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꽝득

 

[image]
'''이름'''
<colbgcolor=white,#2d2f34>'''Thích Quảng Ðức (釋廣德/석광덕)'''[1]
'''출생'''
1897년
'''사망'''
1963년 6월 11일
1. 개요
3. 영향
4. 기타


1. 개요


베트남고승. 베트남 불교 단체에 의하면 7살에 출가했고 이후로 1932년까지 수행을 거듭하다가 1932년에 안남불교회가 성립되면서 베트남 중부와 남부 일대를 돌아다니며 포교와 사찰 재건에 힘을 썼다고 한다. 이후로 캄보디아로 유학 가서 상좌부 불교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 지배 체제에서 벗어난 후로는 남베트남에 머무르면서 사찰 재건 및 포교, 신도 교화에 힘을 쓰면서 남베트남 불교계의 거목이 되었다.
그러나 바오다이를 내쫓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이 불교 탄압 정책과 독재 정치를 펴기 시작했고[2], 친인척들이 대규모로 비리를 저지르면서 남베트남의 형세가 다시 막장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불교 탄압 정책에 맞서서 저항하던 승려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963년 5월 8일은 부처님오신날(베삭 데이) 2527주년인 만큼 남베트남 전역에서 일련의 축하행사가 열렸는데, 가톨릭 신자였던 응오딘지엠은 불교 행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종교적인 상징을 내세우고 거리 행진하는 것은 법에 저촉된다며 부처님오신날(베삭 데이) 축하 행사를 진압할 것을 경찰에 명령했다. 당연히 진압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고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람도 발생하였다.[3]
틱꽝득은 이에 맞서서 소신공양을 하기로 결심했고 1963년 6월 11일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가 있었던 당시에 틱꽝득 스님이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서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소신공양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사진과 영상이 특보에 호외, 속보를 타고 전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로 일파만파 전파되었다.[4] 소신공양 당시 67세(세는나이), 법랍[5] 47년이었다.

2. 소신공양


I was to see that sight again, but once was enough. Flames were coming from a human being; his body was slowly withering and shriveling up, his head blackening and charring. In the air was the smell of burning human flesh; human beings burn surprisingly quickly. Behind me I could hear the sobbing of the Vietnamese who were now gathering. I was too shocked to cry, too confused to take notes or ask questions, too bewildered to even think ... As he burned he never moved a muscle, never uttered a sound, his outward composure in sharp contrast to the wailing people around him.

나는 그 광경을 다시 볼 수도 있었지만 한 번으로 족했다. 불꽃이 솟구치더니 몸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머리는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사람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몸은 빠르게 불탔다. 내 뒤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워 메모를 작성하거나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가면서도 틱꽝득은 미동은 커녕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

뉴욕타임스 베트남 특파원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 1965), 《The Making of a Quagmire》, New York: Random House

  •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 충격적일 수 있으므로 클릭 시 주의[6] 사진과 영상이 전 세계로 보도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신공양의 사례일 것이다. 해당 소신공양 장면을 촬영한 미국의 사진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맬컴 브라운(Malcolm Browne)은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였다.
정권에 저항한 분신자살 시위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끝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위업은 종교적인 열망과 독재 정권의 패악에서 고통받는 민중을 구원하고자 하는 진심을 기반으로 했기에 가능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여러 통증 중 굉장히 고통스럽기로 유명한 작열통을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견딘 것은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인내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다. 문지방에 발가락 끝을 부딪혔을 때에도 저절로 비명이 나오고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온몸이 지글지글 불타고 있는 상태에서 신음 한 번을 내지 않고 얼굴을 태연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소신공양을 감행하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7]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건 정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낳은 기적적인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근육은 구부리는 근육이 펴는 근육보다 많기 때문에[8] 소사체는 근육들이 수축해서 자연스레 안으로 오그라들기 때문이다.[9] 표현조차 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어마어마한 의지로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펴고 열반했다. 이 엄청난 광경에 경찰들도 넋을 잃고 멍하니 서서 스님을 바라보았고 주위의 승려들은 틱꽝득에게 일제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승려들을 감시하고 있던 경찰들도 같이 그에게 절을 올렸다.'''
Google에 틱꽝득을 검색하면 당시의 상황을 찍은 모습이 여러 나온다.(불에 탄 시신의 흑백 사진이므로 주의)
소신공양이 끝난 후 그의 법체는 다시 한번 소각로에 넣어져 8시간 동안 화장(火葬) 되지만 '''그의 심장은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하며'''[10] 이후 남베트남 정부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이 황산을 뿌려 훼손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며'''[11] 금속 용기에 구리줄로 봉인하여 스웨덴 은행에 맡겨졌다가 이후 하노이 국립 은행에서 소장 중이라고 한다.
한편 틱꽝득의 마지막 열반의 순간을 사진으로 촬영해 세상에 알렸던 미국의 AP통신 소속 종군기자 맬컴 브라운은 이때 촬영했던 사진과 월남전의 이면을 담은 생생한 기사 및 부패한 응오디지엠 정권에 대한 고발로 1964년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상을 수상했으며, 2012년 8월 28일에 사망하였다.

