014년 중노송동 인봉리의 발굴 조사를 통해 이 일대가 왕궁지로 확실시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를 참조.http://news.donga.com/3/all/20140416/62796657/1
전주 후백제 왕궁 추정지 (동아일보 2014년 4월 16일 기사)
3.1. 물왕멀 일대
1940년, 일제강점기 때 책자 '전주부사(全州府史)'가 발행됐다. 당시 물왕멀 일대에 수 많은 기와 조각, 자기 그릇 조각, 성벽의 일부였던 돌맹이 등이 발견되어 옛 궁성(宮城)이었을 것이란 추정이 세졌다. 많은 성곽 유물이 드러난건 사실이지만 당시 후백제 시대의 성곽은 굳이 궁성이 아니더라도 이곳저곳 우뚝하게 서 있었다. '여기가 궁성이다!'란 확실한 증거는 없는 셈이다.
물왕멀 일대는 현 전주시청과 전주고등학교 근처인 노송동 일대다.
3.2. 동고산성 일대
1980년부터 2014년까지 동고산성은 큰 관심을 받았다. 동고산성(東固山城)은 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과 대성동 일대에 걸쳐 있다.
동고산성은 대략 신라 신문왕 대에 1차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차로 9세기 즈음에 대대적으로 개조, 보수 되는데 이 때 견훤이 궁성으로 바꿨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고산성은 총 1,600m의 둘레이며 발해 상경성의 황, 궁성과 비슷하다. 가장 큰 건물터는 가로 22칸, 세로 3칸이며 총 7 군데의 대건물터가 있다. 동문, 서문, 북문이 있었으며 정문은 서문으로 보인다. '전주성(全州城)'이라 적힌 수막새가 발굴됐고 관(官) 자 기와, 천(天) 자 기와가 계속 발견됐다. 조선 숙종 대에 편찬된 '전주 성황사 중창기(全州 城隍祠 重創記)'엔 이 곳(성황당터)이 견훤의 옛 궁궐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보면 동고산성이 확실한 듯 싶지만... 많은 반박이 있다. '''일단 너무 접근성이 떨어진다.''' 만약 진짜 동고산성이 도성이었다면 한때 한반도 서남부를 손에 넣고 동남부를 휩쓸고 북부까지 휘젓고 다닌 나라의 수도치곤 지나치게 깊숙한 곳에 있다. 그리고 산성의 크기가 궁성 정도의 크기이고 궁성 밖의 내성, 외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1980년대, 고 전영래(全榮來) 원광대 교수[3] 는 동고산성을 궁성으로 보고 주위에 내성(황성), 외성(나성)이 둘러 쌓고 있었을 거란 주장을 펼쳤다. 어쨌든 동고산성은 평범한 산성이라고 하기엔 대형 건물터가 많고 면적도 상당히 크니까 말이다.
현재의 결론은 동고산성, 당시 '전주성(全州城)'은 비상용, 전시용 궁성으로 보고 있다. 마치 고구려의 대성산성 - 안학궁, 신라의 경주 주변 산성 - 경주 월성처럼 말이다. '접근성 낮은 산성 궁성'[4] 이 하나 있고 '접근성이 높은 평지 궁성'[5] 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