3. 영향


이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원래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고 있던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을 그때까지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부패 정권을 돕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됨으로 베트남 개입의 명분이 약해졌다. 그리고 인구의 90%에 달하는 불교를 탄압하며 시선을 끌던[12] 응오딘지엠 정권에 민심은 더욱 분노하게 되어 사회 혼란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누의 부인이자 역시나 당시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패와 깊숙히 연결되어있던 "마담 누"[13] 쩐레쑤언[14]은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해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

중놈들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한 사람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What had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이런 사탄도 차마 못할 고인에 대한 모욕을 해서 베트남 국민들의 깊은 분노를 이르렀다. 자기 말로는 서구화에 항의하는데 미국제 가솔린을 쓰고 있으니[15]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뭐 저런 정신나간 미친 여자가 있어?' 라며 그 자리에 같이 있던 미국인들도 어이없어했을 정도였다. 더군나다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독신주의자라 영부인이 없어 그의 제수#s-2인 쑤언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오빠가 처형되었다는 일에 앙심을 품고 반정부세력을 퍼스트 레이디로서는 부적절할 정도로 지나치게 극단적인 증오심을 표출했음은 물론, 굉장한 무개념이라서 오만 비리와 폭정에 관여하는 통에 베트콩의 선전에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미국 보수파들도 이를 두고 '''스스로 베트남 반공세력을 좀먹게 한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16] 아무리 미국이 반공국가이고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국가라고 해도 이 정도로 심각한 고인드립은 용납이 안 될 정도의 대단히 질 나쁜 욕이었다. 엄청난 작열통 속에서 이를 의지로 버티며 앞이 아닌 뒤로 넘어진 것은 '''미국인들과 베트남을 깔보던 사람들까지 감명받을''' 일이었는데도 그걸 두고 바베큐라고 비하한 것이니 그걸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다. 나중에 가서야 발언이 경솔했다고 사과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정신 못차리고 불교도들의 저항을 강경하게 찍어눌렀고, 8월 초 응오딘뉴가 사이공의 싸 러이 사원에 군경을 보내 짓밟아 도한 반발심을 초래했다. 쩐레쑤언이 가사를 입었든 말든 외국인 선동자들은 모두 추방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강경진압을 옹호한 것은 물론, 이를 두고 "1955년 바오다이 황제 패망 이후로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the happiest day in my life since we crushed the Bình Xuyên in 1955)"이라는 발언까지 하면서 불교 신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갔다. 베트남 국민의 90%가 넘는 불교도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응오딘지엠은 '''이게 다 빨갱이들의 준동일 뿐'''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런 막장대응에 식겁한 백악관은 결국 응오딘지엠 정권을 종교를 탄압하는 악질 부패 독재 정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1961년의 쿠데타를 묵인했으며, 1963년 10월에는 백악관 주도로 응오딘지엠 교체가 논의되었고 케네디 대통령은 응오딘지엠 제거에 동의했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에 남베트남의 군사 지도자들은 '''미국이 응오딘지엠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확신하고 크게 고무되었다.
결국 1963년 11월 베트남 공화국 육군즈엉반민(楊文明)[17] 소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너진다. 한편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사이공의 한 성당으로 달아난 뒤 미국 대사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의 입장을 요청했지만 주 베트남 미국 대사 롯지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며 사실상 도움을 거절했고 자신은 누가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모른다면서 신변상의 이유로 하야를 권하고, 쿠데타 세력이 만약 당신이 항복한다면 안전한 출국을 보장한다고 말하며(쿠데타 세력이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쿠데타 세력의 입장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사실상 쿠데타 세력에 편중된 모습을 보였다. 실망한 응오딘지엠은 질서 회복에 노력할 것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져서 이후 동생 응오딘뉴(吳廷瑈 1910~1963)와 함께 11월 2일 오전 6시에 쿠데타군에게 항복했으나 군부는 그들을 처형했다. 쿠데타군이 두 형제의 안전한 출국을 보장하겠다며 호송용 육군 장갑차를 보냈고 거기에 탑승하자마자 양손을 결박한 뒤 장갑차 안에서 총살해 버렸다. 물론 군부는 그들이 탈출 중에 사살당했다고 주장했지만 후일 공개된 처형 직후의 사진에는 양 손이 묶여 있고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전형적인 총살당한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한편 응오딘뉴가 참혹하게 사살당할 때 당시 방미 중이던 쩐레수언은 얼른 달아나서 프랑스, 미국, 영국 같은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4월 24일 이탈리아 로마의 초라한 호텔에서 초라하게 87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죽을 무렵에 베트남 정부에 대해 고향에서 죽고 싶다고 애원했으나 베트남 정부나 여론은 '''"우리는 그쪽네 시체도 받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고 50년 가까이 지났어도 당신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 아직 많으니까 베트남에 오면 당신 시체도 보전 못 한다.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해외에서 죽어라."'''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18] 결국 쩐레쑤언은 사후 이탈리아 공동 묘지에 대충 묻혔다.[19] 방미 당시 두 딸을 데리고 있었는데 큰딸은 1967년에, 작은 딸은 2012년에 차례로 사망했다. 사인은 공교롭게도 모두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베트남전의 시작과 끝을 각각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진으로 시작하여 소녀의 절규로 끝나지 않을까하는 말이 있다. 왓치맨(영화)에서도 오프닝에서 베트남전을 상징하는 TV 영상으로 위 장면이 나왔다.
어쨌든 이 사건이 있은 후인 1970년대부터 서구에는 뉴에이지와 같은 반동적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런 흐름이 이 사건과 아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틱낫한 스님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남긴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 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4. 기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그리 기억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반공주의의 영향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한국의 상황상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과거에는 '''교과서에서''' 틱꽝득의 소신공양 사건을 베트남의 혼란상으로 서술하기까지 했다. 오늘날에도 한국의 극우[20]에서는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을 반미, 용공 조장의 분신자살로 폄하하며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에 반미주의자들이 10년간 수많은 분신자살로 월남을 혼란하게 해서 패망하게 했다는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또한 틱꽝득 스님의 소신공양에 대해서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인 중에서 한 사람은 방법의 과격함과 그 내용이 정교 분리에 어긋나는 것임을 들어서 비난하였다. 링크
틱꽝득 스님에 대한 책은 없었지만 미야우치 가쓰스케가 틱꽝득에 관한 내용을 쓴《분신》이라는 소설이 나왔다.
역시 베트남에서 유명한 승려 중 하나인 틱낫한의 스승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틱꽝득 스님의 사건을 모방한 사례가 있었다. 사이공 미국 대사관 직원의 어린 아들이 가솔린을 몸에 뿌리고 불을 낸 사건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몸에 불을 지른 만큼 심각하게 화상을 입었고 나중에는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그랬다"라는 한 마디를 했었다.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리 신의 모티브가 바로 틱꽝득이었다.[21]
2018년 1월 7일자에 방송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영원한 심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90~2000년대 랩메탈그룹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데뷔앨범 Rage Against The Machine(앨범) 커버로 해당 사진이 쓰인 바 있다.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 외곽의 티엔 무 사원이 틱꽝득 스님이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었고, 사이공으로 갈 때에 타고 갔던 차가 전시되어 있다.
[1] 광덕 스님이라는 뜻이다.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승려들은 석가모니의 제자라는 뜻으로 법명 앞에 석(釋)자를 붙이는 관습이 있으며 지금도 일부 승려들은 이렇게 한다. 중국 동진시대의 고승 도안(道安, 312~385)이 증일아함경의 "출가하면 모두 석자(釋子)가 된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승려들은 모두 석(釋)자를 성처럼 써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서 유래한 오래된 관습이다.[2] 응오딘지엠은 하필 가톨릭 신자였다.[3] 응오딘지엠은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충돌에서 경찰의 총에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에 대해 국가 차원의 손해배상을 추진했지만, 이를 반대한 것이 쩐레쑤언이었다.[4] 한국에도 1963년 6월 12일자 경향신문이 소식이 보도되었다.[5] 불교에서 비구계를 받은 해를 원년으로 계산한다.[6] 흑백으로 찍힌 사진을 상상력을 동원해 컬러로 구현한 사진이다. 일단 컬러사진과 컬러영상도 존재한다.[7] 그리고 정말 이 말은 여러 의미로 예언이 되었다. 1차적으로 베트남 불교의 투쟁이 그의 소신공양으로 승리했고, 2차적으로 호치민의 베트남 공화국(북베트남)의 "투쟁"이 베트남 전쟁 승리로 "승리"하였으며, 3차적으로 그런 베트남이 개혁 개방을 하면서 종교의 탄압이 약해지면서 베트남의 종교(특히 불교와 천주교) 인구가 증가했다.[8] 온몸의 근육이 수축되는 파상풍의 후궁반장 증상이 복근의 수축력을 기립근이 이겨 몸이 펴지는걸 감안하면 틀린말이다. 그러나 이런점을 감안해도 고통이 있는 부위로 움츠려드는건 자연스런 반사작용이기에 작열통이 있는 부위로 구부리는걸 막은건 어마어마한 정신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9] 이와 관련된 예제로 자해공갈죄 범죄의 경우 "뒤로 쓰러졌다"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자해공갈 피의자와 옹호자의 증언에 대하여 신빙성이 급격히 줄어든다.[10] 오늘날까지도 심장은 따로 남아 있는데 심장이 숯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전혀 타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11] 제자 승려들이 화장을 끝내려고 타지 않고 남은 심장을 염산에 녹이려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2] 1963년 6월 8일 쩐레쑤언은 여성연대 운동을 통해 불교 신자들을 중립주의자로 고발하는 성명을 발표해 불교를 사실상 공산주의 협력자라고 비난했다.[13] 서양에서는 '''드래곤 레이디'''라고 불렀는데, 절대 좋은 의미에서 붙인 별명이 아니다. 용을 왕이나 황제의 상징으로 여기는 동양과는 달리 서양같은 기독교 문화권에서 드래곤은 묵시록의 붉은 용과 같이 사악한 악의 최고 자리인 사탄과 같은 존재인지라, 그 의미는 '''마귀 같은 악녀''' 정도.[14] Trần Lệ Xuân, 1924년 4월 15일~2011년 4월 24일[15] 서구화에 항의한다면서 미국제 가솔린을 썼으니 순수하게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한 계획된 것이 아니냐고 몰아갔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저네들이 활활 불타오르게 놔두고 우리는 그걸 보면서 박수나 쳐 주면 된다는 것이었으니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뚜껑이 안 열릴 수가 있나.[16] 더불어 미국정부는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 문제의 절로 가서 위로할 정도였다.[17] 응오딘지엠이 직접 장군으로 임명한 것으로도 유명했고 이 사건 이후 만 12년도 못 되어 북베트남군에게 사이공이 함락될 때 잡혀간 마지막 대통령으로 더 유명하다.[18] 사실 베트남 정부도 이럴만 한게 쩐레쑤언은 한때 해외를 떠돌며 반공투사 행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19] 이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달렸을 영상의 댓글을 보아도 쩐레쑤언에 대한 욕설이 99%일 정도이니까 당시의 반응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20] 심지어 극우성향의 스님과 불자들도[21] 현재는 스토리가 바뀌면서 더 이상 분신 공양으로 인해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녹서스에 맞서서 자신의 능력을 쓰다가 시력을 잃었다는 설정이다.